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129
Chapter 129 – 몰락의 삶 (2)
한재중은 새의 부리에 물린 쪽지를 본 즉시 주변을 확인하였다. 쪽지의 내용이 내용인 만큼 들키면 곤란했다.
특히 오늘 괴인의 습격에 대해 심하게 걱정하던 윤설화에게 있어 저 쪽지는 극독일 게 분명하다.
다행히 말을 전하고 즉시 떠나간 건지 윤설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다시 얼굴을 비출지 모른다.
누가 봐도 괴인의 수하인 저 새가 자신에게 접근했단 걸 들킨다면 앞으로는 농담이 아니라 감금을 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질문을 하려면 보티스를 직접 찾아가거나 이 새에 똑같이 편지를 보내거나 해야 할 텐데, 후자라면 새와 접촉 빈도가 높아지며 윤설화에게 들킬 위험이 높아져 곤란하고. 전자라면 애초에 외출이 힘들다.
여기엔 괴인에게서 자신을 지킨다는 사유로 남은 윤설화가 있으니 말이다. 이 야밤에서의 외출은 그녀의 감시 속에서 이뤄지겠지.
이런 한재중의 걱정을 눈치채기라도 한듯 보티스의 쪽지는 계속 이어졌다.
‘오늘 당장 찾아오란 건 아니야. 밤이 늦었기도 하니까. 충분히 고민한 뒤에 나에게 찾아오렴. 내일도 좋고, 그보다 늦어도 좋아. 하지만 최대한 빨랐으면 좋겠어. 우리가 볼 수 있을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테니까. -보티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 글귀는 한재중에게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오늘도 변신을 해제한 이후엔 한동안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넘겼을 가벼운 두통도, 한재중은 이제 간과하지 못한다.
팔락. 새가 요령 좋게 부리에서 종이를 떨궜다. 떨어진 종이는 즉시 흙으로 돌아 갔으며, 곧바로 다음 메모가 나타났다.
‘미안해. 사실 이걸 제일 먼저 알려줬어야 하는데. 전에 말했듯 나 역시 기억이 일정하지 않거든. 벨트와 관련된 사실을 떠올린 것도 나와 만난 직후에 겨우 떠올릴 수 있었어. 물론 너에겐 변명 같이 들리겠지. 정말 미안해. 굳이 이해해주지 않아도 돼. -보티스.‘
새는 어느새 마지막 한 장만을 입에 물고 있었으며 자그만 발에 움켜쥔 긴 막대 같은 걸 창문턱에 올려 놓았다.
‘내 뿔을 자르고 아이들을 죽인 건 별 신경 안 써.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부담 갖지 말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어. 내 위치를 찾고자 하면 이 피리를 불어. 오늘 내 편지를 전해준 이 아이가 널 안내해 줄거야. -보티스.’
보티스의 필체는 정갈했으며 문체 역시 배려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게 기만처럼 느껴졌다. 과거 대학살을 일으킨데다 수많은 사람을 괴인이란 죽음에 몰아 넣은, 악마나 다름 없는 자이다.
그런 자가 이렇게 친절을 펼친다 하여 딱히 고마운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이런 찝찝한 느낌만이 있을 뿐.
하지만 지금 그런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켜 이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다. 난 고까운 마음을 무시하고 창문을 열어 새가 놓고 간 피리를 잡았다.
“재중아?”
“아, 미안. 금방 들어갈게.”
윤설화의 되물음에 한재중은 느지막히 답했다. 마저 몸을 움직여 욕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 도중에 윤설화와 눈이 마주쳤다.
“…?”
새삼스레 그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길게 뻗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은 살짝 젖어 이마에 달라 붙어 있고, 희다 못해 투명해 보이기 까지 한 피부는 살짝 상기되어 보기 좋은 분홍빛을 띄었다. 폼이 넉넉한 티셔츠에 긴 면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특유의 풍만한 몸매는 그 천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한재중이란 이름 하나에 그리도 쩔쩔맨다는 게 어이없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한재중은 문득 그녀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이름과 고통의 이름 모두가 자신의 이름인 것만 같아, 무엇이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인지 고민하였다.
잠시 빤히 그녀를 보고 있자 그녀가 황망한듯 변명했다.
“아, 아니야! 훔쳐 보려는 게 아니라! 난 그, 그냥 방으로 가는 중이었어…!”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변명하니까 괜히 수상해 보이네.”
“아, 아니라니까?”
한재중은 피식 웃었다. 이런 실없는 웃음이라도 웃을 수 있어 좋았다.
**
그 다음날의 낮.
아직 겨울이 지나가지 않았음에도 햇볕이 상당히 강했다. 조아윤이 선물해준 웃옷은 상당히 두꺼워 겨울철에도 추위를 버티기 문제 없었지만, 이런 날에는 조금 버거웠다.
불평은 아니었다. 무슨 낯으로 선물에 이래저래 비판을 한단 말인가. 그저 감사히 입어야지.
다만 오늘 날씨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비판이었다. 일기예보라도 볼 걸 그랬다며 투덜거리며 한재중은 으슥한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가득찬 햇살에도 골목에는 그늘이 만연했다. 거대한 건물들 사이에 놓인 자그만 통로에서는 왠지 모를 오싹함이 감돌았다. 골목 내부는 습하고 끈적했다. 겨울의 찬공기와 여름철의 불쾌감이 한데 모이니 쾌적함은 그야말로 최악을 달렸다.
“삶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날씨도 마음대로 안 따라와 주네.”
사실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은 대부분의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겠으나, 뭐든 거슬리는 지금의 그에겐 썩 좋은 날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 밖에 안 좋은 날에는 흐린 날, 비 내리는 날, 눈 내리는 날, 바람 부는 날 등이 있었다.
한재중은 어젯밤에 받은 피리를 입에 대고 소리를 내었다. 새소리 같은 높고 청명한 음색이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이 골목은 과거 보티스와 만날 때 쓴 골목이다. 편지의 설명에서는 어디에서 불어도 새가 안내해준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편이 더 안심이 되니까 말이다. 아무데서나 피리를 부르는 놈이 있다면 그건 미친놈이다. 무엇보다 눈길도 상당히 끌 테고.
피리 소리가 멀리 떠나가자, 소리가 끝난 저편에서 응답하듯이 새소리인지 염소소리인지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가 건너 왔다.
곧 발 밑에 푸르른 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싹이 싹을 틔우듯이가 아니라,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사실 이 곳이 골목이 아니라 높은 산맥의 풀밭이었던 것 마냥 골목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 중앙에는 새가 낮게 날았다. 편지에 적힌 그대로였다. 한재중은 새를 따라 나아갔다. 변신은 하지 않은 채였다. 지금의 변신 행위는 제 목숨을 챙기는 게 아닌 제 목숨을 버리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겨울치고 덥고 습하던 날씨도 점차 춥고 건조한 산등성이의 날씨처럼 변했다. 마음에 드는 날씨였지만 한재중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빨리 결정을 해줬구나. 정말 다행이야.”
새를 따라 나아간 끝에는 체크무늬 돗자리 위 의미심장하게 후드를 두른채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오랜만이야.”
“…보티스.”
“에이 그러지 말고, 친근하게 ‘보’라고 부르라니까?”
헤헤 웃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한재중은 돗자리 위에 앉았다.
“그래, 다 알고 있어. 지금은 이런 시시한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지? 얼굴에 용건만 말해달라고 써 있어.”
“그걸 다 알면 용건만 말해.”
“어머 명령형?”
한재중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가는 걸 보며 보티스는 쿡쿡 웃었다.
“에이 표정 너무 구겨졌다. 웃으렴. 스마일, 스마일. 웃어야 수명도 늘어난다고 해. 지금 너한텐 딱 필요한 행위 아니니?”
“난 시간이 없어.”
이중적인 의미였다. 앞으로의 시간이 없다는 의미와 지금 당장 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소리.
한재중은 지금 두 사람 몰래 나온 것이니까.
윤설화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대로 휴가도 못 내는 입장인 그녀는 매우 안타깝게도 낮에 출근을 해야 했다. 전에 못 찍고 미뤄진 광고 촬영 건도 있고 괴인 출동 건도 있다.
출근 전 현관 앞에서 한참 그와 포옹을 나눈 뒤에야 겨우 밖에 나갔다.
그녀는 나가며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한 시간 단위로 연락을 해줘.
부담스럽지만 거절은 불가능했다.
한재중은 앞으로 40분 뒤에 그녀에게 연락을 남겨야 한다.
조아윤의 경우는 보다 심했다. 안 그래도 최근 의심과 더불어 언제나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 그녀는 지금의 그에게 있어 윤설화보다 어려운 상대였다.
상황이 억지로 갈라낸 윤설화와 달리 조아윤은 자신 마음대로 24시간 내내 한재중과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도 한재중에겐 퀘스트란 용이한 거짓말 수단이 있어, 그녀를 속이고 잠시 시간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빨리 알려줘.”
그는 지금 급박했다. 필요하다면 존댓말이나 호칭을 바꾸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살핀 보티스가 입술을 열었다.
“알았어. 잠시 농담한 거야. 네가 원하는대로 빠르게 말해줄게. 지금 네가 제일 궁금한 건 너에게 남은 수명과 그걸 늘리는 방법이겠지?”
한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는 솔직히 말해서… 미안. 나도 몰라.”
한재중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에 별빛이 치명적이란 사실은 알지만 그게 너에게 얼마나 많은 삶을 앗아갔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난 의사가 아니니까.”
사실이었다. 정확히 남은 삶을 진단하는 건 그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한부는 확실해. 애초에 일시적인 괴인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별빛을 몸에 수여 받는 변신 시스템은 정상적인 몸의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니니까. 안타깝게도 그 시스템은 일반인이 아닌 마법 소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별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겐…..”
잠시 말을 멈춘 보티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후자는 대답할 수 있어.”
다시 고개를 들어올린 보티스가 싱긋 웃었다. 한재중의 눈빛에 순간 기대가 감돌았다.
“정말로?”
“그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으로 거짓말을 치진 않아.”
보티스는 신난듯 목소리에 흥을 섞으며 말했다.
“괴인이 되면 돼!”
“…뭐?”
“인간의 몸을 버리고 아예 괴인이 되어 버리면 돼! 인간의 몸이 별빛을 못 받아들이는 거니까 아예 인간의 몸을 버리면 되잖아! 간단하지? 그냥 내 아이가 되렴.”
한재중은 헛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오늘의 첫 웃음이었다.
“뭔 시발 개소리를….”
“개소리는 아닐 걸? 왜, 너도 봤잖니. 너와 똑같은 상황에 있다가 올바른 선택으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아이.”
그런 사람을 보았다고? 한재중이 의아한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봐봐 너도 알고 있잖니.”
보티스는 여전히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궁수자리의 괴인.”
**
“무슨 목적이시죠?!”
신고를 받고 출동한 장소. 본래 레드 베가가 쓰러뜨려야 할 괴인은 목에 화살이 뚫려 죽은 채였다. 그 괴인의 시체 위에 걸터 앉은 붉은 갑주의 괴인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야.”
한쪽 눈에 사슬 같은 걸 감은 그는, 경박한 미소를 지으며 레드 베가를 불렀다. 무심코 그녀에게 소름을 돋게 하였다.
“너 내가 재미난 사실 하나 알려줄까?”
토가 나올듯한 불쾌감이었다.
역시 대부분의 괴인은 저렇게 사람과 다른 불길함을 품고 있단 사실을 레드 베가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