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25
Chapter 25 – 수호의 의미 (3)
겨울에는 흥미로운 정서가 들어 있다.
흔히 고난으로 표현되는 시기이지만, 그 고난 속이기에 더욱 빛나는 희망이 들어 있다.
별이 가장 훤히 보이는 계절. 그 시간의 하늘은 척박한 대지와 다르게 풍성한 과실이 잔뜩 열려 있다.
서늘하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녀도 그랬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서늘한 체온, 그 체온이 자신과 닿으며 점차 데워지는 걸 보았다. 차가운 손발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단 마음 보단 감싸주고 싶단 마음이 우선했다.
한재중은 그 감촉을 느끼며 가만히 생각했다.
기억은 결여 되어 있는데 감정은 결부 되어있다.
그 어긋남은 곧 위화감으로, 자아의 고민으로, 죄책감으로.
눈이 닿아 바로 녹아내리듯이, 애틋한 감정은 죄책감으로 끝없이 변환되었다.
“재중아… 재중아… 살아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아…..”
블루 시리우스는 한재중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안도를 드러냈다. 변신한 상태라 일반인과 상당한 근력 차가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블루 시리우스는 안긴 사람에게 부담이 안 되도록 능숙하게 힘을 조절해냈다.
“…블루… 시리우스….”
입에 익지 않는 이름이다. 이것보다 ‘설화’라는 이름이 훨씬 편했다. 덕질 대상이 아니었나. 왜 이렇게 가까운 감정이 드는 건지. 유사 연애에 미쳐버린 건가. 그렇게 스스로를 닦달하면서도 자신이 한재중이란 가설을 아예 던져 버리진 못했다.
이 세계를 미디어 매체로 즐기던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고 닳아 있지만 한재중의 기억과 감정은 점차 선명해진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일까.
이 세계에 온 뒤 몇 번이고 점검했던 딜레마. 이 답을 내리기 위해선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내가 미안해. 모른 척 했어야 했는데, 아는데. 미안. 정말 미안… 못하겠어….”
기억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매달려 울상을 짓는 윤설화를 보며 강하게 다짐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의 과거에 매달린 자들을 위해서도 찾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벨트가 말한 대로 괴인을 쓰러뜨리며 별을 모으는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오리진….’
그 폼에 대한 답도 찾아야만 하겠지. 지금의 힘으론 더 큰 적을 만났을 때 도망치는 데 급급한 정도이니까.
“선배, 그러다 목 졸려서 죽겠다.”
“응? 아. 아! 미안해 재중아. 많이 아팠지?”
“아뇨… 딱히….”
“…존댓말.”
존댓말을 하자 블루 시리우스의 울상이 더욱 심해졌다.
“안 아파.”
끝을 반말로 마치자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곁눈질로 힐끔 거린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돌겠군.’
변신 전의 외모도 상당했지만 변신 후의 외모를 가까이서 보니 인간보단 여신을 영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얼굴을 감상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기껏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얼굴 한 번에 그것이 흔들렸다. 한재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컨셉 유지 결국 끝까지 못하네….”
끌끌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뒤에서 돌아왔다. 컨셉이라니, 진심인데.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재중은 참아냈다. 괜히 이상한 소리만 했다가 기껏 없앤 의심을 다시 불러 일으킬 수도 있으니.
“난 이제 다시 탐지하러 갑니다. 두 분 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핑크 데네브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역할이었던 괴인의 탐지를 재개할 모양이었다. 살랑거리며 손을 흔든 핑크 데네브는 둘만의 시간을 가지도록 배려하여 방을 나섰다.
그렇게 방 안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떠올리지 못해 괴로운 자와 잊지 못해 괴로운 자.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오랜, 만이네.”
“병원 이후로 안 본 거니까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죠.”
“존댓말….”
“오랜만은 아니지.”
블루 시리우스가 안았던 팔을 풀었다. 둘은 서로를 자세하게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 주위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많이 울고, 많이 힘들었음을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한재중의 인상은 애처로운 연민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초췌하고 앙상했다. 고생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굴이다.
“….”
“….”
전 연인의 분위기가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방 안엔 어색함이 가중되었다. 떠나갔던 핑크 데네브를 다시 부르고 싶은 지경이었다. 둘은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 서로의 고통을 짐작했다.
“그… 요즘 어때?”
어색한 사춘기 아들에게 말하는 것 같은 화두였다.
“얼굴 보면 알잖아.”
“그, 그러니까 왜….”
분명 매달 데이트 통장에 돈이 입금되고 있을 텐데.
‘…안 썼구나.’
블루 시리우스는 그 결론을 바로 도출할 수 있었다. 그 돈을 받는 순간 빚이 생기는 거니까. 연이 물질적으로 나마 이어지는 거니까. 아예 끊기 위해, 이젠 뒤돌아 보기도 싫은 과거라.
그래서, 쓰지 않았구나.
울적함이 거세졌다.
“그냥 여러 일이 있어서.”
말 그대로 여러 일이 있었다. 한재중은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일주일 간의 기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자기 들으라고 내쉰 줄 알았던 블루 시리우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미, 미안! 민폐였지? 나 금방 떠날게. 미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구나!”
축객령이 아니었구나. 블루 시리우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한재중은 후회했다. 그냥 나가라고 할 걸.
“…재중아.”
블루 시리우스가 한재중의 소매를 잡았다. 원래는 손을 잡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나간 거 같아 소매로 그쳤다. 그녀는 스스로의 인내심을 대견하다고 평가했다.
“그 때 못 지켜줘서 미안해….”
한재중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지켜주다니, 언제를 말하는 거지.
“그, 언제 못 지킨….”
이 심각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흐름을 못 따라가는 것도 좀 그랬다.
헤어지기 직전 언론에 뚜드려 맞을 때인가, 아니면 이번에 겪은 사고인가. 생각보다 짚이는 일이 많았다. 기억이 없는 부분을 합하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아, 아아… 그렇네. 많지. 내가 못 지킨 게 많지. 그렇네… 그렇지…..”
블루 시리우스가 침울하게 고개를 떨궜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어서 하는 말….”
진짜 몰랐는데.
“아냐… 알아… 내가 받아야 할 합당한 평가인 걸… 내가… 흑….”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감수성이 풍부하네. 한재중은 당황했다.
“이번에… 내가 좀 더 잘 지켜줬어야 했는데… 괴인 앞에서 너의 안전을 제일 우선했어야 하는데….”
블루 시리우스는 그 당시의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했다.
안일했다. 분노에 취해 눈 앞의 적을 사살하는 것만 생각했다. 마법 소녀가 할 일은 격퇴도 있지만, 구조가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데. 블루 시리우스는 이를 갈았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사람을, 그것도 한재중을 죽이려 하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방패자리나 천칭자리나 찢어 죽여도 모자랐다.
블루 시리우스는 그런 분을 그의 앞에선 절대 드러내지 않으며 상냥하게 웃었다.
“…무서웠지?”
무섭긴 했다. 너에게 정체를 들킬까 봐. 그리고 네 앞에서 죽을까 봐.
한재중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블루 시리우스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이젠 절대 그럴 일 없도록 할 게.”
블루 시리우스는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을 은근슬쩍 그의 손으로 옮겼다. 그걸 턱하니 붙잡으며 블루 시리우스는 안도를 위한 말을 읊었다.
“재중아. 나, 나 생각보다 강해. 이젠 S급 괴인들과도 동등하게 싸울 수 있을 지 몰라. 너 덕분에 강해졌어. 그… 요새 유명한 북두칠성의 괴인 있잖아. 그런 괴인한테도 절대 지지 않을 거야. 내가 다 죽일 거야.”
“어… 그, 그렇구나.”
살인 예고인가. 한재중은 마른 침을 삼켰다.
‘사실 다 아는 거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 졌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블루 시리우스는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자신의 다짐을 읊고 읊었다.
“네가 안심하며 살 수 있게 내가 괴인을 없앨게.”
그 모습은 자신의 숭배하는 대상에게 바치는 기도와도 같았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이 목숨을 잃더라도 너 만큼은 지킬게.”
무거운 각오였다. 부풀림은 없었다. 과장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녀는 그렇게 각오했다. 이 목숨을 버리더라도 그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너 만큼은….”
한 번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이 남는다. 그는 자신과 사귀었다는 사실만으로 수 없이 물어 뜯겨진 불쌍한 사람. 자신이 짊어져야 할 원죄였다.
그렇기에, 그 어떤 일을 겪더라도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만 했다.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할 지 모른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블루 시리우스의 숨구멍이었다. 그녀 스스로 이 고통을 바랬다.
“목숨 까진 걸지….”
“재중아.”
한재중은 저 죄책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본다면 그녀가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 했는 줄 알겠다. 그녀의 잘못이 어디 있는가. 죄는 폭력을 쏟아낸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 폭력을 막으려 발악한 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왜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사람을 제 목적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괴인이나 가쉽을 따라 자신의 애잔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사람이나 하찮은 도덕적 우월감을 채우려는 사람들에겐 별 감정도 없는데. 왜 노력하고 희생한 자가 죄책감을 느끼는가.
목숨이 저렇게 쉽게 걸 가치인가. 생물이라면 응당 생명의 보존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되는 것 아닌가.
“네가 날 불편해 할 수밖에 없는 걸 잘 알아. 아니, 지금 이렇게 말을 거는 것도 너에겐 민폐인 걸 알아. 하지만 이거 만큼은… 이거 하나 만큼은 알아줘.”
역시 모든 마법 소녀는 정신 병자다. 한재중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너의 아군으로 남을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난 너를 언제나 지키고 있을 거야.”
꽉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건 더 이상 한기가 아니라 열이었다.
그 각오를 들으면 들을 수록 한재중에게 책임감이 생겨났다. 그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가진 만큼 자신의 고통은 곧 그녀의 고통으로 치환될 것이다. 기억도 제대로 없는 자를 위해 슬퍼하고 본인을 깎아내게 될 터였다.
만일 자신이 괴인에게 죽는다면 그 죄책감은 블루 시리우스만 온전히 느끼겠지. 영웅은 신이 아니다. 만인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왜 남의 죽음을 전부 자신의 죄로 짊어지고 다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하늘을 나는가. 느낄 필요도 없는 죄책감을 짊어지며 오늘도 뛰어 다니는가.
그제야 한재중은 괴인들에게 죽기 직전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았다.
부모나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
그녀였다.
윤설화, 그녀만을 생각했다.
죽을 수 없던 이유가 그녀였다.
“미안해… 부담스럽겠지만, 이 것만은 알아줘.”
“그래, 잘 알겠어.”
“…정말?”
블루 시리우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대를 담고 있었다.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
한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왜 그렇게 말해! 솔직히 조금 멋진 말 아니었어? 감동 받아 줘!”
“감정 강요하지 마.”
“사랑을 강요할 수도 있어?! 내, 내가 진짜 감정 강요 시작해줘? 지금 여기서 사랑해란 말 듣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 미친.”
이제 슬슬 막 나간다. 협박인지 투정인지 애교인지 모를 말을 넘기며 한재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바라보며 블루 시리우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게 내가 싫어…?”
“그 소리가 아니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순간 블루 시리우스의 보석에서 빛이 울렸다. 출동 신호. 괴인이 나타났단 뜻이었다.
“나중에 말하자.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해! 알았지? 지금 움직이면 아픈 데 덧나.”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블루 시리우스는 문이 아닌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얼핏 투신 자살을 생각나게 하는 그 아찔한 행위. 하지만 그녀가 하늘을 날자 그 위험천만한 행동은 영웅의 용기와 특별함으로 변질되었다.
그렇게 빈자리를 바라보며 한재중은 한숨을 내뿜었다.
출동 신고가 떴는데도 벨트가 잠잠했다. 지금 이 몸은 퀘스트 하나 감당하지 못할 만큼 허약해져 있단 뜻.
아까까지 정신이 없던 탓일까. 적막한 병실에서 약간의 쓸쓸함을 느꼈다. 바로 앞 벽면에는 커다란 TV가 있었고,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거리엔 리모컨이 있었다.
유혹이 시작되었다. 도전할 유혹이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트라우마다. 직접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남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보는 것. 그 안의 화제는 자신이 아닐 게 분명했다.
숨을 고르고 리모컨을 집었다.
척. 그리고 총을 쏠 때처럼 그것을 들어 겨누었다.
“….”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식은땀도 나는 듯했다.
[뭐 하십니까? 고민이 된다면 보지 않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닥쳐 새끼야.”
몇 분이나 TV와 씨름을 한 끝에 전원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별 다른 타격감도 없이 들어간 버튼은 새까만 화면을 밝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이는 건 생중계 화면. 어디 커다란 폭탄이 터진 건지, 도시의 한 가운데에 생긴 폐허가 지금 화면에 비춰지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나 가끔 성인들이 묶여 한 구석에 몰려 있고, 그 폐허 주위엔 반 투명한 막 같은 것이 덮어져 있어 누군가의 출입을 차단하는 듯했다.
그 폐허 중앙엔 리브라와 마법 소녀 하나.
“…레드 베가?”
자신의 자살을 상담해주던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