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48
Chapter 48 – 당신의 마음에 혜성처럼 (9)
한재중은 허탈하게 웃었다. 피가 뚝뚝 묻어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올렸다. 마른 세수가 아닌 젖은 세수라 부르기 마땅할 동작이었다.
“미안해요! 재중 씨가 한 말은 다 틀린 게 없어요! 지금 전 나약해요. 지금 재중 씨와 절 동시에 지키기엔 힘에 부쳐요. 그리고 이젠 인정해요! 적은 무서워요! 죽기 정말 싫어요! 도망치는 게 옳다는 걸 알아요.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 알아요. 알지만…!”
그렇게 피를 칠하며 붉어진 얼굴을 비추는 환한 불빛.
“그래도 재중 씨 혼자 두고 도망칠 순 없었어요! 제 잘못과 의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제가 그걸 누구보다 바라고 있어요.”
그녀가 꿈을 향해 날아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이 전장이다.
“지금 도망치면 전 영원히 제가 원한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 거 같아요. 당장의 목숨은 보장해도 제 꿈은 보장할 수 없겠죠. 그러니… 전 돌아왔습니다!”
이 곳이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이 있는 장소.
“말했죠? 원망하지 않기로?”
“하….”
이상이 있다고 해서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장소란 뜻은 아니었다.
둘 다 알고 있다.
호기롭게 등장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아까와 변한 건 없다.
리브라가 노리는 건 한재중.
이것은 레드 베가 혼자서 도망갔을 때 그가 쫓아오지 않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렇기에 레드 베가와 그가 함께 도망가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리브라를 격퇴하기엔 양 측 모두 부상이 심각하다.
한 쪽은 아예 빈사에 가까웠다.
죽음의 위기는 여전히 목전에 있으며,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마땅한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본능에 거스르고 합리에 거스른다.
어리석은 행위다.
그럼에도 도전하니, 영웅이다.
레드 베가의 눈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 고집을 지지해줄 아군을 찾는 것이었다.
누구나 혼자만의 길을 나서긴 무섭다. 그것이 처음이라면 더 그렇겠지.
그녀는 지금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얻고 싶어한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단 믿음을 얻고 싶어 한다.
‘다름 아닌, 내 대답으로.’
원망하지 않느냐는 레드 베가의 질문에 한재중은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망하지 않아.”
허탈하기도 했고, 곤혹스럽기도 했다.
그것이 돌아온 그녀를 내칠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모른다.
지금 여기 돌아온 게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상관 없다.
두려움 속에서 내린 각오는 단단하다.
제 생명보다 우선하여 내놓은 결정은, 어떠한 합리나 이성을 초월해 있다.
당연히 긍정해 줘야겠지.
‘애초에 내가 뭐라고 저 답을 부정해.’
오만하게도 자신의 성취를 위해 타인에게 특정한 행동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동안 억지로 밀어붙였던 게 멍청한 일이었다.
진심어린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면, 이제 어찌할 도리도 없지.
‘그저 믿을 뿐.’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삶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인지하고, 확실히 내린 답이다.
두려움을 모르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두려움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행동하였다.
한재중에겐 그런 사람을 되돌아가라 화낼 자격이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 세상 전원이 부정해도 나만은 긍정하리라.’
그것이 수호자의 수호자니까.
“네가 내린 모든 선택을 긍정하고, 또 지지할 거야. 도망가지 않았다면… 네가 진정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이제 믿을 뿐이지.”
그리고 수호자에겐 응당 그에 합당한 존경이 주어져야 한다.
지킨다는 건 고작 목숨이 아닌, 그녀들의 모든 명예와 꿈.
그녀의 꿈이 지금 자신에게 있다면, 바칠 뿐.
“난 방금 나의 목숨을 버리려 했어. 내가 죽는 공포보다 당신이 죽는 공포가 더 강했으니까. ”
전에 다리 위에서와 달리, 진실된 구조.
착각 하나 없는 자살에서의 구원.
타아를 구원하며 자아를 구원할 그녀를 위해, 이 목숨을 맡겼다.
“넌 목숨을 헛 되게 버리러 온 건가, 목숨을 걸기 위해 온 건가. 자살하기 위해 온 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온 건가… 아무래도 후자겠지.”
변신할 시기를 놓쳤다.
회광반조의 기적같은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이젠 벨트를 잡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자살 예방… 이젠 상담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시죠.”
레드 베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눈동자는 점차 차분해졌다. 눈매가 아름답게 휘었다.
농담이 통한건지 아니면 그냥 뭐라도 긍정받은 게 기쁜 건지.
“나중 가서서 딴 말 하기 없기에요?”
대답을 들은 레드 베가가 배시시 웃었다.
타인에게 받는 긍정이란 언제나 마음을 고취 시킨다.
“좋아요, 제가 당신을 구할 테니까 각오하고 계세요!”
방금 전 흐리게 전했던 말을 확고하고도 선명하게 전했다.
물론 아직 불안은 있다.
다리는 떨리고 주먹 쥔 손에 힘이 빠진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귀에 심장 소리가 들린다. 그 탓인지 숨도 거칠었다.
이는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처럼 떨렸고, 꽉 깨물어 진동을 멎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공포의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물러날 이유는 되지 않았다.
힐끔 뒤를 돌아 본 그녀는 그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심각해.’
지금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잉크통을 실수로 뒤집어 쓴 사람처럼 피가 흥건했고, 다리 한쪽은 잘못 만진 인형처럼 이상한 각도로 돌아갔으며, 몸 곳곳에 타박상, 머리도 깨져 피가 눈을 찌르는 중이었다.
그렇게 찬찬히 살펴보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그의 허리춤과 배의 부근. 상처가 가장 심각한 부분과……
“….”
“….”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저기.”
순간 한재중의 몸이 휘청거렸다. 철골 따위로 몸의 균형을 맞추는 건 역시 꽤 힘든 작업이었다. 심지어 과다 출혈로 몸에 힘이 없다시피한 상태라면 더욱.
끝내 서 있을 모든 힘을 잃은 몸은 자연의 이치대로 아래로 이끌렸다
그의 허리에 감겨있던 벨트도 도로 풀려 구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레드 베가가 즉시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아직 움직일 수….”
“여기서 더 움직이면 진짜 죽어요. 제가 온 걸 헛고생으로 만들 셈이에요?”
한재중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레드 베가는 잠시 적의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말대로다. 소녀여, 네 잘못된 선택으로 둘 다 허망히 목숨을 버리게 되었구나.”
먼지를 털고 일어선 리브라가 불쾌하단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번뜩이는 황금색의 광채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금 저걸 막을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한동안 한재중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를 방치해두어야 한다.
레드 베가는 눈을 꾹 감고 그의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렸다. 지금 그는 과다 출혈, 움직여도 죽지만 안 움직여도 죽는다. 제일 시급한 건 지혈.
“죄송합니다. 이것도 원망하기 없기에요. 알았죠?”
“…? 으아아아악!!!”
귀를 찢을듯한 비명이 한재중에게서 터져 나왔다. 고문을 당하는 저항군 따위를 생각하게 할만한 처절한 고통의 비명이었다.
레드 베가가 올린 손에서 엄청난 고열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출혈 부위를 불로 지져서 지혈시켰다. 극단적인 응급조치였다.
인간의 고통 중 가장 강력하다는 작열통.
그것이 신경을 한가득 자극하니 비명이 튀어나오는 게 당연했다.
“저 이거 몇 번 연습했거든요? 상상이었지만… 아마 괜찮을 거에요! 제 섬세한 손길을 느껴보세요!”
“너 이거 복수… 아아아아아악!!”
“복수라니요? 전 잘 모르겠네요!”
“이 영악한 불여시….”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소리치던 한재중은 이내 침묵했다.
고통으로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고통은 의식을 깨우지 못하고 오히려 정체 시킨다. 한재중의 눈이 점차 감겼다.
레드 베가의 몸에 무게를 맡기기 시작했다.
“타살 상담사였네 망할….”
“힘내란 뜻이죠? 네, 응원 잘 들었어요. 잠시 쉬고 계세요.”
끝내 그의 육체가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고 완전히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배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멎었다.
“내분인가?”
“아뇨, 보호 행위이자 치료 행위입니다.”
“어리석군. 스스로 전력을 줄이다니.”
“민간인에게 전투를 도와달라 할 리가 없죠.”
“모른 척 하는 건가?”
“하하, 애초에 아는 게 없는 걸요. 제가 못 배운 멍청이라 무슨 소린지 잘….”
레드 베가는 그 몸을 조심스레 눕혔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엔 강렬한 분노가 존재했다.
조용히 끓는 기름과도 같았다.
“지금 아는 건 하나 뿐이에요.”
골절된 왼 팔을 들어올리고 주먹을 쥐었다. 짜릿한 고통이 몸에게 몇 번이고 경보를 울렸지만, 무시했다.
오른팔 역시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려 주먹 쥐었다. 두 다리는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을 자세로.
“당신을 쓰러뜨러야 한다는 것.”
“…하하.”
리브라는 언짢게 웃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소원에 도전에 응했다.
“그렇다면, 한 번 해 보거라!”
레드 베가가 땅을 벅찼다. 그 한달음만으로도 순식간에 리브라와 가까워졌다.
리브라는 굳이 방어하지 않았다. 이번 일격으로 힘을 완전히 파악할 생각이었다.
퍽!
그의 턱이 위를 향했다. 그녀의 주먹이 턱을 가격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 끝엔 의아함이 존재했다.
아무리 방어 자세를 안 취했다 해서 이 정도의 충격이 있을 일인가.
‘과연.’
의아함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다.
며칠 전 주먹을 나눴을 때와는 다르다.
‘더 강해졌군.’
리브라는 우악스런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고작 한 번의 손짓만으로 땅이 파일 정도의 강한 광풍이 일었다. 압도적인 빛과 견줄만한 압도적인 힘.
유사 신성의 모습. 전에 본 것에 비해선 작은 빛이었다.
‘전에 본’ 것에 비해선.
여전히 강력하단 점은 변함 없었다.
그의 움직임을 감지한 즉시 레드 베가는 위로 뛰어 올랐다. 이번에도 발 밑에 불을 분사했다. 그것은 도약이라 부르기보단 비상에 가까웠다.
“너의 성장을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닌가?”
문제는, 리브라도 가능한 방법이었단 것. 폭발의 소리와 함께 리브라가 뛰어올랐다.
레드 베가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윽!”
곧 이어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꽂혔다. 레드 베가는 재빨리 뒤돌며 방어했다.
쾅!
방금 전 광경의 반복. 레드 베가는 땅으로 추락했다. 박살난 건물을 다시 한 번 박살내며, 여러 잔해의 조각과 먼지 구름이 물방울처럼 튀어 올랐다.
파문처럼 흩어지는 파괴의 흔적 속에서 소녀가 일어났다.
“왼 팔을 버렸나.”
그녀의 왼팔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솜이 빠진 인형처럼 아래에 축 처진채 너덜거리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하, 불나방과 다름 없는 꼴이군.”
레드 베가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불나방이라.
홀린듯 무언가에 이끌려 목숨을 태우는 자를 빗대는 표현.
제 발로 파멸속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자를 흔히 그렇게 말한다.
‘나를 빗대기에 딱 알맞네.’
와쳐의 등장 이후, 레드 베가에겐 몇 번이나 좌절과 패배와 수치가 찾아왔다.
이를 통해 깨달은 사실이 몇 개 있다.
하나, 괴인은 두렵다.
그들은 자신의 자신감만으로 치우기엔 너무나 강대하다.
몸집은 거대하여 생물적인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고, 그들이 휘두르는 힘은 불합리하기 까지 하다.
또한, 불평등 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시민들까지 지켜야 하는 마법 소녀가 그들을 막아내는 일은 상당히 고되며, 그 일은 매일같이 반복된다.
축적된 피로는 이 쪽이 크고 축적된 강함은 저 쪽이 크다.
‘알고 있어.’
제대로 깨달았다. 세상은 오기와 미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벽이 있단 걸.
둘, 목숨을 잃는 건 두렵다.
단순한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 눈 돌렸다. 그러나 이젠 눈 돌릴 수 없다.
강한 빛은 암막 속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듯, 너무나 강한 공포는 철옹성처럼 굳은 고집마저 무너뜨리니까.
영웅이라 한들 죽음이란 두렵다. 다른 사람과 다를 것도 없다.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을 본능은 그녀에게도 똑같이 작용되었다.
단순한 본능 그 이상의 의미도 있다.
죽으면 끝이다. 미래 따위는 없다.
꿈꾸던 이상도, 하고 싶은 일들도, 누군가를 지키지도 못한다.
모든 가능성과 자아의 부정.
그렇기에 죽음은 두렵다.
셋, 인정 받지 못하는 건 두렵다.
사람은 사회적인 생물이라 했나.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아군이 없다는 건 두렵다.
누군가의 긍정을 받지 못하는 건 두렵다.
지금 이 행동이 단순한 오지랖이고 민폐이지 않을까 생각하면 떨린다. 욕을 먹으면 억울하다. 화도 난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왜 인정하지 않고 욕만 해?! 칭찬해줘! 이해해줘! 용서해줘!’ 이 따위의 살짝 유치하고도 천박한 생각도 난다.
영웅은 고고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도 온정이 필요했다.
레드 베가는 세 번 부정했던 두려움들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깨달은 결론.
‘난 스카이 폴라리스가 아니야.’
불타오른 도로에 내려온 그날부터 언제나 동경해왔다.
존경하고 꿈꿔왔다.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녀의 인터뷰 속 모든 말을 신뢰하고, 그대로 따르길 원했다.
하지만 동경은 동일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와 자신은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리 따라 해봤자 같은 마음가짐은 생기지 않았고, 같은 힘은 가질 수 없었고,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다.
‘아직 어리고 어린 마법 소녀.’
늦게 마법을 익히고 생각 없이 돌격만 하던 머저리.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힘이 필요하다. 너는 어째서 돌아 온 거지? 후일에 힘을 길러 다시 나에게 도전하면 될 일 아니었나.”
리브라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는 너의 가족인가?”
아니다.
“그는 너의 연인인가?”
아니다.
“그는 너의 친구인가?”
아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지킬 이유가 있는 건가. 형편 없는 꼴로, 손과 다리를 벌벌 떨면서, 이를 부딪히면서, 초라한 불꽃을 늘어뜨리면서, 두려워하면서.”
레드 베가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왜 돌아왔는가.”
두렵냐고? 당연한 말이다. 그는 괴인이면서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이다. 당연히 공포스럽다. 지금도 도망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있다.
두려움은 희망이다.
자신을 방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인해 뒷걸음질 칠 수 있다면, 육체와 정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렇게 보호된 심신은 언젠가 다시 미래로 향해 걸음을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기에, 두려움은, 이 공포는 희망이다.
하지만 희망에 불과하다.
“왜 돌아왔냐고요?”
희망은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일. 관측되지 못한 어떤 현실.
그저, 공상.
희망은 실현되지 않으면 마약으로 보는 환각 따위와 다를 바가 없다.
당장은 행복해도 언젠가 초라하게 만들 달콤한 가능성.
그렇기에 두려움은 희망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시나요?”
그러니, 두려움을 알며 전진한 한 걸음은 존귀하다.
희망을 알며 전진한 각오의 한 걸음.
두려움 속 피어난 용기가.
그 한 발자국이야말로.
가능성이 아닌, 실현이 된다.
“사람을 지키는 데 언제 이유가 필요했나요.”
대답에 있던 건 그간 자신에게 부여했던 마법 소녀의 의무도 아니었다.
죄책감은 더욱 아니었다.
억지나 강요는 없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나온 마음을 뱉을 뿐.
지금 여기 순수히 새롭게 정제된 이상을 되새길 뿐.
“당신의 납득 따위 필요 없어요. 전 제 이유로 움직입니다.”
이미 등 뒤의 그에게 긍정받았으니까. 이 이상에는 대답을 해주는 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레드 베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리브라는 대답을 듣고 웃었다.
“그런가. 그래, 그런 게 원래 영웅이었지. 그것이 너희들이 보여주는 정의였지. 미안하군. 너를 모욕했다.”
그 두 손에 한 가득 빛이 담겼다.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이 만연해지고, 대기가 울렁거렸다.
하늘을 찢고 땅을 뒤흔들 힘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태양의 위광은 그 앞에서 떨어졌고, 대지의 포용력은 그를 안아들길 포기했다.
이윽고, 그 두 광채가 하나로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아무 이유 없이 죽거라.”
천권낙분.
빛은 곧은 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걸 갈아내고, 재로 만들며.
레드 베가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손을 들어냈다.
그녀도 지지 않고 불꽃을 뿜어냈다.
기술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렇게 정제된 무언가가 아니다. 이성으로 본능의 폭력을 다스려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니다.
처절하게, 무모하게, 최선을 다해 지금 내놓을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쥐어짜고 불꽃을 뿜어낼 뿐.
이것은 길 잃은 아이가 터뜨린 울음보와도 닮아 있었다.
거대한 감정의 격류와도 같았다.
‘지면 안 돼.’
물러나면 안 된다.
레드 베가의 발걸음이 한 발자국 뒤로 물렸다.
‘질 수 없어.’
뒤에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그토록 걱정했으면서도, 돌아왔을 때 웃으며 긍정해준 사람.
아직 말할 게 산더미처럼 남은 사람.
레드 베가는 침묵을 지키며 물러났다.
“형편 없는 별빛이구나! 여기서 지워져라! 사라져라! 이 빛의 위대함을 위해 희생되어라!”
빛을 가리는 건 어둠이 아니라 그보다 강한 빛이었다.
레드 베가는 다시 물러났다.
그렇고 물러나고, 물러났다.
그러다.
툭, 하며 뒷발꿈치가 무언가와 닿았다.
“지워질 리가 없지.”
불을 뿜는 그녀의 오른손에 누군가의 오른 손이 올려졌다. 뜨거울 텐데도, 아플 텐데도 상관 않고 올렸다.
긍정의 실체화였다.
소녀의 노력을 여기 지금 긍정했다.
“내가 여기 보고 있으니까. 보았다면 알고, 알았다면 기억하겠지. 네 놈이 아무리 부정해도 여기 내가 긍정한다. 그녀의 빛이 이 곳에 환히 존재함을 긍정한다.”
괴인은 사람의 부정을 통해 강해진다.
마법 소녀는 그 반대다.
사람의 긍정을 통해 강해진다.
사랑.
누군가를 통해 얻는 자신의 긍정.
“여기, 내가 별을 보았다.”
평화.
자신을 통해 얻은 누군가의 긍정.
레드 베가의 빛이 강해졌다.
소녀의 손에 모여든 불꽃은 더 이상 초라하지 않았다.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을 듯이 힘차게 샘솟았다.
신성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