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51
Chapter 51 – 이름을 불러줘 (2)
초겨울의 햇살은 청량한 온기를 머금고 볼을 간지럽힌다. 그 햇빛을 뚫고 하늘을 보면 구름은 거의 없고 어제보다 더욱 푸르렀다. 그 푸름 아래엔 회색이나 흰색 따위를 머금은 건물들이 높이 솟아 구름 대신 하늘을 채웠다.
건물들보다 더 아래를 내려다보면 행인들이 오늘도 무기력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내가 죽을 수도 있단 경각심이나 무기력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수백을 넘는 사상자가 나오지만 그 명단의 일부에 본인들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곤 조금도 상상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병원 옥상에서 무슨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삭막한 상상력으로 연상하는 건 고난도의 작업일 터였다.
“흐음….”
새하얀 옥상에 녹색의 발자취가 하나 있었다. 이 발자취의 주인이 그 위협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 충분한 존재.
물론 이건 대다수의 인간을 향한 수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지만.
그와 같은 생김새를 지닌 자에겐 보다 확신을 가지고 사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우스꽝스럽고도 기괴한 모습. 검정색 스판덱스같은 재질의 옷이 전신을(머리까지)뒤덮고 그 위에 다시 초록 갑주를 뒤덮었다.
그렇게 까지 인간의 모습을 철저하게 가린다면, 이제 그것은 인간이라 부르기 곤란한 존재가 된다.
괴인.
단단하고 육중해 보이는 그 모습은 열이면 아홉이 피할만한 생김새였다.
“그 모습 오랜만이네요?”
도망가지 않는 하나는 대체로 소녀의 얼굴을 띄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누군가의 부름에 와쳐가 뒤돌았다. 앳된 얼굴의 여성이었다. 이제 성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아직 작은 소녀 하나. 불꽃을 닮은 색을 두른 마법 소녀.
“왔군.”
괴인의 모습을 띈 와쳐. 그는 지금 오리진을 각성하기 전 보다 험악한 인상이었을 시기의 모습이었다.
“때론 추억에 잠기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나.”
와쳐는 두 팔을 벌리며 여유를 부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드 베가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화륵. 아무런 발화 장치도 없던 그녀의 손에서 붉은색의 화염이 샘솟았다. 그 고열의 어스럼을 잡으면서도 소녀에겐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면 전에 그랬던 거처럼 저 먼저 갈게요.”
첫 만남.
그 때의 추억을 회고하며 레드 베가가 자세를 잡았다.
“당신의 마음에 붉은 혜성처럼.”
그 당시엔 하지 못했던 본인의 시그니처 대사를 읊으며.
그녀는 달려나갔다.
나아간 건 단 한 발짝.
한 걸음. 일 리를 가기에도 부족한 길이.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럴 터였나 그녀에겐 달랐다. 불꽃을 발 밑에 모아 뿜어내는 형식으로 차원이 다른 도약력을 얻을 수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레드 베가, 등장!”
주먹이 와쳐의 몸을 강타했다. 전에 그랬듯 와쳐는 이번에도 방어하지 않았다.
소녀의 손에 감긴 건 그 때와 동일한 파장의 불꽃, 소리 같은 파장을 흩뿌리는 불꽃.
일로. 화음.
전과 동일한 대처, 동일한 기술, 하지만 전과 동일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타앙!
호쾌한 피격음과 함께 와쳐가 하늘 높이 날려졌다. 위를 향해 총을 쏘아 올린 것처럼 빠르고 강렬하게.
전과 달리 그 공격은 별 영향이 없지 않았다.
방어하지 않은 오만함의 대가는 컸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사람의 육체 한 점이 장식되었다. 주먹의 파괴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갑주에서 약간의 실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죠!”
“멀리 날아가긴 했군.”
언제 따라온 건지 하늘을 날아가는 와쳐의 위에 레드 베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리를 아예 이동할 생각이군.’
병원 옥상을 파괴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직 멀었단 말의 의미는 ‘아직 덜 맞았다’라는 의미였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 레드 베가는 왼 손을 뻗었다. 와쳐의 어깨가 붙잡혔다.
변신을 하면서 깁스를 저 멀리 던져버린 모양이었다.
왼 팔은 그리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잡기엔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레드 베가는 짙게 미소 지으며 오른팔을 들었다.
퍽! 퍽! 퍽!
하늘을 날고 있던 그에게 레드 베가가 몇 번이고 주먹을 내리쳤다. 한 번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이 미묘하게 진동했고, 금이 가 있던 갑주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하찮게 잔해를 흘렸다.
한참 비스듬히 날아가던 몸은 아래를 향하는 주먹의 충격을 받으며 비스듬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퍽! 퍽!
레드 베가의 주먹은 조금의 자비도 띄지 않고 한땀한땀 진심을 담아 그를 내리쳤다.
와쳐는 공중에서의 자유가 그녀보다 한참 부족했다. 그것이 얌전히 주먹을 맞아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레드 베가가 다시 한 번 오른팔을 들었다. 방금 전과 달리 그 손에 불꽃이 모이기 시작했다. 와쳐는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ALIOTH.]벨트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갑주가 붉게 물들었고 손에는 세검 하나가 생겼다.
염정, 못을 닮은 붉은 검. 그 검에선 그녀의 것과 비슷하게 불꽃이 모이기 시작했다. 단 그녀와는 달리 검록색의 흉흉한 불꽃이.
“으앗!”
와쳐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잡아 당겼다. 비행하는 새를 잡아채 땅으로 내리려 드는 것과 비슷했다.
억지로, 힘으로 당겨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와쳐는 그녀를 내림과 동시에 본인을 당겨 올렸다. 자연히 레드 베가는 아래를 향하게 되었다.
위치가 역전되었다. 와쳐가 위에, 레드 베가가 아래인 자세가 되었다. 장소는 아직 하늘 위.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잡은 채, 불꽃을 감은 기술을 준비했다.
둘의 팔이 동시에 당겨졌다. 활을 쏘려는 사람처럼 팽팽하게.
곧, 세검과 주먹이 맞부딪혔다.
쾅!!!
결과는 폭발이었다.
한가한 오후에 두 불꽃이 번뜩였다. 터져나간 빛이 낮을 보다 환하게 만들었다.
공중이란 도화지, 그 일부에 붉은 점 하나가 떨어져 푸름을 더렵혔다. 번뜩이던 그 붉은 점은 곧 이어 희뿌연 연기로 변화되었다.
연기 속에서 유성 하나가 떨어졌다. 사람의 모양을 한 유성이었다.
당연하게도 와쳐와 레드 베가였다. 폭발의 여파로 다시 거리가 벌어진 둘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균형을 찾아냈다.
퉁!
곧 그들은 대지에 닿았다.
사람 수준의 질량이 땅에 내려 꽂아진 탓에 훅 하며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크게 다친 모습은 없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안정되게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히어로 랜딩이라 흔히 불리는 자세였다.
‘…젠장.’
하지만 아직 다리가 좋지 않았던 한재중은 착지의 충격을 완전히 분산 시키지 못했다.
다리를 자극시켰고, 그 탓에 즉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너른 평원에 흙먼지와 모래가 섞여 날리고 있었다. 풀이나 수목은 적었다. 사막과도 같은 환경이었다.
곳곳에 건물의 잔해 따위가 있는 걸 보면 예전 괴인 사태로 버려진 침입 불가 지역 중 하나인 걸로 보였다.
아직 먼지 구름이 날며 시야를 가리는 도중, 와쳐는 최대한 기척을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기척이 잡혔다. 바람을 뚫고 달려오는 사람의 발소리와 호흡, 그림자, 그 모든 게 아우러진 인기척.
다리를 억지로 일으키며 와쳐는 자세를 잡았다. 연기 속에서 레드 베가가 튀어나왔다.
더 먼저 움직인 건 와쳐였다. 그는 즉시 세검을 앞으로 뻗었다. 화륵 피어오른 불길은 날카롭게 벼려졌다. 설령 눈 앞에 있는 게 단단한 바위라 해도 간단히 뚫어낼 자신이 있었다.
펑!
그 때, 폭발음이 들렸다. 레드 베가가 왼 쪽 손에서 불을 뿜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얻은 추진력은 기껏 뻗은 공격을 무위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기껏 돌진한 적에게서 훨씬 멀어질 가능성을 제공하기에도 충분했다.
하지만 레드 베가는 그러지 않았다.
펑! 다시 한 번 폭발음이 울렸다. 자신이 가던 역방향으로 불꽃을 뿜어낸 것이었다. 레드 베가는 다시 와쳐를 향해 돌진하였다.
펑! 펑! 펑! 공중에서 몇 번이고 불을 뿜으며 과감하게, 또한 세심하게 방향을 조절해내며 그의 앞에 도달해냈다. 눈이 한 번 깜빡이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레드 베가는 날아오며 얻은 관성과 추진력을 전부 돌려차기에 실어 그의 허리를 강하게 차올렸다.
쾅!
와쳐의 갑주가 다시 한 번 깨져 나갔고, 그는 오늘 두 번째로 허공을 날았다. 방금 전과는 달리 저공비행이었다.
그는 오른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카가가각! 그 땅을 헤집으며 브레이크로 삼았고, 몇 걸음 멀어지지도 않고 다시 멈춰서는 데 성공했다.
방금 전보다는 훨씬 온건한 착지를 해낸 와쳐가 일어났다.
“후우….”
깊은 한숨이 뿌연 먼지 구름을 헤집었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강해졌군.”
“…!”
단순한 한 마디였다.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한 한 마디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강해지겠지. 너를 막는 벽은 매일매일 작아질 것이다. 네가 나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시련이 있겠지만, 넌 언제나 그 시련을 이겨낼 것이다.”
한재중은 벨트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는 없다.”
망원경의 초점 조절 장치를 닮은 바퀴. 그것을 주먹으로 쳐냈다.
“진실에 닿고 싶다면 행동해라. 너에겐 그럴 힘과 권리가 있다.”
바퀴가 크게 돌아갔고, 벨트 중앙의 유리 안 빛도 크게 돌아갔다. 마치 별이 일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빛의 회전 속 와쳐를 이루던 갑주가 점차 깨져나갔다.
[ORIGIN.]벨트에게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오고, 그를 감싸고 있던 육중한 갑주 대부분이 산산히 깨져 흩어졌다. 그 갑주들은 가루처런 작게 빻아졌고, 끝내 별빛과도 같은 모양이 되어 목에 모여 들었다.
그 별빛은 붉은 머플러가 되었다.
머플러가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휘날렸다.
그가 손가락을 올려 레드 베가를 가리켰다.
“너는, 별을 본 적이 있나? …하, 누가 누구에게 묻는 건지.”
적어도 그녀에겐 말할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와쳐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 웃었다.
레드 베가는 말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뻗었다.
절도 있게 땅을 짚은 다리에선 불꽃이 샘솟았다.
두 길쭉하고 흰 다리는 이 세상의 모든 진노를 눌러 담은듯 환하게 타올랐다.
“네. 있습니다.”
다시 그녀가 돌진했다. 화염을 담은 다리가 크게 휘둘려졌고 와쳐는 팔을 들어 그걸 막아냈다.
쾅!
그렇게 뻗어난 진동은 북처럼 울려 대지를 흔들었다.
“당신 덕에! 아주 많이 봤죠! 그렇게 까지 사경을 헤맨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당신 말대로, 뇌가 잔뜩 흔들려 시신경을 잔뜩 자극 당했으니까요!”
막혔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레드 베가는 다리를 수거하고 다른 쪽 다리를 뻗었다. 이번의 와쳐는 허리를 뒤로 굽히며 피해냈다.
“무서웠죠! 아팠어요!”
레드 베가의 다리는 계속하여 발을 움직여 그를 공격했다. 한 발 한 발이 위협적이었다. 불꽃이 허공에 만드는 긴 잔상은 수묵화처럼 짙고 서정적인 감성을 만들어냈다.
“왜 그런 거에요!”
쾅! 충격을 전부 분산해내지 못하고 와쳐가 뒤로 물러났다. 발이 밀리며 남긴 마찰열이 땅에 검은색 선을 형성해냈다. 타들어간 재와 같은 색이었다.
“전에 말했듯이 협박을 당했다….”
“…!”
레드 베가의 표정에 옅은 기대가 서렸다.
“…라고 한다면, 넌 나를 용서해야 하나? 마법 소녀니까?”
그 기대를 와쳐는 매몰차게 끊어 버렸다.
“협박을 당했든 뭐가 되었든, 내가 너에게 폭력을 행사한 건 온전히 내 선택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지. 너에게 행사한 폭력으로 인해 난 스스로 가졌던 목적에 가까워졌다. 내게 사정이 뭐가 있었든, 난 그것으로 이득을 얻었다.”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타인도 용서하지 않았으면 했다.
죄는 합리화할 수 없다.
사정이 있다 해서 죄가 없던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다.
“난 너의 죄인이다.”
레드 베가는 대답을 듣고 잠시 굳었다. 그의 모습을 천천히 살피다 입술을 열었다.
“…그럼 왜!”
그녀가 악에 받친 듯 소리친 다음 다시 목소리를 줄였다.
“그럼 왜… 저에게… 지금까지 왜… 그 모습을… 그런 말을… 당신은 도대체….”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실제로 레드 베가는 누군가가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다짐하기 위해 말한 것이었다.
다시금 호흡을 되찾은 레드 베가가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은… 제가 괴인에게 두려움을 얻길… 바랬나요?”
“용서를 위한 말인가.”
“아뇨.”
레드 베가는 단호하게 끊었다.
“제가 납득하기 위한 의문입니다.”
와쳐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답을 들은 즉시 레드 베가는 팔짱을 낀 다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 고개를 주억인 다음 팔을 풀고 다시 전투의 태세를 갖췄다.
“좋아요. 납득했습니다.”
그녀의 발에 자그만 불씨가 얹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신은 정말 괴인인가요?”
“….”
“…침묵이다 이거죠? 곤란한 건지 못 말하는 건지… 괜찮아요. 어차피 대답은 변함 없으니까요.”
툭, 첫 눈처럼 다가간 불씨가 녹아 사라졌다.
“당신은 제 죄인이니, 판결은 제가 내리겠습니다.”
그것도 잠시, 불씨가 사라진 발치로부터 거대한 불꽃이 샘솟았다. 자그만 불씨는 더욱 큰 불을 일으키려는 방아쇠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저는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폭력으로 얻은 공포와 부정적인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요. 제게 가끔 꿈으로 되살아나 절 괴롭히겠죠. 그러니 저는 당신이 밉습니다.”
거대해진 불씨가 서늘하게 레드 베가를 비췄다. 데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갔고 그녀의 머리카락 역시 불꽃처럼 낭창하게 휘날렸다.
“하나, 그럼에도 저는 당신에게 어떤 호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료애이며 스승을 향한 공경심 비스무레 한 것이기도 했고 저보다 강한 존재에 대한 동경심이기도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성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그딴 오해를 할 거 같나.”
“다행이네요. 자칫하면 신고할 뻔 했어요.”
둘은 마주 보며 헛 웃었다. 그러나 농담으로도 지금 전장에서 흐르는 서슬퍼런 투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
폭풍처럼 휘날리던 불씨가 얌전해졌다. 불꽃은 모이고 절제되며 하나의 순환을 만들어냈다. 끝나지 않을 원형의 형태를, 고리를.
“그렇기에 전 당신이 밉지만, 죽진 않았으면 해요.”
그녀의 다리에 헤일로가 생성되었다.
“증오스럽지만, 제 눈 앞에서 그 밉살스런 말을 하고 있었으면 해요.”
와쳐도 그에 맞춰 버클을 움직였다.
[SET. 칠성보각.]그의 다리에 초록색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반딧불이같은 미약한 광채들이 불씨를 죽이고 그를 비췄다.
“그렇기에 전 당신의 정체를 알면 안 돼요. 당신이 가장 연약한 모습일 때도 죽이려 행동해야만 하니까. 그게 제 소임이고 사명이며, 이 세계의 사람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할 선택이니까.”
적록의 빛들이 폐허를 뒤덮었다.
“그러니 나의 죄인, 저는 당신에게 하나의 판결을 내립니다.”
한참동안 주위를 어지럽히던 빛이 압축되었다.
“저의 적이며, 경쟁자이며, 스승이며, 친구가 되어주세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시련이, 언젠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우군이, 마음껏 분노할 수 있는 원망의 대상이 되어주세요.”
폭발하기 위한 힘을 비축하듯 하나의 고리 안에 모여 방금 보단 작게, 그러나 선명하게 빛을 내보냈다.
“그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가 아니지 않나?”
“그런 건 안 따지는 게 멋진 거에요.”
“요새 애들의 감수성은 어렵군. 아니면 네가 특별한 건가.”
잠시 서로를 바라본 둘은 투지를 불태웠다. 두 빛이 선명한 의지를 담고 준동했다.
둘은 동시에 발을 움직였다.
“그럼, 갑니다.”
“가도록 하지.”
첫 번째 발걸음엔.
‘두려움을.’
행동하기 전, 잠시의 침묵. 고뇌의 시간. 이 앞으로 나아가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고뇌했다면,
나아가라.
이제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둘은 가볍고도 묵직하고도 확실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달려나갔다.
각오를, 이해를, 확신을, 여유를, 의지를, 두려움을 떨쳐내고 볼 모든 마음가짐을 힘으로 바꿔 실어라.
레드 베가의 다리에 있던 불꽃의 고리가 점차 거대해졌다.
와쳐의 다리에 있던 녹색의 고리 위로 새로운 고리가 덧 씌워졌다.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 적은 없었다. 이런 가르침을 나눈 적도 없었다.
하지만 둘은 자연히 알게 되었다.
상대도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쳤음을, 의지를 선명히 가진 자 특유의 사고 과정이 있었음을.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대단한 우연을 넘어 운명처럼 겹쳐 한 줄로 흐르듯이, 둘은 무한한 우연이 겹쳐 동일한 걸음에 도달했다.
마지막 걸음.
담는 건 의지를 증명 하기 위한 의지.
으드드득!!
땅에 균열이 생겼다.
레드 베가가 밟은 땅에선 화산처럼 불꽃이 터져 나왔고,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갈라진 와쳐의 땅에선 오로라 같은 몽환적인 별빛이 샘솟았다.
둘의 다리에 있던 고리가 하나의 점이 되어 극한까지 힘을 압축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레드 베가가 뛰어오르기 직전, 찰나간 그와 눈이 맞았던 순간에 물었다.
“당신은, 별을 본 적이 있나요?”
와쳐는 웃었다.
“그럼 당연히! 보았고 말고!”
그녀가 높이 뛰었다.
태양을 가렸으나 그림자는 되지 아니했다.
레드 베가는 또 다른 낮의 광채가 되어 뜨겁게 지평을 달구었다.
혜성과도 같은 궤적을 남기며 그녀가 아래로 떨어졌다. 와쳐는 그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일로(一路). 염화류휘(炎花流輝).
칠성보각(七星步脚).
두 압도적인 별빛이 만났다.
“여기 지금, 내 눈 앞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으니!”
광채가 폐허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