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56
Chapter 56 – 기억 복구 (2)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밥 먹는 법, 화장실을 쓰는 법, 단어를 말하는 법 등의 아주 작은 배움으로부터 보다 높은 예의를, 자세를, 품격을 갖추게 된다.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배움을 쌓고 쌓아 식견을 넓히고 그 식견에서 나온 언행으로 보다 현명해지는 것이다.
배움에는 경험이, 경험에는 사건이, 사건에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어린이에는 ‘어리다’라는 어리석다란 의미가 있다.
행동한 적이 적고, 겪은 사건이 적으며, 경험이 부족하고, 배움이 짧다.
배움이 적어 어찌 행동하면 좋을지 모르고 어찌 말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재중도 그런 어린아이 중 하나였다. 아직 인생의 반의 반도 살지 못한, 어린아이.
고아였음에도 씩씩했던 아이.
한재중은 본인이 어른스럽단 착각을 하기 아주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부모가 없어 본받을 어른이 없이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자립심이 또래에 비해 강했다.
정확히는 그저 자립심 밖에 없단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예속될 남이란 게, 떨어질 부모란 게 존재하질 않았으니.
그 자립심은 또래에 비해 비범한 면모를 지니게 했고, 그 비범함은 또래 친구가 그에게 의지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는 그에게 배움이 아니라 잘못된 깨달음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구나.
배움이 적은 상태로 얻은 자립심은 곧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본인 하나 책임 못질 이가 남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기 시작했다.
책임감은 곧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곧 무모함으로.
그 무모함은 사건을 종결 지을 손쉬운 결론을 떠올려냈고.
사건의 후폭풍은 떠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지킬 대상에서 자신을 배제한 결과였다.
어른스러운 아이와 어른을 착각한 결과였다.
자신이 지닌 육체적, 정신적 한계 이상의 부담감을 느끼며 그는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인 체 책임을 지었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안일한 판단이었다.
안일할 수 밖에 없는 정신 상태였다.
아직 그는 어린이였다.
연애사가 터지며 불특정 다수에게 정신적 학대까지 경험한 어린이.
오만했으며 무모했고 초조했다.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클지 몰랐으며.
자신의 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몰랐고.
현실의 풍파가 얼마나 힘겨울지 몰랐다.
지금 그 어리석음의 대가를 똑똑히 치르는 중이다.
거친 호흡은 지금까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과거의 고통이 경험이 되었단 증거였다. 그리고 한창 배움을 얻는 중이란 증거이기도 했다.
“오, 오빠! 지, 진정… 보, 봉투. 봉투 어딨지?”
시간의 흐름은 만인에게 공평하나 만인에게 똑같은 치유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망각은 축복이다. 시간의 흐름은 바람이 모래를 옮기는 거처럼 천천히 쌓여있던 고통을 잊혀나가게 한다. 하지만 그 바람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의 것은 거세고 누군가의 것은 느지막하다. 혹은 아무리 거세게 바람이 불어도 옮겨지지 않을 때도 있다.
한재중의 경우엔 또 특별했는데, 불어 사라졌던 모래들이 역풍을 받아 다시 돌아온 경우다.
분명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들이 억지로 끌어 올려져 그를 괴롭혔다.
원하던 기억 중 하나였으나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오빠! 나 봐! 빨리!”
핑크 데네브는 한재중의 볼을 잡고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게 하였다. 보석을 닮은 눈동자는 선명하게 그를 비췄다. 그의 눈동자 역시 선명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를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내 말 들리지?! 어?! 아니야 고개는 끄덕이지 않아도 돼. 7초, 7초 동안 숨을 들이마셔! 알았지? 지금부터 셀게. 1, 2….”
그녀의 손가락이 주먹 쥔 상태에서 하나하나 펴졌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거칠게 날뛰던 횡경막이 팽창하였다. 방금 전보단 한층 안정된 움직임이었다.
다섯 손가락이 다 벌어지자 이후엔 두 손가락을 접었다.
“이제 내쉬어. 이번에도 천천히, 11초 동안. 알았지? 1, 2….”
다시 그녀의 손이 주먹으로 돌아갔다. 들이켰던 숨을 핑크 데네브의 목소리와 손가락에 맞추어 천천히 내쉬었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천천히 원래의 모양을 되찾았다.
“…11. 이제 다시 숨 셔. 7초 동안. 아까랑 똑같아. 알겠지?”
그걸 몇 번 반복했다. 711호흡. 과호흡 시의 대처 요령 중 하나였다.
물이 끓어오르듯 거칠게 튀어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던 어깨는 그 호흡의 반복을 통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허억… 흐억….”
하지만 후유증은 있었다. 마라톤을 끝마친 사람처럼 땀이 흥건했고 팔이나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악몽 같은 기억을 한 순간에 번개처럼 때려 박은 결과였다.
한재중은 지금 얼굴에서 흐르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어지러웠다.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도 상처 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이 따위 지랄 쯤이야 사춘기라면 흔히 할 법한 행동이었지만. 그 선택의 가벼움에 비해 대가는 너무나 무거웠다.
‘염병할… 이러니까 자살을 했고 그간 자취를 감췄지.’
왜 그간 한재중이 자살을 결심한 건지는 아주 잘 깨달았다.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니, 공감이라 하기에도 부족하다. 실제로 체험했으니.
거기에 다른 두 사람에 대한 한재중의 생각, 감정, 죄책감 등에 대해서도 보다 잘 알게 되었다.
복잡했다. 원래 타인을 향한 감정이란 게 단순하진 않지만, 그의 경우엔 보다 더했다.
이성적으로도 부성적으로도 볼 수 있을 자애로운 사랑, 동료 의식, 동경, 열등감과 열패감, 우정, 타인을 아끼는 상냥한 자신에 도취되며 얻는 일종의 우월감과 고양감, 권태감, 책임감, 미안함, 죄책감.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쳐 그를 때렸다.
기억 안에는 장면만이 아닌 감정이 들어 있다. 한재중은 눈 앞의 그녀에게서 떠나갈 결심을 하고 실천한 기억을 얻으며, 그 때 있던 여러 감정도 알게 되었다.
‘지쳤구나.’
한재중은 마법 소녀 같은 빛나는 존재들 옆에 있는 것에 지쳐 있었다. 권태감.
사람에 지친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옆에 있으며 얻는 여러 시선과 관심에 지쳐 있었다.
열애설은 단순히 떠날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없어도 자신은 어느날 자취를 감췄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것이 천성이었다. 조금의 감정적 동요가 있으면 즉시 행동하는 것.
말려줄 부모가 없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후천적 환경으로 만들어진 천성이라 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주 가출을 했다. 학교는 딱 출석일만 맞춰 다녔고, 자주 땡땡이를 치며 다른 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다 어느날 권태감이 사라지면 돌아왔겠지.
그녀들도 이 성격을 알기에 한동안 찾지 않은 것이겠고.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오빠… 괜찮아?”
핑크 데네브가 걱정스레 물었다. 볼을 잡고 있는 손이 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 동시에, 감정의 매개체로서 작용했다. 그녀의 손은 그 못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어, 괜찮아.”
그 놀람을 짐작한 한재중은 웃어 보이며 안심시키려 했다. 실제로 효과적이었다. 핑크 데네브의 얼굴에 살짝 안도가 맺혔다. 그녀는 한재중처럼 고꾸라 앉았다.
“그, 그런데 왜 여기 있던 거야…?”
정당한 의문이었다. 곤란한 의문이기도 했다. 한재중은 살짝 웃음을 일그러뜨리며 무슨 변명을 할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기껏 괴인이라는 의심을 지웠는데 다시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건….”
중얼거리듯 뱉은 변명은 이어지지 못했다. 뿌연 수증기로 뒷 말이 흐려졌다. 한재중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눈을 의심했다. 핑크 데네브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죽지 마….”
“…?”
돌아온 답변은 너무나 뜬금 없었다. 지금 보니 앞선 질문은 묻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 안에서 답을 확정 내린 의문이었다.
핑크 데네브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재회란 점에서 썩 뜬금 없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감정은 꽤 당혹스러웠다. 무거운 감정의 격류에 어벙벙한 눈이 되어 한재중은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공을 휘저었다.
“오빠 죽지 마아… 히끅, 흑, 죽지 마아….”
어깨에 얼굴을 기대자 축축함이 배여나왔다. 방금 전 흘린 식은땀 때문이 아니었다. 핑크 데네브는 울고 있었다. 친한 지인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고 놀란 마음에 눈물이 나오는 일도 있다만, 지금 상황에 적용하기엔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이것은 염려를 넘어선 염원이었고.
단순한 건강의 기원을 넘은 생명에 대한 수호 행위이자 애환이었다.
‘방금 전 설화에게 죽을 뻔했긴 했지. 따질 거면 내가 아니라 설화한테 살려달라고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이 따위 농담을 내뱉기엔 상대가 안 좋았고 상태도 안 좋았다.
“죽지 마… 죽지 마… 내가 잘할게… 내가 미안해… 못 알아봐서 미안해… 아재라고 말해서 미안해… 이제 욕도 안하고 착하게 살테니까아….”
이걸 어째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생각해둔 변명이 하얗게 표백되고 그녀의 눈물로 씻겨 내려갔다. 나이에는 맞지 않지만 겉모습에는 어울리는 처절하고도 유아적인 통곡에 한재중은 말을 잊었다.
“자살하면 안 돼… 죽지 마요….”
기억을 되살린 뒤 다시 떠올리는 건 기억이었다. 어렴풋 하지만 한재중은 그녀가 어릴 적 울보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 때에 비해 화장도 강해지고 자세도 당당해지고 언행도 망설임이 없어졌지만, 지금 우는 모습을 보니 아직 그 어릴 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죽으면 안 돼요….”
너무나 강경한 염원에 한재중은 방금 전 있던 고통조차 잊게 되었다.
“내, 내가 죽긴 왜 죽어! 아윤아 내가 누구야! 응? 안 죽어. 괜찮아. 안 죽을 거야.”
상황을 전부 따라갈 순 없었지만 한재중은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머쓱한듯 허공을 휘젓던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모았다. 이 작은 등을 한 아름 안곤 어린아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던 그의 손이었으나 어느새 떨지 않고 있었다.
안개 뒤처럼 희미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나 안 죽어. 아윤아 진정해. 다 괜찮을 거야. 다.”
그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방금 전 호흡법처럼, 천천히.
이 뒤로 일곱 번을 안 죽겠다 외치고 열 한 번 괜찮다 외친 후.
처절히 떨리던 그녀의 등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