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62
Chapter 62 – 기억 복구 (8)
어제, 레드 베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다름 아닌 한재중의 과거였다.
상담이란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과정에서조차 숨긴 치부.
“그러니까! 그 새끼는 마법 소녀 여친을 통해 우월감을 가지게 된 쓰레기란 거죠!”
화이트 다비흐는 핑크 데네브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한재중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다비흐 씨.”
“하루 짱이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직녀!”
레드 베가는 심란해져 깊게 신음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단 생각에 뿌듯함을 느낀 화이트 다비흐는 살가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직녀도 조심하세요! 그런 사이코패스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상담을 통해 직녀의 약한 마음에 파고 들어 뿌리를 박은 다음, 당신을 조종할 것입니다!”
“제가… 상담자였는데요….”
“그거도 위험합니다! 약한 모습을 통해 동정심을 유발해 당신과 더 깊게 연관되려 할 것입니다!”
“연락… 며칠 간 단 한 번도 없….”
“그거도 위험합니다아아!!! 밀당입니다! 밀당! 직녀를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기 위한 음습한 수단입니다!”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한재중이 그 유명했던 블루 시리우스의 남친이었다니.
레드 베가가 아직 초등학생일 무렵, 인터넷에 가깝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TV 뉴스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 기억난다.
인터넷에 잘 알게 된 이후에도 굳이 병크를 찾을 생각은 안 했다.
이 세상 대부분의 마법 소녀에게 팬심을 가지고 있는 레드 베가에게 있어 블루 시리우스 또한 덕질 대상이다.
가끔 어그로 등이 ‘그 새끼’의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대부분 먹금하고 넘어 갔다.
호감 이미지를 지닌 연예인의 병크를 굳이 끌올하는 사람이 적듯이, 블루 시리우스는 국민적 호감을 지닌 마법 소녀였다.
오히려 그녀가 피해자란 이미지가 강해 괜히 그 연애사를 꺼내 봤자, 피해자에게 향하는 2차 가해가 된다고 여러모로 눈치를 받았다.
그렇기에 레드 베가도 그 사건의 개요와 ‘그 새끼’의 존재 정도는 알았지만, 상세는 알지 못했다. 거의 6년이 된 사건이니 말이다.
과거 터진 카톡 일부나 학교폭력 이력 등은 알았지만, 얼굴과 이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 화이트 다비흐가 알려준 지식으로 인해 한재중과 그 열애사에서의 흉포한 남친을 잇는데 성공했다.
“…정말… 재중 씨가…?”
“흑흑, 벌서 직녀가 가스라이팅을 당했습니다… 괜찮아요 직녀! 남자는 세상에 많습니다! 직녀의 얼굴과 지위라면 맘대로 골라 먹기가 가능….”
“그런 거 아니에요.”
차갑게 대꾸했지만 화이트 다비흐는 여전히 명랑했다.
“직녀 씨! 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세요! 이런 가스라이팅 폭력남은 안 됩니다!!!”
레드 베가는 한재중의 뒤를 잇는 저 주홍글씨 같은 수식어를 반기지 못했다. 만족스럽게 받아 넘기지 못했다. 불편했다.
“그, 그래도 제 앞에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진… 어, 보, 보이지는….”
짚히는 게 있어 즉시 부정하진 못했다. 레드 베가는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입원 당시 그를 놀리기 위해 생긴 습관이었다.
“아, 아무튼 보이지 않았어요!”
“직녀 씨. 그 유명한 옛 학살자들도 주변엔 따뜻했다고 합니다! 닝겐(인간)은 양면적입니다! 누군가에겐 악마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요!”
흠칫. 레드 베가의 어깨가 떨렸다. 와쳐로서의 그가 기억에 떠올렸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런 미혹들을 부정했다.
“닝겐은 다 악마입니다!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는 아쿠마(악마)! 캬, 저 지금 좀 멋진 소리 하지 않았습니까?! 보쿠(나), 캇코이이이(멋져)!!!”
한재중이 저지른 일들이 사실이라면 저 험담은 합당하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핑크 데네브가 보여준 흥분된 모습은 과거의 열애사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대중에게 공개된 것만이 진실이 아님을.
레드 베가는 결심을 굳혔다.
오늘 핑크 데네브가 돌아와 사정을 설명하기 전까진 중립으로 있자고.
‘만일 그가 저지른 게 진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어찌 대해야 하지. 아니, 그만이 문제가 아니다. 블루 시리우스. 자신을 많이 챙겨준 상냥한 언니. 무슨 낯으로 그녀를 봐야 하는가.
‘데네브 언니가 시리우스 언니에겐 말하지 말랬지….’
아직 사정을 깊게 알게 된 건 아니지만 왜 그런 말을 한지 감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일이 있던 연인이 자살 상담을 받았다면 혼란스럽겠지.
동시에, 가장 연관이 깊은 사람은 블루 시리우스인데 그녀에게 안 밝히는게 도의적으로 올바른지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결국 답이 없는 문제였다.
이럴 땐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다.
“직녀 씨, 너무 슬퍼하지 마요. 직녀 씨에겐 둘도 없는 영혼의 토모다치(친구)… 제가 있잖아요!”
레드 베가는 핑크 데네브가 빨리 돌아와 사정을 설명해주길 빌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여기 한재중의 앞에 서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핑크 데네브에게 아무 설명도 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달아 격전을 치룬 덕에 휴식이 필요했다. 본인이 그걸 원했다.
미안하다며 나중에 이야기 해주겠다며 사과를 했다.
호기심의 연소가 멀어졌다.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 한재중의 집에 찾아오기로 했다.
주소쯤이야 상담 설문지에 적혀 있으니까!
**
“확실히 마음에 안착했죠? 그럼 이제 집에도 안착할게요.”
“네 행동이 안 착해요. 제 마음에도 안 착한 마음이 샘솟고요. 말도 없이 집에 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기에 팔로 들어올 틈을 막아 침입을 방지했다.
레드 베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항의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사이인데?”
“어허 씁, 말 놓지 마요.”
“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죠?”
벽에 손을 짚은 팔을 양 손으로 잡아 자신의 배에 가져가게했다. 두꺼운 옷감 너머 희미하게 느껴지는 체온.
“…정말, 안 들여보내 줄거에요?”
이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고 질문하려 했던 입을 필사적으로 다물었다. 내 업보이니 달게 받을 뿐이다.
“정말로~?”
팔을 잡은 양손을 상하좌우로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몸을 더욱 가까이 하였다. 코트가 내 손에 의해 구김이 발생했다.
코트 안 틈으로 손을 넣으려 했을 때 재빨리 팔을 빼냈다.
“어허. 어른 놀리는 거 아니에요.”
“이제 저도 한 달 뒤면 어른인데 뭐.”
“언젠가 죽는다고 지금 뒤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은 애새끼죠.”
그 말에 레드 베가가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맞아요. 지금은 애죠.”
그러더니 만화 속 정체를 드러내는 악당처럼 후후 웃으며 코트 자락을 잡았다.
“이 코트 안 뭐가 있는지 아나요?”
“뭔데요. 크롭티라도 입었나요. 이 날씨에 춥겠다.”
“아니에요. 변태에요 재중 씨? 시리우스 언니한텐 그런식으로 성희롱 안 했죠? 안 했어야 해요.”
내가 원작에서 배 춥게 입고 다니는 꼴을 봐서 그러는 건데… 이런 걱정을 단순한 성희롱 취급하다니 정말 슬프다.
이 슬픔을 목 아래로 넘기는 무렵 레드 베가는 코트 윗 단추를 하나 풀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그 틈을 손으로 벌리며 안에 입은 의복을 두 눈에 담게 하였다.
“…저, 교복 입었어요.”
“아, 네. 그 나이에 어울리는 건전한 복장이시군요.”
뭐 어쩌라는 거지.
“지금 저 계속 거절하면, 코트 벗고 현관 앞에서 울 거에요. 겨울철 여고생과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으면….”
“안으로 혜성처럼 들어오시죠.”
즉시 현관 안으로 들였다. 아무리 괴인 출몰 위험 지역에 있는 놈들이라곤 다 이상한 녀석들 밖에 없다지만, 그 이상한 녀석들한테 더 이상한 녀석이라 낙인 찍히긴 싫다.
변태로 낙인 찍히는 건 더더욱.
“으음… 꽤애… 빈티지한 방이네요! 안정감이 있어요!”
“그냥 방에 대한 코멘트를 하지 마시지.”
“왜요. 저 옛날까지 살았던 데가 이런 방인데.”
그녀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와중 방 안에 있던 핏자국에 흠칫 놀랐다.
“저 이거….”
“제 피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휴, 전 또 저 말고 다른 마법 소녀라도 데려와서 몇 대 팬 줄 알았죠~ 질투할 뻔 했네요!”
“그게 왜 질투할 거리….”
“저 말고 약점을 잡은 사람이 또 생기는 거니까요!”
“점점 음습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시네요. 다른 동료 마법 소녀에겐 그러지 않죠? 그러지 않으셔야 해요.”
방금 전 들은 비꼬기를 그대로 돌려 주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차 같은 거 없어요. 물 정도 밖에….”
“괜찮아요! 제가 사왔어요!”
레드 베가는 웃으며 가방 속에서 분말 코코아를 꺼냈다.
“그거 참 철저하시네요. 주세요. 금방 끓여 올게요.”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레드 베가를 곁눈질 해보았다. 코트를 벗으려다 난방 하나 없는 찬 공기에 당해 다시 옷을 여미는 모습.
그것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웃음이 나왔다. 얼핏 보인 교복은 블레이져에 셔츠에 넥타이를 맨 평범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본 교복에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 때 설화가 참 예뻤지.
적어도 졸업식까진 같이 있어주고 싶었는데.
결국 고등학교 졸업은 검정고시로 따게 되었다.
여러 추억을 더듬고 싶었으나 자국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 없이 선만 남은 퍼즐을 꿈꾸고 이에 슬퍼하며 멍하니 애수에 빠져 있자,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익. 하는, 이명과도 같은 소리.
컵에 코코아를 만들며 텁텁한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내 옛날 얘기가 궁금하다고? 설화랑 사귀었을 때 얘기?”
“네? 네, 넷! 맞아요… 재, 재중 씨가 막, 시리우스 언니를 옛날에 괴롭히고 학대하고 그랬다고… 아, 아주 나쁜 놈이라고….”
“그런 소리를 들었어?”
나는 하하 웃으며 코코아를 그녀 앞에 놓았다.
“정확히 말했네.”
“네… 네?!”
“잠수 이별이면 충분히 나쁜 놈 맞잖아.”
내 앞에는 그냥 뜨거운 물을 놓았다.
“그럼 설명해줄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
그는 담담히 연애사에 얽혔던 진실을 밝혔다.
사건에 시달리던 블루 시리우스를 위해 그가 취했던 조치.
조작된 기사, 자취를 감춘 일.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관조적인 태도로, 담담하지만 깊은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다. 11에 걸려져 있던 시침이 12로 이동할 무렵 이야기에 끝이 났다.
레드 베가는 조용히 그가 밝힌 진실을 조용히 곱씹었다.
“그건 정말… 힘들으셨.”
“제가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런 놈 실종 당해서 그간 고생한 애들이 더 힘들었겠죠.”
지금까지 본 한재중의 모습과 남의 입을 통해 들은 과거 한재중의 모습, 이 둘 사이에 있던 괴리를 깨달았다.
애초에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봐서 그만 욕을 할 수 있도록, 나쁜 놈으로 보이도록 철저히 조각되었다.
진실이란 대리석을 다듬고 색을 칠해 화려한 조각으로 만들어 눈속임했다.
또한, 왜 이 진실이 그간 밝혀지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폭로하면 조작 논란에 휩싸이며 금방 사실 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조작이 왜 이뤄졌냐는 점에서 기인한다.
블루 시리우스의 편애 논란이 이 모든 사건의 시초였다. 괜히 그녀가 다시 한재중을 편들어 봤자 다시 편애 논란이 가중되고 힘들어질 뿐이다.
고통을 끝내는 일이 아니라 연속되게 하는 일.
게다가 이것은 그의 결심을 무로 되돌리며 다시 블루 시리우스와 한재중을 동시에 욕되게 하는 행위다. 심지어 남의 시선을 꺼리는 그에게 다시 시선을 집중시키며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고통을 줄 것이다.
‘거기에 시리우스 언니 성격이라면… 재중 씨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일부러 찾지 않았겠지.’
한동안은 한재중에게 시간을 주어 고통을 다스릴 시간을 갖길 원했을 것이다. 그가 떠난 이유 중 하나엔 자신이 그를 화나게 했다는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했을 터.
“…한 가지 더 물어도 괜찮을까요?”
“뭔데요?”
“왜… 돌아가지 않으신 거에요? 그런 식으로 헤어졌다면 재중 씨나 언니나 마음이… 편치 않잖아요.”
자신이 모를 뿐이지 블루 시리우스는 지금도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레드 베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그의 목소리가 살짝 달라졌다. 무던했던 방금과는 달리 약간의 소금기가, 바닷바람과도 같은 서러움이 머금어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점심 드셔야죠. 이제 슬슬….”
“아, 네, 네! 그렇네요 제가 맛집 아는데 데려다 드릴게요!”
“아… 그게….”
한재중은 쓰게 웃었다.
“아마 같이 먹진 못할 거 같아요. 이제부터 일이 있어서요.”
“11시까지 잤던 사람이 일은 무슨 일이에요!”
“네 맞아요. 사실 쉬고 싶어서 그래요. 게다가 저 아직 못 씻었고, 밖에 나가려면 나름대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베가 씨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죠. 어제 이후로 몸에 땀 냄새가 배여서. 베가 씨도 불쾌하시죠? 미안해요 제가 조금 정신이 없어서.”
“재, 재중 씨는 냄새 안 나요 아마…? 아, 제가 한 번 맡아볼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순간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한재중이 순간 식겁하여 몸을 뺐다.
“저, 저도 땀냄새 나요! …한 번 맡아보실래요?”
레드 베가가 씨익 웃더니, 발로 그의 다리를 꾹꾹 밟았다. 점차 그 발은 다리를 타고 슬그머니 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발 베가 씨 쌉소리를… 아니, 개소리를 하지 말아주세요.”
“왜 고친 거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에겐 체취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제 따뜻한 배려를 무시하지 마세요!”
“따뜻한 배려가 아니라 뜨거운 가학이겠죠. 냄새나는 발 내밀지 마시고. 에헤이, 치워! 아무튼, 점심은 동료 분들과 드세요.”
한재중을 놀리는 데 점차 맛을 들려 가는 레드 베가였다.
“전 지금은 쉬고 싶어요.”
그는 조용히 제안을 거절했다.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레드 베가는 이럴 땐 배를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도 그가 물러서지 않음을 알기에(입원 중 선타기를 해보며 익혔다) 어쩔 수 없단 듯 삐진 티를 내며 물러났다.
“흥, 엄청 맛있는 데인데. 딱히 유명하지 않아서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 숨은 맛집인데. 분위기도 좋고 플레이팅도 좋은 곳인데.”
“그거 참 즐겁겠군요. 저 대신 많이 즐겨주세요.”
“나중에 데려가 달라고 빌어도 안 해줄 건데. 지금 밖에 없는데.”
“구질구질하게 이러시지 마시고. 소비의 즐거움과 봉사의 즐거움과 적선의 즐거움을 저를 통해 얻으시려 하지 마시고. 그냥 저기로… 나가주시면 됩니다.”
우아하게 손짓하며 현관을 가리켰다. 결국 포기한 백아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났다.
“알았어요. 피도 흘렸다고 하니까… 아 맞다, 제가 치료해줄까요? 저 응급처치 잘하는데. 자자 빨리 상의를 벗어보세요.”
“나가렴.”
“넵.”
단호한 선언에 배시시 웃은 그녀가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화해를 하고 싶다면 언제나 저에게 연락하세요! 아니, 딱히 아무 마음 들지 않아도 연락 하세요!”
“상담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에요. 연락은… 적극적으로 고려해보죠.”
사실 그는 전화에도 일정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전화 공포증이다.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알려주자 다짐하며 그는 손을 흔들었다.
녹슨 경첩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에 혼자 남겨진 그는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했다.
구의 형태로 자신의 주위를 떠다니는 벨트였다. 그것은 반복하여 한 정보를 머리에 전송했다.
[해당 위치로 이동하십시오.]“알아.”
퀘스트였다.
해당 위치로 이동해 누군가와 접선하라는 내용의 퀘스트.
위치는 지도의 형태로 전송되었다. 검은색으로만 칠해진 장소. 인간이 살 수 없는 구역으로 지정된 땅, 이제 버려진 땅.
접근 불가 공간. 소외 지역.
통칭 다크 매터.
주머니 안 고이 접어 넣은 핑크 데네브의 메모지를 만져 보았다.
“전화… 해줘야 하는데.”
자신이 지금 안전하단 확신을 줘야 하는데, 안심을 줘야 하는데.
전화라는 매체는 여전히 꺼려졌다. 어제 소리치던 조아윤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결국 휴대폰을 키고 문자 몇 자를 남기고 다시 껐다.
다시 이야기 하는 건 보다 깊이 진실을 안 뒤가 좋겠지.
비르고의 말 마따나 망각이야말로 광기라면.
지금의 한재중은 누구보다 미쳐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곧 이어 몸을 씻고 다친 상처에 붕대를 감았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부정을 정화하기 위한 목욕재계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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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해가 떠 있는 데도 어두웠다. 높은 고층 빌딩이 쓰러지며 육교처럼 거리와 거리를 이었다. 그 밑에 있는 것들에는 거대한 그림자를 덧씌웠다.
목동 자리의 괴인은 위를 올려다 보았다. 깨진 창문이 햇빛을 난반사하며 만화경처럼 빛을 흩뿌렸다.
“언제 오려나….”
후드 아래의 고운 입술로 호선을 그리고, 넓직한 로브에 감싸인 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눈 멀은 어린양이 언제 오려나….”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내의 시간을 달콤하게 승화시켰다.
한 손에는 벨트의 버클을 든 채, 누군가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