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66
Chapter 66 – 짐승의 꼬리 (4)
“은퇴는… 아직 때가 아닌 거 같아.”
이것이 오늘 윤설화가 조아윤을 부른 목적이었다.
그녀는 아끼는 동생이 제안한 배려를 거절하기 위해, 술의 힘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다.
고작 툭 뱉은 제안에 저리 괴롭게 고민하다니, 참 사람이 좋다고 생각했다.
조아윤은 한재중과 만난 걸 어찌 전달해야 할지,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진 숨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자신이 창피해졌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결국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마법 소녀가 처음 되었을 때부터 느꼈다. 자신은 다른 마법 소녀들처럼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사람을 도울 때 뿌듯함을 느끼긴 했지만, 이 감정 하나만으로 목숨을 걸 순 없었다.
돈? 돈이야 당연히 좋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관심을 감수할 만큼 좋은 건 아니었다.
마법 소녀의 일에 나날이 염증을 느낄 뿐이었다.
핑크 데네브란 이름은 하루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데네브란 이름의 뜻처럼, 꼬리 같은 삶이었다.
끝자락에 있는 삶.
제대로 된 활약은 하나 못하고, 누군가의 꼬리처럼 달달 따라다니며 조력에 집중해야 하는 삶.
다른 이들이 하나하나 즐거운 승전보를 기록할 때 맨 끝에서 기록을 끄적이는 삶.
용의 머리같은 다른 마법 소녀에 비해 뱀의 꼬리조차 아닌, 새의 꽁지 같은 삶.
어느새 조아윤은 자신이 짐승의 꼬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별빛의 성장이 멈춘지도 꽤 되었다. 거기에 딜레마의 활동까지.
은퇴할 적기였다. 이제 더 많은 마법 소녀가 탄생하고, 자신의 자리따위 금방 사라지겠지.
하지만 혼자 이대로 사라지는 건 외로우니, 동료가 있기를 바랬다. 마지막까지도 누군가의 꼬리처럼 잘려 사라지긴 싫었다.
이런 마음에 더해, 가족을 잃는 경험을 다시 하긴 싫었다.
방패자리의 괴인에게 당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단 사실보다 옆에 있는 윤설화가 살아 있음에 안도했다.
동시에 공포스러웠다. 이제부턴 저런 S급 괴인과 몇 번이고 싸워야 한다.
이후의 패배에서도 병원에 실려오는 정도로 끝날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나.
년에 몇 번씩 뜨는 마법 소녀의 죽음을 생각하며 더욱 몸을 떨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된다. 또한 그만두게 만들어야 한다.
벌어 먹고 사는 것도, 일에 몰두하는 것도,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도, 결국엔 살고서 생각해야 할 이야기 아닌가.
가족과도 같이 지낸 언니. 블루 시리우스에게 은퇴를 권유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녀가 강하든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든 별개로, 조아윤에게 있어선 그저 하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아윤은 그녀의 은퇴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그녀는 괴인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있다. 뭐가 아쉽다고 은퇴를 하겠는가.
블루 시리우스는 은퇴하지 않는다. 대중에겐 행복한 소식이겠지만 조아윤에겐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 부탁은 단순한 떼쓰기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아하하하! 하늘 참 맑다! 그치?”
바람 또한 세차게 스쳐 지나갔다.
조아윤은 지금 자신이 비르고를 안은 채로 하늘을 날고 있단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나섰다.
품에 안긴 건 시한 폭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위험 분자. 핑크 데네브의 등이 오싹해졌다.
[수호자! 뭐하는 것이냐! 당장 내려 놔라! 거리를 벌려! 위험해!]리본에 달린 보석, 마스코트로부터 급하게 지시가 전해졌다.
조아윤은 급히 품에서 비르고를 놓았다. 조금 아래로 떨어지다 다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아깝다!”
피융. 자줏빛의 광선이 밤하늘을 살벌하게 가르고 사라졌다.
살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뜨거움이 전해졌다. 핑크 데네브는 식겁하며 더 거리를 벌렸다.
“고맙다. 앵무야.”
[앵무가 아니라 백조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니까… 또 온다!]흐르는 용암같은, 석양같은 줄기들이 밤하늘을 타고 수차례 그어졌다.
핑크 데네브는 곡예 비행을 하듯이 하늘을 휘저으며 모든 선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 때, 비르고가 눈으로 잡지도 못할 속도로 다가왔다.
“아하하하! 이번엔 내 차례~!”
등 뒤에 펼쳐진 건 홍익오. 지금 자신의 축천법을 훔쳐갔음을 알았다.
풍경이 연속된 하나의 선처럼 길어지고, 구름이 찢어진다. 하늘을 접어 달리는 이 느낌은 절대 착각할 수 없었다.
“이런 씹! 야! 놔!”
“그렇게 말하지 마~ 서운하잖아. 응?”
쾅! 쾅! 몇 번이고 주먹과 팔꿈치로 등을 내리쳤지만 소용 없었다. 안마도 되지 않는 듯 가볍게 웃어 넘기며 그녀를 잡고 달려 나갔다.
“너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죽고 싶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날 혼자서 납치해간다는 건 무슨 생각이래? 이 배에 내가 구멍 하나 뚫어줄까? 좋은 장식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이 시발… 시발!”
“어머나 추해라. 욕하지 마~ 무섭잖아. 마법 소녀는 욕 쓰면 안 되는 거 몰라? 그리고 또….”
입꼬리를 호선으로 들어 올린 비르고는 분에 잠긴듯한 목소리로 뱉었다.
“내 사적인 욕망을 위해 힘은 쓸 수 없지만 공익에는 별 말 없이 기부해야지. 언제나 내 시간은 희생해야 하고, 타인의 시간은 지켜줘야지. 나쁜 말은 참아내야 하며 반격하지 못하지. 남의 목숨은 지켜야 하지만 지 목숨을 우선하면 못할 짓이고 개새끼지. 안 그래? 너도 잘 알지?”
깔깔 웃은 비르고는 희번득한 눈빛으로 아래를 살폈다.
“아, 우리 데이트를 어디로 할 지 정했어. 설레지 않아?”
수평적으로 그어지던 선이 수직이 되었다. 아래에서 훅 바람이 불어왔다. 앞을 향해 날아가던 새들이 머리를 밑으로 내리고 미친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하강. 비스듬한 추락.
마찰열로 등이 굉장히 뜨거워졌다.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으, 아아악!!”
“아파? 조금만 참아~ 괜찮아! 우리 후배 파이팅! 힘 내라 힘!”
오랜만에 고통으로 눈물이 고였다. 다시 한 번 주마등처럼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무력에서 전해지는 공포는 조아윤에겐 친숙하다. 우악스럽게 잡힌 몸이 폭력으로 유린되는 기억은 꽤 친숙했다.
키가 작다. 만만하다. 그 따위 이유만으로 괴롭힘을 받았던 과거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수와 더 우월한 신체를 앞세워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고 자유를 속박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 강압이 비르고를 보며 떠올랐다.
비눗방울처럼 떠오른 추억은 곧 땅에 부딪히며 터지고 증발했다.
“커, 헉… 억… 으헉…!”
“아파? 많이 아파? 으음… 아픈 것만으론 그런 얼굴이 안 나오는데… 아! 알았다!”
땅에 엎어진 조아윤을 비르고가 내려다 보았다.
“너 무섭구나? 내가 무섭구나! 그렇지?”
비르고는 환희하고 있었다. 조아윤은 팔을 움직여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흔적과 함께 느껴지는 자그만 물기.
눈물이었다. 아픔으로부터 출발하고 두려움으로 귀결된 물줄기.
“아….”
저 괴인의 말은 정답이었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가락 끝은 신체를 무리한 증거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공포에 질린 자의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굳이 언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본능이 몸을 굳게 만들고 혀를 마르게 만들며 눈에선 눈물을, 심장에선 거센 고동을, 허파에선 끝없이 숨을 뱉게 만들었으니까.
비르고의 자줏빛 눈이 서늘하게 조아윤을 비췄다. 그것에 거울처럼 비춰진 자신은 마법 소녀가 아닌, 그냥 소녀였다.
꼬리를 만 개처럼 초라한 모습. 조아윤은 공포에 빠진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공포를 지웠다.
대신, 헛 웃었다.
“시발 진짜….”
“응? 여기서도 욕해도 괜찮아? 여긴… 음, 어디더라? 아무튼 사람이 많네.”
사람이 많다. 그 발언에 조아윤은 허탈하게 웃지도 못했다. 입꼬리가 천천히 쳐졌다.
“…뭐?”
그녀는 내려가는 입꼬리의 속도만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르고의 뒤에서는 세찬 달빛이 떨어졌다. 그 달빛은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중이었다.
다만, 달빛보다 밝은 인공적인 빛이 가득 안에 채워져 있어 그 존재감이 밖에 비해선 덜 했다.
어떤 뜨거운 열선에 막았는지 녹아내리고 있던 두꺼운 천장.
쇳물이 비처럼 떨어져 그녀의 볼을 스치고 식었다. 그 뜨거움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사람, 사람, 사람. 어딜봐도 사람들 천지.
피난소, 지하 쉘터.
등골이 오싹해졌다. 방금 전 까지 흐르던 식은땀마저 증발해 사라졌다. 차게 식은 몸은 정신을 더 빠르게 차리도록 만들어주었다.
수많은 시선이 숨을 죽인 채 자신 하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삶의 터전을 버려두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이들. 그런 이들의 노력을 비웃듯이 괴인이 침범했다.
“여러분 안녕? 모두의 심장을 뜨겁게 해줄 내가 나타났어! 다들 반가워~”
비르고는 주변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웃었다.
“방금 전 괴인….”
누군가가 그리 중얼거렸다. 다 쉰 목소리는 지금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 모든 이들을 대변해주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 듯이 그 중얼거림을 계기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저 괴인이 왜 여기 있는 것이지, 우리의 쉘터는 그럼 뭐가 된 거지, 이제 쉘터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건가, 우리 이제 죽는 건가, 마법 소녀는 뭘 한 거야.
저걸 봐. 막으려고 노력은 했어. 다만…..
그 따위 소란들이.
과거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여러 수근거림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실망한 시선과 공포에 질린 시선, 도망칠 장소를 필사적으로 찾는 시선과 무언가 기대와 동경을 드러낸 시선.
그리고 종종, 연민과 공감을 드러낸 시선.
조아윤은 눈빛의 파도에 파묻힌 채로 몸이 굳었다.
당장 피난을 유도하고 비르고를 상대해야 함을 안다.
하지만 그걸 성공시킬 방법이 있긴 한가.
도로에 비하면 상당히 좁은 피난처, 이 많은 인원이 한 번에 비상구로 달려나가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비르고가 그 뭉친 인원이 있는 장소를 향해 광선 한 번 쏘면 순식간에 몇 백이 사망한다.
홍익오를 전개하며 비르고를 견제하고 천장을 향해 사람을 옮긴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전부 저 가증스런 처녀에게 빼앗겨 버리겠지. 조롱하고 짓밟을 것이다.
[수호자… 나는….]마스코트가 힘겹게 목소리를 발했다.
[네가 택한 모든 선택을 존중할게. 널 응원할게.]은유적으로 돌려 말했다. 여기선 뭘 할 수가 없다고, 지금부터 하는 모든 짓은 발악이 될 것이라고. 또한, 극단적인 선택이 될 것이라고.
비르고는 그녀를 조롱하듯이 소리쳤다.
“여러분! 이 귀여운 후배에게 너무 뭐라고 하진 마요! 사람마다 두려운 게 있을 뿐이잖아요? 이 친구는 괴인이 두려울 뿐이에요! 니들과 똑같이!”
피융. 하늘에 광선 하나를 뿜어냈다. 다시 한 번 두껍던 천장이 갈라지고, 달빛을 안으로 들여 보냈다.
천장에 있던 조명이 깜빡거리고, 곧 인공적인 불빛마저 꺼져 밤의 어둠에 잡아 먹혔다.
-꺄아아악!
드디어 비명이 터져 나가고,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계단으로 향했으며, 누군가는 사람을 밀치고 누군가는 친지 손을 꼭 붙잡으며 발을 굴렸다.
“괜찮아! 도망쳐! 맘껏 도망쳐! 그래! 두려우면 도망쳐야지! 이 세상에 무적인 사람은 없다고! 죽으면 다 끝이니까! 도망가 도망가!”
비르고의 말은 단순히 저 시민들에 국한된 말이 아닐 터였다.
“내가 술래야. 알았지? 1분은 줄게.”
행복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렸다. 그 손가락 끝에서 광선이 내뿜어졌다. 깊은 지하의 유흥가처럼 쨍한 빛이 점멸을 반복했다. 그 점멸 한 번 마다 천장이 녹아내렸다.
그 녹아내리는 쇳물들 속에서 비르고와 눈이 맞았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서늘한 눈빛이 조아윤을 향하고 있었다. 조소도 광소(狂笑)도 없었다. 있는 건 하나, 흥미. 냉소적인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어제부터 비르고는 핑크 데네브와 자신의 유사성을 주장하곤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기대하고 있다.
도망치기를 기대하고 있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자신을 우선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정확하다.
핑크 데네브는, 조아윤은, 지금 그러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다 내버린채 살아남고 싶다.
생명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생명이야말로 제일의 가치 아닌가.
의무나 책임도, 사명도, 이미지나 자존심도 결국 생명이 있어야 보존될 문제 아닌가. 살다 보면 언젠가 회복할 수 있다. 이행할 수 있다. 하지만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아윤의 어깨를 누군가가 흔들었다. 희미한 달빛 너머로 보이는 것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아가씨, 빨리 도망쳐요. 그렇게 엎어져 있다 간 죽어.”
그리 충고하곤 도망갔다. 소시민이 남길 법한 짧고도 먼 선의. 그럼에도 분명한 선의.
눈이 어두워서 걱정할 사람을 착각이라도 하신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야 앵무야….”
조아윤에게 있어 영웅심은 없다. 그런 위대한 존재 따위 되고 싶지도 않다.
의무감도 없다. 억지로 하는 일 따위 딱 질색이다.
몸과 힘은 나약하다. 언제나 다른 이들과 비교 당할 뿐 제대로 된 승리 하나 따낼 수 없다.
“내가 뭐 할 건지 알지?”
[물론이지 또라이야.]그럼에도, 이 고된 일을 계속해 나가며 사람을 구하는 이유가 있다.
[그간 함께해서 영광이었다.]자신에겐 힘이 있으니까.
다른 힘 있는 자에 비하면 나약하지만 분명히 이건 힘이니까.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젠 너무나 오래되고도 낡은 말.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목숨이 존나게 아깝긴 한데.”
조아윤에게 대단한 사명감 따윈 없다.
힘이 있으니까, 사용할 뿐.
지금 구하는 데 힘 쓸 수 있으니까 행동하고, 지금 움직일 수 있으니까 움직일 뿐.
“그게 또 힘이 아까운 건 아니라.”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안 그래도 승률을 최하위로 기록하고 있는 년이 사정을 따질 게 뭐가 있다고. 뭐가 아쉽고 뭐가 아깝다고.
맞다.
자신은 나약하다. 괴인은 A급만 되어도 이기기 힘들고, 다른 마법 소녀의 조력에나 힘 써야 한다. 대외적 평판도 좋지 않다. 워낙 언행이 안 좋아 그런지 안티가 많다. 나약한 데다 아군도 없다.
그렇다면 나약하고 비참한 자여.
지금, 아래를 볼 여유는 있는가?
“줄 건 줘야지.”
조아윤은 버렸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대외적 평판을, 가치를, 자존심을, 존중을, 마지막으로, 이젠 힘 까지.
언제나 꼬리 같던 삶. 끝자락에 매달려 흔들리던 삶.
그런 삶마저, 짐승의 꼬리 같던 삶마저 스스로 잘라내었다.
이젠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어떤 가치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충분했다.
“도망가라고? 내가 네 좋을 짓을 왜 해. 니같은 괴인 새끼들 엿 먹이는 게 내 가장 큰 즐거움이다 새끼야.”
핑크 데네브가 일어났다. 팔 다리는 후들거리고 영웅다운 미소도 하나 없었지만, 일어났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진한 화장과 함께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더욱 사납게 구겨졌다. 그녀의 가슴 중앙 리본에선 폭발과도 같은 광명이 뿜어져 나왔다.
어두운 밤 희망을 주는 한 줄기의 온점.
흑색왜성(黑色矮星).
마법 소녀 최후의 수단.
별이 불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뿜는 가장 강한 빛.
마스코트에게선 말이 사라졌다. 시야는 점차 좁아졌다. 지금껏 다뤄본 적 없는 방대한 마력을 선녀의 날개옷처럼 두르며, 핑크 데네브는 우아하게 떠올랐다. 달빛과 홍색의 빛이 만나 구붓하게 휘어지며 그녀를 신비롭게 치장했다.
날개옷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올리며, 그녀가 단아하게 물었다.
“넌 별 아래서 춤춰본 적 있어?”
아마 마지막이 될 마법 소녀로서의 등장 대사. 핑크 데네브는 후련한 마음으로 그 끝을 읊었다.
“없다면, 함께 춤추자.”
영원한 어둠이 도래하기 전 한줄기 빛 아래에서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