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 or death RAW novel - Chapter 88
Chapter 88 – 한 배에 올라 타라 (5)
새해의 카운트 다운을 세기 몇 시간 전, 나와 조아윤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조용히 입김을 내뱉고 있었다.
아직 올해의 마지막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 눈처럼 피어난 숨결들이 우리에게 남은 나머지 시간처럼 녹아 사라졌다.
아윤이는 내 팔을 붙들고 정류장에서 몇 분이나 투덜거리길 반복했다.
“오빠… 나 굳이 가야 할까?”
“사회생활이잖아. 해야지.”
조아윤은 오늘 새해맞이용 인터뷰를 가야 했다. 마법 소녀 협회에서 매해 선정하는 마법 소녀 어워드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올해 가장 명예로운 마법 소녀가 그녀가 되었다고.
“올해의 마법 소녀, MOTY도 받을만 했는데.”
“뭔 개소리야. 그건 아희나 선배 같은 사람이 받아야지. 둘 다 신성의 전조를 보인 사람이잖아? 그에 반해 불나방 전법으로 간신히 사람만 대피시킨 내가 뭐라고… 어휴, 가기 싫다.”
권태롭게 내 팔에 머리를 기대며 칭얼거렸다.
“그래도 준다는데 받아야지. 좋은 일이잖아. 욕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마법 소녀도 아닌 사람한테 줘서 어디에 쓰냐고. 오빠 오늘 일몰까지만 보고 헤어지면 안 될까?”
“이미 늦었잖아.”
나는 그녀에게 잡혀 있던 팔을 내빼며 쓰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대중교통을 타면 촉박하게 도착하겠지.
때가 알맞게도, 멀리서 버스 특유의 불빛이 한기를 뚫고 비춰져 왔다.
“아윤아 버스 왔다. 이제 가야지.”
“아 진짜 가기 싫은데….”
“아윤아.”
“아아악~! 왜 시발 내가 올해 마지막 날에도 이딴… 오, 오빠, 나 너무 추워… 외로워….”
“히터가 빵빵해 따스한데다 친구도 많아 외롭지 않은 실내에서 잘 인터뷰 하다 오렴.”
“아이씨 이 땐 좀 잡아주지.”
“동생이 일을 땡땡이 치려 하는데 내가 왜 잡아.”
버스가 앞에 도착하고 조아윤은 그것에 올라 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난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올해 고마웠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조아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곧 버스 문이 닫히고 그녀는 과거의 영광을 말하기 위해 내 곁을 잠시 떠났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애도 아니고, 그녀에게 느끼는 건 대견함과 뿌듯함 뿐이었다.
“새해 인사도 안 해주다니… 단단히 삐졌나?”
형식상으로라도 조금은 잡아줄 걸 그랬나.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숨을 내뱉었다.
“…나도 가야겠다.”
결국 올 한 해도 혼자 외롭게 해를 보내게 되었구나.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면이 있어 그리 슬프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조아윤이 기억과 자기 보신을 할 힘을 가지고 있는 지금, 내가 굳이 그녀의 집에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그날부터 난 원래 계약했던 꼬질한 원룸에 다시 머무르기 시작했다.
물론 왜 굳이 내 집 놔두고 거길 돌아가냐며 아윤이가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한테 너무 빌붙어 살긴 좀 그래 결국 돌아갔다.
눈치도 보이고 부담스럽기도 하였다. 이미 많이 챙겨 받았는데 여기서 더 받는 건 부담이었다.
아윤이가 제 살 길 찾을 수 있는 성인이듯, 나 역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을 뿐 팔 다리 멀쩡하고 대화도 가능한데 멀쩡히 살아갈 수 있다.
‘애초에 내가 지금 가장 큰 돈을 소비한 게 그 집인데, 뽕은 뽑아야지.’
이렇게 버리기엔 이미 써버린 돈이 너무 많았다.
돈은 아껴 써야 한다. 나에겐 안 그래도 빚이 있으니까. 서류상에 표기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심리상에는 분명히 기록된 채무가 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정말 한 해가 끝나간다는 실감이 났다. 올해는 이렇게 결말이 지어졌지만, 아직 내 여정은 미완이었다.
오히려 시작에 가까웠다.
‘괴인 요주의 지역… 뭐 때문이지? 거기에 뭐 욕심낼만한 게 있다고….’
이미 원작과 과정이 상당히 달라지긴 했어도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원은 동일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가능하다.
문제는 모순이 데리고 온 미국의 괴인들. 독수리자리 괴인과 함께 고물자리, 용골자리, 돛자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마법소녀 전성기’에서도 꽤 활약을 한 아퀼라와 달리 나머지 셋은 전혀 모르겠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조차.
‘그 세 별자리는 전부 아르고 자리에서 출발한 별자리… 같은 아르고자리였던 나침반자리 그 놈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네.’
다음에 제이슨을 만나 취조를 해봐야겠네. 대화가 통하는 괴인 한둘 정도는 정보책으로 있어도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점점 지평선 아래로 넘어갔다. 해넘이. 언제나 같았지만 오늘만큼은 마지막인 해가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렇게 물드는 붉은 하늘에선 그와 비슷한 색을 지는 혀 끝에서 비릿한 쓸쓸함을 감돌게 하였다.
“뭐 했다고 해가 끝나냐.”
석양에는 그리움이란 정서가 있었다. 연말에도 동일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마지막 해넘이엔 말로 다 하지 못할 그리움이 담겼다.
일몰. 해가 지평선 아래로 빠지듯 난 그리움에 빠져, 완결된 한 해 속 가장 완결하지 못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홀린듯 전화를 걸었다. 그녀도 마법 소녀 어워드에 있는 사람인 걸 깨달은 건 전화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한 직후였다.
윤설화.
올해의 마법 소녀로 선정될 가장 유력한 사람. 딱히 tv나 여론을 찾아 보진 않지만, 단순히 길가에서 들리는 이야기만으로 그렇게 판단하기엔 충분했다.
바쁠 때에 방해가 되겠단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연결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재, 재중아! 왜?”
한 손으로 잡은 자그만 수화기 너머에선 커다란 설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기뻐보여 지금 전화를 끊는 게 배려인지 계속 유지하는 게 배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아… 지금 전화 괜찮아? 바쁘다면 그냥 끊어도 괜찮….”
“아니 하나도 안 바빠! 지금 당장 그 쪽으로 갈까?”
“자제해라. 이제 곧 일이잖아.”
“어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아마 나만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알긴 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 가려면 갈 수 있어. 지금 어디야?”
“아니 만나잔 뜻은 아니고….”
호들갑은 여전했다.
전에 미완으로 끝난 데이트를 사과하기 위해 걸려왔던 전화에도 이랬다. 중죄라도 저지른 사람 마냥 울먹이며 몇 번이고 사죄를 전했었다.
“그냥, 오랜만에 목소리 좀 듣고 싶어서.”
“…그렇구나. 기쁘다. 재중이가 듣고 싶다면 녹음이라도 해서 보내줄 수 있어. 재중아, 목소리만으론 좀 부족하지 않아?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 달려갈….”
“왜 그렇게 달려가는 거에 집착해.”
“나 TV 나오는 거 싫단 말이야. 카메라 보면서 웃는 거 아직도 적응 안 돼. 아니, 이건 다 핑계고 그냥 너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 싶어졌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기쁘네.”
진심이었다. 요새 일이 바빠 지쳤을 텐데도 전혀 그런 기색을 내지 않았다. 피곤한 와중에도 날 위해 이렇게 열과 성을 다 해주는 게 정말 감사했고, 기뻤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꼭 얼굴 보자. 전에 먹지 못했던 점심도 먹고, 이야기할 것도… 이야기 하고.”
“응! 꼭 그러자! 근데 잠깐…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재중아? 그냥 오늘, 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설화야 일 열심히 해.”
“응~!”
해맑고 힘 찬 목소리를 들으니 나까지 힘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이 이상 전화를 계속하는 것도 실례겠지. 난 인사를 전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재중이도 새해 복 많이많이많이 받아!”
일관적으로 활기한 모습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전에 느끼던 우울감은 상당히 걷어졌다.
참 어렸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아니, 어렸을 땐 활기차기보단 냉랭하단 느낌이 더 강했지.
‘…그러고보니 설화랑 어떻게 만났더라?’
어느덧 눈 앞엔 집이 보였다.
**
싸게 얻은 방이라 당연하게도 가구가 적었다. TV는 없는 가구 중 하나였다.
평소라면 그 따위 미디어는 질색이라 보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많이 나올 테니 어워드 쯤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의 당사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디어를 시청하는 것쯤의 일.
“할 수 있다!”
난 당당한 마음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열어 어워드를 감상하고자 했다. 실시간 방송을 클릭하자 마자 날아오는 데이터 경고 문자. 그리고 화면 정지.
“아 와이파이 없지.”
아 시발 미리미리 좀 설치할 걸.
“내가 진짜 거지긴 거지구나.”
염치도 없이 옆집과 이어지는 벽면에 딱 붙었다. 비밀번호가 걸리지 않은 와이파이가 날 반겨주었다.
“내가 그쪽 소음 많이 봐주니 이것도 봐주세요.”
맨날 키보드 배틀하는 소리가 벽을 뚫고 나를 괴롭히니, 이 정도 도둑질에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었다.
돈과 함께 줄어든 도덕심을 미덕 삼아 마법 소녀 어워드를 감상했다. 옆집 벽 너머로 동일한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연말이다 보니 이것도 볼 사람은 꽤나 있겠지.
이웃사촌도 연말인데도 나와 같은 외톨이 신세구나. 동질감이 느껴졌다. 고향에는 내려갈 생각이 없으신가. 어조나 문체를 보니 외국인 같았는데.
‘뭐 각자 사정이 있는거지.’
난 별 생각 없이 작은 화면 안에 시선을 집중했다.
구역질과 어지럼증, 다한과 거친 호흡의 증세를 제외하곤 거의 정상적으로 시청이 가능했다.
작은 화면 속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 지켜야할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마법 소녀.
가장 명예로운 마법 소녀로 조아윤, 핑크 데네브가 나왔다.
앞으로가 주목되는 마법 소녀로 백아희 레드 베가가 나왔으며.
올해의 마법 소녀엔 예상했던 대로 윤설화, 블루 시리우스가 나왔다.
그 외에도 세 명 정도가 상을 탔다.
시상식에 올라온 마법 소녀 중 반이 나와 관련이 깊다는 게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화면 너머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과 언제라도 원한다면 대화가 가능하다니. 남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저 수많은 관심을 감내하는 사람도 결국은 다 평범한 사람이란 게 새삼스레 실감이 들었다. 오늘 들은 다른 마법 소녀들도 그러하겠지. 영웅이라 불린다 할지라도 별 다를 거 없는 평범한 사람.
어워드도 끝이 났고, 하늘은 이제 새까만 검정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이제 정말 한 해도 끝.
허탈감과 기대감에 고동을 느끼고 있자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배달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 설마 와이파이 빼돌린 걸 눈치챈 이웃이 따지러 온 건가?
“여기 사는 사람 대체로 정상 아닌데….”
식칼이라도 들고 왔으면 어쩌지. 무릎을 언제라도 꿇을 준비를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까까지 혹사 당하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을 보자 ‘레드 베가’ 네 글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설마.”
기시감을 느끼며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와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눈치 챘죠? 빨리 문 열어요.”
아니 어워드 끝난지 얼마 됐다고.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백아희가 서 있었다.
“베가 씨.”
“아희라고 부르라니까요?”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연말에 놀 사람도 없잖아요? 데네브 언니는 지금쯤 시리우스 언니랑 놀고 있을 테고 만날 사람도 많고… 불쌍하기도 해서 제가 만나러 왔어요!”
“아니 미친… 일단 들어와요. 추울 테니까.”
“에이 섭섭하다. 귀여운 마법 소녀가 기껏 같이 지내자고 왔는데. 짜잔 치킨도 사왔지요!”
“어서 들어오시죠 아가씨.”
“속물.”
정중하게 치킨에게 인사를 하니 백아희는 안에 들어왔다. 코트를 벗으려다 그녀는 재빨리 다시 입었다.
“으으 추워.”
“난방은 안 될 테니까 밖이랑 별 차이 없겠지만요. 아니 잠깐… 베가 씨 드레스 입고 그대로 온 거에요?!”
“네! 예쁘죠. TV로 봤어요? 아 못 보셨을 테나? 보여드릴까요?”
백아희는 씨익 웃으며 다시 코트를 벗으려 했다.
“됐어요. 추우니까 계속 입고 계세요.”
“에엥 언니들 반응 시원찮아서 재중 씨 반응 보려고 온 건데. 이거 예쁜데….”
“인터넷 사람들이 칭찬 안 해줘요?”
“그래도 직접 입으로 듣는 거랑은 다르죠!”
“됐고 치킨이나 주세요.”
“네넹~”
테이블을 깔고 치킨을 차리고 있자 다시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뭐에요?”
“저도 모르는데.”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초인종을 연타하는 소리. 상당히 성미가 급해 보였다.
이번엔 또 누구인가. 진짜 이웃 사람인가. 다시 현관으로 나가보니 이번에도 지인이 날 맞아 주었다.
“아윤아… 설화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우리 오느라 늦었잖아.”
“짜, 짜잔~ 재, 재중아 나 왔어! 헤, 헤헤….”
방 안에선 당황한 백아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엥?!”
“…뭐야 시발.”
“….?”
현관 밖에선 황당하단 듯 조아윤이 소리쳤으며 윤설화는 아직 뭐가 뭔지 이해가 안 돼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야 임마! 너가 왜 여기에!”
“어이 코라! 거 건물 혼자 쓰나요?! 왜 그렇게 시끄럽게….”
언성이 높아지자 이웃집에서 까지 사람이 나왔다.
“에엣?!!!”
이번에도, 아는 사람이었다.
“뭐야 시발.”
화이트 다비흐, 내 최애캐였던 그녀였다.
이렇게, 난 연말을 마법 소녀들과 함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