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1030)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1030화(1030/1120)
1030화 의사 아냐? (5)
“흐어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었으니까.
오진승은 여기 멀리 떠오르고 있는 해를 보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날 밤을 새운 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련받을 때조차 이랬던 적은 없었다.
다른 과 애들이 너네 과는 편하잖아 라고 하면 화가 나기는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커피?”
누가 어깨를 두드리길래 뒤를 돌아봤더니 강혁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강혁이 이 농장들을 차지하게 된 이상 주요 시장 중 하나가 한국이 될 공산이 크지 않나.
아쉽게도 한국은 더 이상 차를 마시는 문화권이 아니었다.
커피를 먹고 머리로 전달된 카페인으로 아데노신을 분비해 빡일을 해야 하는 나라가 된 지 오래였다.
해서 강혁은 전문가 의견에 따라 몇몇 농장을 갈아엎고 커피나무를 심었는데 어찌나 토양과 기후가 적합한지 벌써 열매가 나오고 있었다.
“아, 네. 주세요.”
“오. 보통 이 시간에 주면 됐다고 하고 그냥 자러 가던데.”
강혁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냉큼 받아다 챙기고 있는 오진승을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단지 커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술방에서는 어리바리하긴 했는데…….’
그래도 사람이 열의가 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도움이 되기는 했더랬다.
거의 한 사람의 인턴 정도는 했다고 봐야 했다.
인턴이라고 하면 굉장히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대학 병원을 돌아가게 하는 필수적인 인력이었다.
오진승은 그 역할을 바로 이곳 응급실에서 해냈다.
“먹고 잠 깨면 약 먹고 자면 돼요.”
“응? 그거 약물 남용 아닙니까?”
“제가 정신과 의산데…… 제 판단에 괜찮다고 판단이 되면 되는 거죠.”
“허.”
칭찬까지는 아니더라고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 주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진승이 대뜸 이상한 말을 했다.
커피로 깨우고 약 먹고 자겠다니.
이게 무슨 약물 중독자 같은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강혁은 이내 자신을 올려다보는 오진승의 얼굴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 온 지 오래됐고, 또 이렇게 하는 사람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농담입니다. 저는 원래 카페인 영향을 잘 받아요.”
“으음. 그런 것치고는.”
뒤늦게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수습에 나섰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강혁이 워낙에 이런 쪽으로는 또 눈치가 빨라서 그랬다.
“하여간…….”
계속 약물 얘기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오진승은 커피를 한 모금 딱 마시자마자 번쩍 드는 정신에 힘입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완전히 다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환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좀 위험한가.’
리처드나 재원 그리고 1호에 쿠트라팔리, 장미 등은 죽도록 힘들어 보이긴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커피가 무슨 보약이라도 되는 듯이 빨대로 빨고 있겠는가.
한 가지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희망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오늘 쉬는 날이라 그런가 보다.’
오진승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뒤에 서 있는 강혁을 올려다보았다.
이쪽은 또 저쪽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분명 같이 밤을 새웠는데도 쌩쌩해 보인다고나 할까?
심지어 꾀죄죄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방금 머리 감고 나왔나 싶을 정도의 싱그러움이 있었다.
‘뭔 인간이 땀 냄새도 안 나냐.’
숫제 괴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흔한가요?”
제발 아니라고 말하라고 빌고 있었다.
다행히 강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흔하면 우리 다 뒤졌지.”
“아, 휴.”
“일주일에 한 번?”
“그 정도면 흔한 거 아닙니까?”
안도의 한숨을 쭉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강혁의 생각과 일반인 사이에 괴리가 꽤 심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랬다.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닌데 뭐. 게다가 거의 2주에 한 번 정도라고 보면 돼요. 어제 절반은 저기서 쉬었잖아.”
물론 강혁도 아예 근거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아니었다.
힘들어도 절반의 인원으로 버틴 이유가 있지 않겠나.
군의관 1, 2호를 제외한 장기 봉사자들은 나름 강혁이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한번 확 힘들어도 다음에 쉴 수 있다는 게 크지 않던가.
강혁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것이, 오늘 밤새운 모두가 얼굴이 밝았다.
심지어 리처드는 커피 다 먹고 나가서 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논다고 해 봐야 이 근처일 테고, 좀 더 가면 군인들이랑 노는 게 다긴 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음…… 그렇군요. 거참…… 대체 어떻게 이런 걸 계속 견디시는 겁니까?”
“견뎌? 그냥 할 만하니까 하는 건데. 보람도 있고. 여기 나 오기 전에는 진짜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어요.”
“아, 그건 들었습니다. 근데…….”
당연히 봉사하는 입장에서 현장이 팍팍 변하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되는 일이었다.
반대의 경우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지만 오진승은 봉사하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봐 왔다 보니, 다양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봉사자의 이탈률 또는 탈락률이 이전보다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세태가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시대라 그랬다.
‘SNS가 문제야, 진짜.’
예전엔 오지에 들어가면 그냥 세상 모든 소식에서 깜깜이가 되어 버렸다.
그저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전달해 주는 소식만 듣고 살았고, 그나마도 몇 주씩 툭 끊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것도 그것대로 고립감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했을 테지만 세상 어떤 단체도 오지에 사람 하나만 달랑 보내는 경우는 없었기에 나름대로 버틸 만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이젠 스페이스 x니 뭐니 하는 프로젝트 덕에 세상 어디라고 해도 인터넷이 아예 안 되는 곳은 드물어졌다.
덕분에 SNS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박탈감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런 사람은…… 한국에 있었어 봐. 아휴.’
오진승은 강혁이 커피 마시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강혁도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지치긴 지쳤는지 잠시 끊어진 대화를 굳이 이어 나가진 않았다.
그저 호록 소리를 내면서 본인이 몸소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누와라엘리야의 녹빛 산을 배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어서 그런가, 조명이 예술이었다.
그 조명에 비치는 강혁의 모습은 조각이었고.
‘그냥 광고잖아. 진짜 편하게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인간이 여기서 이렇게 개고생하는 동기가 대체 뭘까 싶었다.
백강혁이 아무리 환자만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회적인 자기 위치를 아예 모를 리는 없지 않겠나.
그럴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비교를 하고 싶지 않아도 절로 비교가 되니까.
“그래도 여기 계속 있으면 힘들지 않나요?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삶이 훨씬 윤택할 텐데.”
“아, 뭐, 그건 그렇지. 나도 이렇게 평생 살 생각은 없어요. 늙고 힘들어지면 한국 들어가야지.”
“그전까지는 괜찮은 건가요?”
“괜찮은 게 아니라 즐거운데.”
“네?”
제아무리 커피를 마셔도 밀려오는 졸음에 취한 김에 오진승은 냅다 돌직구를 던졌다.
아마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건 마치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던 사탄 같은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오진승이 보기에 강혁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단단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은근히 묻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묻는 것을 훨씬 선호할 거란 확신도 있었고, 자신의 질문 따위에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즐겁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뭐…… 인터뷰 영상에서는 즐겁다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
실제로 단기 봉사자들은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봉사자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도 허다하고.
때문에 상담하다 보면 내담자로 온 봉사자 중에 오히려 화가 많은 사람도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난 내가 여기서 이뤄 나가고 있는 일들이 좋아요. 나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거든.”
“아……”
“거리를 지날 때면 내가 이룬 일들이 보이지. 내가 살린 사람의 얼굴이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더 좋아.”
“아……”
강혁의 말이 지속될수록 오진승의 입이 계속 벌어져만 갔다.
나르시시스트란 말은 귀엽게 쓰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자기애성 인격 장애를 가진 인들의 특성을 보면, 착취적이고 남들을 소모품으로만 여기면서 동시에 본인도 딱히 행복하지 못했다.
정신과 의사인 오진승에게는 그저 치료의 대상이고 또 교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순기능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애가 있는 사람이 이타적인 목표를 갖게 되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대체 이 인간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된 걸까?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이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환경과 경험 그리고 문화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오진승으로서는 탐구 정신이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인간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새끼……. 이렇게 말하면 걸려들 줄 알았다. 내가 진짜 자기애성 인격 장애인 줄 알겠지?’
강혁은 돌연 눈을 빛내고 있는 오진승을 내려다보며 속으로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며칠 지내고 보니, 과연 오진승은 꽤 훌륭한 사람이지 않나.
일도 열심이고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과적으로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예 붙잡아 둘 수 있으면 최고고 그렇지 않다면 자주 오게끔 하고 싶어졌다는 얘기였다.
오진승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일이었다.
세계 최고의 의사인 강혁에게 인정받았다는 측면에서는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래서 강혁에게 붙잡히게 생겼다는 측면에서는 마땅히 애도를 받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여간 해 완전히 뜨려면 좀 시간 있으니까, 아침이나 먹읍시다.”
“아, 네. 근데 교수님은 안 주무세요?”
“아……. 난 할 일이 좀 있어서.”
“어떤 할 일이요? 좀 쉬셔야지.”
강혁은 오진승의 말을 들으면서 밤새 보아 온 환자를 돌아보았다.
수가 적지 않았다.
경증 환자까지 하면 거의 서른이었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렸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거지?’
설령 책임자 집이 콜롬보에 있다고 해도 충분히 도달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한데 이렇게 나왔다는 건 여기 있는 인부들의 목숨 정도는 그냥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있단 얘기였다.
‘넌 죽었다.’
강혁은 콧김을 휭 하고 내뿜고는 말했다.
“구경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