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1119)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1119화(1119/1120)
1119화 양재원
“어, 양 선생. 왔어?”
“네, 교수님.”
재원은 지도 교수이자, 펠로우 담당 교수인 한유림의 명을 듣고 연구실로 온 참이었다.
한유림은 언제나처럼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색상의 다기에 차를 끓여다 놓고 있었다.
앞에는 제약 회사인지 어딘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을의 입장임이 확실한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게 성공한 사람의 삶인가…….’
이게 너무 부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군의관일 때는 특히 그랬다.
대학 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나름 전문가로서 대우를 받기도 했거니와 아래 연차도 있어 내가 대단한가? 했었지만.
군에 가니 그야말로 대위 나부랭이가 되고 말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가, 가끔 병원에 인사 올 때마다 마주친 한유림이 그렇게 부러웠다.
“어, 그래. 여기 앉아. 그래. 양 선생 전에 내가 시킨 거 어떻게 됐지?”
“시킨 거…… 아, 네. 전달 드렸습니다.”
“어떻게 하신대?”
“네, 그. 기조실장님은 오신다고 합니다.”
“원장님은?”
“그날 무슨 회의가 있다고…….”
“무슨 회의?”
“그거까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재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한 한유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멋져 보이던 외과 한유림도 결국, 그 위의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데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차기 기조실장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현 이사회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원장단에 아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내가 펠로우 하면서…… 골프 약속하는 거 말하러 이리저리 다닐 줄이야.’
그 사람 밑에 있다 보니 자연히 재원도 아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생각했던 펠로우랑은 거리가 있었다.
레지던트 때처럼 액티브하게 돌아다니면서 환자를 볼 줄 알았다.
아니, 그때보다야 훨씬 낫겠지 싶었더랬다.
펠로우는 뭐가 되었건 간에 전문의니까.
한데 이게 그렇지가 않았다.
애초에 가장 인기 있는, 그러니까 나가서 써먹기 좋은 분과인 항문외과를 택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한유림이라는 사람에게 환자가 최우선이 아니었다.
“그럼 사람 하나가 비는데…… 양 선생. 골프 칠 줄 알던가?”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원에게 한유림은 절대 갑이었으니.
“아, 그…… 제가 미처 배우질 못했습니다.”
“군대 있을 때 뭐 했어?”
“그…….”
댁이 시킨 논문 쓰고, 환자 보느라 바빴는데요…….
군의관 시절이야말로 본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휙휙 달라는 시기 아닌가.
한유림 말마따나 골프에 미쳐서 살던 동기도 있었다.
다른 취미를 찾았던 동기도 있었고.
재원은 그저 환자 보고, 논문 쓰고 나면 지쳐서 수동적인 취미, 그러니까 게임이나 했더랬다.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어서, 재원은 일단 죄송하다 했다.
한유림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재원을 바라보았다.
못하건 말건 나가서 인원수 때워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 그보다도 옆에 선 제약 회사 사람이 더 간절해 보였다.
‘이건…… 이건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 아니라 했나?’
아마 저 사람이 골프장 잡아 주고, 픽업도 해 줄 터였다.
원장단쯤 되는 사람이 원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헷갈렸다.
이게 불법인지 아닌지.
하지만 별로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나중에 높아지더라도…… 이러진 말아야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꼼짝없이 잡혀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위이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듣기만 해도 짜증이 확 솟구치는 그런 소리였다.
“뭐야?”
“아, 제가 오늘 외상 당직이라.”
“뭐? 그럼 일단 받아. 아니, 나가나가.”
한유림은 소리에 인상을 쓰더니, 외상이라는 말에는 숫제 질겁했다.
잘됐다 싶었다.
외상 환자가 달갑지 않은 것은 재원도 마찬가지였지만.
주말에 원치 않는 골프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백 번 천 번 나았다.
“네, 외과 양재원입니다.”
“네, 선생님. 그…… 칼에 찔린 환자가 이송 중이라고 합니다. 5분 내에 도착합니다.”
“아……. 네, 내려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해서 재원은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외과 레지던트 하나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럴 터였다.
칼에 찔렸다고 했으니.
‘외과로 콜이 됐으면 아마도 복부…… 하…….’
목이 찔리면 이비인후과, 가슴은 흉부외과, 머리는 신경외과를 콜 하는 식이었다.
딴 데도 다 골 때리는 부위지만 배도 만만치는 않았다.
일단 뼈가 없어 보호가 덜 되는데, 너무 중요한 장기가 많지 않나.
앞에도 뼈로 채워져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더랬다.
‘그랬으면…… 자기 발도 못 잡았겠지.’
만들어진 존재라면 신이 만들었을 텐데 아무렴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했겠나.
왜애앵.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사이렌 소리가 들이닥쳤다.
저 소리 만든 사람은 진짜 상 받아야 했다.
듣자마자 두근거리는 소리라니.
정말로 급해 보이지 않나.
“복부 자상입니다!”
“칼, 칼은 뭐예요?”
“사시미칼입니다!”
“이런 망할.”
재원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일단 처치실로 향했다.
바이털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진 않았다.
엉망인 것은 오히려 머릿속이었다.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해.’
배우긴 했다.
하지만 제대로 수련받지는 못했다.
그냥 환자가 오면 되는대로 했다.
교수님마다 방침이 다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의료는 최정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외상 외과에 있어서만큼은 걸음마도 못 걷고 있는 실정이라 그랬다.
“일단 씨티! 씨티 찍자!”
해서 검사부터 해 보려 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겠지 싶어서였다.
“보호자분,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때 누군가 처치실에 들어왔다.
레지던트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가 말렸다.
상대는 그런 레지던트를 한 손으로 툭 밀어내고는 말했다.
“아니, 아니지. CT부터 찍으면 안 되지.”
“에?”
뭔 개소리일까.
재원은 어벙벙해하다가 문득 자기 옆에 사내가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큐리티 부를까요?”
무서웠다.
상대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으니까.
얼굴도 잘생기긴 했는데 인상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시큐리티 운운을 해 보았다.
그럼 보통은 쪼니까.
“시큐리티는 내가 불러야 할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주 멍청한 의사 둘이 환자 하나 골로 보내고 있으니까.”
“뭔 개…….”
상대는 쫄지 않았다.
대신 환자의 옷을, 가슴까지 올려져 있던 옷을 찢어 버렸다.
‘어…… 깡패…….’
재원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문신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가리킨 것은 달랐다.
“자, 두 돌팔이 선생님들?”
“도, 돌팔이라뇨. 말씀이 너무…….”
“조용히 하시고. 여기 환자분 가슴이나 좀 봅시다.”
“뭔 가슴을…… 다친 건 배인데.”
멍이 보였다.
“좌측 상복부…… 비장이 물론 중요한 장기지. 하지만 찌르고 들어간 방향을 보면 기껏해야 껍질이나 다쳤을 거야. 근데 혈압은 개판에 의식도 없지. 그런데도 별거 아닌 배 상처나 후벼 파고 있으니…… 이제 뭐가 원인인지 감이 좀 잡히시나, 두 돌팔이 선생님들?”
“시, 심낭 압전!”
“이야 역시 펠로우가 조금 낫네. 그럼 뭘 해야 하지?”
“처, 천자! 여기 초음파랑 스파이날 니들(Spinal needle, 척추 주사, 바늘이 길고 굵음) 준비해 주세요! 흉부외과 콜도 해 주시고!”
당황한 재원은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흉부외과는 심장 파열로 못 오는 상황.
‘아, 죽겠구나.’
죽을 게 뻔했다.
이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래도 뭐라도 해야 했다.
해서 재원은 바늘로 천자를 시도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되게 창의적이란 얘기 많이 들을 거 같아.”
“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네.”
“아까부터…… 자꾸 시비 거시는데, 대체 누굽니까?”
상대가 나서지 않았다면.
“나?”
“네.”
하여간 누구냐 물었더니, 상대는 당당한 얼굴로 답했다.
“백강혁. 오늘부터 이 병원 중증외상팀 교수야. 비켜 봐. 그렇게 찌르면 환자 뒤져.”
그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실로 완벽한 천자로 환자의 생을 연장하더니, 수술방을 내달렸다.
‘와……. 이게…… 이게 되는 건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술은 더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다는 말로도 좀 부족했다.
교과서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던 것보다도 더 잘됐으니까.
‘그래, 내가…… 내가 되고 싶었던 의사는 이런 거였어.’
그제야 재원은 군 시절 때문에 잊었던 로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칼끝 하나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
그게 되고 싶어서 외과로 오지 않았나.
당시 외과는 인기가 없다 못해, 과 전체가 정부 지원금이라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던 이유.
성적이 썩 괜찮은 데다가 나이도 어리고, 인성도 좋고, 인상도 괜찮은 재원이 외과를 지원한다 했을 때 말리던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럼에도 외과에 온 것은 바로 이런 의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 * *
“그때 그랬지. 내가 그때 미쳤나 봐.”
재원은 밤을 새우고 나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옆에는 장미가 서 있었다.
그녀 또한 재원 못지않게 지쳐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샜으니까.
“근데 그날 임팩트가 좀 있긴 했어요. 선생님 헬기도 타지 않았어요?”
“어? 어어. 그랬지. 그러고 보니까 진짜…… 드라마틱했네.”
다시 생각해 봐도 정신없는 하루였다.
백강혁이라는 역대급 미친 사람을 처음 본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을 둘이나 살렸으니까.
거기에 홀려서 외상 외과를 지원할 만도 하지 않았나.
재원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날을 잊지 못할 터였다.
“후회하세요?”
장미는 웃으며 물었다.
답을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재원도 웃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집에 가지도 못한 주제에.
“아니. 그 후부터……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라.”
그런 재원을 보며 장미가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좀 멋있긴 한데.”
“그래? 그럼 이제라도.”
“아뇨. 나도 외상센터 있는데 남편도 외상센터에 있으면 어떻게 같이 살아요.”
“아, 그러니까 좀 후회되는데.”
재원이 너스레를 떠는 사이 전화가 왔다.
국제 전화였다.
웃음꽃이 피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이건 백강혁이니까.
“왜…… 이 양반이 왜.”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안식년이었으니까.
‘설마. 에이. 설마.’
악마도 아니고.
안식년을 뺏으려고?
그게 말이 되나.
재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