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117)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117화(117/1120)
117화 쓰게 웃으며 (4)
모두 입을 다물고 강혁을 바라보았다.
다 그렇겠지만 특히 재원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강혁의 모습이 아니라, 수술실에서 한창 주요 부위를 째고 있을 때의 표정이었으니까.
늘 보조의로 들어가 있던 재원은 습관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중증외상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다들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강혁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소변 컵에 담긴 양주를 내려놓고만 있었다.
오직 강혁만이 한 모금 맛을 보는 중이었다.
“음.”
그는 잠시 그 맛을 음미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죽음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뭐 이런 생각 말이야.”
“으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죽음’이라니.
묘하게 가슴 한쪽을 불편하게 하는 단어 선정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에 대해 토를 달지는 못했다.
실제로 모든 정책 입안자들이나 병원 관계자들은 말로만 언급할 뿐, 아직도 변한 건 없었으니까.
오늘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던 사람이 뇌사니 뭐니 하는 상태에 빠지고 말지 않았는가.
“난 개인적으로……. 이게 내 업보라고 생각해.”
강혁은 침묵 속에서 잔을 내려놓았다.
비록 소변 검사용이라고 쓰인 작은 종이컵에 불과했지만.
툭 하고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리는 듯했다.
적어도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러했다.
“업보…… 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재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강혁은 그런 재원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업보.”
“왜……. 왜요?”
재원은 설마 이 백강혁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적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말끝을 흐렸다.
장미나 경원 그리고 중헌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숨을 죽였다.
“그때가…… 그래, 벌써 20년도 더 됐네.”
강혁은 먼눈을 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미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는데, 딱히 풍경을 보는 것 같진 않았다.
그의 과거 어딘가를 헤매는 듯했다.
“내 아버지는 환경미화원이셨어.”
환경미화원이라는 말에 장미가 침음을 삼켰다.
바로 얼마 전에, 지나던 트럭에 치여 내원했던 중증외상 환자가 바로 환경미화원이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꽤 여러 차례 실려 온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미화 작업 도중 버스에 치였고, 돌아가셨지.”
“아.”
이번엔 재원이 탄식을 내뱉었다.
강혁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거의 처음인데, 그 얘기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
얼떨결에 이 회식에 참여하게 된 중헌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조차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음.”
경원은 그저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딱히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저 뭐라도 해야 강혁의 말을 좀 더 어색하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지. 아니, 그보단 경황이 없었다고나 할까. 아버진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유일한……?”
재원은 저도 모르게 생경한 단어를 되뇌었다.
강혁은 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였다.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셨거든. 그건 기억에도 없어.”
“아…….”
“아무튼, 그땐 그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어. 뭐든지 열심히 했지. 공부도, 알바도.”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니.
그런 생각은 적어도 재원이나 경원은 단 한 번도 품어 본 기억이 없었다.
둘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평탄하게 의대에 들어와 의사가 되었으니까.
“우연히 무안대학교에서 시행하는 지역 내 장학 퀴즈에서 장원하고, 무안대로 진학하면 전액 장학금에 용돈도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었지. 무안대라…… 그리 좋은 대학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어쩌겠어, 돈을 준다는데.”
“아……. 그래서…….”
재원은 그제야 의문점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늘 강혁과 같이 우수한 사람이 왜 무안대학교 의대를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물론 의대는 하나같이 점수가 높기는 했지만.
강혁의 능력을 보면 한국대학교마저 정문 부수고 들어와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의대에 진학하고 공부하다 보니……. 그때가 되어서야 알겠더군.”
강혁은 거기까지 말하곤 종이컵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더 삼켰다.
어쩐지 아까보다 양이 더 많아 보였다.
표정도 씁쓸해 보였고.
양주가 아니라 소주를 삼켰나 싶을 지경이었다.
“내 아버지는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던 환자였다는 걸 말이야.”
“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탄식을 흘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
“문제요?”
그나마 재원만이 강혁의 말에 대꾸할 수 있었다.
나머진 분위기에 짓눌려 말없이 듣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 여전히 아버지 같은 환자들이 계속 죽어 가고 있다는 거지. 웃기지 않아? 대한민국 의료는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수준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잖아. 심지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인 분야도 적지 않다고.”
강혁은 그리 말하며 술을 한 모금 더 삼켰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이긴 했다.
대한민국 의료는 칠성병원과 같은 대규모 기업 병원들의 진출과 더불어, 한국대학교 병원의 법인화와 같은 여러 방면의 기업화를 통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방 병원들이 무너지는 등의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질적인 성장이 뒤따랐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진 못할 터였다.
“멀리 갈 것도 없지. 이 병원 간이식센터만 해도 전 세계에서 배우러 오잖아? 미숙아 생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
“그건 그렇죠…….”
“하지만 중증외상 환자들은 어떻지?”
“음…….”
강혁의 말에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없었다.
중증외상센터의 한심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외국 상황은 어떤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 번 일본에 출장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중헌만이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었다.
“이웃 나라에 비하면 형편없죠…….”
“그래. 다른 분야는 거의 비슷하거나 도리어 앞서 있는데, 중증외상센터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야. 미국, 영국 등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지.”
강혁은 거기까지 말한 후 천천히 치킨이 담긴 상자를 풀었다.
무게 잡고 말은 하고 있는데, 빈속에 술만 먹으니 아무래도 좀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우. 아무튼, 그래. 난 내 아버지 같은 환자가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람이고……. 그렇게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강혁이 치킨 다리를 우적거리며 말하자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렇게 죽으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이에 용기를 얻은 장미가 다른 조각 하나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강혁은 아까와 같은 분위기를 걷어 내고 씹는 데 주력하며 답했다.
“뭐……. 하다 보면 재미도 있고. 우린 똑같은 수술 두 번 하기가 쉽지 않잖아.”
“하긴 그렇죠. 저만 해도 뭐…… 여기 와서 처음 해 본 수술이 수십 가지는 되니까.”
재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치킨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희도 고민은 좀 해 봐. 다 나 같은 사정이 있지는 않겠지만…… 이 힘든 길을 괜히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야지. 그래야 버틸 수 있어.”
강혁은 시리아로 떠나기 전, 무안대학교에서 겪었던 좌절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때 강혁은 지역 거점 병원이 된 무안대학교에서 외상 외과 창설과 함께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해 열심히 일했더랬다.
하지만 결국, 그를 제외한 모든 의료진이 사퇴함으로써 막을 내리고 말았다.
보상 없는 희생은 언젠가 파국을 맞기 마련이었으니까.
“네. 전, 교수님 말씀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강혁의 말에 늘 에프엠인 경원이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이미 입안에 치킨이 한 무더기 들어가 있었다.
그간 맨날 일만 하느라 기름칠하는 게 오랜만이다 보니 참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물론 강혁은 그걸 탓할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치킨이나 피자가 반가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저도 교수님을 도와야 하는데……. 이렇게 한직에 밀려나서 죄송합니다.”
중헌은 어렵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를 초대한 장본인인 강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사실 중앙 구조단에서 그렇게 해 준 게 이상한 일이긴 했지. 원래는 병원에도 닥터 헬기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건데.”
강혁은 그 말을 하면서 원장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헬기 이·착륙대도 지어주지 않는 놈들인데, 헬기를 사 줄 리는 만무하다고 보면 되었다.
‘뭐, 이제 한동안은 헬기 출동은 물 건너간 셈인가.’
그나마 병원에 있는 구급차가 시설이 꽤 괜찮은 게 다행이었다.
그래 봐야 닥터 헬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표정이 다소 어두워진 강혁을 향해 중헌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응?”
“제가 이래 봬도 꽤 발이 넓긴 넓거든요. 적어도 소방청 내에서는.”
“그래서?”
중헌 정도 되는 연배에 이런 성격이라면 그럴 것 같긴 했다.
특히 후배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터였다.
중헌은 본인이 직접 일을 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경기 소방청 쪽 구조단에 제 1년 후배가 이번에 들어갔는데…… 닥터 헬기 놀고 있는 게 너무 아까운 모양이에요.”
“거기도 있어?”
“EC 225 기종은 아니고 AW139 기종이긴 하지만, 한 대 있습니다.”
“한 대…….”
“뭐, 부족하긴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어차피 아무도 안 쓰고 있습니다.”
중앙 구조단의 EC 225 기종도 거의 반쯤 놀리는 상황이었다.
경기 소방청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리란 법은 없었다.
“그건 잘됐군. 아니, 잘된 일이 아닌가?”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 친구가 교수님 활약상을 듣고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소방청장께선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중헌은 청장이 중앙 구조단 헬기가 백강혁 개인택시냐고 하면서 성을 냈다고 전해 들었던 것을 기억했다.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중헌의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은 백강혁에 대한 협조와 관련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험악한 여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방해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장이 뭐라 말하든 나는 관심 없고. 그 친구 연락처 뭔데?”
“여깄습니다. 제가 따로 또 얘기도 전해 놓겠습니다. 관심만 있으시다면요.”
“관심? 말해 뭐해. 중증외상센터에서의 핵심은 ‘헬기를 이용한 이송’이야. 그게 없으면 모든 게 어그러져.”
용케 실려 온 환자를 살리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복잡한 도로 사정을 뚫고 병원까지 이송될 때까지 살 수 있는 환자라면, 사실 제대로 된 의료진만 만나면 살 수 있다고 보면 되었다.
‘골든 아워가 중요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선 헬기가 필수야.’
강혁은 그걸 외국에서 두 눈 똑똑히 본 바 있었다.
같은 환자라도 이송이 얼마나 걸리냐에 따라 예후는 극명하게 갈렸다.
“그럼 제가 얘기 넣겠습니다.”
“고마워. 그래도 어느 한쪽에서는 도움을 받긴 받네.”
“말씀하셨잖습니까, 저도 팀이라고. 힘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그래. 든든하네.”
거대 권력이 하지 못하는 일을.
아니, 하지 않으려는 일을 개미들이 애쓰고 있었다.
강혁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느끼고 있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털어놓진 않았다.
그런 고민은 팀장이 오롯이 지고 갈 몫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