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204)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204화(204/1120)
204화 뉴욕 (1)
강혁은 이현종 대위를 비롯한 모든 환자를 한유림과 강일구에게 넘겼다.
퇴원해도 문제없을 만한 환자는 한유림에게 맡기고, 그렇지 않은 환자들은 강일구에게 맡기는 식이었다.
한유림은 어려운 환자를 보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강일구는 곧 강혁이 고어 메디칼사의 제품을 사 올 것이라 여겨 좋았다.
덕분에 강혁은 무사히 뉴욕행 비행기에 타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윈-윈이 된 셈이었다.
“넌 뭔 이민 가냐?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가?”
강혁뿐 아니라 중증외상팀 전체가 뉴욕을 갈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심지어 비행깃값은 병원에서 내 주었으며, 호텔비는 강혁이 사비로 마련해 주었다.
팀원들이 들뜨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재원은 강혁이 자신의 짐을 두고 뭐라 할 때도 딱히 언짢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일주일이잖아요. 뉴욕 가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정작 학회는 4일뿐인 걸 모르는 건 아니지? 가서 옷 사 입으면 될 텐데.”
“음?”
“미국은 옷이 엄청 싸단다, 촌놈아.”
“그, 그럴 리가요. 미국 잘 살잖아요.”
“어후.”
강혁은 이놈이 정말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을 나름 우수하게 마치고 의사가 된 놈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이 어려운 놈이 이러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은 놈이 이러니까 이해가 안 갔다.
‘분명히 꽤 산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외과 수련을 결정할 수 있었겠는가.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근데 왜 이렇게 거지같이 하고 다니지?’
예전에야 재원이 워낙 가정 교육을 잘 받아서 부를 드러내지 않는 점이 좋단 생각도 했지만.
이 녀석은 패션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강혁은 도저히 자신의 제자가 이런 꼴을 하고 다니는 걸 더 볼 수 없었다.
“잠깐 비켜 봐.”
해서 재원이 지난 1주일간 밤잠 줄여 가며 차근차근히 싼 짐을 냅다 풀었다.
그러자 이게 옷인지 고쟁이인지 모를 것들이 상당수 터져 나왔다.
“야……. 너 전에 네가 입는 옷 중에 수술복이 제일 좋다고 했던 게 농담이 아니구나.”
“네? 아니, 그래도 이거 메이컨데요.”
“2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
“뭐……. 원래 명품은…….”
“배스보이가 어떻게 명품이야, 인마. 너 무슨 미국 의류 수거함이라도 들르려고 이러냐?”
“아니…….”
재원은 계속 뻔뻔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장미가 가까이 다가오는 즉시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옷가지들이 이성에게 어필하기는 좀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 에이! 빨리 닫아요!”
“너 인마……. 보이는 것도 부끄러운 옷을 용케 입고 다닐 생각을 했네.”
“이……. 빨리 닫아 줘요!”
“안 되겠어. 너 그냥 속옷이랑 해서 이틀 치만 가져가. 나머지 옷은 내가 거기서 사 줄게. 가방까지 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마……. 이 가방은 너무하잖아.”
강혁은 재원이 잔뜩 짐을 싸 둔 가방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훈련소 입소할 때 받은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군용이었다.
“으음……. 다 사 주신다고요?”
사 준다는 말에 재원이 어조를 확 누그러뜨린 채 강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던 것도 잠시였다.
“에이. 아니에요. 교수님 월급 뭐 엄청 많은 것도 아닌데요. 호텔비도 내 주시잖아요.”
“싸가지 없는 놈이 갑자기 이러니까 이상하네. 뒈질 때가 됐나?”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야. 나 돈 많아. 블랙 워터스는 연봉 엄청 많이 주거든.”
“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속옷만 챙겨. 이거 다 두고 가. 나머지 놈들은 짐 어때? 이렇진 않겠지?”
재원 때문에 일행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져 버린 강혁은 난데없이 짐 검사를 실시했다.
다행히 경원은 재원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일단 옷이 새것이었고, 가방은 군용이 아니었다.
장미나 지민은 학생 때 입던 옷들이 잘 맞아서 별걱정이 없었고.
결국, 이 일행의 구멍은 재원뿐이란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된 놈의 수제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가르쳐야 하냐. 대충 챙겼으면 나와. 전에야 외교부에서 배려해 줘서 금방 갔지, 원래는 공항 2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해.”
“그, 그건 저도 압니다.”
“오, 그러셔? 장하셔, 정말.”
강혁은 몰아치듯 일행을 이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누가 병원 사람들 아니랄까 봐 불필요할 정도로 서두르고 있었다.
무려 새벽 6시 표였기 때문에 일행이 병원에서 나온 시각은 3시였다.
“스님도 아니고…….”
강혁은 공항 리무진도 없는 시간이라 점보 택시를 탄 채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수술하러 가는 길이 아니다 보니 한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반대로 같이 택시에 탄 나머지는 마치 수학여행 가는 고등학생들처럼 떠들썩했다.
“거봐! 이른 시간으로 하길 잘했지? 도착하면 8시도 안 돼. 하루 통으로 놀게 생겼어, 지금!”
특히 재원이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아예 사정을 모르면 어디라도 쥐어 박고 싶은데.
녀석이 두바이 가던 거 말고는 이게 첫 해외여행이라는 걸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좀 자자, 이놈아…….”
덕분에 강혁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뿐이었다.
끼이익.
택시는 이래서 총알택시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빠르게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빨리 가자. 비행기 안에서는 설마 못 떠들겠지.”
어차피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녀석들 때문에 한숨도 못 잔 강혁이 머리를 흔들며 택시에서 뛰어내렸다.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머지 녀석들의 입은 쉬지 않았다.
“자유의 여신상도 가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가고!”
“쉑색 버거도 먹고!”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늘어놓는 도중 재원의 말을 들은 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건 한국에도 있는데요?”
“저한테는 강남역이 뉴욕보다 가기 힘든 곳이에요…….”
“이, 인정.”
막판에 기분이 가라앉은 재원은 비로소 강혁이 원하던 음소거 상태가 되어 출국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강혁이 약간은 강박적으로 달달 챙긴 덕에 누구 하나 여권을 빠뜨린 사람은 없었고, 무사히 출국 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재원은 그동안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강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도라도 하는 건가.’
딱히 신앙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재원이 기억하기로 강혁이 이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적어도 한 번은 있었다.
바로 기도 화상 환자 처치를 할 때.
“뭘 그렇게 중얼거리세요?”
재원은 딱히 뭘 물어보거나 할 때 망설임이 없는 놈 아니던가.
해서 궁금해진 김에 강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혁은 그런 재원을 아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기도하고 있는 거야.”
“뭔……. 기도요? 설마 비행기 무서워하세요?”
“설마.”
“그럼 뭔데요?”
“여기서 뉴욕까지 얼마나 걸리디?”
강혁의 말에 재원은 곧장 답을 하는 대신 일단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14시간이요.”
“짧지 않은 시간이지? 수술을 해도 두 개는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건……. 그렇죠.”
비행기를 앞에 두고 수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이 사람 말고 또 있을까.
재원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냥 두기는 아까운 시간이잖아.”
“그렇죠.”
“그래서 가는 도중에 닥터 콜이 있으면 우리 수제자 노예 1호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 중이었지.”
“네? 이런 미친.”
“뭐? 미친?”
강혁에 의한 폭력 사태가 막 발발하려고 할 때쯤,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얻어맞지는 않은 재원은 한숨을 쉬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전히 뭔가 중얼거리고 있는 강혁을 노려보면서였다.
재원에게는 천만다행하게도 강혁의 기도는 그 누구도 들어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행기는 무사히 태평양을 건너 북미 대륙까지 횡단한 후,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리 비행기 착륙합니다. 안전띠 사인에 불이 꺼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계셔 주세요.”
그 말을 듣던 강혁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당연하게도 그 바로 옆에 있던 재원의 고막에 푹 파고들었다.
“마음을 곱게 쓰세요, 교수님.”
“수제자 실력 녹슬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나처럼 고운 마음씨가 세상에 어디 있냐?”
“그……. 아닙니다…….”
재원은 뭔가 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강혁과 말을 더 나눠 봐야 이쪽만 손해 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틱틱 거리는 사이 비행기는 공항에 무사히 내렸고, 곧 사람들이 우르르 입국 심사장으로 향했다.
재원이 외국 공항 입국 심사장에 오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저번엔 외교부 직원이 함께였고, 이번엔 혼자였다.
적잖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헤이, 컴 히어.”
게다가 덩치가 산만 한 흑인 직원이 무려 ‘영어’로 그를 호명하자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예, 예스.”
해서 재원은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영어 실력을 뽐내며 쭈뼛쭈뼛 나아갔다.
“어휴, 저 새끼. 저거.”
뒤에서 그런 재원을 보고 있던 강혁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설마 뭐 잡히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영어로 된 논문도 읽지 않는가.
아마도 읽는 것만 할 수 있고 나머진 못할 거 같긴 했지만.
강혁이 걱정을 해 대는 사이, 재원은 직원 앞에 섰다.
“여기 온 목적이 뭐죠?”
직원은 공항 직원들이 으레 그러하듯 무척이나 불친절했다.
딱히 ‘고객의 소리’ 같은 것을 사용할 정신이 없는 곳인 데다가, 하루에도 수백 명씩 말 안 통하는 외국인들을 봐야만 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어…….”
“사업이에요? 아님, 여행이에요?”
재원이 답을 못하자, 직원이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꿨다.
“오늘 뭐 해요?”
불행히도 재원은 그제야 직원의 말을 알아들었고, 아주 쓸데없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교수님이……. 오늘은 총 쏘러 간다고 했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봤으면 굳이 그 말을 하진 않았을 텐데.
재원은 긴장감과 더불어 고자에 가까운 영어 실력 때문에 이상한 말을 털어놓고 말았다.
“건……. 프랙티스 건.”
“네? 총을 쏘러 간다고요?”
“어……. 예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혁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미친놈이 진짜.”
가뜩이나 자국 내 테러 방지에 힘을 쓰고 있는 곳이 미국인데.
그 입구에서 ‘나 총질하러 왔수다’ 하고 있다니.
미친놈이란 말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 실례합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강혁은 이미 직원의 눈빛이 경계심 최고조에 달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껄껄 웃었다.
“이 친구 담당 의사입니다. 자, 여기.”
그리곤 국경 없는 의사회에 자문 의사로 활동하던 때 받았던 증서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음?”
“좀 모자란 친구예요. 여기 오면서 영화를 보더니, 거기서 총 쏘는 모습이 멋있었나 봅니다.”
“아하.”
직원은 그제야 어눌한 재원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슬며시 파이팅 자세를 지어 주며 둘을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강혁이 재원의 등짝을 후려친 것은 그곳에서부터 대략 수백 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미친놈이. 총 쏘러 왔다는 얘기는 왜 하는 거야. 할 거면 제대로 연습장 가 볼 거다, 라고 하던가.”
“그…….”
“아까 내가 자느라 잘못 들었나 했는데, 이 새끼 기내식 나올 때도 말이야.”
“어어, 그건.”
“‘아 유 베지테리안?’이라고 하니까 뭐? ‘아임 코리안’? 돌았냐?”
“으음…….”
강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재원을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재차 옮겨 댔다.
“됐어. 짐 들고 있지? 바로 따라와.”
“어딜……. 가시려고요?”
“어디긴 어디야, 총 쏘러 가지.”
“근데 거기 진짜 왜 가는 건데요?”
“너 인조혈관 사야 하잖아.”
“그거랑 총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생각을 해 봐라. 병원에서 우리한테 그걸 팔겠니, 아니면 도매상에서 팔겠니.”
그건 불법이니까 안 될 터였다.
“어……?”
“뒷골목에서 사야지. 근데 미국 뒷골목은 자칫 잘못하면 총알 날아오거든.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