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219)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219화(219/1120)
219화 밀수도 했다 (1)
재원은 강혁의 뒤를 따라 이동하면서 불과 사흘 전 있었던 급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사실 급했다기보다는 혼자 후달렸던 상황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올바른 표현일 테지만.
아무튼, 정상적인 입국은 아니었다.
“어디 있냐?”
강혁은 당직실에 들어서자마자 재원을 향해 물었다.
그다지 좋지 못한 회상에 빠져 있던 재원은 즉시 말을 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최하림 감독이 어느새 뒤따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라고는 해도 다큐멘터리를 주로 찍는 사람이다 보니, 어찌 보면 저널리스트적인 성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촉이 좋다는 얘긴데, 방금 두 사람이 슥 하고 빠져나오는 걸 보고 딱 뭔가 온 모양이었다.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최 감독이 본 강혁은 결코 환자를 두고 어딜 가거나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특히 방금 했던 수술은 정말이지 문외한이 보기에도 말이 잘 안 나올 정도로 빡센 수술이 아니던가.
그런 수술을 해 놓고 중환자실까지 따라가지도 않고 당직실로 온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요?”
게다가 강혁과 재원은 하려던 것을 멈추고 최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 감독이 이 당직실에 합류한 이래 둘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결단코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까 수술실에서만 해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함부로 행동하던 강혁 아니던가.
재원의 정강이를 그토록 세게 걷어차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이 다큐가 개봉하게 되면 너무 리얼해서 오히려 페이크 다큐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흠, 거…….”
제아무리 강혁이라도 밀수해 온 물품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들키지 않으려고 이상한 물건으로 에워싼 상태일 텐데, 그런 게 카메라에 잡히면 무조건 나쁜 일만 있을 게 뻔했다.
“왜요? 무슨 일이신 거예요?”
“그…….”
강혁은 당황한 눈빛으로 재원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실로 드물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윽, 교수님…….’
수제자를 자처하고 있는 재원도 처음 보는 눈이었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제대로 된 똘끼로 무장하고 있는 재원은 이 눈빛을 그냥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기대받고 있어…….’
게다가 조금 전 수술에서 어마어마하게 털리고 온 몸이 아니었던가.
거의 강혁과 들어간 첫 수술을 떠올리게 할 만큼이나 엉망으로 혼나고 말았더랬다.
자존감이 땅바닥에 처박힌 상황이라는 건데, 이럴 때 이런 눈빛을 받아 버렸다.
“으아아.”
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야, 야 미쳤어?”
강혁은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있는 재원을 보며 소리쳤다.
최 감독 또한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왜, 왜 이러세요?”
“아까 수술하다가 너무 급해서 싸 버렸습니다! 교수님만 눈치채신 거 같아서 수습해 주시러 오신 겁니다!”
재원은 거의 반쯤 울면서 외쳤다.
왜 내 머리는 이따위 생각만 떠올릴 수 있는 걸까.
“에, 에이. 그럼 나갈게요!”
하지만 효과가 있기는 있었다.
최하림 감독은 차마 더 있지 못하고 휙 나가 버렸다.
그렇게 당직실 안에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강혁과 바지를 반쯤 내린 채 울고 있는 재원만 남게 되었다.
“그게 최선이었냐?”
강혁은 완전히 굳어 버린 재원의 바지를 올려 주며 물었다.
그로서는 거의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 주는 중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그걸 재원 또한 모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뭘 울고 그래.”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내렸잖아요…….”
“설마 방송에 쓸까?”
“교수님은 저 감독님이 이전에 낸 영화 안 보셨죠?”
“보진 않았지.”
강혁이 무슨 시간이 있어 영화를 보겠는가.
그저 블로그에서 평전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무대포가 따로 없는 인간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로 한 주제에 그 감독의 전작도 제대로 모르다니.
물론 재원이라고 해서 강혁보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클립으로 정리된 것은 본 적이 있었다.
“저 감독님 팬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꽤 있는 편인데, 그 이유가 ‘진짜 리얼해서’예요…….”
마약 수사하던 형사가 단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잠복근무를 하느라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그 과정은 물론이고 뒤처리 과정까지 모자이크를 첨부해서 보여 준 전력이 있는 감독이었다.
그러니 방금 장면 같은 건 당연히 나갈 거라고 보면 되었다.
그 말을 들은 강혁은 재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너 여자 친구 없던가?”
“네.”
“저 영화 나오기 전에 부지런히 사귀어라…….”
온 국민에게 똥쟁이로 소문나게 생긴 마당 아닌가.
강혁은 진심을 담아 재원을 위로해 주었다.
“어휴.”
“아무튼, 그거 어딨어.”
재원은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강혁은 이미 위로했으니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해서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과 같은 태도로 혈관부터 찾았다.
재원 또한 강혁에게 딱히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러기엔 이 인간과 너무 오래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거……. 가방에 있어요. 아직 짐을 못 풀어서요.”
“아니, 뉴욕에서 온 지가 사흘째인데 아직도 짐을 못 풀었어?”
“오자마자 헬기 탄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아, 맞네. 그러고 보니까 나도 내 짐 못 풀었어.”
강혁은 그제야 당직실 한쪽에 놓아둔 가방이 생각났다는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우드버리 아웃렛에서 새로 장만한 캐리어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안에는 새 옷이 제법 많이 들어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단 한 번 입지 못하고 버리게 생겼다.
“읏차.”
재원 또한 강혁이 사 준 캐리어를 열고, 마찬가지로 강혁이 사 준 옷가지 등을 치우곤 누가 봐도 수상쩍게 생각할 만한 검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의 서적이 몇 개 들어 있었다.
혹시 걸리면 이걸로 대신하고 넘어가기 위함이었는데, 이렇게라도 다시 보게 되니 역시 이상하긴 했다.
“이 새끼 이거 아무거나 19금 서적 넣으라니까, 취향 봐라…….”
강혁은 그중 하나를 빼 들고는 혀를 츠츠 찼다.
전국구 똥쟁이가 놀림거리라면, 이 책은 거의 매장 거리였다.
“에, 에이! 그거 제가 원해서 산 것도 아닌데요, 뭐!”
“이런 거로 혈관을 싸다니. 너 이거 애들 몸속에 들어갈 거라는 건 알고 있는 거냐?”
“아니……. 상자를 싼 건데 뭔 상관이에요.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온전히 교수님 거라고요!”
“이렇게 이상한 책을 살 줄 누가 알았나?”
“미국에서는 이런 책만 파는데 그럼 어떡해요.”
“미국 사람 들으면 너무 억울할 거 같은데?”
강혁은 수갑 찬 여자가 하이힐로 남자를 짓밟고 있는 표지의 잡지를 흔들며 말했다.
“버릴 거예요, 진짜.”
“가만 보면 노예라고 부를 때 좋아하는 거 같았거든. 이런 게 취향이었다니……. 미안하다. 교수가 돼가지고……. 앞으로는 좀 더 괴롭혀 줄게.”
“여기서 더 괴롭히면 죽어요!”
“죽도록 좋다고?”
“하, 이런 씨…….”
“아무튼, 그 지저분한 거 다 치워. 상자만 꺼내.”
“알았어요…….”
재원은 봉지 안에 든 상자를 꺼냈다.
안에 무려 인조혈관이 열 개나 들어 있는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정가만 따져도 상당한 가격을 자랑하겠지만, 현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목숨값만큼 받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게 없어서 죽어 가는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강일구 교수 앞으로 입원한 아이가 그러했다.
“가자. 교수님 진짜 애타게 기다리실걸.”
“네. 아기 아직 살아 있는 거죠?”
“확인은 못 했어.”
“어, 그럼…….”
“살아 있을 거야. 강 교수님이 두 달이라고 했으면 아마 그게 최소한일 거거든.”
“아.”
재원은 그제야 강일구 교수 또한 강혁 정도는 아니더라도 흉부외과에서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교수란 사실을 떠올렸다.
실제로 그가 돌봐 준 외상 외과 환자들은 전원 상태가 아주 좋았다.
환자 보는 비결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잘 처리하신 거예요?”
당직실을 나서자 앞에서 대기 중이던 최하림 감독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몰라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원은 역시나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 정말 대단하세요. 살신성인이네요, 진짜.”
“아뇨, 뭐…….”
“이런 건 제가 좀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반드시 싣겠습니다.”
“아뇨, 아뇨. 그런 건 좀…….”
“자랑할 건 자랑해야죠!”
남이 똥 지린 게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인가.
심지어 실제로 지린 것도 아닌데.
재원은 잠시 그런 눈으로 최하림 감독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완성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재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말이었다.
어느 한 방면에서 큰 성공을 이루려면 인성이 이래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저, 감독님. 저희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재원이 절망에 빠진 사이 강혁은 최 감독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디 가시는데요?”
“다른 과 교수님 만나러요. 개인적인 일이라.”
“아, 네…….”
최하림은 잠시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녀도 연이은 강행군으로 지친 마당이었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선을 긋는 데 따라갈 만큼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건 무슨 마약 수사대보다 더 힘들어.’
해서 그냥 강혁과 재원만 보내고 당직실 빈 침대에 널브러지고야 말았다.
그녀가 정신 줄을 놓은 사이, 강혁과 재원은 흉부외과 강일구 교수에게 찾아갔다.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본인 연구실에 있었다.
“아, 백 교수님. 환자 인계는 해 드렸습니다. 잘 다녀오셨어요?”
강 교수는 여느 때처럼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모니터에는 환자 차트와 함께 논문들이 잔뜩 떠 있었다.
‘심혈관계 기형에서 자동맥 채취를 활용한 수술…….’
강혁은 잠깐 그것을 훑어본 것만으로도 강일구 교수가 어떤 환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혈관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만들어서라도 쓰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논문은 미처 인조혈관이 나오기 전에 발표된 논문이었다.
아주아주 옛날얘기란 뜻이었고, 그땐 해당 수술 성공률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저 당시 트라우마 생긴 흉부외과 의사가 한둘이 아니라 했었지.’
드라마나 영화 또는 만화책에서는 수술대에서 환자가 죽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없는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외상 외과가 아닌 의사들은 평생 그런 상황을 마주할 일이 아예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조금 전까지 수술한 환자가 가슴이 벌어진 채 죽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도 아직 앞길이 창창해야 할 어린아이가.
의사도 사람인 이상 다시 칼을 쥐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강혁은 강일구 교수 같은 사람이 그렇게 되면 개인의 불행을 넘어 대한민국 의료계의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인계 잘 받았습니다. 아이는 좀 어떤가요?”
“아, 그거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제가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강일구 교수는 허허 웃으며 손을 저어 댔다.
어찌나 어색한지 누구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별로 알아서 잘되는 거 같지는 않은데요? 그 논문 78년에 발표된 거 아닙니까?”
강혁은 모니터를 가리키며 강 교수의 거짓말을 파헤쳐 버렸다.
그러자 대번에 강 교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시에는……. 최고로 치던 논문이죠.”
“그래서 수술 성공률이 어떻습니까?”
“5% 미만이죠.”
하지 말아야 하는 수술이란 얘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수술이기도 했다.
안 하면 100% 죽으니까.
강혁은 그 말을 한 후 참담한 얼굴이 된 강일구 교수 앞으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쓰시면 100% 살릴 수 있으시죠?”
희망 가득한 말을 보태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