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493)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493화(493/1120)
493화 닥터 백 (2)
톡.
강혁이 들고 있던 작디작은 바늘 끝이 혈관을 뚫었다.
혈관은 작은 동맥 분지였기에 무척이나 가늘었는데, 그런데도 실수는 전혀 없었다.
“후.”
일단 리차드의 보조가 퍽 훌륭한 편이었다.
워낙에 배울 때부터 혹독하게 갈굼을 당한 데다가, 미군 군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강혁의 기분이었다.
그는 정말로, 믿어지지 않겠지만 진짜로 리처드를 한바탕 갈군 후로 기분이 무척 좋아져 있었다.
그 덕에 순간 실력이 크게 늘어서 혈관을 쭉쭉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와…….”
곧 리처드는 완벽하게 이어진 혈관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하부 장간막 동맥에서 이어져 나온 분지는 원래 형편없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찢어져 있었거늘.
이젠 언제 찢어진 적이 있었냐는 듯, 상행결장과 회장 연결 부위 부근으로 제대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피가 흐르는 건가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피가 제대로 가는 건지 어떤 건지 확인이 어려웠다.
일단 혈관이 너무 가늘기도 하거니와, 출혈이 있던 부근이라 색이 잘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보려면 따뜻하게 데운 생리식염수라도 좀 뿌려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시야도 확보하고, 또 피도 더 잘 통하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있어 봐.”
물론 이곳엔 따뜻하게 데운 식염수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전력 수급도 안 좋은 마당에 무슨 놈의 데운 식염수란 말인가.
그런 설비를 들여놓는 것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급한 설비들이 지천이었다.
예를 들면 석션이나 보비와 같은 설비들.
“있어 보라고요?”
“그래. 천천히 저 끝을 봐 봐.”
해서 강혁은 정석대로 물로 혈관을 씻어 내는 대신, 손가락 끝으로 방금 이어 준 혈관의 끝을 가리켰다.
무리해서 식염수를 뿌려 댄다면야 지금 혈관에 묻은 피 정도는 닦아 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찬 식염수를 뿌려 대면 혈관이 수축할 거 아닌가.
괜히 그렇게 했다가 시간만 더 허비될 수 있었다.
어쩌면 혈관의 연축을 야기해서 혈액 순환을 악화시킬 수도 있었고.
“끝…… 음.”
리처드는 강혁의 성질머리는 무척 두려워했지만.
아니,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싫어한다는 표현이 맞았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강혁의 의학적인 견해는 존중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강혁에게 배웠다는 건 곧 강혁이 펼치는 기적을 보아 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니까.
“아.”
그렇게 몇 초가 더 지났을 무렵, 리처드의 눈에 점차 생기를 되찾아 가는 상행결장이 들어왔다.
정말이지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고 있던 부위가 어느 정도 핑크빛을 띠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어……. 출혈이 있습니다.”
이미 상행결장의 대부분은 죽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조직은 죽으면 헐거워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피가 들어오자, 버티지 못하고 줄줄 새어 보내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이 있다면, 연결해 준 혈관이 아주 가늘었다.
그 말은 곧 피가 거의 나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딱 여기서 집어.”
리처드와는 달리 강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희미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피 나는 부위가 회장과 상행결장 연결 부위에서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네.”
리처드 또한 훌륭한 외과 의사였기에, 당황을 뒤로하고 즉시 강혁의 명을 따랐다.
“좋아. 가위.”
“아, 바로 자르시려고요?”
“그럼 어쩌게. 이미 혈관도 다 묶어 버렸는데. 이건 이제 절대 못 살려.”
“하긴…….”
“미련 갖지 말고, 잘 잡기나 해 줘. 그게 이 병사를 위한 길이야.”
강혁은 리차드를 보다 말고 병사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젊다는 말조차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앳되다는 표현이 딱일 터였다.
‘너도 최선을 다해 줘라.’
의학계에는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걸로 죽나 싶은 케이스가 노년에는 수두룩한 반면에, 이걸로도 안 죽네 싶은 케이스가 젊은 청년에는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 나이라는 게 비단 생사에 있어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추후 환자의 삶의 질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깄습니다.”
카심은 강혁이 재차 고개를 돌릴 때쯤 가위를 건네주었다.
강혁은 그 가위를 받아다 서걱 소리를 내며 대장을 잘라 내었다.
이미 집게로 잡은 후였기에 안에 있던 내용물이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마 집게가 없었다 하더라도 거의 흘러나오는 건 없었을 터였다.
환자는 공복으로 있었는지 제법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으니까.
“봉합할 거.”
강혁은 그렇게 거침없이 대장을 잘라 낸 후, 손을 내밀었다.
카심은 중간 짬을 내서 한유림을 보조하다가 이내 실을 강혁에게 건네주었다.
강혁은 그 실을 봉합 기구로 다시 한번 단단히 잡으며 입을 열었다.
“리처드, 보조해. 이제부터 더 중요해.”
“아, 네.”
그리곤 상행결장의 일부와 하행결장을 그대로 이어 주기 시작했다.
톡.
톡.
늘 그렇듯 완벽하기 그지없는 봉합이었다.
‘이대로 밥 먹여도 안 터지겄다…….’
그걸 오랜만에 보는 리처드로서는 이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안 본 사람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오버하지 말라며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실이……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러지.’
사실 혈관하고 대장은 사정이 좀 다르다고 보면 되었다.
즉 혈관 내부에는 실이 들어가면 혈액이 응고되는 등 여러 불이익이 눈에 보였지만.
대장은 안에 실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꼭 목숨과 연관되는 합병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강혁은 굳이 실이 대장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 가면서 봉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얇디얇은 대장 벽을 포 뜨듯이 이어 주고 있다는 뜻.
그럼 이게 좀 헐겁거나 불안해 보여야 정상일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 괴물이……. 진짜 실력이 더 늘었네.’
종국에는 리처드의 눈에 경악이 깃들기 시작했을 지경이었다.
리처드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원래도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강혁의 실력이 더 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더랬다.
“한 교수님. 거긴 어떻게 돼 가요?”
“아, 여기? 여기도 거의 다 돼 가. 장루 뽑아서 고정하고 있어. 이거 한 한 달은 써야지?”
장루라.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조각난 소장과 총탄이 보였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장루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어?”
그래서 리차드는 자신이 강혁의 보조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그리곤 장루를 보았다.
형편없이 조각나 있던 소장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잉.’
덕분에 리처드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
그리곤 이 수술을 한 게 누군가 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리고 있음에도 못생긴 한 노년 의사였다.
생긴 거로 판단하는 게 참 미안했지만.
아무리 봐도 실력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디 좀 봐요.”
한눈팔고 있던 리처드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게도, 강혁은 수술을 이어 나가는 대신 한유림의 수술 부위에 관심을 보였다.
다 맡겨도 될 거라고 판단을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좀 불안하지 않은가.
확인할 수 있으면 확인하는 것이 좋았다.
“자. 봐 봐.”
물론 한유림이야 자신 있게 자신의 수술 부위를 보여 주었다.
아까 강혁에게 자신감 펌프를 받은 덕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수술 부위는 거의 완벽했다.
‘저긴 저렇게 하지 말지.’
강혁에게야 조금 아쉬운 부분이 보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사소한 부분들일 따름이었다.
적어도 환자의 생사나 예후에는 별 관계가 없을 터였다.
그냥 강혁의 방식대로 하면 대략 1시간 정도 더 회복이 빠를 수준이라고 보면 되었다.
즉 한유림의 수술은 거의 완벽하다는 말에서 ‘거의’란 단어를 빼도 좋을 지경이었다.
“잘했네요?”
“당연하지. 백 교수가 그랬잖아. 나 할 수 있다고. 내가 이 정도는 하지.”
“그, 그러니까요.”
아까 자신이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걸 까먹은 강혁은 영 어색하게 웃어 댔다.
하지만 이미 자아도취에 빠진 한유림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노인네는 누군데 또 이렇게 수술을 잘하지?’
그럴 만도 했다.
외상 외과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리처드조차 넋을 놓고 보게 될 지경이었으니까.
‘이만하면 내가 알아야 하는데.’
리처드는 자신이 참가했던 해외 학회 리스트를 떠올렸다.
거기서 본 의사 중에는 분명 동양인 의사도 꽤 많았다.
하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인지 뭔지 떠오르는 얼굴은 백강혁뿐이었다.
‘에이 시발.’
좀 적당히 괴롭혔어야 할 거 아닌가.
배운 게 워낙에 많았으니까 참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확 뒤집어 버렸을 터였다.
그런 마음에 홱 하고 강혁을 돌아보았는데, 강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눈깔이 왜 그러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였다.
“어, 그…….”
리처드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 수술 보조할 때보다도 더 빨랐다.
강혁이 쓸데없는 부분에서 눈치가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너 뭔가 개길 생각했지?”
“아뇨. 아뇨. 그…….”
“시간 가는데 그럴싸한 답 안 나오면 알지?”
“아, 알죠.”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게 좀만 더 지속되면 정신건강의학과적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아, 약 차에 두고 왔는데.’
딱히 강혁 때문은 아니었지만.
리처드는 공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외상 외과 전문의에게는 그렇게까지 드문 병이 아니었다.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일해야 하는 데다가, 그 수가 어디에서도 충분하지 않아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애초에 강혁이나 한유림처럼 정신력이 강한 게 좀 이상한 일이었다.
‘아, 그래.’
그때 구세주처럼 든 생각이 있었다.
리처드는 한유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이 노인. 아니, 이 교수님은 누구시죠? 어떻게 이렇게 수술을 잘하시는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진짜 그거 맞아?”
“네, 네! 아무렴요.”
리처드는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다급한지, 살기 위해서라는 게 누가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제인은 그런 리처드를 보면서 몰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하의 미군 군의관이 여기서 저러고 있다니.’
이것 또한 국경 없는 의사회를 하지 않았다면 구경도 못할 광경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 대강 넘어가지. 근데, 모르는 사람인가? 알 텐데? 아, 장관 할 때 왔었나, 너가.”
“그…….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유림 장관 몰라?”
“한유림……? 응? 보건복지부 장관이요? 그런 사람이 여길 왜……?”
장관이라니.
미국에서도 장관은 의전 서열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사람들이었다.
공직에 있는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혁은 여전히 껄렁했다.
“내가 같이 오자고 했지.”
“아.”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리처드는 왜 왔는지 딱 이해할 수 있었다.
해서 리처드는 연민의 눈빛을 한유림에게 보냈고.
한유림 또한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