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506)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506화(506/1120)
506화 정비 (2)
‘역시 개기면 안 되겠어. 존나 가만히 있어야지…….’
재원은 정말로 혼자 냉장고를 내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혼자 들어다 병원 안으로 들고 가 버린 강혁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하는 게 비단 재원 혼자만은 아니었다.
“야, 혹시 오면 나 계속 일했다고 해. 알았지?”
구석에 짱박혀서 딸내미와 노가리 까고 있던 한유림도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하면 안 나오려고 했지만, 사람이 냉장고를 혼자 들어다 옮기는데 어찌 안 나와 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처럼 짬으로 들어 옮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 순수하게 힘으로 들어다 옮긴 느낌이었다.
“어…….”
“어 하지 말고. 너 인마 원래 내 제자였어. 은혜를 이렇게 갚을래?”
“어…….”
“야, 살려 주라. 재원아. 아까 봤잖아. 수틀려서 저 상태로 한 대라도 치면 나 진짜 죽어. 이제 환갑 넘었다…….”
“아,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저도 정신이 나가서 그랬어요.”
“그래……. 그래, 넌 착한……. 근데. 음.”
한유림은 ‘역시 재원은 외과 천사야’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친놈이 수염을 길렀네?
딱 강혁이 아까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였다.
그때는 왜 강혁이 남의 수염 가지고 그렇게까지 화를 내나 했는데.
이걸 보니 이해가 갔다.
‘미친놈인가.’
왜 이 얼굴에 이런 수염이 날까.
창조주는 정말 이게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신 걸까.
만약 그렇다면 신은 있는 걸까.
오랜 기독교인인 한유림에게 이러한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이상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파키스탄에 온 이후론 수염 많은 현지인을 너무 많이 보아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가, 정말 이상했다.
“어딜 그렇게 보세요?”
“아니. 아냐.”
“아, 수염 보시는구나. 잘 어울리죠?”
“엉?”
“다들 그러더라고요.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하.”
“어…….”
한유림은 그제야 재원이 센터장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들 밑에 놈들이니 개소리를 해도 웃어 주고, 이 몰골을 해도 좋아해 주겠지.
하지만 그건 밑에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일 터였다.
“휴.”
저 멀리서 절대 재원의 아랫사람이 아닌 인간의 한숨이 들려 왔다.
보아하니 혼자서 냉장고를 옮긴 후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가드들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경외감 어린 시선을 받아 가면서였다.
“이제 다 됐나?”
“아, 네. 백 교수님. 다 됐습니다.”
“오, 오 김인수 교수님. 이번에 진짜 도움 많이 주셨다고. 비행기도 빌려다 주시고.”
“뭘요. 아버님이 하신 거죠. 하하. 어차피 항공사 주주셔서.”
“그래요오?”
순간 강혁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거의 무슨 피라도 본 드라큘라 눈빛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김인수는 껄껄 웃느라 그런 강혁의 변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한림원 부원장만 하신 줄 알았더니……. 항공사 주주야?’
설마하니 한 열 주 들고 주주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김인수 성격에 주주라고 하는 거로 봐서는 적어도 4% 이상 들고 있는 대주주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역시 잘해 줘야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강혁은 김인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듣자니 요새 실력이 더 좋아지셨다던데. 조만간 저보다 나아지겠어요.”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해 대면서였다.
“아, 아뇨.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영혼이 1도 담겨 있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김인수는 마냥 꺄륵 거리기만 했다.
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머지 인원들도 점차 둘을 향해 다가왔다.
워낙에 긴 비행을 한 데다가, 도착해서도 쉬지 않고 6시간을 달려온 사람들 아니던가.
게다가 짐까지 나른 참이라 다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 다들 환영합니다. 저는 국경 없는 의사회 한구 긴급구호 팀의 팀장 제인입니다. 계시는 동안 최대한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나머지 인사는 들어가서 하시죠. 식사 준비해 뒀습니다.”
해서 지켜보고 있던 제인이 서둘러 나서서 밥 먹자는 얘기부터 꺼냈다.
놀러 온 사람들도 아니고, 당장 내일부터는 진료에 투입될 사람들 아니던가.
‘이중에 어쩌면 다시 한구에 올 만한 사람도 있을 거라고 했었지.’
아니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얘기만 잘 전달되면 올 수도 있다고 했더랬다.
이 말을 꺼낸 게 다른 사람도 아닌 강혁이었기에 제인은 깊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혹 너무 무책임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거의 무조건 들어맞았으니까.
“식사는 3층에 있어요. 아, 엘리베이터는 안 됩니다.”
“아.”
밥 먹는다는 말에 화색이 돈 채로 병원 안으로 들어왔던 몇몇이 탄식을 터뜨렸다.
3층이라는 말도 절망스러운데 엘리베이터도 안 된다니.
“죄송합니다, 전력 수급이 안 좋아서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들 봉사하러 온 사람들답게 제인의 사과에는 서둘러 손을 저어 댔다.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강혁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 강혁을 참고 견뎌 내 줄 정도로 인격이 훌륭하단 뜻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여기까지 휴가를 써서 와 준 사람들이니 더 검증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아마 적절한 계기로 이름만 알리면 5대 성인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와우. 이거…… 이거 불고기예요?”
“김치도 있네? 아니, 어떻게 여기…….”
게다가 3층 식당에 차려진 음식은 한식이었다.
뒤에 서서 수줍게 웃고 있는 한식당 연의 사장 김영수 덕분이었다.
비용은 전부 대사관에서 지불받은 참이라 주머니 사정도 두둑해져 있었다.
게다가 한유림의 권유로 시장 조사까지 나설 수 있었기에 표정이 정말 좋았다.
“맛있다.”
“사실 아까 공항에서 여기 음식 잘 못 먹었다가 버렸는데……. 와……. 한식을 먹게 되다니.”
그렇다고 지금 단기 팀 일행보다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거의 만 하루 동안 이동만 하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이들이지 않은가.
옷차림이야 그렇지 않았지만.
얼굴만 보면 구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야 지금은 그냥 이렇게 좀 두겠지만.
강혁은 아쉽게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목록 줘 봐.”
“웁.”
“걸신이 들렸나. 센터장씩이나 되는 놈이. 굶어?”
“오늘은…….”
“뭐?”
“아뇨. 네. 드리겠습니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강혁은 입안 가득 불고기를 넣고 씹어 대고 있던 재원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 바람에 재원은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로 인한 분노와 짜증도 참았다.
지금 개기기에는 아까 봤던 냉장고 옮기던 장면이 너무 충격적으로 남아 있었다.
“어디 보자.”
강혁은 그렇게 어거지로 받아 낸 목록을 쓱 훑었다.
이 녀석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강혁이 애초에 요청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축소되었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재원도 그쪽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 모양이었다.
법적으로 불가한 물품들이야 당연히 반입해 오지 못했지만.
그 외에 다른 물품들은 오히려 늘어나 있었다.
‘이것 봐라……? 항생제 IV를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감염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건 면역 결핍 환자들에게나 또는 노인들에게나 통용되는 얘기겠지만.
이곳 한구 아니, 파키스탄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 질환 중 하나였다.
‘이 정도면……. 하루 100명씩 봐도 반년은 쓰겠다.’
어쩐지 박스가 좀 많더라니.
어마어마한 양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현장에서 돈 문제로 주로 쓰이는 인도산 카피 약도 아니었다.
정품이었다.
‘삥을 뜯었나?’
거의 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 기생충 약도 있네. 이렇게 많아?”
항생제 외에도 강혁의 눈길을 끄는 게 또 있었다.
바로 기생충 약이었다.
“구하기 힘들지 않아? 지금?”
“그렇긴 하죠. 그래서 국외 회사에서 협조받았어요.”
“국외……?”
재원은 자신이 직접 답하는 대신 최하림 감독을 돌아보았다.
강혁 또한 재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허기와 지침에 잠시 체통을 잃고 허겁지겁 음식을 탐하던 하림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외국계 제약 회사들 좀 있잖아요. 그 회사들도 교수님은 알더라고요. 국경 없는 의사회면 또 저명한 단체기도 하니까. 이거 미니 다큐로 만들어질 거라고 하니, 협조 하더군요.”
“아하. 오……. 이거……. 이거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이만한 양이면 진짜 큰 도움 되겠는데.”
기생충.
한때 대한민국에서도 어마어마한 사회적 부담을 지우던 질환이었더랬다.
그러던 것이 적절한 생활 습관 및 전반적인 사회 위생이 개선되면서 거의 사라진 것이 이제 2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박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는데, 거기에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원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약이 좋아도 너무 좋지.’
기생충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변이하지 못하는 놈들이었다.
즉 현존하는 기생충 약만 있으면 거의 다 죽일 수 있다는 뜻.
실제로 강혁의 동기 중 기생충에 관심 있던 친구가 평생 기생충을 하겠노라고 기생충 교수님을 찾아 갔을 때도 이것 때문에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이젠 보건 기구 정도에서나 관심을 갖는 학문이라는 얘기와 함께.
“제인. 내일 지역 신문에 공고 내자. 기생충 약 먹으러 오라고.”
“아, 얼마나요?”
“여기 도시 사람들 전체.”
“네? 그렇게나 많아요?”
한구가 그래도 인구가 만 단위는 되는 곳인데.
그걸 다 먹일 수 있다니.
제인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강혁과 재원 그리고 하림을 돌아보았다.
원래도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더더욱 그러한 것 같아서였다.
물론 강혁은 그런 제인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기생충 약을 먹일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음. 하루 200명씩 선착순으로 받아서 다 먹이자.”
“아, 하긴. 그게 안전하긴 하겠네요.”
제인 또한 강혁의 말을 듣자마자 현실로 돌아왔다.
기생충 약은 효과가 대단하긴 하지만, 안에 기생충이 너무 많은 경우엔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꺼번에 싹 다 죽이다 보면 장이 막히기도 하고 간혹 죽어 버린 기생충의 몸에서 흘러나온 항원 때문에 과도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
이제 대한민국에서야 문헌으로만 찾아볼 수 있는 옛날 얘기였지만.
여기서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법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기생충은 그렇고. 또……. 이야, 이거 수액도 많네. 냉장고에 넣으면 되고. 수술 기구도 다 들고 왔네? 이게 되던?”
“원래 안 되는 건데……. 이건 어떻게 했더라. 아, 맞아. 식기류로 통과시켰던 거 같은데.”
“식기……?”
“대강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아……. 그렇…… 그렇기도 하네. 이제 무법자 다 됐구나?”
“다 교수님 덕이죠. 밀수부터 배웠으니까.”
재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처음엔 헬기도 못 타던 새가슴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놈 여기 남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런 재원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옆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아직 고국이 마음에 걸렸다.
한구도 소중했지만.
역시 둘을 저울질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해서 강혁은 아쉬운 마음을 그래도 품은 채 한유림을 돌아보았다.
‘저 인간을 어떻게든 키워다가……. 잡아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