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519)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519화(519/1120)
519화 지원 좀 해 주라 (3)
“어휴. 이거 뻑뻑해서.”
경원은 강혁의 눈빛을 기가 막히게 읽어 내었다.
예전엔 그야말로 성실히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는 캐릭터였는데.
강혁을 만나 이런저런 세상의 풍파를 겪다 보니 어느새 연기까지 늘어 버린 참이었다.
물론 실제 산부인과용 벤틸레이터는 후진 물건이라 연기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음.’
눈앞에서 대한민국에서 온 의사들이 낑낑대는 걸 본 아만 총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생은……. 살아날 거 같긴 한데.’
솔직히 아까 모하메드 칸 의원을 수행하던 비서가 보여 준 사진을 보았을 땐, 어떻게 애도를 표해야 앞으로 행보에 불이익이 없을까 싶었더랬다.
그만큼 치명상으로 보였었는데.
지금 보니 비록 얼굴이나 배, 가슴 여기저기에 거즈가 붙어 있긴 해도 죽진 않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되니? 또 안 되는 거 아냐?”
아만 총리의 표정 변화를 읽은 강혁이 일부러 다급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환자 잘못될 거 같은데, 이러면!”
환자 생명까지 운운하면서였다.
의사로서 양심의 가책이 아주 조금은 느껴지는 순간이었지만.
어차피 이 환자는 절대 죽을 리는 없는 상황이었다.
강혁이 그렇게 수술했으니까.
‘다른 환자들 좀 살리자고 하는 짓이니까, 좀 봐주슈.’
강혁은 의식 없는 환자를 보며 자신의 가책을 덜 생각으로 중얼거리며 경원을 바라보았다.
경원은 마침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스승이자 또 전 센터장이었던 사람이 주도하고 있는데.
게다가 와서 보니 정말이지 열악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세계 최고의 외과 의사가 일하고 있다고 믿기엔 말도 안 될 지경이었고.
“자, 잠시만요! 기계가 너무 후져서! 전압도 약하고!”
해서 경원은 강혁의 즉흥 연기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미친놈들…….’
이런 연기에 자신이 없는, 동시에 이런 연극을 볼만한 담력이 안 되는 제인은 슬며시 뒤로 빠졌다.
한편으로는 일말의 기대를 품으면서였다.
‘그래도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
일단 동생의 은인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만 총리는 다른 파키스탄 정치가들처럼 영국물을 좀 먹은 위인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료에 관한 관심이 지대한 양반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비를 털어 라호르에 암 전문 병원을 지었단 얘기는 상당히 유명했다.
‘관심이 있다는 소리니까.’
제인은 말리는 대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기계가 그렇게 후집니까?”
아니나 다를까, 입을 다물고 있던 총리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동생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일까?
얼굴엔 근심마저 가득해 보였다.
‘옳거니.’
강혁은 그런 아만 총리를 보고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강혁의 무서운 점이었다.
총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경원은 아니었다.
“후지죠……. 하.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지만. 저희 병원에서 쓰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병원에서도 이런 건…….”
해서 경원은 혀를 츠츠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댔다.
표정도 어둡기 그지없어서, 정말이지 그럴싸했다.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근심에 휩싸이면 아무래도 더 공감을 사기 마련 아니던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
“어, 된다. 되네. 이번엔. 휴, 살았다.”
강혁은 총리의 입에서 탄식이 나올 때쯤 해서, 이미 연결된 지 오래인 기기가 마치 지금 된 것인 양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바꿔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고작 이거 가지고 시간 끌면 안 되지.’
아무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수 분 내로 떠날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무작정 있진 않을 거 아닌가.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보여 주어야 했다.
한구 병원이 처한 현실을.
“근데 여기 좀 덥지 않아?”
강혁은 환자 보느라 숙이고 있던 몸을 슥 하고 펴며 물었다.
이곳에 제일 오래 있었던 카심을 향해서였다.
“네?”
아무래도 카심은 경원처럼 척 하면 척이 되진 않았다.
그저 속으로 이런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기 더운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갑자기 왜 저러셔.’
강혁은 그의 뚱한 얼굴을 보고는 바로 한유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유림은 좋든 싫든 정치를 한 몸인 데다가, 강혁과 워낙에 오래 지내 온 탓에 눈치가 빨랐다.
“어……. 어, 더, 덥다.”
해서 한유림은 재빨리 여태 끼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어?”
그러자 아만 총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는 한유림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야 스쳐 지나가며 본 터라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당시 아만 총리는 이제 막 당선된 지 한 달 남짓했을 무렵이었더랬다.
모든 게 새로웠고, 새로운 일은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었다.
게다가 한유림은 상당히 특이한 얼굴 아니던가.
“한…… 장관님?”
“어? 어떻게 저를?”
“박성민 대통령 순방 때 같이 오시지 않았나요?”
박 대통령은 비단 중증외상센터 활성화뿐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도 관심이 지대한 인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직 전 세계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시장인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소위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인데, 그중 인구 2억이 넘는 파키스탄은 당연히 주요 관심 대상국이었다.
“아, 네. 근데 전……. 사실 멀리서 뵙기만 하고 따로 인사는 드리지 못했는데…….”
“박 대통령께서 워낙 얘기를 많이 해 주셔서요. 가장 신임하는 내각이라고.”
“아……. 뭐.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기는 했습니다.”
“한데 여기까지 오셔서……. 도움을 주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제가 더 신경을 썼을 텐데.”
아만 총리는 한유림의 그을린 얼굴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민 대통령 순방 당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면서였다.
‘한유림 장관님은 우리나라 중증외상센터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인물입니다. 백강혁 센터장님과 함께요.’
한 나라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실로 어마어마한 노력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뇨, 아닙니다. 하하.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팀원으로 왔을 뿐입니다. 대단하신 분은 저기 닥터 제인이죠.”
“그렇군요.”
물론 아만 총리는 파키스탄의 현황에 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현재 파키스탄은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수한 노력과 돈 그리고 인력이 들어가는 중증외상센터를 살릴 게 아니라, 보편적 의료 복지부터 개선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나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왕 와 있는 전문가들을 허투루 놀릴 생각도 없었다.
비주류 정당이었던 현 여당을 이끌며 총리까지 된, 그야말로 정치력 만렙에 해당하는 사람 아니던가.
‘한구 지역은……. 아직 정부의 힘이 그렇게까지 미치는 곳이 아냐.’
다행히 최근에 지역 유지들끼리 협정을 맺은 건지 뭔지 좀 안전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파키스탄 탈레반의 간섭이 심심하면 이루어지는 곳이지 않은가.
게다가 지역 주민들의 지지도 애매했다.
‘이런 곳에 있는 병원을 지원하는 건…… 괜찮은 방법이지.’
빵과 같은 음식을 나누어 주는 방식도 괜찮긴 하겠지만.
그러한 방법은 늘 단발적일 뿐이었다.
게다가 파키스탄 탈레반을 지나치게 자극할 가능성도 컸고.
하지만 병원은 얘기가 좀 다를 거 아닌가.
일단 표면적으로는 외국인 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이기도 하고.
실제로 열악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 여기…… 좀 더 둘러볼 수 있겠습니까? 병원 사정을 알고 싶군요.”
“오, 좋죠. 닥터 제인, 도와주시겠어요?”
해서 한유림을 향해 물었고, 한유림은 팀장인 제인을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제인은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역시 이 미친 인간들은 대단해.’
속으로 엄지를 휘둘러 대면서였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이건 기회야…….’
외부에 후원을 요청할 때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적어도 총리가 후원하는 병원에 들어가는 물품을 삥땅 칠 간 큰 공무원은 없을 테니까.
혹 모르고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걸로 응징할 수도 있을 테고.
“일단 여기가 우리 의료진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좁군요.”
“그리고 덥습니다. 에어컨을 받아 두기는 했는데……. 전력 사정으로 인해 돌리고 있지 못합니다.”
“아……. 하긴 여긴 수급이 불안정하겠군요. 근데 어떻게…….”
아만 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라마바드나 라호르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24시간 전기가 들어가는 곳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페샤와르도 아니고 지역 거점 도시에 불과한, 그러니까 조금 큰 마을인 한구 도시라면 어떨까.
병원이 돌아가는 게 기적이었다.
“따로 기름 발전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발전기 용량이 부족하고, 또 오래되어서 원래 용량만큼도 안 나옵니다. 게다가 기름 수급이 쉽지 않습니다.”
“음.”
기름 수급이 어렵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실 파키스탄은 상당히 커다란 산유국인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그와는 완전히 반목하고 있는 사이 아니던가.
대신 이란의 또 다른 적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와는 굉장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여러 정치 및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데, 아무튼, 그래서 석유가 아예 부족한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려면……. 이것저것 떼는 게 많았겠지.’
아마 이슬라마바드에서 1ℓ를 보내면 한 절반 정도나 도달할 정도였을 터였다.
석유는 누구에게나 유용한 자원이었고, 공무원들에게 외국인은 거의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실정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기왕 이곳을 활용할 생각이 든 아만 총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쇼.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앞으로 이곳 한구 병원으로 이송될 석유는 정부 이름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럼 정말 너무 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제인은 정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전기만 풍부해져도 이곳 의료 수준이 확 올라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발전기를 바꾸게 된다면, 그에 필요한 석유까지도 보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님.”
물론 돈은 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석유라는 게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이곳 한구에서는 그러했다.
그것만 해결해 줘도 정말이지 큰 도움이었다.
‘뭐 해, 더 뜯어.’
하지만 옆에 있던 강혁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제인의 얼굴에 만족감이 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옆구리를 냅다 찔렀다.
깡패 같은 소리를 해 대면서였다.
“그리고 다음은 병실입니다. 침대들이 말이죠.”
해서 제인은 하릴없이 계속 병원 투어를 지속해야만 했다.
아만 총리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릿속으로 지원 가능한 품목을 헤아렸다.
주로 돈보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들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래, 공문 하나 내리고……. 사람 붙이면 대강 이 정도는 되겠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한구 병원은 크나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