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583)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583화(583/1120)
583화 축하할 일 (3)
“아니, 근데…….”
데니스는 더듬거리며 강혁이 건네준 계약서를 들춰 보았다.
대체 이 양반은 언제부터 이걸 들고 다니고 있던 걸까.
워낙에 깔끔한 인간이다 보니 여기저기 구겨져 있진 않았지만.
접힌 부분이 마모된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 뭐.”
“이걸…… 이거 언제 쓰신 거예요?”
“한 한 달 됐지.”
“한 달?”
한 달이라면 딱 데니스가 여기 와서 첫인사를 나누었을 때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벌써 임대차 계약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사람이지?’
다들 조심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간 보아 온 강혁은 그저 맛 좋은 커피나 가져다주면 헤헤 웃는, 어딘지 느슨한 사람 아니었던가.
하지만 눈앞에 선 강혁은 그가 알고 있던 그 강혁이 아니었다.
“문제가 되나? 내가 옛날에 써 놨다고 이 좋은 조건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건 그렇죠.”
맞는 말이긴 했다.
그렇다고 불안감을 해소할 순 없었지만.
이쪽은 이제 처음 둘러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이 건물에 들어온 건데.
상대는 이미 한 달 전부터 빌려주려고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뭐 이런 고민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강혁은 쯧 소리와 함께 침을 뱉었다.
“왜, 왜 그래요?”
어차피 바닥이 쓰레기장이라 침 뱉는 행위 자체가 아주 못 할 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침을 뱉는 태도는 정말이지 상스러워 보였다.
아니, 좀 무서웠다.
“손님, 맞을래요?”
“네?”
손님이란 단어랑 맞을래요라는 단어가 같이 붙을 수가 있는 건가?
교포긴 해도 평생 미국에서 살아온 터라 대한민국의 용팔이 문화를 모르는 데니스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간 봐. 이 늦은 시간에 매물 봐 달라고 해서 30분을 썼는데 그냥 가시겠다? 하…… 나, 이거야 원.”
“오, 옷은 왜 벗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인간의 몸은 장난이 아니었다.
전해 들은 얘기로는 어지간한 요원 한둘 정도는 순식간에 찜 쪄 먹을 수 있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야 없었지만.
스미스를 넘어 랭리, 백악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곳이 이곳 한구였다.
백강혁은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인간하고 드잡이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솔직히 질 거 같고…….’
해서 데니스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이러지 마시고. 일단 계약서 줘 봐.”
“계약하실 거예요, 손님?”
“일단…… 일단 좀 봐야죠.”
“본다고? 지금까지 건물 다 봤잖아. 뒤질래? 손님?”
“거…….”
존댓말과 반말, 그것도 아주 공손한 존댓말과 거친 반말이 오가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백강혁 안에 두 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니 계약서 얘깁니다. 계약서.”
“아, 이거. 근데 한국어로 돼 있는데, 괜찮아? 그냥 내가 읽어 줄게. 나 못 믿어?”
데니스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혁이 세상에서 제일 못 미덥다는 생각을 했다.
눈앞에서 아수라 백작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부모님에게 이따금 배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신의 한글 실력을 믿는 게 나았다.
“그래도 보긴 봐야죠.”
“음…… 그래, 뭐. 봐라. 대신 빨리 봐. 시간 계속 가. 자꾸 이러면 나 월세 올릴 거야.”
‘그…… 알겠습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조건 자체는 진짜 좋은 조건이었다.
아마 나중에 정식 허가 절차 다 받아서 진행한다 해도 이거보다 무조건 몇 배는 비쌀 터였다.
-렌털 프리 3개월, 1년간 월세 500달러. 관리비 별도.
다행히 아까 강혁이 구두로 알렸던 사안이 명문화되어 있긴 했다.
아니, 그것만 쓰여 있었다.
“이게 다예요?”
“그렇지, 뭐.”
“어…….”
“아, 뒤에 선불이라고 쓰여 있지? 1년 치. 1년 중에 3개월은 무료니까, 4,500불만 내.”
건물 1년 임대료가 4,500불이라니.
기껏해야 500만 원이라는 소리 아니던가.
이렇게 들으니까 진짜 거저 같았다.
마침 지금 들고 있는 작전비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당이 가능했고.
“어……. 알겠습니다. 사인할게요.”
“어, 난 해 놨어. 거기 계좌로 보내. 닥터 제인 명의로 된 계좌야.”
“아, 네.”
해서 얼렁뚱땅 계약이 완료되었다.
“들어왔어?”
강혁은 바로 눈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꿈지락거리고 있는 데니스에게서 제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제인은 띵동 소리가 울렸음을 깨달았다.
그리곤 계좌에 4,500불이 들어왔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네, 들어왔어요.”
“음. 잘됐네. 월세는 그렇고.”
강혁은 허허 웃으며 데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이 너무 친절해 보여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응하는 게 결과적으로는 맞았다.
“관리비가 문젠데.”
“네?”
“아까 정확히 말해 줬던 거 같은데. 여기 발전기 우리 측에서 단 거거든. 전기 365일 들어올 수 있게끔. 기름도 우리 한구 병원으로 들어오는 트럭으로 실어 나를 거고.”
“어…….”
데니스는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당한…… 당한 느낌인데?’
관리비 별도라는 항목을 좀 더 챙겼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강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알아서 기름 구해 오고 발전기 떼다 딴 거 붙여도 되는데. 알지? 우리는 총리 라인 타서 아무한테도 안 뜯기고 오는 거. 이거 알아서 하려고 하면 아마 어려울걸.”
CIA 백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불행히도 그 백이 통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디 가서 CIA요 하고 거들먹거렸다가는 총 맞아 죽기 딱 좋았다.
해서 데니스는 그냥 입을 닥치고 있었다.
잘한 일이었다.
어차피 강혁은 말을 멈출 생각일랑 전혀 없었으니.
“그렇긴 해도 우리가 아주 모르는 사이는 아니니까. 원가 그대로 하진 않을 거야.”
“오?”
“대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겠지?”
“어…….”
“여기 보라고. 공간이 이렇게 좋은데 보수도 안 되고, 더럽고 그래. 안 그래?”
“그렇긴 하죠.”
“렌털 프리 해 주는 동안 여기 치워.”
“허.”
데니스는 그제야 이 인간이 왜 렌털 프리를 해 주겠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제인은 왜 강혁이 95% 이상의 확률로 교육동부터 치우자고 했는지 깨달았다.
이미 데니스라는 인간을 알게 된 후로는 여길 이 친구한테 떠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천재…… 천재다.’
어찌나 감탄이 벅차오르는지, 한유림은 하마터면 짝짝 박수를 해 댈 뻔했다.
‘하긴…… 어차피 여기 이 건물…… 애물단지야…….’
처음 발전기 달고 나서는 신나서 기름도 들이부어 놨지만.
사실 그 이후로는 딱히 전기를 써 본 기억도 없었다.
안이 워낙에 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육동 1층 치우는 것만 해도 뒤질 거 같은데 여길 대체 어떻게 치운단 말인가.
그런데 이걸 돈까지 받으면서 청소랑 유지 보수까지 시킬 수 있다고?
이게 천재가 아니면 대체 어느 누굴 천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 여길 다 치워요? 저 아직 직원이…….”
“렌털 프리해 준 돈으로 새꺄, 사람 쓰면 되잖아. 어차피 지역 경제 활성화 위해서 온 거 아냐? 그리고 사무실 렌털 비용도 여기로 돌려. 그럼 한 달에 사람 두세 명은 충분히 쓰고도 남을걸.”
해 봐야 백만 원인데 사람 두셋을 어떻게 쓰나 싶긴 하겠지만.
파키스탄 한구 지역의 인건비라고 하는 것은 저렴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사실 저것도 공정 거래에 가치를 두고 있는 회사라 그런 것이지, 현지 임금 수준으로 맞추면 저 세 배도 가능했다.
“그건…… 음. 그것도 그렇긴 한데…….”
“하는 거 봐서 관리비 결정할 거야.”
“아니…… 관리비를 유동적으로 둔다고요?”
‘당연하지. 기름 끌고 오는 거 다 우리 손으로 하는 건데 그게 가격이 맨날 같겠냐?”
“어…….”
데니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이는 건 천장이었지만 그의 후두엽에 맺힌 건 스미스의 얼굴이었다.
‘이거 말하면 뒤지겠지.’
협조하라고 했지, 가서 노예 짓 하라고 했냐고 뭐라 할 게 뻔했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이 있다면, 한구 병원은 감청 대상에 속해 있지만, 아직 이 빈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 싸게 했잖아. 싸게…… 내가 좀 고생하면 되는 거야.’
평생 여기서 썩을 생각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 데니스는 자신이 당한 사기를 자기 선에서 덮기로 작정했다.
강혁은 그런 데니스의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끼. 너가 어디 가서 이런 걸 말하겠니.’
이건 마치 검사나 변호사가 사기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강혁은 변호사 친구 하나가 사기당해 놓고도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던 것을 떠올렸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요원도 비슷할 거 같다 했더니, 역시나였다.
“자, 그럼 내일부터 농장일 끝나면 여기로 와서 청소해. 직원 따로 뽑아서 낮에 하는 건 우리가 감독해 주겠지만, 알지? 여기…… 아주 열심히 일하는 풍조는 아닌 거.”
“하…… 아마 제가 거의 다 해야겠죠.”
“그래, 잘 알아듣네. 역시 우수한 요원이야.”
“하…….”
말 그대로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었다.
강혁이 방금 언급한 것처럼 이곳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있는 힘껏 일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돈을 더 주니까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주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하.”
해서 한숨을 더 쉬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름 아닌 리처드였다.
“자, 이럴 때 하는 말을 가르쳐 줄게요.”
리처드는 아주 진중한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데니스로서는 당연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눈앞의 이 사람은 CIA 요원이지 않은가.
한구에서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놈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무슨 말을?”
“이거 해 보면 확실히 기분이 나아져요, 앞으로도 계속 저…… 저 백강혁 보려면 배워야 해.”
리처드는 계속해서 데니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동시에 이미 껄껄 웃으며 내려가고 있는 강혁을 가리켰다.
“그…… 도움이 되는 말이 있나요?”
데니스는 안 그래도 뭔가 답답한 것이 잘 안 풀리는 기분이긴 했다.
이런저런 미국 욕을 해 보긴 했지만, 부족했다.
리처드는 그런 데니스를 보며 다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한 마디, 아주 또박또박 알려 주었다.
“자, 해 봐요. 시.”
“시.”
“발.”
“발.”
“이번에 연달아서, 시발.”
“시발. 어?”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당한 억울하고 분했던 감정이 조금은 풀리는 듯한 느낌.
리처드는 데니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거 없이 백강혁을 견디는 건 말이 안 돼.”
“고맙…… 고맙습니다. 훨씬 낫네요. 훨씬…… 나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