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685)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685화(685/1120)
685화 늘려 가는 루틴 (2)
“나 여기 오기 전에 싹 했는데?”
외래가 끝나자마자 들이닥친 강혁을 보면서도 한유림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방금 말한 것처럼 국경없는의사회에 투신하기 전에 한국대학교 병원에서 VVIP 검진 세팅으로 싹 긁고 온 참이기 때문이었다.
내시경 정도가 아니라 저선량 폐 CT에 골밀도 검사 등등.
이 나이에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건 다 한 몸이었다.
“1년 정도 된 거 아닌가?”
그런데 강혁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지나칠 정도로 당당하고 해야할까.
“1년……. 그렇긴 하지. 내년에 들어가서 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1년 정도 되긴 했더랬다.
검진하고 바로 파키스탄으로 오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선 대한민국에서 봉사를 위해 기본적인 1차 진료에 대해 수련받는 시간이 있었다.
그 후에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본부에서 봉사하는 내용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내가…… 내가 봉사 준비한 것까지 따지면 벌써 1년이구나.’
처음엔 1년 딱 깔끔하게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찌저찌 뭉개고 있다 보니 여기가 일상이 된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강혁은 어쩐지 회한에 젖은 얼굴이 된 한유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이미 결론을 내린 참이었기에 전혀 설득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지, 아니지.”
“뭐가 아냐. 내년에 한다니까?”
“생각해 봐요. 여기 와서 고생 많이 했지? 체중 얼마나 변했어.”
“어……. 한 5kg 빠졌지.”
“노화도 1년 더 된 거고.”
“그야…….”
세상에 1년 지났는데 나이 안 먹는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생물도 1년 지나면 그만큼 낡는 게 이 세상의 이치였다.
엔트로피 법칙도 있지 않은가.
“1년 나이 더 먹고, 5kg 체중 감소가 있고. 고위험군이네.”
“아니……. 난 살을 뺀 거지. 백 교수 때문에 매일 위에 끌려가서 운동을 그렇게 하는데?”
“여기서 먹는 음식들도 바뀌었잖아요. 속이 어디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아?”
“그…… 아니, 잠깐만. 그럼 백 교수도 할 거야?”
그래, 할 거면 너도 해야지.
백지장도 맞들면 더 가볍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즐거움은 나눌수록 두 배가 된다는 말은 솔직히 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고통은 혼자 겪는 게 아니라 남도 겪게 되면 적어도 마음만은 훈훈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60넘게 살아온 한유림이 몸소 체득한 사실이었다.
‘오, 잘한다.’
‘파이팅.’
뒤따라와 있던 샘이나 리처드, 츠요시 등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자 당한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강요했던 강혁도 당한다고 생각하니 훨씬 나았다.
얼마든지 궁둥짝을 깔 수 있겠단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나? 나야 해야지. 당연히. 제일 먼저 할 건데?”
“아, 그래?”
그런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하겠다고 하니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놈이 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겠다는 느낌도 일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퍽 정확한 편이었다.
“내가 다 생각해 둔 명단이 있거든. 하나라도 수틀리면 닥터 제인이나 닥터 미유키가 누워야 해.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 왜, 왜?”
“이 양반이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까……. 다들 무슬림이잖아.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거야, 뭐 용납이 된다 쳐도. 어떻게 외간 여자 앞에서 남자가 궁둥짝을 까. 쿠란 위반하는 거지.”
“어…….”
한유림은 정말 그런가? 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외래 수간호사 역할을 마치고 들어와 있던 카심이 눈에 띄었다.
뭐라도 병원에 궂은일을 하게 되면 무조건 자원했던 그가 한유림의 눈을 피했다.
“너, 넌 안 해?”
“저도 무슬림이라……. 교리에 위반되는 일은…….”
“카심, 너 나일롱 신자잖아! 기도도 빼먹는 거 여럿 봤는데?”
“어휴,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수술 시간 말고는 다 하거든요?”
“새벽 기도는 많이 빼먹잖아, 솔직히. 너 기도했으면 우리 다 그 시간에 깼을걸.”
“그…… 너무 힘든 건 알라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이건. 이건 못 하시고?”
“네. 확신합니다. 이맘(이슬람 사제)께 여쭤봤어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맘이 카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얼마 전 칼에 찔려 반송장이 되어 온 것을 살려 준 게 바로 이 한구 병원이었으니까.
하지만 한유림은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거기까지는 미처 떠올리지도 못했다.
“와…….”
이 새끼 이거 참 편리한 신앙 생활 하는구나.
한유림은 그에 비하면 그래도 일요일마다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드리는 자신은 독실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별로 쓸모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해야 된다니까. 요 며칠 아무거나 드셨을 테니까 그냥 저녁부터 굶어요.”
“내 나이에 그렇게 굶으면 죽어!”
“건강한데 뭐.”
“건강하면 왜 검진을 해?”
“혹시 모르니까. 아휴, 이 양반 이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그럼 나 닥터 미유키한테 가요? 그 사람은 거절 안 할 거 같은데.”
닥터 미유키라.
한유림은 여전히 혼자만 마음에 품고 있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아내를 닮아 좋았는데.
알고 지내면 지낼수록 좋은 사람이란 것만 배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대장 내시경이 아니라 뭘 요청해도 들어줄 터였다.
“아, 안 돼. 그건…… 내가 할게.”
“어차피 할 거면서 튕기긴,”
“하아…….”
한유림은 한숨과 함께 방 안에 있는 인원을 돌아보았다.
“잉.”
보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백강혁, 한유림, 츠요시, 리처드, 샘에 이 자리에 없지만 아마도 하게 될 것이 뻔한 요다, 댄, 장까지 해 봐야 모두 8명 아니던가.
근데 어디서 2명을 구해 오겠다는 걸까.
“사람이 모자라지 않아?”
“아니, 딱 맞는데. 열 명.”
“우리 병원 8명…… 아닌가?”
“와……. 이 사람이 따뜻한 척하면서 이렇다니까. 츠요시 비서 잊었어요? 지금도 땀 흘려 가면서 일하고 있을 텐데.”
“아……. 아, 맞네. 근데 어디 갔어? 최근에 못 본 거 같은데.”
한유림은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고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느껴질 만큼이나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 갔어요?”
심지어 츠요시도 비서를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싸가지 없는 매국노라고 비난만 할 일은 아니었다.
츠요시도 카슈미르까지 끌려다녔을 만큼이나 정신없이 시달렸으니까.
게다가 리처드나 카심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의 행방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백강혁뿐이었다.
“아, 몰랐나. 내가 얘기 안 했어?”
“안 했어요! 했으면 저는 기억하죠.”
“방금 전까지 존재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 아무튼. 어디 갔어요.”
“커피 농장 갔지. 병원 일은 걔가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거 같아서.”
“네……?”
농장에 갔다고?
일본에서는 그래도 정치 지망생이었던 내 비서가?
물론 정작 함께 있을 땐 딱히 잘해 준 기억은 없지만.
여기 와서는 거의 인격 개조라고 해도 좋을 만한 과정을 거친 츠요시 아닌가.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파, 팔았어요?”
“미친놈이. 팔긴 뭘 팔아. 다 정당한 대가 받고 일하고 있어.”
“근데 저는 생사도 모르고요?”
“궁금해한 적도 없잖아. 적어도 대장 내시경 받을 만큼은 건강해. 괜찮아.”
“허…….”
츠요시는 충격받은 얼굴로 비척거리다가 뒤에 있던 벽에 부딪히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유림은 잠시 츠요시의 망연자실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여전히 하나가 비지 않은가.
생사도 몰랐던, 솔직히 말하면 이름도 모르는 비서까지 해 봐야 9명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응? 아니, 이 양반 진짜 왜 이래. 우리 가족 같은 애 있잖아.”
“가족……? 너 설마.”
“그래, 데니스.”
가족은 개뿔이.
맨날 뜯어먹기만 하는 게 무슨 놈의 가족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데니스 볼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가 움츠려졌었는데.
이젠 궁둥이까지 까겠다니.
이놈이야말로 악마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 그러다 진짜 자다가 총 맞아…….”
“에이, 이번에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
“의사가 사람 살리는 게 당연한 거지!”
“그 사람은 진짜 죽을 사람이었어, 나 아니면.”
“그…….”
이렇게 광오한 말이 또 있을까?
나 아니면 못 살렸을 거라니.
하지만 맞는 말이긴 해서 또 더 뭐라고 하기도 그랬다.
게다가 막상 찾아간 데니스가 보인 반응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공짜로 검진을요? 아유, 당연히 해야죠.”
“궁둥짝 온 병원 사람들한테 까야 되는데?”
“그거 뭐……. 다들 의료진인데요. 설마 녹화해요?”
“녹화는…… 대장 내시경 화면만 하기는 할 거야.”
“그걸로 나 누군지 알아보면 그건 승복해야죠. 괜찮습니다.”
“오호…….”
이로써 제일 나쁜 놈인 강혁과 제일 한구 병원과 관계없는 사람인 데니스가 오히려 가장 흔쾌히 대장 내시경을 허락한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먼저 얘기를 꺼냈던 한유림은 물론이고, 아직 말을 전해 듣지도 못한 사람들까지 도매급으로 싹 다 궁둥짝을 까게 되었다 이 말이었다.
장규선은 죽을상을 하고 모여든 인원에게 물통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번에 내시경 물품을 사면서 같이 구매한 관장용 약이었다.
어딘가에서는 알약도 나왔다고 하던데.
아직 그렇게 업데이트된 약까지 받기엔 돈이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전달해 준 인원의 능력이 모자랐던지.
‘드니스가 다 나았으면 혹시 몰랐는데.’
잔뼈 굵은 로지스티션의 휴민트 대신 다른 걸 동원하려니 아무래도 애로 사항이 꽃 필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부터 이거 마시고……. 싸셔야 되는데. 아시다시피 숙소동 화장실이 총 3개뿐입니다. 쌀 사람은 열 분이고요.”
“아…….”
“그래서 말인데 병원에서 주무실 분 자원 받습니다. 어차피 화장실 끼고 주무셔야 될 거예요.”
“그렇군요. 음.”
한유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단 눈으로 앞에 놓인 물통을 노려보았다.
마시기 좋으라고 넣은 레몬 향이 어쩐지 열 받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여성 분들 그리고 카심은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참아 주세요. 여러분도 물론 마려울 수 있는데, 이분들은 진짜 죽어요.”
“네, 물론입니다.”
“아유, 제가 해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한유림의 감정이나 생각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한구 지역에 제대로 된 내시경 설비를 갖춘, 그리고 그 내시경을 다룰 수 있는 의료진이 있는 병원이 생긴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 아니겠는가.
팀장인 제인부터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정말이지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지 않은가.
만약 이 중 하나라도 펑크를 낸다면 얼마든지 깔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강혁과 데니스가 하겠다는데 거기서 감히 안 하겠다고 나선 이는 없었다.
심지어 새벽녘까지 화장실 파티가 이어졌음에도 그랬다.
“자, 그럼 백 교수님부터 하시죠. 누우세요.”
“네. 이거 되게 헐렁하네. 뒤가 나풀거리니까 이상해.”
“뭐……. 그렇죠. 이게. 근데 수면으로 진짜 안 하실 거예요? 위는 몰라도 대장은 이게…….”
“제가 깨 있어야 더 잘 배우죠.”
“이게 체험한다고 더 잘 배워지는 건 아닌데…….”
“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남들은 재우죠.”
“도움이 되면요?”
“다 맨정신에 하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