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689)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689화(689/1120)
689화 장 원장 출격 (1)
“일단 한국 갔다가 일본으로 가시는 거죠?”
강혁의 말에 장규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이틀 전부터 싸 두었던 짐을 확인하다 말고서였다.
“아……. 그래야죠. 안 그래도 한국에 있는 동기들이 제 소식을 엄청 궁금해해서요.”
“그중에 혹시 봉사 원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아.”
그래도 2달간 따로 떨어질 예정이니 뭔가 다정한 인사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한다는 소리가 인력 수급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물론 기분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 사람이 일관성이 있으려면 이쪽으로 있어야지.’
백강혁이 이런 사람이라서 수많은 봉사 예정지 중 이곳을 고른 거 아니겠는가.
“아마 있을 겁니다. 제 나이쯤 되면 슬슬 봉사 생각도 나는 법이거든요. 특히 의사들은 더하지 않을까요? 봉사하기 이만큼 좋은 직업도 없으니까요.”
다들 그렇진 못할 터였다.
아직 아이가 덜 자랐거나, 독립하지 못한 경우엔 따로 떼 놓고 어디 나다니기 어려울 테니까.
혹은 개업에 실패해서 벌어 둔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봉사에 대한 열망 한 스푼 정도는 품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살다 보면 삶의 가치라는 것이 단지 돈 위에만 놓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법이었으니까.
장규선은 아마도 나이 든다는 것이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관점의 변화에서 오지 않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요? 그럼 좀 잡아…… 아니지. 잡아 오는 건 좀 그렇고.”
제 딴에는 퍽 멋진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주하고 있는 강혁은 별로 감동적인 동기 따위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로지 이곳에 와서 일해 줄 일꾼이 더 생기냐 마느냐에만 눈을 빛냈다.
“안과, 안과가 좋겠어요. 원장님도 보셔서 알겠지만 여기 뭐……. 백내장이 천지에 깔렸잖습니까. 그 사람들 다 백수 되고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것만 교정해 주면 팔다리는 멀쩡하니 먹고살 수 있을 거예요.”
“아……. 안과. 음.”
“왜요? 없어요? 안과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좀 봉사에 관심이 없나?”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수가 적잖아요. 그래도 뭐 찾아보긴 하겠습니다. 근데…….”
장규선은 왜 백 교수 차원에서는 찾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애써 뒷말을 삼켰다.
‘하긴 이런 사람이랑 친구로 오래 지내긴 어렵지…….’
실력도 좋고 훌륭한 일도 많이 하는 데다가, 사명감도 최고이긴 하지만.
그놈의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목숨 걸고 봉사 온 사람이 개차반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한번 겪어 보면 세상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네. 교수님. 맡겨 주세요. 어차피 단기라 휴가 대신 오라고 하면 올 친구들 많을 겁니다.”
“네, 단기죠 그럼. 장기는 저도 안 바라요. 한국대 병원도 들러 주시고. 제 얘기해 주면 애들 좋아할 겁니다.”
“네네.”
장규선은 자기 할 말만 남기고 떠나가는 강혁을 돌아보다가, 다시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어차피 놓고 가는 게 있어도 다시 올 것이니 상관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는 동안 여정을 덜 심심하게 해 줄 노트북이니 탭이니 하는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곳 한구 병원은 봉사 자체도 힘든 편이었지만 이동도 험악했다.
일단 여기서 이슬라마바드까지 가는 길만 해도 걱정이었다.
‘허리가 남아나려나……. 보조 시트라도 사 와야지, 이거.’
오는 길에 덜컹거리던 걸 떠올리면 딱 죽을 거 같았다.
그나마 그땐 드니스라는 실력 있는 로지스티션이 있어서 중간중간 검문소에서 시간을 끌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 양반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가는 길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오!”
그때 밖에서 강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괴롭힐 때 말고는 좀처럼 하이 톤이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지금은 전심전력으로 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잖이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또 리처드가 야동보다 걸렸나?’
만약 사진이나 영상까지 찍혔다면 저렇게 소리를 질러 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오!”
그런데 뒤이어 소리 지르는 친구가 리처드였다.
적어도 당한 게 리처드는 아니란 뜻이었다.
‘벌써 한유림 교수님 엉덩이에 꽂았나? 아닌데? 이틀 연속 굶게 하는 건 무리라고 했는데?’
한유림이 강혁이 소리친 이유가 누군가의 고통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은 머릿속에 떠올린 모두가 다 소리친 이후였다.
그러니까 제인마저 하이 톤의 소리를 지른 후에야 장규선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당 쪽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드니스였다.
“다 나은 건가?”
강혁은 드니스의 어깨 쪽을 부여잡고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웃옷을 훌렁 제꼈다.
그러자 강혁이 여러 차례 갈랐던 흉터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어…….”
드니스는 설마하니 이렇게 개방된 곳에서 옷이 벗겨질 줄은 몰랐는지 꽤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상대가 강혁이 아니었더라면 그 당황은 좀 더 지속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로 한 순간부터 강혁을 대면하게 될 거란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아야지 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네, 괜찮습니다. 덕분에…….”
“그렇네. 기능도 다 괜찮지?”
“네. 비장 말고는 뭐…….”
“그거 감염 주의해야 해. 이제 정글 같은 곳은 절대 무리야. 알지?”
“네, 그럼요. 예방 주사도 다 맞았어요.”
“잘했네. 근데 벌써 일 시작하는 건가?”
강혁은 드니스 뒤로 세워져 있는 커다란 픽업트럭을 바라보며 물었다.
트럭엔 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병원 직원들이 하나둘 내리고 있는 참이었다.
내시경 이후 아직 농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비서와 츠요시도 끼어서 일하고 있었다.
아마 저 물품들 중 태반이 츠요시 쪽이 부담한 200만 달러로 사들인 것이란 건 꿈에도 모를 게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고작 한국 김을 보며 화색이 되진 않았을 테니까.
“몸도 다 좋아졌는데 더 쉬어서 뭐 하겠어요. 일해야죠.”
“무리는 안 하는 게 좋은데. 외상이…… 이게 보통 일이 아니긴 하거든.”
“그렇지 않아도 지부장님이 당분간은 이슬라마바드랑 한구 지역만 왕복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길이야, 많아야 주 2회고 아니면 주 1회니까 부담은 안 됩니다.”
“음.”
강혁은 잠시 눈을 감고 여기서 이슬라마바드까지 가는 길을 떠올렸다.
협정이 이루어진 후, 그리고 현 정권이 서방 세계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한 후로 조금씩 수복이 되어 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자연 환경 자체가 척박하지 않던가.
하루 이틀 새에 좋아질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뭐…….’
강혁은 이제 눈을 뜨고 드니스를 바라보았다.
혈색이나 눈동자 색, 혀의 색 등을 미루어 볼 때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원체 근육량도 괜찮은 편이었던지라 지금도 썩 나쁘진 않아 보였고.
그렇다면 그 정도 업무는 괜찮을 터였다.
‘내 수술이 쓸모가 있었구만.’
이럴 때가 외상 외과 의사로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목숨만 간신히 붙여 놓은 게 아니라, 일상으로 복귀시켰다는 느낌이 들 때.
단언하건대 이러한 종류의 보람은 아마 다른 직종으로는 느끼기 쉽지 않을 터였다.
‘힘들어도, 의사 하길 잘했지.’
강혁은 스스로 뿌듯해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충전하며 여태 붙잡고 있던 드니스의 어깻죽지를 놓아 주었다.
“그래, 딱 그 정도가 좋겠네. 운동은 하고 있나? 팔 만져 보니까 좀 쉰 거 같은데.”
“아……. 해도 됩니까? 웨이트도?”
“팔다리 다친 것도 아닌데 뭐. 신장에 무리 가지 않을 정도론 해도 돼. 일부러 무리 주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열심히 해.”
“음.”
“알았어?”
“네네.”
드니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만에 보자마자 질문 공세에 이어 잔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강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날 살려 준 거야.’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돈이야 못 받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심지어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늘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살아난 이후 내내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인 지부장에게 물어도 뚜렷한 답을 들을 순 없었다.
맨정신으로는 떠올리지 못할 거 같다고, 술까지 들이켰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술 먹고 주절거리는, 쓸데없는 개똥철학과 같은 소리였다.
다만 이 한마디만은 기억에 남았다.
‘그 사람의 꿈에 동참하도록 해. 무슨 꿈인진 모르겠는데……. 아마 존나 힘들지 않을까?’
지부장은, 평소 그렇게 험한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는 지부장은 이례적으로 ‘존나’에 힘을 줘서 말했다.
드니스도 십분 공감하는 바였기에 딱히 반발심이 들진 않았다.
일견 전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백강혁의 꿈은 도대체 뭘까.
그 꿈이 대체 얼마나 원대하기에 이런 사람에게도 꿈으로 남아 있을까.
그런 미지의 세계에 동참해도 되는 걸까.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가게 될까, 등등.
수없이 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지만, 드니스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인생도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던가.
은인의 꿈에 남은 평생을 바쳐도 좋을 거 같았다.
“아무튼, 목숨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렇다고 또 그런 마음을 일일이 늘어놓기엔 쑥스러웠다.
해서 그냥 의례적인 인사인 양 감사 인사를 하고 말았다.
강혁은 그런 드니스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튼? 누가 보면 목숨 살려 준 게 아니라 잃어버린 쿠션 같은 거 찾아 준 줄 알겠어? 왜 이렇게 쿨해?”
“아니, 감사하다니까요?”
“그래, 뭐. 감사하다는데 뭐 어쩌겠냐. 계속 하던 일 열심히 하라고. 오늘 저기 장규선 원장님 잘 모셔서 가고.”
“네네. 그럼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오는 길에 무슨 변동 사항은 없었고?”
이 말은 곧 지금까지 약 친 사람들 문제 안 생겼냐는 뜻이었다.
드니스 대신 땜빵 치던 로지스티션은 그놈들이 자꾸 시비 거는 통에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수 시간 씩 늦어지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돈도 적잖이 뜯기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아니란 건데, 그 친구들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 한 달이면 드니스 얼굴도 잊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 저야 뭐. 괜찮습니다. 인맥 좋아요.”
대답하는 투를 보니, 정말로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빈말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랬더라면 지금껏 이 험한 일을 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해서 강혁은 안심한 얼굴로 드니스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동시에 장규선은 결연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우선 한국에 도착하면 한국대학교 병원부터 들를 생각을 하면서였다.
‘양 센터장님이 좋아하시겠지? 백 교수님 얘기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