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715)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715화(715/1120)
715화 삶의 질 (1)
“헉.”
데니스는 훈련받은 요원답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눈을 떴다.
그리곤 침대 옆에 두고 있던 서랍에서 총을 서둘러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누군가 그 서랍을 발로 꾹 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으아아!”
덕분에 손가락이 낀 데니스의 입에선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그보다 더 데니스를 괴롭게 하는 것은 역시나 두려움이었다.
‘뭐지? 뭐냐고.’
아직 방에 불을 켜지 못했기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탈레반인가? 아니면 ISI?’
만약 여기가 파키스탄이 아니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한구 지역이 아니라 수도 근처라면 이런 일을 겪는다 해도 의심할 만한 대상을 좀 더 제한할 수 있었을 텐데.
워낙 오지이면서 동시에 정치 역학적 험지인지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아마도 최악의 상대는 탈레반, 그중에서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일 터였다.
계속되는 아프가니스탄 내의 미군 작전으로 인해 떠밀리듯 파키스탄 북부로 내려온 그들은 미국인을 상대로 복수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파키스탄 탈레반 정도는 부드럽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누, 누구요.”
하지만 데니스는 애써 두려움을 억누른 채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적에게 넘어가서는 안 될 정보들을 떠올리면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기반 마련을 위해 온 몸이었지만, 강혁과 얽히고설키면서 본의 아니게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된 마당이었다.
‘이런 젠장.’
그런 것들을 알려 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혼자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한편 데니스를 마주하고 있는 강혁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아침쯤 사람들 올 거라고 얘기도 해 놓은 참 아니던가.
해서 별 경계심도 없이 계단 밟고 올라왔는데, 올라와서 보니까 서랍에서 총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설마 이 기회에 나를 제끼려는 건가 하는 생각에 우선 신발을 차 넘겨서 서랍을 1차로 닫고, 달려와서 발로 차면서 닫아 버렸다.
오랜만에 총을 봐서 그런가 천하의 강혁도 당황한 나머지 힘 조절이 안 되었는데, 그 때문에 데니스는 좀 더 긴장하게 되었을 터였다.
“누, 누구냐고.”
해서 데니스는 마른침을 삼킨 채 어둠 속의 강혁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강혁과는 달리 일반인의 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식별은 불가했다.
반면 강혁은 데니스의 얼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겁먹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카메라를 갖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찍어다 스미스한테 보여 주면 무슨 말을 할까?
‘아깝긴 한데……. 지금은 다른 게 급하지.’
여러 놀릴 방안이 떠올랐고, 그중에는 정말 아까운 것들도 많았지만.
강혁은 다행히 남 놀리는 것보다는 아직 환자 살리는데 더 주안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병신아, 뭔 소리야.”
“응?”
“나 백강혁이야.”
“아……. 백강혁……. 당신 역시 첩자…….”
민망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병신인 건지.
강혁은 잠시 고개를 가로젓다가 단 한 방에 데니스를 정신 차리게 할 방법을 찾았다.
“억.”
기계든 뭐든 튼튼해 보이는 물건이라면 이상할 때 한 대쯤 쳐 보는 것도 방법 아니던가.
강혁은 역시나 아까보다는 명료해진 데니스의 눈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뭔 미친 소리야. 단기 팀 도착했어. 새벽 비행기로 떨어졌는데, 안 쉬고 바로 온대. 원래 점심쯤 받기로 했는데, 아마 아침에 올 거 같아.”
“아, 단기 팀. 지금 몇…… 몇 신데요?”
“이제 5시 다 되어 가. 아까 4시 반쯤 출발한다고 연락 왔으니까……. 3시간이면 오지 않을까? 하나도 안 막히잖아.”
“안전한가? 그……. 하이웨이 북쪽은 아직 위험하지 않아요?”
“ISI 측에서 호위하는데 감히 누가 건드려.”
“아……. 그쪽도 움직이셨구만.”
데니스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강혁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에 강혁이 불을 켜준 덕에 옆얼굴을 똑똑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잘생기긴 오달지게 잘생겼다…….’
만약 내가 이 얼굴에 이 능력이 있으면 절대 의사는 안 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겨우 단기 봉사 팀 하나 오는데 ISI에 CIA까지 동원할 수 있는 양반이었다.
만약 정보 요원이었다면 아마 할 수 있는 일의 사이즈가 차원이 달라졌을 터였다.
“뭘 봐, 인마. 일어나 봐. 숙소 어떻게 꾸몄어? 물탱크는 잘 채워 놨지?”
“아……. 네. 일단 보여 드릴게요.”
“음. 그래. 옥상부터 가 보자.”
“네.”
데니스는 부리나케 옷을 주워 입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강혁이 처음 건물을 임대해 주었을 때는 솔직히 여기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던 공간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틈틈이, 정말이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보수 공사를 해 댄 결과, 이곳은 어엿한 집이 되어 있었다.
끼익.
예전엔 잘 열리지도 않던 옥상 문도 잘만 열렸다.
조금 빡빡하다는 것이 단점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열렸다.
“어우, 추워.”
어느덧 9월에 접어든 지 오래인 한구의 새벽 날씨는 상당히 쌀쌀한 편이었다.
강혁이야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뚱한 얼굴이었으나 거의 헐벗다시피 하고 있던 데니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날씨가…… 아유.”
“위로 올라왔잖아. 그래도 저기 산들보다는 낫지, 뭘.”
데니스의 엄살 아닌 엄살에 강혁은 북쪽에 위치한, 깎아 내지르는 듯한 산맥을 가리켰다.
대한민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산들과는 그 모양새 자체가 달랐다.
우리네 산은 물론 험준한 부분도 있지만, 나무도 있고 해서 아무튼 간에 푸르지 않은가.
하지만 이곳의 산들은 그저 돌이었다.
그것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솟아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경외감이 들게 할 지경이었다.
한유림은 이곳 사람들이 유독 종교적인 이유가 어쩌면 저 산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더랬다.
‘지랄.’
강혁은 아주 짤막한 대답으로 한유림의 대자연에 대한 감상에 대응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에 비해 데니스의 반응은 상당히 떨떠름한 편이었다.
‘지금 보여서 가리키는 건가.’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지 않은가.
억지로 떠올려 보려고 하면 산맥이 생각나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 보이는 건 그저 깜깜한 무언가뿐이었다.
“야, 어디 봐. 왜 아무것도 없는 데를 그렇게 보냐. 무섭게.”
“에?”
“초점이 이상하다고 너. 귀신에 홀렸냐?”
“아, 아뇨. 근데…… 귀신을 믿어요?”
데니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탱크 쪽으로 향했다.
원래 있던 탱크는 총에 맞은 건지 뭔지 구멍이 너무 많이 나 있어서 데니스가 사비로 바꾼 물건이었다.
볼 때마다 강혁에게 당했던 것이 생각나서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도 사람답게 살게 해 준 물건이라 기쁘기도 했다.
“귀신? 뭐…… 그게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강혁은 그런 데니스의 뒤를 바짝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날씨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말하는 사람이 강혁이라 그런가 음산하기 짝이 없게만 들렸다.
“뭔……. 뭔 소린지…….”
특히 데니스는 스미스나 리처드, 한유림 등을 통해 강혁에 대해 들은 게 워낙 많지 않은가.
대부분은 오늘은 어떻게 괴롭혔는지,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긴 했지만.
그중에서 데니스가 아, 이건 기억해야겠다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강혁의 눈에 대한 것이었다.
‘뭔가…… 우리한테는 안 보이는 걸 본다니까?’
리처드한테서만 들은 말이라고 하면 무시했을 터였다.
서글픈 말이지만, 데니스에게 리처드는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미스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닥터 백의 제자들 말을 종합해 보면 확실히 그 사람 눈에 뭐가 있어.’
그런 인간이 귀신에 대해 믿거나 안 믿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데 어찌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새벽이라 어둡기도 한 데다가, 하필 방금 탱크 위로 올라와서 그런가 발밑도 흔들거렸다.
“어디 봐.”
“으.”
심지어 뒤에는 강혁이 있었다.
“뭐야. 왜 이래.”
“아, 아뇨.”
하지만 명색이 요원인데 무섭단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일단 태연한 척을 하기로 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좀 더 물어봐야지……. 이렇게 깜깜한 데서는 말고…….’
해서 데니스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탱크 안쪽을 가리켰다.
플래시를 비추자 거의 끝까지 차오른, 깨끗한 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공동 우물 형식으로 물을 충당하고 있는 한구에서 이만한 물을 준비했다는 건, 죽도록 고생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새끼, 잘했네.”
강혁이 또 부려 먹을 땐 부려 먹지만, 기분 좋으면 칭찬도 할 줄 아는 인간 아니던가.
예전엔, 그러니까 재원 하나 부릴 땐 정말이지 칭찬에 인색했었는데.
간혹 칭찬도 해 줘야 더 잘 부려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조금 변한 마당이었다.
“아, 네…….”
역시나 데니스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놈이라 제법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강혁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했던 일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럼 숙소로 갈까? 이번에 단기 팀 인원이 꽤 많다고.”
“그쪽은 준비 다 된 거예요?”
“우리 건물? 우리야 다 됐지. 한 교수님이 당직 쭉 서 준 덕에 나머지가 좀 놀았잖아.”
“아……. 하긴 거기 뭐 전담 직원도 있죠?”
“전담? 아, 아……. 그…….”
“이름도 모르시네.”
“넌 알어?”
“저는 당연히 모르죠.”
둘이 떠올린 것은 츠요시의 비서였다.
말 그대로 자기 이름도 모르는 놈들에게 이런저런 부림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본인이야 인성 개차반 시절 츠요시에게 당하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고 얘기하고 있는 모양인데, 주변 사람들은 다들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여우의 신포도 같은 방어 기제로만 여기고 있었다.
“오……. 침대 싹 해 놨구나?”
“네? 아, 네. 어차피 사업 확장하면서……. 곧 한국인 직원들도 올 예정이라 겸사겸사 마련했죠.”
“돈 잘 버네.”
“아니……. 돈을 벌고 있지는 않은데.”
“이런 거 다 비용으로 털려면 꽤 벌지, 뭐. 최소한 손해는 안 보고 있지 않냐?”
“그…….”
데니스는 이게 그냥 넘겨짚는 건지 아니면 뭔가 아는 게 있는 건지 헷갈렸다.
상대가 그냥 의사라면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여길 텐데, 백강혁이다 보니 그랬다.
“뭐…… 그렇죠.”
“그럼 됐지. 아무튼, 잘했네. 음……. 이번에는 진짜 크게 하는 거야. 저번에야 뭐 외상 수술만 주구장창 하다 갔지만, 요번엔 달라. 지역사회 봉사 느낌이 훨씬 크니까……. 너도 될 수 있으면 나와서 얼굴 비추라고. 환자 안내라도 좀 하고.”
“네, 그래야죠. 그게 사업에 보탬이 될 테니까.”
“보안도 더 신경 쓰고. 알았어?”
“네네.”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알지? 수도에 있던 사장님. 이번에도 오셨어.”
“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