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806)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806화(806/1120)
806화 진료 전에도 (1)
외교부 4급 공무원 한석준은 누와라엘리야 호텔 지구에 위치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지어졌다는 건물 안에 마련한 사무실이었는데, 큰 창이 인상적이었다.
그 창으로 내다보이는 누와라엘리야의 차 밭 풍경은 인상적이다 못해 환상적일 지경이었다.
“하아…….”
솔직히 나랏밥 먹는 공무원으로 이만한 사무실을 혼자 쓸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한숨이 아니라 웃음이 터져 나와야 정상이라는 건데, 이상하게 계속 한숨만 나왔다.
“왜 그래?”
마주 앉아 있는 인간 때문이었다.
본인이 괴롭게 만들어 준 주제에 천연덕스러운 표정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체격이야 밀릴지 모르겠지만, 키만큼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허허. 이 친구.”
그의 눈빛을 읽은 한유림이 즉각 나섰다.
조카의 팔뚝을 가만히 두드려 주면서였다.
‘그러다 뒤져, 이 녀석아.’
그리곤 눈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한석준이야 당최 뭔 소린지 알아들을 길이 없었지만.
어른에 대한 공경으로 일단 참기로 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강혁이 내민 서류를 보면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립톤이 소유한 차 밭을 뺏는 게……. 내가 맡은 임무의 첫 단계라고?’
립톤이 대체 어떤 회산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굳이 국제적인 위상을 끌고 들어올 필요도 없었다.
스리랑카 내에서의 힘만 본다면 어지간한 다국적 기업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었다.
립톤 소유의 차 밭이 즐비한 누와라엘리야에서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유지도 이런 유지가 없는데…….’
와서 인사 나눈 누와라엘리야 시장이 제일 먼저 소개시켜 준 사람이 바로 립톤 회사 관계자들일 지경이었다.
심지어 관료주의가 만연한 후진국으로서는 실로 드물게, 시장이 외국계 회사원들에게 하대하지 못했다.
해서 한석준도 제일 먼저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래야 여기서 무슨 일을 해도 진행이 될 거 같았다.
‘그거 때문에 어저께도 립톤 지부장이랑 술 먹고 사우나는 없어서 못 갔는데. 밭을 뺏어?’
이 양반이 미쳤나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호언장담한 것에 비해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없거나.
물론 강혁은 미친 것도 아니었고,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왜 한숨을 쉬냐고.”
“아니……. 어떻게 립톤 소유의 차 밭을 뺏습니까…….”
“아,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닌데. 잘못 알아들었구나.”
“아, 그렇죠? 그렇구나. 네, 그럼 제가 뭘…….”
“헐값에 사.”
“아…….”
뺏는 거랑 헐값에 사는 거랑 같은 말 아닌가.
한석준은 이제 한국말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름 우리말 겨루기에 나왔던 아나운서랑 이름이 같기도 하고 또 같은 청주 한씨인 데다가, 항렬도 같아서 나름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해 왔음에도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가 얼마나 큰 회산데…….”
“일단 있어 봐. 난리 날 테니까.”
“난리가 나요?”
“그래.”
“뭐……. 국가 전복이라도 꿈꾸는 건 아니죠?”
말을 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느낌이 팍팍 왔다.
하지만 백강혁이라면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미친 인간이니까.
“미쳤나.”
그 인간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으니까 굉장히 속이 상했다.
해서 티를 내려고 했는데, 강혁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뭔 국가 전복이야. 나처럼 평화로운 사람한테. 그리고 여기 내전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전복을 해. 뭐야, 외교부 직원이 아니라 국정원이야? 공작해, 여기서?”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대체 무슨 난리가 난다는 겁니까.”
“나도 어떻게 날지는 모르지.”
“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해서 집안 어르신이자, 최근 들어 청주 한씨가 배출한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인 한유림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해서였는데.
놀랍게도 한유림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허.”
“허는 무슨 놈의 허야. 그쪽이 해야 할 일만 정해 줄 테니까……. 그거나 하라고.”
“아니……. 헐값에 사라면서요. 그것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매물이 나오면 사라는 거야. 내가 뭐 내놓지도 않았는데 가서 사래?”
“내놓겠습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윈데.”
사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말도 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홍차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누와라엘리야에서 나는 홍차는 최고로 쳐줬다.
이곳 산지에서 산다면 몇 불도 채 하지 않는 것들이, 고급 상자에 포장되고 나면 100불도 우스워 보일 만큼 비싸게 팔려 나갔다.
한데 립톤이 그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은 터무니없이 적지 않은가.
이런 사업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한석준이 립톤이라면 그런 얘기 꺼내는 놈의 입부터 찢어 놓을 거 같았다.
“내놓게 될걸.”
하지만 눈앞에서 웃고 있는 강혁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렇게 될 거 같기도 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한유림은 벌써 립톤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너무 다 빼앗기진 않기를…….”
강혁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면서였다.
외교부 공무원이자,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얼추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는 한석준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어르신이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나.’
그런 말이 돌기도 했더랬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부귀영화를 다 마다하고 한구니 뭐니 하는 곳만 돌아다닐 턱이 있겠냐는 말을 문중에 계신 여러 어른들이 해 댔던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튼, 그거 매물 나오면 사야 되고. 다음은…… 이거. 이게 사실 어려운 일인데. 사는 거야 뭐 바지사장으로 나서는 거라 별거 없을 거고.”
“바지…….”
“그건 넘어가. 이거 보라고.”
“아, 네.”
첫 단추도 못 끼울 거 같은데 다음 안건이 뭐가 중할까 싶었지만.
여기서 그만합시다 했다간 어쩐지 주먹이 날아들 거 같았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강혁은 분명 자신의 뺨 언저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해서 한석준은 급히 강혁이 내려 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어…….”
첩첩산중이라더니.
이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립톤한테 차 밭 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아니,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졌는데 그래도 이것보다는 나았다 싶었다.
“아니……. 여기 타밀 사람들한테 스리랑카 주민 번호를 부여하라고요?”
“그래. 이게 말이 되냐? 멀쩡히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데 왜 국적이 없어.”
“그걸 저한테 말씀하셔도…….”
타밀 족속의 안타까운 사연 정도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립톤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속한 이들을 악랄하게 부려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한석준은 어디까지나 외부인 아닌가.
스리랑카 정부에서조차 손 놓고 있는 일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단 말인가.
“외교관으로 온 거 아냐. 지금 스리랑카에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있는데, 이것도 부탁 못 하나?”
“그…….”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싸하긴 했다.
확실히 대한민국에서 이곳 스리랑카에 투자하고 있는 금액은 장난이 아니었다.
대부분 대한민국의 건설사들이 그 열매를 따 먹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마련된 인프라는 스리랑카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스리랑카는 개발 건을 제외하고도 대한민국에 대한 감정이 퍽 좋은 편이었다.
쓰나미 당시 쏟아진 온정 덕이었다.
“어? 그것도 부탁 못 해? 그러고도 대한민국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어?”
“아니……. 그…… 알겠습니다. 근데…… 이게……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뭐.”
“사실 몇 명이 살고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뭘 어떻게 요청합니까.”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타밀 족속의 디아스포라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기에 그랬다.
벌써 고향을 떠나 국적을 잃게 된 지도 수십 년이 훌쩍 지나지 않았던가.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그들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모두에게 버려진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
“일단 절차만 만들어 놓으라고. 여기서 나고 자란 거만 입증되면 바로 주민 번호 발급될 수 있도록. 내가 뭐 몇만 명을 한꺼번에 하라고 하는 게 아냐.”
“아……. 음, 뭐 그 정도라면…… 얘기는 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내가 효용이 있게 할 거니까 그런 건 걱정 말고.”
“아, 네.”
강혁은 그 외에도 관광지 내에 현지인들이 해 볼 만한 사업이면서 동시에 수요가 있을 만한 것들을 알아보라는 주문을 했다.
하나같이 한석준으로서는 황당하기만 한 얘기들이었다.
외교관이 언제 관광지 상품을 생각해 봤겠는가.
“아니, 대한민국 외교관이 그런 거 몰라? 관광 대국을 꿈꾼다며?”
“그건……. 그건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또 지들끼리 책임 돌리는 거 봐. 공무원들은 왜 그래?”
“아니, 관광은…… 이름부터 거기 써 있는데요?”
“노려봐?”
“아뇨. 아닙니다.”
억울함을 토로해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대화는 강혁이 이끄는 대로만 흘러갔다.
“아무튼, 그거 알아봐. 그 왜…… 그런 거 있잖아. 솜사탕 기계 같은 거. 그런 건 싸고 뭐 재료 수급이 어렵겠어? 관광객들도 하루 이틀은 사 먹을 수도 있지.”
“아…….”
“아는 개뿔이. 아이디어가 없네. 이런 거 좀 생각하라고.”
“맥반석 오징어?”
“올라오다가 상하지. 생각이 없네.”
“냉동차…….”
“그럼 원가가 오르잖아.”
“아.”
단순히 대한민국에 있는 휴게소를 떠올렸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인프라가 쫙 깔린 대한민국에서도 물류 이동의 중심이 되는 고속도로에 있는 상점들 아닌가.
게다가 대한민국은 이미 소득 수준이 냉장차를 쓰든 냉동차를 쓰든 별 상관 안 해도 될 정도까지 오른 마당이었다.
이곳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해서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강혁이 손가락질해 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이렇게 무례할까 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이렇게 멍청해서 어디 쓸모가 있겠나.”
“에이, 그래도 행정고시 붙은 사람이야. 똑똑해.”
“공부머리랑 일머리랑 다르지. 리처드 봐. 븅신이었잖아. 그나마 내가 가르쳐서 그렇게 된 거지.”
“그럼 뭐 이 친구도 백 교수가 좀 가르…… 아니, 아니다. 내가 괜한…….”
심지어 면전에 대고 멍청하다는 등의 인격 모독적인 말을 해 대고 있었다.
더 상처가 된 것은 한유림이 딱히 열심히 변호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말은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판명되었다.
“그래, 내가 가르쳐야겠다. 어차피 이거 다 전화로 할 수 있잖아. 다음 주까지 사무실 비워. 병원으로 출근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