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870)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870화(870/1120)
870화 이런 걸 한다고? (1)
재원의 간곡한 청에 강혁은 환자에게 가는 대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재원이 말했던 환자를 보낸 농장에 전화하기 위함이었다.
“네, 블루 리프 농장입니다.”
각 농장마다 나름 고유의 이름들이 있었다.
입맛이 둔감한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농장마다 차 맛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는 티백 차는 고급 제품에 들어가지 못하는 찻잎을 마구 갈아 만들기에 섞어 만들지만, 위 등급으로 가면 차의 세계도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선천적으로도 그렇고 후천적으로 감각을 갈고 닦은 강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누와라엘리야 병원 백강혁입니다.”
“아, 네.”
강혁의 단호해 보이는 말투에 관리자가 긴장했다.
이미 누와라엘리야 전역에서 강혁은 상당한 유명인사였다.
우선 호텔 단지 쪽에서 저명인사를 살려 줬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이에 더해 감히 다니엘 러셀에게 시비를 걸어서 비웃음을 샀다가, 오히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직 미군이 다니엘에게 강탈한 차밭의 주인이 강혁이 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꺼림칙했다.
긴장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보내 준 환자 중에…… 이름이 아툴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툴……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명단을 보는 중인 모양이었다.
숙소를 비롯한 여러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들을 보면 이렇게까지 관리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농장 입장에서 노동자들은 자산이었다.
자산 관리의 일환이라고 보면 이해가 훨씬 쉬웠다.
명석한 두뇌에 힘입어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혁은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러야만 했다.
“아, 네. 목 아프다고 했었네요.”
“거의 몇 달은 됐을 텐데, 누가 깔아뭉갰지?”
물론 억누른다고 해서 막 억눌러지지는 않았다.
강혁은 상대가 나쁘면 나쁠수록 안심하는 타입 아닌가.
두려움 대신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인간이었다.
마음껏 괴롭힐 수 있으니까.
“네? 그…… 목 아픈 건…… 저희 매뉴얼상 경증…….”
“지랄. 니들이 의사야? 목 아픈 게 이유가 한두 가지냐?”
“제, 제가 결정하는…….”
“닥쳐.”
“네. 죄송합니다.”
강혁은 기어코 사과를 듣고 나서야 씨근덕거리는 숨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곤 진짜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이까짓 관리자 따위가 아니란 생각을 했다.
물론 나쁜 놈이긴 했다.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매뉴얼이고 나발이고 돌볼 생각을 해야지.
그걸 핑계로 내깔겨 두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뭐 그런 건 좀 나중에 생각해야지.’
하지만 강혁은 나름 일의 순서를 따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해서 물색없이, 아무 소득 없는 화만 내는 대신 원래 했어야 하는 말을 꺼냈다.
“아무튼, 그 아툴. 목 안에 암이 있어.”
“네? 암이요? 그럼 죽는 겁니까? 이것 참…….”
“미쳤어?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치료할 생각부터 해야지, 대뜸 죽는단 소리가 나와?”
“아……. 아, 죄송합니다.”
관리자는 별생각 없이 죽음을 떠올린 참이었다.
다른 세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 노동자들에게 죽음은 참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존재였다.
병원 가서 치료받고 다시 일터에 복귀하는 것보다 그냥 죽고 다른 이로 대체하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지극히 중세적인 기업 마인드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혁의 눈에 비친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도 있는 법이지만.
최소한의 노력은 기울여야만 했다.
“수술할 거야. 수술 중 조직검사 결과 봐서……. 방사선 치료 정도는 해야 할 수도 있어.”
“음…….”
“일터 복귀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그동안 이 사람 일자리 보전해 놔.”
“아, 그게…… 저희 매뉴얼…….”
“한 번만 더 매뉴얼 얘기해 봐. 나 블루 리프 어딨는지 알어.”
“어…….”
상대가 내가 있는 장소를 안다는 게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 있는 일이구나.
관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한참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본사 직원이 물었다.
“뭐야?”
마침 이 전화를 끊든가 누구에게라도 맡기고 싶었던 관리자는 서둘러 답했다.
“아, 네. 누와라엘리야 병원의 백강혁입니다. 일꾼 하나 수술하려는 모양인데…….”
“수술? 음.”
본사 직원은 아까 아침에 전해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이 좋지가 않아.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고. 그렇게 되면 알지? 우리 같은 현장직들부터 날아가는 거야.’
말이 현장직이지, 사실상 일 하나 안 하는 꿀보직이었다.
본사에 있는 사람들이야 오지에 오기 싫어 어떻게든 미루지만, 그들보다 못한 스펙 탓에 떠밀려 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노동 환경에 만족하고 있었다.
날씨도 시원한 휴양지 날씨인 데다가 음식도 썩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일이 없었다.
이곳에서 영국인은 마치 식민지 시절의 지배층과 같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분명 치료하는 거 생색낼 거라고 했지?’
그러면서 동시에 의료진 파견 따위는 없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처음 들을 땐 이게 말인가 방귄가 싶었으나, 생각해 보니 여기엔 백강혁이란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 돕는 데 환장한 사람.
다큐멘터리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척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평범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용해야지.’
직원은 스스로 기가 막힌 생각이라 여기면서 전화를 넘겨달라고 손짓했다.
그동안에도 계속 시달리고 있던 관리자는 서둘러 전화를 넘겼다.
“안녕하세요, 닥터 백.”
“응? 이건 또 뭐야.”
“저는 리프 사의 존입니다. 블루 리프 농장을 비롯해 다섯 개 농장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뭐가 되었건 더 높은 놈이 받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말이 더 통하지 않을까?
“어, 처음부터 말해야 하나?”
“누가 아프다고요?”
“그래, 아툴. 암이고 수술해야 해. 방사선 치료도 받아야 할 수 있어. 그럼 수도 가야 하는데……. 그사이에 자르지 말라고.”
“아, 물론입니다.”
“응?”
얘기를 해 보니 말이 통하는 수준이 아니라 너무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아마 강혁이 조금이라도 더 순진했던 때라면 무턱대고 좋게만 생각했을 터였다.
가령 아, 이 사람은 좀 다르구나. 뭐 이렇게?
하지만 아쉽게도 강혁은 한국대학교 병원의 외상센터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부터 너무 많은 이상한 놈들을 겪어 온 바 있었다.
‘새끼, 이걸로 분위기 반전시키려고 하는구나.’
게다가 강혁은 원래도 나쁜 놈이라 나쁜 놈들의 생각을 아주 잘 알았다.
“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아, 네네. 근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어떤 청이죠?”
“수술 과정…… 이나 치료 과정 같은 거 좀 저희가 영상이나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까요? 자세하지는 않을 겁니다.”
직원은 강혁이 눈치챘다는 건 추호도 모른 채 입을 털었다.
머릿속엔 강혁을 이용해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꽃밭에서 사는 인간이잖아. 봉사라니, 세상에.’
순진한 봉사자 하나 벗겨 먹는 건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그가 조금이라도 더 관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주의를 했겠지만.
아쉽게도 누와라엘리야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던 사람조차도 물들게 하는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다.
“좋죠.”
“알겠습니다. 그럼 수술 날짜 알려 주시죠.”
“네. 내일모레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해서 강혁의 승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칭찬받을 생각에 희희낙락하면서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혁도 웃고 있었다.
마냥 밝아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보고 있자면 소름이 끼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뭐, 뭐예요.”
데니스가 물었다.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면서였다.
강혁은 그런 데니스를 방금 지었던 표정을 유지하면서 바라보았다.
“그래, 너 마침 잘됐다.”
“네? 저 잘못한 거 없는데요?”
“누가 잘못했대? 찔리는 거 있냐?”
“아, 아뇨.”
데니스는 혹 며칠 전에 강혁이 맛있다고 했던, 이곳에서는 구하기 힘든 소갈비 먹었던 게 걸렸나 해서 떨다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강혁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어차피 어디 도망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지 않은가.
잘못한 게 있다면 곧 걸릴 터였다.
찰나의 순간이라면 몰라도 영원히 강혁을 속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어……. 수술방에 왜 왔어요.”
강혁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불 꺼진 수술실이었다.
원래 불 꺼진 곳은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기 마련 아닌가.
그중에서도 병원은 좀 심한 편이었다.
학교보다도 더했다.
특히 수술실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요원 훈련을 받았고, 나름 현역 요원이기까지 한 데니스조차 뒷걸음질이 자연스레 나올 지경이었다.
“너 몰카 잘 설치하지?”
“네? 아니, 뭔…… 갑자기 몰카 얘기가 왜 나와요.”
“음…….”
강혁은 어리둥절해하는 데니스를 두고 수술대를 잠깐 바라보다가 어느 한 지점을 짚었다.
수술 장면을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하지만 어느 정도 담아내려면 딱 그 위치가 좋을 거 같았다.
그 말은 곧 리프에서 보낼 촬영팀이 여기 어딘가에 올 거란 얘기였다.
“여기 사람들 서 있으면…… 이놈들 하는 얘기랑 표정 같은 거 잘 잡을 수 있어?”
“카메라로요?”
“어, 이놈들은 모르게.”
분명 아무도 없는 상황임에도 강혁은 마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데니스는 이 양반이 뭐가 보이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구에서 한번 강혁 때문에 귀신 체험 비슷한 것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없는 거죠?”
“뭔 미친 소리야. 여기 뭐가 있어? 이 자리엔 없어.”
“이 자리에는 없다는 게…….”
“자세히 듣고 싶냐?”
“아뇨, 아뇨. 아닙니다. 제발 하지 마세요.”
확실하게 하려다 된통 당할 뻔한 데니스는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강혁은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재차 물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찍을 수 있어, 없어.”
“그거야 뭐…… 어렵지 않죠. 원래 맨날 하던 일인데.”
“좋아. 그럼 설치해 놔. 음성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그걸 어따 쓰려고요?”
“카운터로 쓸 거야.”
“네?”
“지금 말해도 못 알아먹을걸. 하여간 할 수 있지? 해 놔.”
“아, 알겠습니다.”
원래 자신이 뭐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하는 일만큼 짜증 나는 일도 드물 터였다.
하지만 데니스는 요원이었다.
그것도 CIA.
하급 요원일 때는 정말이지, 내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정보 요원의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기에 그랬다.
덕분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요구에도 나름 익숙한 편이었다.
열과 성을 다해 설치를 하고 나니, 딱 이틀 뒤 리프에서 사람이 왔다.
휘황한 장비를 가지고서였다.
“음, 이쪽에서 촬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일 잘 나올 거예요.”
강혁은 그들을 예정된 자리로 안내했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가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