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901)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901화(901/1120)
901화 이제부터 너희들은 말이야 (3)
강혁의 말에 의료진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전 외래가 넷이니만큼 명당 60명에서 70명만 보면 되지 않았나.
이것도 물론 적지 않은 숫자긴 하지만, 수술이 끝나는 대로 또 외래 진료 인원이 충원될 테니 별로 우려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둘이 빠지면 두당 120에서 140명이었다.
‘말이 되나?’
‘허…….’
그나마 한국 의료에 익숙한 사람들은 당황함이 덜했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지금도 대학 병원의 갑상선 센터나 당뇨병 센터 같은 곳의 외래는 유명 교수인 경우 오전 타임에 100명 가까이 보기도 해서였다.
그런 얘기를 옆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러니까 원래 한구 병원에 있다가 끌려온 이들 또한 절망에 빠지진 않았다.
리처드, 샘 등이 그랬다.
‘어떻게 사람이 오전에 100명을 봐?’
‘오전 오후 다해서도 어려울 거 같은데.’
하지만 미국에서만 일하다 온 잭과 노아는 그 몇 분지 일도 익숙지가 않았다.
심지어 둘은 외상 외과라 외래가 주된 업무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야전에서는 이런 저런 간단한 외래를 봐야 하겠으나,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부림을 당한 적은 없었다.
“노아.”
“아, 네. 교수님.”
그때 강혁이 나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잭보다는 강혁에 대한 태도가 유보적이었던 노아는 이제 눈이 충심으로 빛났다.
강혁의 개인적인 매력 덕분이기도 했거니와, 어제의 연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 부탁해. 여기 사람들은 우리 아니면 아무도 없어.”
“아…….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혁의 말은 거기에 불을 지핀 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혁은 참 훌륭한 사람이라 믿고 있는데, 여기서 또 훌륭한 말이 나오지 않았나.
노아는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니……. 사람을 하루 만에 홀렸네.’
‘저 멍청한 놈……. 좋단다.’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대강 요약하자면, 저놈은 왜 저렇게까지 순진할까 정도가 될 터였다.
그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들 또한 강혁에게 속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단기도 아니었다.
최소 1년이었다.
‘아무튼…… 신입이 최선을 다해 주면 좋기는 하지.’
‘잠자코 있어야겠다. 괜히 산통 깰 필요는 없지.’
‘알아서 하겠다는데…….’
‘허허, 다 늙어서 이게 뭐람.’
게다가 노아가 뼈가 부서져라 일하게 되었을 때 이득 볼 사람은 노아 빼고 나머지 전부였다.
환자에게도 좋을 일일뿐더러,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도 좋았다.
해서 모두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눈길 한번 주는 것만으로 분위기 파악을 끝낸 강혁은 얼떨떨한 얼굴로 곁으로 다가와 있던 잭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린 가자고. 어제 타고 온 비행기로 가면 되겠네. 따로 안 기다려도 되겠어.”
“아……. 네.”
그리곤 어느새 도착해 있는 미군 차량에 탑승했다.
차량은 오프로드건 어디건 다닐 수 있는 지프차였는데 당연히 승차감은 별로였다.
“어이구.”
강혁이야 익숙하기도 한 데다가, 어지간한 일로는 엄살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기도 해서 조용했으나 잭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이 지역의 도로포장 하는 일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미군 측에서 할애하는 예산은 병원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이 일은 오로지 병원이나 스리랑카 정부에서 해야 하는데 둘 다 돈이 없었다.
한동안은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부우웅.
안 좋은 도로 사정 때문에 한참처럼 느껴지는 길을 달리자, 곧 비행장이 나왔다.
원래 같았으면 이곳에서 계속 있지 않고 바로 수도로 떠났을 비행기도 보였다.
아무래도 어제는 도착 시간이 늦어서 하루만 밖에서 버티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누와라엘리야는 안개가 많아 아침과 저녁에는 기상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보니,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터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비행기로는 얼마 안 걸리는 길이라 해도, 이착륙하는 데 걸릴 수십 분을 아낄 수 있지 않은가.
“탑승하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어, 간만이네.”
“간만은요. 지난주에도 봤는데.”
“기분 좋아 보이네.”
“여기 숙소가 경치가 진짜 좋거든요. 날씨도 시원하고. 수도랑은 영 딴판입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여기가 참 좋은 곳이지.”
기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방금 말한 것처럼 경치가 좋아서 그런 건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우웅.
비행기는 기장의 표정만큼이나 가볍게 비행장을 떠났다.
안개가 아직 자욱하게 끼어 있었으나, 별문제는 안 되었다.
애초에 비행기에 레이더가 있어서 지형지물 파악이 어렵지도 않았거니와 기장 또한 벌써 여기 와 본 게 여러 번이라 익숙해진 덕이었다.
슈우웅.
비행기는 곧 스리랑카 섬을 벗어났다.
영해를 이토록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건 다 스리랑카 정부의 배려 덕이었다.
배려라기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와의 경협에 대한 보답 같은 의미가 더 크기는 했지만.
하여간 덕분에 비행기는 곧 구조 요청한 지점에 닿았다.
이렇게 보면 아주 빠르게 간 거 같지만 이미 수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환자는 어떻게 됐지?”
강혁을 불러야 했을 만큼 급한 환자이지 않은가.
충분히 잘못되고도 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몇 번은 이대로 항공 모함에 섰다가, 급유만 하고 돌아간 적도 있었다.
해서 강혁은 지금 용병이 옮겨진 채 치료받고 있는 군함에 전화를 걸었다.
커다란 배에는 선의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시설이 군함만은 못하기 마련이었다.
안 그런 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네, 백 교수님. 일단 수혈하면서 버티고는 있는데……. 아까보다 소변량이 줄었습니다. 이거…….”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가고 있군…….”
“네. 어렵겠습니다.”
“흠. 그래도 일단 거의 다 왔으니……. 보기는 해야지.”
“네.”
다발성 장기 부전이란, 원인이 뭐가 되었건 간에 혈류량이 줄어들면서 결국 여러 장기가 한꺼번에 망가지는 상황을 뜻했다.
주로 패혈증이나 심각한 출혈 시에 발생했다.
한번 이 궤도에 접어들게 되면 되돌리는 게 아주 어려웠다.
가능한 빨리 원인을 교정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벌써 다발성 장기 부전이면…….”
힘겨운 얼굴로 옆에 타고 있던 잭이 물어 왔다.
처음보다는 나아 보였으나, 지금 봐서는 딱히 내려서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았다.
‘상관없지.’
부려 먹는 건 누와라엘리야에서만 해도 충분하긴 할 터였다.
애초에 이 녀석들을 받겠다고 한 건, 교육을 위해서 아닌가.
실제로 강혁에게 있어 외상 처치하는 데 도움이 되려면 리처드나, 재원 또는 한유림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나머지는 미안한 얘기지만 걸리적거릴 가능성이 훨씬 컸다.
“괜찮아. 판단은 내가 해. 오늘은 그냥 지켜보라고.”
“아……. 네.”
해서 강혁은 괜찮다는 말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계획을 짜기 위해서였다.
대강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는 노티를 받아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구체적인 상황 파악이나 어찌할지 계획 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강혁은 얼추 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경험과 가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재능 덕이었다.
‘그래……. 지금 문제가 되는 건 화상하고…… 관통상인데. 아마도 관통상이 치명적이겠지. 화상 범위가 좁지 않은 편이지만 이것만으로 다발성 장기 부전이 올 정도는 아냐. 들어가자마자…… 여기부터 손봐야지.’
강혁이 남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머릿속으로 하는 동안 비행기가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극도로 짧은 착륙장만 있어도 내려설 수 있는 기종이다 보니, 착륙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어우.”
“음.”
물론 급제동이 필요하기는 했다.
덕분에 강혁과 잭은 몸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가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혁은 곧 몸을 훌훌 털고 일어나 잭을 밖으로 끌어냈다.
벌써 이만한 흔들림은 지겹도록 겪은 탓이었다.
본디 죽어도 이상할 거 없는 사람을 살리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 강혁의 생각이기도 했다.
“아, 네.”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 밖으로 나가니, 피 칠갑을 한 간호 장교와 몇몇 군인들 그리고 용병 관계자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용병 마크는 아주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블랙워터스였다.
“어.”
“안녕하십니까, 백 교수님. 말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중 수염을 기른 용병 하나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강혁은 어차피 걷고 있는 길이기도 했고, 딱히 용병이 진로 방해를 한 것도 아닌 데다가, 블랙워터스 마크가 반갑기도 해서 악수를 받아 주었다.
“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네. 행크의 후임입니다.”
“후임이라고? 행크는 어떻게 됐지?”
일반적인 회사와 달리 PMC, 즉 용병 집단은 죽음이 일상에 깔려 있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일을 한다고 하지만 고액 연봉을 달리 주겠는가.
후임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지금껏 겪은 죽음들이 떠올라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염은 강혁의 얼굴을 보고는 급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은퇴해서 텍사스로 돌아갔습니다. 농장으로 놀러 오라더군요.”
“난 또…… 소원 성취했네. 나한텐 말도 안 하고, 이 새끼가.”
“엽서 보냈다던데요? 계시는 곳이 멀다 보니 시간이 걸리나 봅니다. 간 지 얼마 안 됐어요.”
“아, 그래. 그렇군. 하여간…… 상태는 어떻지?”
“안 좋습니다.”
수염의 얼굴에 지어졌던 억지웃음이 금세 사라졌다.
누가 봐도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RPG에 당했다지 않는가.
지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수염도 자잘한 부상들이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나, 아마 꽤나 아플 터였다.
“그래, 빨리 가지.”
“네.”
강혁의 말에 따라 앞장서서 걷던 간호 장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강혁과 잭 그리고 나머지 인원도 보폭을 맞춰 좁다란 선실 복도를 부리나케 걸었다.
그나마 수술실로 향하는 곳이라 침대는 지날 수 있게 만들어져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건장한 사내 둘이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 자연히 한 줄이 형성됐다.
강혁이 간호 장교 뒤에 바짝 붙었기에 그가 제일 먼저 수술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환자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 쪽으로 모두 라인이 달려 있었다.
피가 벌써 꽤 들어갔는지, 빈 백이 보였다.
‘이렇게 되면 파종성 혈관 내 응고 장애도 걱정해야 할 판인데.’
어째 새로운 정보가 습득되고 있기는 한데, 그중 좋은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간호 장교는 시시각각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는 강혁을 돌아보고는, 발을 수술실 문 옆에 있는 홈에 끼워 넣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죠.”
“아니, 손 닦고 들어가지.”
“바로…… 수술하시려고요? 환자 상태 안 보시고요?”
“이미 봤어. 충분해.”
“어…….”
“잭, 너도 손 닦아. 시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