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uma Center : Golden Hour RAW novel - Chapter (971)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971화(971/1120)
971화 누와라엘리야에서는 (1)
“안 온대?”
강성지보다는 좀 일찍 잤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나온 최윤섭이 물었다.
그나마 이런 일이 익숙해서 그런가. 머리도 감았고, 나름 깔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가 좀 갈라져 있었는데 최윤섭 나이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아무리 젊은 시절 운동 열심히 해서 3대 460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다 옛날얘기 아닌가.
나이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뉴스 보셨잖아요. 완전 난리 났던데.”
“하긴 그놈이 그런 거 두고 어디 갈 놈이 아니지.”
“그러니까요.”
최윤섭도 강혁이 어땠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턴 때부터 얼마나 미친놈…… 아니, 이상한 놈…… 아니, 나쁜…… 아니지. 어떤 새끼야, 대체.’
종잡을 수 없는 놈이긴 했다.
수년을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딱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힘든.
하여간 한 가지 분명한 건, 자신이 말했던 가르침을 최윤섭 자신보다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백강혁은 절대 눈앞의 환자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럼 여긴…… 우리랑 이번에 새로 온 군의관 둘이랑 커버 쳐야 되는 거네?”
“네. 아유…….”
그래서 참 좋은 제자긴 한데 지금은 그 덕에 개고생하게 생긴 셈이었다.
최윤섭은 밤새 씻지도 못하고 환자를 봤을 게 뻔한, 강혁 같았으면 그래도 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못 씻은 티가 너무 나는 강성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커피를 집어 들었다.
차만 먹기가 좀 그렇다고 농장 몇 개에 의료진끼리 먹을 커피나무를 옮겨 심었는데, 여기 토양이랑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옮겨 심자마자 바로 콩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맛도 좋았다.
강혁처럼 예민한 미식가는 아니더라도, 나름 취향이 확고한 최윤섭으로서도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맛과 향을 늘 내주었다.
“너는 먹지 말고 가서 자. 오전에는 셋이 어떻게든 봐 볼라니까.”
“아, 네. 안 그래도…… 아유,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가 봐요.”
“나이가 들었지 그럼. 거울 안 봐? 넌 좀 심해. 강혁이 봐라, 걔는 뺀뺀 하더라.”
“걔는…… 걔는 교수님 나이 돼도 그 얼굴 그대로일 거 같기도 한데.”
“아……. 싫다. 징그럽다.”
최윤섭은 너스레를 떠는 강성지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어쩐지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나.
원래 불쾌한 골짜기라고 해서 진짜는 아닌 거 같은데 너무 진짜랑 닮아 있으면 더 불쾌해지는 법이었다.
딱 이럴 때 써먹을 만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현장만 전전하는 사람이 단어 뜻 제대로 알아 뭐 하겠냐는 게 최윤섭의 지론이었다.
해서 멋대로 생각을 이어 나가면서 강성지를 내보냈다.
“아, 주인님.”
“안녕하세요, 주인님.”
아니, 내보내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곤 군의관 둘이 들어왔다.
언제 들어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해 대면서였다.
‘인계를 그렇게 받았다고 했지?’
잭이란 새끼가 도대체 가서 뭔 소리를 했길래 호칭을 주인님이라고 할까?
“어……. 그래, 이름이…… 뭐더라.”
“노예 1호, 2호로 불러 주세요. 아, 제가 1호입니다. 소령이라. 하하.”
심지어 자기 호칭을 노예라 불러 달라고 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강혁이 미군 본부에 가서 군의관 전체를 세뇌하거나 하진 않았을 테니, 모조리 잭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아니, 근데 거기도 강혁이 제자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도 정정을 안 해 줘? 한국어를 모르나?’
잭이 어떻게 해서 그런 오해를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기는 했다.
양재원 때문인데, 노예라는 말이 한국인이 부르기 제일 좋은 발음이라 생각하게 되었단 얘기였다.
아마 다른 좋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 정정을 해 주었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이지 원래 여기에 있던 팀원들은 하나같이 좋은 일을 하는 나쁜 놈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나이 지긋한 한유림도 그랬다.
‘백강혁 이놈이…… 한국말로 교수가 주인님이라고 한 거지?’
그런 상황에서 백강혁은 어떻게 나왔겠는가.
사실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교정해 주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낄낄 웃으며 이용만 했다.
덕분에 미군 군의관들 사이에서는 자기 호칭은 노예 1, 2호로 하고 백강혁, 한유림, 최윤섭과 같이 누가 봐도 교수 같은 사람에게는 주인님이라 부른다는 인계장이 돌았다.
의문인 것은 거기에도 강혁 제자가 있는데 왜 정정이 안 되냐는 것이었다.
‘음? 아……. 그래? 그렇게…… 그래, 그렇게 해.’
이건 최윤섭이 강혁의 평소 행동을 몰라서 든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미군 군의관들의 정식 호칭은 슬레이브이지 않았나.
그게 한국어로 되었을 뿐이라, 딱히 이상하게 여기고 있진 않았다.
다만 봉사 현장에서까지 그 호칭을 고집하는구나, 역시 백 교수님은 이상한 분이시다 뭐 이런 소문만 다시 돌고 있었다.
“어, 그래. 와서 먹어.”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음…….”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최윤섭은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교정을 해 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자가 좀 무서웠다.
‘쓸데없이 입 털지 마세요. 얼마나 편해. 어차피 부려 먹을 텐데……. 호칭도 그러면 좋잖아요.’
강혁이 남긴 말인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부려 먹을 거 호칭이 무슨 문제냐니.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건가.
‘아니, 애초에 여기에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들 해방하러 온 거 아냐?’
처음엔 강혁이 무슨 마약 사업이라도 하는 줄 알고 겁이 났지만 와서 보니 실제로 좋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남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이미 이루어 낸 후였다.
백 년 가까이 공고히 이어져 내려오던 족쇄를 풀었을뿐더러 다른 사업체까지 끌어들여서 차 농장 주인만 내쫓고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까지 선사해 주고 있었다.
우선 공사장이 그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21세기 노예 해방 운동이라 이건데, 정작 병원에서는 이렇게 버젓이 노예를 써?
‘나는 정말 모르겠네.’
최윤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1, 2호는 표정이 아주 밝았다.
강혁이 떠나기 전에 바로 눈앞에서 강혁이 펼치는 기적에 가까운 수술을 봤을뿐더러 녹화본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은은한 미소만 지어졌을 텐데 심지어 강혁은 여태 여기서 녹화한 수술 동영상을 죄 넘겨주었다.
그것만 보고 있어도 어쩐지 수술 실력이 느는 느낌이 들고 있으니, 진지하게 외상 외과의 길을 걷는 1, 2호로서는 기분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지들이 좋다니까, 뭐.’
최윤섭은 잠시 안타깝다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단 심정이 되었다.
설령 진짜 노예라고 해도 단기 노예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개입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최윤섭은 이 병원의 손님일 뿐이라 여기고 있었다.
강혁이 이미 최윤섭, 강성지를 이름으로 불리는 노예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였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인도 없는 병원에 남아서 개고생하고 있는 상황이 이상하게 여겨질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기에는 여기서 너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아, 주인님. 환자들 벌써 왔던데요?”
“아……. 그래.”
“그나마 백강혁 주인님이 안 계시는 게 연락이 가서 그런가? 저번 주보다는 적습니다.”
“그래야지, 어떻게 그때 보던 걸 다 보겠어.”
최윤섭은 단지 숫자의 차이도 아니라고 여겼다.
강혁은 수술뿐 아니라 외래도 기가 막히게 보지 않던가.
딱 보면 진단명이 나오는 건지 뭔지. 환자가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처방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 그랬다간 이 의사 싸가지 없다는 식의 컴플레인이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의사 얼굴이라도 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괜찮았다.
더욱이 그 처방이 정확하기 이를 데 없어, 딱딱 효과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어찌 보면 강혁은 이런 현장에 가장 최적화되어 있는 의사일는지도 몰랐다.
“교수님.”
이제 막 시리얼을 다 먹으려니 누군가 또 들어왔다.
누와라엘리야 농장을 관장하는, 강혁 만나서 사장이 된 데니스였다.
“아, 데니스.”
“환자 수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근데 공사장 쪽에서 오는 환자들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서요, 그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아, 그래야지. 공사는 얼마나 되고 있다는데?”
“올린 농장 임금보다도 더 임금이 세다 보니……. 젊은 남자들이 엄청 많이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한 달 안에 얼추 마무리되겠어요.”
“여기에 한국 호텔이 생긴다 이거지.”
최윤섭은 누와라엘리야에 강혁이 해 놓은 일은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놀랍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전 상황을 전혀 몰라서 처음엔 그냥 그런 갑다 했으나, 이제는 알지 않나.
지금도 여기 와서 일손을 보태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에게 전해 들은 누와라엘리야는 지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름을 굳이 붙여 준다면 무관심과 착취의 지옥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한국의 중증외상센터 시스템도 별반 다를 게 없기는 했어. 그것도 바꾼 놈이니…….’
어찌 보면 그곳도 누와라엘리야였다고 봐야 했다.
얼마나 많은 외상 외과 의사들이 무관심과 착취 속에 메말라 죽어 갔나.
특히 최윤섭은 자기 제자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때, 총기 넘치던 제자의 텅 빈 동공을 마주했을 때 더는 한국에 있지 못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생각만 들었던 게 아니라 도망쳐야만 살 수 있을 거 같아, 강성지만 데리고 나와 세계 곳곳을 전전했다.
그동안 강혁은 시스템과 싸워 이겼다.
여기서도 그랬다.
‘그래…….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인도에서 사람 살려라.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제자 아닌가.
그 과정에 노예가 생기고 하기는 하지만, 품은 뜻이 너무 커서였다.
다 감수할 수 있는 일이란 얘기였다.
해서 최윤섭은 분연히 일어나 외래로 향했고, 군의관 둘도 그를 따라 외래로 향했다.
그들뿐 아니라 샘을 위시한 간호사들도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았다.
덕분에 오전에는 꽤 순조롭게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데니스가 환자 수를 조정해 준 덕이었다.
“저, 교수님!”
하지만 오후에도 그러지는 못했다.
“응?”
“공사 현장 사고입니다!”
“아.”
공사 현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리랑카 정부의 요청에 따라 대다수 인부는 현지인을 쓰고 있지 않나.
돈 쓸 거면 우리나라 사람들 임금으로 써라 이건데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숙련되지 못한 노동자는 부상의 위험도 크고, 부상의 정도도 더 심하다는 통계 자료가 있었다.
외상 외과로 수십 년을 살아온 최윤섭은 통계까지 갈 것도 없이 그저 경험으로 알았다.
오늘이 처음, 아니면 일주일째라고 하며 실려 왔던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나.
“내가 갈게.”
그렇게 실려 온 이들 중 살리지 못했던 목숨들의 무게는 온전히 최윤섭의 어깨에 남아 있었다.
최윤섭은 하릴없이 몸을 일으켜 현장으로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