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3
03
파란 볼펜을 어쩌지 못하고 가방에 넣고 다닌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가방 속에 필통 같은 걸 넣고 다녀 본 역사가 없다. 오늘 쪽지 시험을 본다기에 가방을 뒤적거렸더니 이 짜증스러운 볼펜이 나왔다.
내 머릿속은 갑자기 끌려 나온 볼펜으로 인해 한 멍청이를 곱씹고 있었다. 햇볕이 센 창가 쪽에 앉아 원형 모양의 볼펜을 유심히 관찰했다. 도대체 이 볼펜 어디에 특별함이 있다는 거지? 문구점 같은 곳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거기서 열 다스는 구할 수 있을 것같이 생겼다.
“해루.”
어느 틈에 벌써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자동으로 책상에 엎드렸다. 볼펜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문득 그 멍청이가 요즘 들어 벤치에 나와 있지 않는다는 게 생각이 났다. 하기야 오든 말든 어쩌라고. 그 멍청이가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필시 나한테 괴롭힘당할까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 거겠지. 수능이 얼마 안 남았으니 공부 좀 해 보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 미리미리 안 해 두었으면 지금에 와서야 뛰어 봤자 개미지, 뭐.
“그래서 한다고?”
“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대답부터 했다. 하지만 대답을 하고 나니 질문이 무엇일지 다 알 것만 같았다. 나한테 하는 말이 늘 고정된 애가 반에 한두 명은 꼭 있었다. 여자, 여자, 여자.
“그럼 네 번호 준다.”
“알아서 해.”
“졸리냐?”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어.”
생각할수록 괘씸한 것이었다. 내 앞에서 특이한 척하려고 그림이나 그려 대고. 볼펜이 중요한 것처럼 말하더니 딱히 찾는 눈치도 아니고. 맨날 내가 축구하는 걸 지켜보는 것처럼 말하더니 그것도 아니고.
말하고 행동하고 맞는 게 없는 사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멍청한 게 거짓말까지 하고 다닌다. 그 맹한 얼굴이 볼펜 한 자루에 연연하는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이게 뭔데 계속 보고 있냐고.”
그때 뚜껑을 여닫으며 가지고 놀던 파란 볼펜을 빼앗겼다. 들어가려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지. 하필 지저분한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공부하게?”
“뭐야, 뭐야. 정해루 공부하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요즘 들어 잠잠하던 감정이 팔팔 끓어 역류하고 있었다. 저 볼펜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멍청이한테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도 아니었다. 한번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은 내 물건이었다. 빌려달라고 사정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함부로 휙 뺏어가는 게 말이 되는가.
“내놔.”
“왜 정색이야. 이게 뭔데. 한정판 볼펜?”
“야.”
“왱.”
“내놓으라고.”
좋게좋게 말할 때 들어야 사람 새끼였다. 풀 죽은 척하며 내 손바닥 위에 볼펜을 올려놓는 시늉을 했다. 그 새끼는 애당초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돌변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이거 누가 받아 봐.”
던지려는 듯이 왔다 갔다 하는 팔. 패스할 테니 받으라는 말. 요 며칠 온 마음을 들쑤신 심술이 공격할 대상을 바꾸었다.
일어나 웃고 있는 그 얼굴에 주먹을 먹였다. 손마디가 아플 즈음에 귀가 열렸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운동화 수 켤레가 모여들었다. 내 허벅지 아래에 깔린 몸뚱이와 코 사이로 흘러나오는 찐득한 피를 보자마자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친구 사이였는데 엉엉 우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도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이 손 떨리게 두려웠다.
“정해루!”
내 어깨를 잡아당기는 담임의 얼굴을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건 딱 하나뿐이었다. 제까짓 게 뭔데 내 몸에 손을 대고 난리야. 담임에겐 믿기지 않는 말이겠지만 나는 그런 나 자신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래서 부모가 나를 포기한 건가 싶었다. 그 생각을 1초라도 인정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피떡이 된 애를 내 옆에 세워 둔 담임이 코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거 때문에 싸웠다고?”
“장난이었다고요, 장난.”
“정해루. 넌 왜 말이 없어. 어? 이거 일방적 폭행 아니야?”
담임은 파란 볼펜을 책상에 증거물처럼 올려 두었다.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잘못했다고 하고 끝낼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담임 눈치를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훈계 도중 담임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 담임이 핸드폰을 만지는 동안 녀석은 팔꿈치로 나를 찍었다. 눈길을 돌려 보니 입 모양으로 자기한테 사과하란다. 그때 그놈의 얼굴 뒤로 교무실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보름달처럼 하얀 얼굴이 미소를 달면서 들어왔다.
“선생님.”
“어, 하얀아.”
임하얀이 나를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 교무실에는 우리 반 담임과 임하얀의 담임으로 추정되는 선생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고개 숙여 인사하던 임하얀이 나를 발견했다. 의아한 눈빛이 내 뺨에 꽂혔다. 쌈박질하다가 불려 오는 새끼를 처음 보는 듯한 눈빛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졌다.
아니, 내가 저를 패기라도 했나. 잘못한 것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다시 들었다. 임하얀은 제 담임과 나란히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선생과 화기애애한 임하얀의 모습은 이제껏 보았던 그 맹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정해루, 인마. 어디 봐.”
담임이 서류철로 내 팔뚝을 때릴 때 이를 악물었다. 짧디짧은 1초의 시간이었지만 칸막이 너머에서 비웃고 있을 임하얀이 떠올랐다. 어금니를 무는 으드득 소리가 머리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담임이 꺼내 놓은 파란색 볼펜을 보자 억울함이 치밀었다. 저 싸구려 볼펜이 뭐라고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만에 하나 저 볼펜 때문에 불려 왔다는 걸 임하얀이 알게 되는 날엔 이 교무실에 불을 지를 거다.
“안 되겠다. 어차피 애 얼굴 저 지경으로 만들어서 연락 안 할 수도 없고.”
“…….”
“반성의 기미도 없고. 친구한테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때 상담을 마친 임하얀이 제 담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멍청이는 그냥 가면 될 것이지 괜히 이쪽에 눈도장을 찍고 간다. 마지막까지 비웃어 줄 작정인가 보다. 옆에 선 놈이 코피를 흘리든 말든 한 대 더 때려서 눕혀 주고 싶었다. 임하얀이 교무실에서 나가기만을 빌었다. 빨리 꺼져, 제발 빨리.
한여름도 아닌데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부모님께 연락드린다는 담임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내 청력은 오로지 교무실 문 닫히는 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임하얀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도르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담임은 내게 교무실 펜꽂이에 있던 검은색 볼펜을 주었다. 하얀 종이 위에 선생이 적으란 대로 적고 기다리란 대로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고서도 교무실로 불려 갔다. 쓰다 만 반성문을 다 채우고 가란 뜻이었다.
반성문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오렌지 주스 색으로 물드는 하늘이 오늘따라 못생겨 보였다. 반성문을 검사한 담임이 가도 좋다는 말로 나를 내보냈다. 교무실 밖으로 나와 마주한 운동장에는 야간 자습을 신청한 학생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담임이 가져가라며 돌려준 파란 볼펜은 내 주머니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휑한 운동장을 지나쳐 하굣길로 내려가려고 할 때 익숙한 뒤통수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많이 본 머리 스타일이 내 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교무실에서 나를 비웃었냐고 따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왜 혼자 청승을 떠냐는 시비라도 걸어야 마음에 든 거미줄을 걷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벤치가 가까워질수록, 임하얀의 모습이 선명해질수록 오기 부리고 있는 내 모습이 징그러웠다.
나는 왜 임하얀이 신경 쓰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임하얀 같은 사람은 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말도 섞어 본 적 없는 부류의 사람이 전부터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우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그 마음의 실체를 깨닫자마자 말할 수 없이 창피했다. 주머니 속에 있는 볼펜을 당장이라도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이대로 발을 돌려서 쟤랑 멀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 부끄러운 마음을 알아 버린 이상 임하얀 앞에서 예전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임하얀이 벤치에 나와 있을 걸 고려해서 요 며칠 부지런히 축구를 뛰었던 게 한심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안녕.”
하지만 벤치에 발이 닿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해 왔다. 임하얀 같은 부류.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저런 쪽하고 엮이면 피해 보는 건 나밖에 없었다. 무시하고 돌아서려는데 주머니 속 파란 볼펜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것처럼 내 허벅지를 찔렀다.
이거 때문에 말을 섞게 될 핑곗거리가 계속해서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을 바꿔 먹었다. 운동장 쪽으로 몸을 튼 임하얀에게 뛰듯이 걸어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임하얀은 가지 않고서 나를 기다렸다. 겉으론 아닌 척해도 임하얀은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교무실에서 본 임하얀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줬다.
“이거.”
주머니에서 파란 볼펜을 꺼내자마자 임하얀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아끼던 볼펜이라는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임하얀은 제 이름처럼 하얗게 웃었다.
“세상에.”
덕분에 하려던 말을 까먹고 말았다. 예상보다 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는 임하얀의 미소는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 임하얀은 내게서 받은 볼펜을 당근 모양 필통에 소중히 넣어 두었다. 볼일이 끝났음에도 나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을 진 운동장을 등지고 서서 임하얀의 그늘 노릇을 자처했다.
가방을 다시 바르게 멘 임하얀은 내내 쓰고 있던 까만 안경을 벗었다. 동그란 안경을 치우자 본래 임하얀이 가진 날카로운 눈매가 나왔다. 저 갸름한 눈꼬리를 안경으로 가리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 받침에 눌린 콧대를 살살 문지른 임하얀이 안경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서 찾았어?”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시선 둘 곳이 없어 썰렁한 운동장을 바라봤다.
“몰라.”
하지만 이렇게 말을 끝냈다가는 임하얀이 나한테 고마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볼펜 때문에 내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생색이야 당연했다. 조금 모양 빠지지만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바닥에서.”
“내가 저번에 한 말 때문에 찾아 준 거구나.”
빠짝 마른 목으로 침만 삼키게 된다. 간다는 말 없이 운동장을 지나는데 임하얀이 내 쪽으로 따라서 왔다. 지난 불화는 까먹은 것처럼 옆으로 따라와 걷는다. 오늘 여기저기 끌려다녀서 그런지 저리 꺼지라고 말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조용히 따라오던 임하얀은 운동장을 반쯤 지날 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생각되네.”
뜬금없는 사과였다. 절대 말을 걸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을 거란 다짐이 깨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임하얀을 바라봤다. 땅만 보고 걷던 임하얀이 내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임하얀의 눈빛이 전처럼 무정하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봤을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너한테 막상 이야기해 보니까 별로라고 했던 말. 미안해.”
임하얀의 가벼운 말들이 깃털로 변해 내 마음에 쳐진 거미줄을 걷어 냈다. 머리로는 쟤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가는데 마음으로는 빨리 이 자리를 탈출하고 싶을 뿐이었다. 지나친 간지러움도 고통에 속했다.
“내 멋대로 너에 대해 생각했다가, 내 멋대로 실망이라고 난리 치고.”
“내가….”
내가 찾아 준 거 아니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버리려다가 만 거니까 그만 꺼지라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빈정거리긴커녕 입도 벙긋 못했다. 웃음기 없이 제 심정을 고백하는 임하얀이 대단할 따름이었다.
“아, 맞다.”
잘 가던 임하얀이 멈추어 서서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대로 두고 가면 될 일인데 나는 그걸 또 기다려 줬다. 기다리는 동안 안경 벗은 임하얀의 얼굴을 훔쳐볼 기회가 있었다. 립밤 바른 것처럼 빨간 입술이라든가 그 입술 옆에 있는 조그마한 갈색 점이라든가. 미친놈.
“이거.”
임하얀이 내게 건넨 건 토끼가 그려진 노트였다. 분위기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아 들었다. 동화책인가 싶어 첫 장을 펴자마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보기만 해도 멀미 나는 숫자와 영어들이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정리한 거야. 난 복사본 있고 그건 원본.”
“이걸, 어디다 쓰라고?”
“고마운데 돈이 없어서. 그래도 그거 다른 애들이 많이 탐내는 거야.”
“누가 이딴 거….”
“이딴 거?”
임하얀의 중얼거림을 듣고 뒷골이 서늘해졌다. 사람한테 풍기는 분위기가 무섭다고 느껴진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가방 속에 공책을 쑤셔 넣었다. 내가 가방 지퍼를 잠그는 것까지 확인한 임하얀은 금세 기분을 풀었다.
“이제 졸업하고 나면 너 축구하는 것도 못 보겠네. 그건 좀 아쉽다.”
꽁해 있던 내 마음이 아쉽다는 단어에 푹 꽂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한 가지 가능성에 눈을 떴다.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이유. 그리고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가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유. 볼펜을 돌려줬을 때 눈이 반짝거린 이유. 남들이 다 탐낸다던 공책을 나한테 준 이유. 고작 아쉽다는 단어 하나에서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 얘, 설마.
“너랑 내가 뭐라고. 아쉬울 것 없잖아.”
“그런가? 맨날 하던 걸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정문을 빠져나가는 길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어 임하얀과 딱풀처럼 붙어서 걸었다. 임하얀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나를 지켜봐 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학교 앞 자전거 보관소 앞에서 나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임하얀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아니면 임하얀과 집 앞까지 걸었으면 좋겠다. 후자는 심심해서 한번 해 본 소리였다.
이렇게 밋밋하고 맹하고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뭐가 달라져? 정면으로 임하얀을 마주하면, 그러면 마음 정리가 확실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주제에 어딜 넘보냐고, 네가 졸업해도 나는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쳐다봐 주면.
“난 저쪽.”
임하얀이 손가락으로 빈 골목길을 가리키며 섰다. 학교 가까운 데에 사는 애들이 그 골목길로 들어간다. 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 대로변에서 택시를 타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몸이 무거워 택시 타기가 싫었다. 임하얀보다 앞서서 그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별 인사를 준비하던 임하얀이 내 뒤를 쫓아오면서 물었다.
“이쪽에 안 살잖아.”
“내가 왜 그걸 너한테 일일이 말해야 하는데? 쫓아오지 마.”
은근히 돌려 묻는 임하얀의 화법이 웃겼다. 마치 내가 자기 때문에 택시를 안 타기라도 하는 양 얘기하는 것 아닌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나를 훔쳐보고 따라다니는 게 누군데.
임하얀은 쫓아오지 말란 말을 들었음에도 단단한 태도로 걸었다. 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내 상상력을 부추겼다. 원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이면 만족스러운 결실을 얻기 전까지 빠져나가기 힘들다. 그게 바로 내가 자꾸 임하얀을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까 왜 싸웠어?”
임하얀은 클랙슨을 울리는 차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간 뒤 물었다. 하필 귀가 좋은 나는 임하얀의 말을 지나치지 못했다.
“궁금한 거 많아서 듣고 싶은 것도 많겠네.”
비꼬듯이 한마디 했는데 역효과가 났다. 입술을 꿈틀거린 임하얀이 터지는 웃음을 제 손으로 막았다. 임하얀의 그 톡톡 튀는 웃음소리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임하얀처럼 맹한 사람의 입에선 나올 수 없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찌르는 중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웃기는 왜 웃어….”
웃을 일 많아서 좋겠다. 나는 공감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임하얀의 웃음 상자가 열린다. 그 신기한 상자 속이 궁금해 눈길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특이한 반응이, 그 이상한 말들이 임하얀 자체가 되었다. 이젠 담벼락에 칠해진 하얀 페인트만 봐도 임하얀이 떠오를 정도다.
저녁이 찾아와 하늘에 시퍼런 멍이 드는 것처럼 임하얀의 하얗기만 하던 미소도 빨간 입술과 맞물려 그 색이 변해 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미소를, 얼굴을 이렇듯 자세히 보는 게 처음이었다.
“나 이쪽으로 갈 건데.”
임하얀은 지금 걷는 골목보다 더 좁은 골목 앞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임하얀에 대한 나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저건 자기를 데려다달라고 하는 신호겠지. 보통 관심 없는 남자한테 자기 집을 알려 주는 여자는 없었다. 임하얀의 그 맹한 반응들이, 미소들이 전부 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임하얀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담백하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 학교 애들은 이 근처에 사는 애가 없어서 누구랑 같이 하교해 본 게 처음인데 이거 은근히 재밌다.”
친구 없다는 말을 길게 돌려서 한다. 밸 빠진 놈처럼 임하얀이 사는 골목까지 쫓아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인사 없이 떠나려 한 차였다. 흔들던 손을 내린 임하얀이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 회심의 한마디를 남겼다.
“보기보다 말하는 게 재밌다, 너.”
그건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진다, 성격이 왜 저 모양이냐는 말은 들어 봤어도 말하는 게 재밌다는 건 처음이었다. 나와 맞지 않는 말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임하얀이 내 어떤 모습에 그렇게 웃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 대답을 내놓으라고 말을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이 관계에서 내가 약자인 것처럼 구는 게 싫었다.
임하얀이 사라지자마자 이 지저분한 골목을 떠났다. 대로변으로 나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몸집 큰 승용차가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는 비양심적인 모습. 옆구리 터진 음식물 쓰레기봉투, 꾀죄죄한 아저씨 입을 거치고 나온 담배 연기. 나의 하굣길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불쾌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내 스트레스 지수를 높였다.
볼펜을 돌려줬다가 마음의 빚을 두 배로 얹어서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볼펜보다 부피가 몇 배나 큰 공책이 내 빈 가방 속에서 덜그럭거렸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공책은 필요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랍에 두고 못 본 척할 거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서 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가방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큰 돌덩이를 인 것처럼 택시의 속도가 다른 날보다 떨어졌다. 어쩌면 택시보다 내 마음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예, 예. 아닙니다.”
택시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통화하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인사 없이 들어가려는데 잠시 멈추라는 듯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할머니가 쓴웃음을 머금고 통화하고 있는 상대는 아마 오늘 팬 놈의 부모님이거나 담임일 터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로 통화를 끝낸 할머니는 쯧 혀를 찼다.
“아이고, 거 아줌마 욕심도 참 많네.”
이런 비슷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나한테 훈계조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과연 내가 어디까지 저질러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한계를 시험하고 싶게 한다.
“해루. 학교 다녀왔음 인사부터 해야지이.”
오늘 교무실에서 느낀 수치심은 아주 각별했다. 그런 감정을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았다. 임하얀의 눈으로 본 나의 모습은 형편없는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누구야, 전화.”
“염려 마. 할미가 어련히 잘 처리할까.”
그리고 그런 형편없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나를 형편없는 모습 그대로 두려는 조부의 관심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건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관심마저 끝나면 나한테 무엇이 남을까. 그런 생각으로 나는 다시 형편없는 길, 그 쉬운 길로 빠지고 만다. 부모의 무관심과 조부의 무관심은 결이 다르지만 그 결과는 내게 똑같이 다가왔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근 나는 가슴에 숭숭 난 구멍 사이로 바람이 지나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묻혔다. 가방을 발아래로 던지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핸드폰을 켰다. 몇십 개씩 쌓여 있는 문자를 읽다가 지쳐 스르르 잠들었다.
꿈에서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여자는 제 무릎을 내어 주었다. 고운 손으로 가슴에 난 구멍을 메워 준다고 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나는 무릎을 내어 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야 만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하얀 목과 도톰한 입술 옆 갈색의 점. 안경이 가리고 있지만 그 안경 속의 눈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꿈속의 여자가 임하얀이란 건 이상한 일이었다. 임하얀이 꿈에 나타난 게 이번으로 두 번째란 사실도.
눈을 뜬 시간은 새벽 3시. 비몽사몽 일어나 버려둔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로지 노트 한 권만이 있었다. 버리지 못하고 가져왔던 볼펜보다 무겁고 성가셨다. 노트의 첫 페이지만 펼쳐도 보이는 토끼 캐릭터와 단정한 글씨체는 그 주인을 닮았다. 내용을 알지 못하는 터라 휙휙 넘겨 보며 마지막 장까지 갔다.
뉴스만 보게 생겨서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중요한 건 파란 글씨로 적고 그 옆에 토끼가 당근을 흔드는 그림을 그려 두었다.
A 대학으로 가는 마지막 한 걸음. 힘내자.
“A 대학.”
노트에 써진 내용 중에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한 줄이었다. A 대학. 꽤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하는 걸 보니 공부는 웬만치 하나 보다. 설마 제가 어느 대학을 가는지 알아달라고 적어 놓기라도 한 건가.
오늘 임하얀과 골목길을 걸으면서 의심이 한 가지 더 늘었다. 임하얀이 나를 좋아할 가능성 같은 것. 하지만 임하얀은 다른 여자처럼 나를 좋아해서 무엇이든 해 줄 것 같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나오지 않는다. 졸업을 앞둔 평범한 수험생인 임하얀이, 꽤 모범생처럼 보이는 임하얀이 나를 좋아한다면 무슨 이유에서지.
축구를 잘하는 모습? 나보다 축구를 잘 뛰는 놈도 있을 텐데. 그리고 임하얀이 고작 그런 걸로 나를 지켜봤다고, 다시 봤다고 말할 것 같진 않다.
고민 끝에 핸드폰을 켜서 카메라로 들어갔다. 난생처음 내 얼굴을 카메라로 마주하고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정신 나간 짓거리가 무슨 짓거리일까. 당장 핸드폰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내가 내 손으로 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하얀한테 어떻게 보이나 궁금하기라도 한 건가?
창피함이 올라와 괜한 노트에 화풀이했다. 노트를 집어 들어 1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한 서랍 속에 넣어 놓았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여자, 펼칠 일 없는 노트였다. 임하얀이 나를 좋아하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건가.
임하얀은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한참 밑이었다. 조금 예쁘장하게 생긴 게 전부인 데다가 안경까지 끼면 흔한 범생이일 뿐이다. 신발도 가짜를 신고 다니질 않나 갖고 다니는 가방만 봐도 패션에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얼굴은 하얗기만 하고 입술은 빨개서 화장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촌스럽기만 했다. 입술에 난 점은 또 어떻고. 누구는 매력적이라고 쳐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옅게 난 점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내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을 할 만큼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나를 비난하는 데엔 망설임 없지 않은가.
성격도 맹하다가 저 듣기 싫은 소리가 나오면 벌처럼 톡 쏘는 편이었다. 냉담하게 뜬 눈은 보는 사람 가슴을 다 서늘하게 만든다. 그 모호한 태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내 쪽에서 손해 보는 일이었다. 시간 낭비, 정신 낭비, 그게 무엇이든 낭비다.
어쩌다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접점의 전부일 여자애. 임하얀은 처음 보는 종류의 들고양이 같은 걸 거다. 차분하게 임하얀에 대해 정리하고 나니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며 뻐기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A 대학이라는 문구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참다, 참다, 참다가 손이 근질거려 핸드폰을 건드리고 말았다.
A 대학. 검색해서 들어간 그 대학교 홈페이지에 단정한 남녀가 홍보 모델처럼 떠 있었다. 그중 여자 모델 얼굴에 임하얀을 대입해 봤다.
더럽게 잘 어울리네.
기분이 고속열차를 타고 수직 낙하했다. 구태여 검색해서 그 대학 홈페이지까지 찾아간 것부터 실수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떡하니 떠오른 임하얀을 그린 상상이 마치 실제 일어난 일 같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니 잠이나 자자 했지만 새벽 4시, 그리고 5시가 될 때까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오던 잠이 무서워 달아날 정도로 눈알 빠지게 A 대학에 관한 걸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뜬눈으로 새벽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쓰러지듯 잠을 잤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
읽을 게 없어서, 눈이 심심해서 그 노트를 다시 편 게 한 달 전. 지금 내 머릿속은 꼬부랑 글씨들이 지배하는 중이다. 그 멍청이를 보지 못한 것도 한 달이나 됐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잊는 데에 일주일이면 충분하기에 임하얀 같은 건 얼굴이 하얗다는 것 외엔 떠오르는 게 없다.
공부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펼쳐 본 것뿐이라고 혼자 되뇌었다. 임하얀이 정리한 내용은 꽤 쓸 만했다. 중학교 과정부터 고등학교 1학년 과정까지의 수학 개념을 친절히 정리해 두었다. 처음에는 버리기 전에 한번 읽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펼쳤다. 하지만 솔직히 임하얀이 반말로 써 놓은 노트 필기가 만화책보다 재밌었다.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
얌전히 생겨서 공책에는 별의별 요사스러운 그림을 다 그려 놓았다. 태어나 책 한 권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던 내가 마지막 장까지 다 본 것도 모자라 그 노트를 심심할 때마다 펼치고 있다. 맹세하건대 심심해서 그랬을 뿐이다. 내 흥미를 끌 정도면 바보들한테 이 책을 비싸게 팔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팔기 전에 상품 점검이나 하는 거다, 상품 점검.
“뭐야, 해루. 너도 이제 곧 고3 된다고 공부해?”
“내가 공부를 왜 해. 그냥 읽는 거지.”
“그게 공부 아니야?”
공부가 아니라 상품에 오류가 없는지 꼼꼼히 살폈을 뿐이다. 벽에 달린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트를 검수하느라 하루의 반을 보냈다. 이번 교시만 끝나면 점심시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공부와 담을 쌓은 앞자리 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 토끼 진짜 촌스럽지 않냐. 이거 그린 사람 성격 보이지. 태어나서 고맙다고 이딴 걸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노트를 주기엔 앞자리 놈은 격이 떨어졌다. 저거 머리는 감았나. 이런 거 봐 봤자 이해하는 놈도 아니고.
기름칠한 것처럼 번들거리는 앞머리, 쉬는 시간마다 얼마나 싸돌아다녔는지 몸에선 쉰내가 났다. 뻑 하면 교과서 위에 엎드려 자는 놈이기도 했다. 이래 봬도 그 까탈스러운 임하얀이 손수 적은 노트였다. 저런 놈한테 가는 건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야.”
“왱.”
“네 숨소리 거칠어서 짜증 나니까 앞에 보고 앉아.”
“아 왜에.”
“씻고는 다니냐?”
갑자기 책을 볼 마음이 뚝 떨어져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생각해 보니 이 책이 필요할 만큼 공부 안 하는 새끼들은 다 저 모양 저 꼴일듯싶고 이 책이 필요 없는 새끼들한테는 팔아 봤자 손해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지는 수밖에 없다. 임하얀, 이게 보면 볼수록 고단수였다. 이제껏 나한테 가방이며 운동화며 축구공이며 이것저것 다 해다 바치는 것들과 비교도 안 됐다. 4교시가 시작하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임하얀을 떠올렸다.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운동장에도 나오질 않는다. 수험생이니 3학년 교실에만 처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서? 아니, 임하얀은 그전에도 꾸준히 나를 보기 위해서 운동장에 출석했었다. 어디 아프거나 나한테 노트를 주고 나서 쑥스럽다거나, 뭐 그런 멍청이다운 이유가 아닐까.
임하얀이 왜 나오지 않을까에 대한 추측은 수십 가지다. 그중 가장 유력한 두 가지는 임하얀은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아니면 이따위 노트로 내 환심을 샀다고 생각해 자만한다거나.
하지만 이런 노트 쪼가리에 내가 감동해서 제게 관심을 가질 거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맹한 얼굴을 안 보면 나야 땡큐였다. 기왕 얻은 김에 잘 활용해서 성적 올리는 데에 써 버릴 거다.
임하얀? 그게 누구였지? 아, 그 가짜 신고 다니던 멍청이?
“해루.”
눈치 없는 새끼가 수업 시간에 말을 걸고 지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계를 보는데 이미 수업 끝나는 종이 친 뒤였다. 앞문으로 우르르 달려 나가는 같은 반 머저리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같이 밥 먹는 놈 몇몇이 뒷문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 안 먹게?”
“너희들끼리 먹어.”
“그럼 같이 매점 가자. 어? 어때.”
수업이 끝난 것도 몰랐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교실의 소란스러움이 불편했다. 기운 빠는 모기한테 걸린 것처럼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다. 점심이고 나발이고 이 교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매점, 매점, 매점.”
“아, 씨, 안 먹으니까 매점을 쳐 가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좋은 말로 하지 맨날 화내, 이 새끼는.”
“야, 그냥 빨리 와. 제육 다 없어지겠다.”
교실 안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공사장 소음 같았다.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지금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픈 거지?
가을임에도 한여름인 양 습하고 목뒤에선 땀이 흐른다. 더운 히터 바람에서 여름내 묵힌 먼지 냄새를 맡았다. 저 텁텁한 바람을 점심시간 내내 맡고 있다간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교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실소가 나왔다. 구정물 삼킨 표정에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교실 복도는 다행히 창문을 열어 두어 바람이 통했다. 복도 창문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교무실로 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빈속으로 아래층에 내려갔다가 음식 냄새를 맡으면 아침에 먹은 밥까지 게워 낼 것 같아서겠지.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를 실은 매캐한 바람이 불어왔다. 교무실로 가는 길에 수능 날짜 디데이가 적힌 낙서를 봤다. 임하얀 그것도 목도리 둘러매고 수능 고사장 앞까지 가겠지. 점수가 안 나와도 임하얀 성격이라면, 재수나 해야지 별수 있겠어, 그럴 것만 같았다. 하여간 상상에서도 그 녀석은 재미가 없었다.
학생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집 나간 정신이 돌아왔다. 학생이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둔 교무실 앞이었다. 안 빤 지 3년은 된듯한 교무실의 노란색 커튼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점심을 건너뛴 이유도 교무실에 방문한 목적도 불분명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렸다. 지루하다. 재미없다. 특별한 일 없이 물리는 하루. 우연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내 마음인데도 수습이 안 됐다. 차 사고가 나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어쩌면 큰 병에 걸리더라도 이 지겨운 삶은 내가 살아온 날들의 배 이상으로 많을 터다.
매년 비슷한 행동을 하고 비슷한 결과를 얻고 비슷한 일로 상처를 받고 비슷한 말들만 반복한다. 그렇다면 나의 10년 후는커녕 1년 후조차 기대가 되지 않는다. 죽을 만큼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 재미가 생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모든 게 재미가 없다.
운동화 밑바닥에 비벼져 일어나는 흙먼지. 그것들이 폴폴 날리는 곳에 자리한 벤치가 나의 최종 목적지였다. 비 맞은 비둘기처럼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은 곳이 여기라는 게 한심할 따름이다.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을 열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하도 자주 봐서 약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싫증이 난 핸드폰을 버려두고 고개를 뒤로 젖뜨렸다. 공 한번 차 보겠다고 쫓아다니는 인간들이 고무찰흙처럼 보였다. 남이 하는 축구는 바보들의 행진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임하얀이 이상한 거다. 여기에 앉아서 저 답 없는 놈들이 어떻게 운동장을 더럽히나 구경했던 건가.
“뭐 해.”
발밑에 구멍이 뚫린 줄 알았다. 어린 시절에 본 연극에서처럼 토끼를 따라서 굴속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쭈욱 떨어지는 기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추락임에도 설렘을 느끼는 주인공이 반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땅으로 꺼진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목에 담이 걸린 사람처럼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벤치 옆이 무거워질수록 나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간다. 허리는 붕대를 칭칭 감은 것처럼 일자로 세워졌다.
“정해루.”
흙먼지가 눈알로 들어왔다. 따가운 눈을 비비듯 손등으로 눌렀다. 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를 구덩이에 빠트린 건 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임하얀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너 핸드폰 번호 바꿨어?”
“…….”
“오늘 축구 안 해?”
뇌를 빼서 하얀 페인트에 담근 뒤 다시 머리에 끼면 이런 기분일 거다. 내가 기운이 빠진 게, 내가 이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던 게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 좋은 축구도 밥도 귀찮은 마당에 사람이 그리울까.
“무슨 고민 있어?”
“야. 좀 가라.”
“오늘 그래도 대답 잘 해 준다.”
옆에 앉은 여자는 봉긋 만 것처럼 부푼 앞머리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낯이 익다. 분명 같이 놀았던 놈 중 하나가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었다. 그럼 나하고는 처음 보는 남보다 더 어색하고 먼 사이라는 소리다.
“나 어제 이수민이랑 헤어졌어.”
이수민. 알 만하다. 놀아도 꼭 더럽게 노는 새끼들 중에 최고로 더러운 새끼가 이수민이었다. 걔랑 사귄 애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이수민 여자 친구 중에 이수민이 모범생이라고 생각하며 사귀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 갈래?”
“네 집 가서 뭐 하는데 내가.”
“위로해 줘야지, 나.”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끼리끼리. 이런 미친놈, 미친년만 꼬이는 나도 끼리끼리. 임하얀도 토끼 캐릭터 같은 것들하고 끼리끼리 어울려 놀겠지. 하얀 페인트가 벗겨지고 그 안에 죽어 있던 나의 까만 뇌가 드러나고 있었다. 인생이 지겨워도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질릴 새가 없다. 세상이 요지경이 돼서 망하는 게 나만이 아니구나 싶다.
여자의 명찰은 하얀색. 이것도 고등학교 3학년이란 소리였다. 임하얀은 도끼 들고 대학 문을 부술 생각인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이런 것들은 잘도 밖을 돌아다닌다.
“학교 옮기고 싶게 만드네.”
“전학 가게? 어디로?”
3학년은 교실 밖으로 못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이렇게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게 두는 거 보니까 이 학교도 망하기 직전인 것 같다.
“말 많으니까 귀엽다, 해루. 피부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이수민이랑 안 친해.”
“그런 것 같더라. 나 사실….”
“이수민이 키우던 개가 달려와도 안 쓰다듬어 줄 판에 이름도 모르는 여자 친구 위로하게 생겼어, 내가?”
“그렇게 사이가 나쁠 줄….”
“아니, 씨발, 야. 이수민이랑 나랑 1년에 세 마디도 안 하는 사이인데 네 집 가서 내가 위로하게 생겼냐고.”
“…….”
“좀 꺼져. 어?”
“야.”
“이래야 재밌지. 위로 좀 해 조오, 이러는 거 말고 목소리 까니까 훨씬 낫다.”
이번 미친 여자는 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역시 없던 정도 떨어트리게 만드는 방법이 이런저런 수고 안 하고 손을 털 수 있었다. 부모도 떠나게 만들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손 안 대고도 코 푸는 격이지.
“너는 마주 앉아 이야기해 보니 많이 별로다.”
임하얀의 다른 명대사들도 많았지만 그 말이 제일 베스트였다. 다달이 받아야 할 용돈처럼 때만 되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장난으로 이 새끼, 저 새끼 같은 말을 주고받고 사는데 그게 뭐 그리 충격이겠는가 싶겠지만. 이제껏 그 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든 말은 없었다. 임하얀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내 모습은 돈 까먹는 못된 벌레였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언제는 내가 괜찮았던 적이 있었나.
물론 그 말에 반발하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곧 나 자신이 괜찮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임하얀의 말을 인정하고 만다. 혹시 임하얀은 이런 수까지 다 계산을 해 둔 것일까.
학교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임하얀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임하얀의 말을. 조부모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정해루라는 사람은 최악일 거다. 나는 내가 받을 사랑과 관심의 양이 중요했지 그 외의 것은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종례가 끝나고 찾아온 청소 시간에 임하얀의 노트를 펼쳐서 읽었다. 내가 괜찮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자 임하얀을 헐뜯고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노트 안에서 임하얀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글씨체는 뻗침 하나까지 단정하고 나 같은 공부 포기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개념은 완벽했다.
“해루. 오늘도 PC방 안 가?”
“안 가.”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냐? 저번에 한승윤 때린 것 때문에 그래? 집에서 많이 깨졌어?”
깨지기는커녕 남자답다고 할아버지가 좋아한다는 걸 알면 미친놈 보듯 보겠지. 어떻게 보면 나는 이미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객관적으로 싫어하는 조부모의 사랑이고 내 것이 아니라 문제지. 내가 얻고 싶은 관심과 애정은 그런 종류가 아닌 게 분명한데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는 평생 알 수가 없다.
“힘내라. 우리 오늘 종일 사거리 PC방에 있으니까 언제든 마음 바뀌면 오고.”
“와서 라면 사 줘라.”
대충 손을 흔들어서 시끄러운 떼쟁이들을 얼른 보내 버렸다. 저 입 가벼운 놈들한테 상담을 받으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전교생이 나에 대해 떠들 터였다. 누구한테 이야기를 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현대에 유행하는 신종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쓰레받기에 쌓인 먼지를 버린 놈이 환기하자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엎드려 있으니 운동장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바다가 사라진 황색의 행성 같았다. 겨울이 목전에 왔다는 걸 알리듯 하늘이 빨리 저문다. 집에 가기 위해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가 근래 들어 이상해진 것은 임하얀 때문이었다. 이제껏 내가 정리했으면 정리했지, 남한테 내가 정리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임하얀은 어느 날 나타나 내 삶이 그렇게 엉망인가, 라는 커다란 의문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셈이다.
그래, 그런 거였다.
학교 앞 사거리 신호등에 도착했을 때 확신이 들었다. 감기약을 먹고서 푹 자고 난 다음 날처럼 뇌가 팽팽 돌아갔다. 내가 임하얀을 과도하게 신경 쓰는 이유는 아무런 예고 없이 들어와 아무런 예고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겨우 임하얀 같은 게 나를 보지 않기로 택했다는 걸 믿기 어려운 거다.
신호등을 건너서 택시 승차장 앞에 섰을 때까지만 해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신호등에 걸려 대기하고 있는 검은색 택시를 보는데 내가 낸 결론이 과연 정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쾌하다고 생각했던 결론이 전혀 명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하얀이 노트 한 권으로 퉁치고 나를 잊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제자리 걷기를 하다가 택시 승차장 앞을 떠났다. 오늘은 택시 탈 기분이 아니었다. 느글거리는 속도 누를 겸 골목길로 빙 돌아서 걷고 싶었다. 등교하는 것처럼 신호가 녹색불로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중에 교복 입은 사람은 나뿐이고 나머지는 이 동네 사람들이었다. 나는 누구의 강요도 없이 내 발로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섰다.
학교 옆으로 이어진 그 작은 골목길은 명백히 임하얀의 구역이었다. 남자가 자존심도 없는가 싶겠지만 이대로 택시 승차장에 앉아 있으면 화병이 나 버리고 말 거다. 내 기호 따윈 무시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중년 남성들과 수시로 튀어나와 길을 막는 어린애들 때문에 스트레스 수치는 시시각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임하얀을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라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저기 굴러다니고 있는 파란 캔을 발로 차 버리는 기막힌 타이밍에 임하얀이 나타날지 모른다. 비키라고 꼬맹이의 어깨를 밀어 버리는 타이밍에 임하얀이 나타날지 모른다. 전봇대 옆에 서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아저씨에게 너 혼자 뒤지라고 할 때 임하얀이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새까만 구정물을 바닥에 버리는 슈퍼 주인의 등장으로 내 인내심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심지어 물 몇 방울이 내 교복 바지에 튀었다.
“미안해, 학생. 그런데 이거 더러운 물 아니야.”
하도 노려보니까 지레 찔려서 먼저 선수를 친다. 더러운 물이 아니면 처마셔서 없앨 것이지 왜 길바닥에 버린답니까. 참을 인이 세 번 넘으면 사람도 죽인다는데 이미 그 세 번은 앞에서 다 썼다. 바지에 튄 검은색 물 자국이 정말 참을 거냐고 묻는다.
“이봐요, 아저씨.”
임하얀은 역시 타이밍을 아는 고단수다. 페인트가 벗겨진 시소, 줄이 한 개뿐인 그네, 유치원생도 안 탈 미끄럼틀을 가져다 두고 주민 공원이라는 허접한 이름을 붙인 곳에서 임하얀이 나타났다. 사복 차림이라서 못 알아볼 줄 알았겠지만 내 시력은 양쪽 다 2.0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슈퍼 주인과 입씨름할 시간은 없었다.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임하얀은 제 백팩 끈을 야무지게 쥐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주제에 생긴 건 서너 살은 어리게 보였다.
어쨌든 새로운 목적을 발견한 나는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임하얀의 뒤를 밟았다. 임하얀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쫓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임하얀은 음악을 듣지도 누구와 통화하지도 않는다. 대관절 저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빗자루를 주렁주렁 매단 철물점 앞을 지나갈 즈음이었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어떻게 하면 임하얀 앞에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을까.
집에 가는 길이다. 아니, 임하얀이 믿지 않을 거다. 내가 어디서 택시를 타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살 것이 있어 잠시 들렸다. 주변엔 생닭을 걸어 놓은 정육점, 초등학교 보습학원, 얼렁뚱땅 어린이집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임하얀이 믿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가 이 근처인데 길을 잃었다. 그러니 네가 나를 안내해라. 다소 뻔뻔스럽지만 길 잃은 사람을 버리고 떠나진 않을 듯싶었다. 과연 잔머리 굴릴 땐 S 대학 간 사람 부럽지 않았다. 임하얀을 따라서 사람 둘이 지나가기도 비좁은 골목을 통과했다. 사람이 개미도 아닌데 왜 이 동네는 굴처럼 좁은 통로를 선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임하얀은 나라에서 돈 들여 뚫어 놓은 길 대신 골목길을 쏘다니더니 예상외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까 구정물을 바닥에 버린 슈퍼와 이름만 거창한 주민 공원이 나왔다. 내가 뒤따라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랬다기엔 쟤도 만만치 않게 정신이 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가방 문이 반은 열려 있다. 지퍼에 달아 둔 캐릭터 키링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임하얀은 주민 공원 옆 골목길로 들어갔다. 제 성에 찰 때까지 동네를 빙빙 돌고 있는 듯했다.
만남의 방법을 고심하느라 임하얀의 현재 상태에 대해선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공부가 잘 안 풀리는지 애 상태가 말이 아니다. 해가 지고 골목을 비추기 위해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임하얀은 그 좁은 골목에서도 가장 좁은 골목만 골라서 다녔다. 동네가 미스터리였다.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듯이 뻗어 있는 계단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임하얀은 걷고 또 걸어서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 버릴 거다.
작은 돌 하나를 찾아서 발로 찼다. 운동화에 맞아 날아간 돌은 통, 통 튀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둔한 임하얀은 그제야 기척을 눈치채고 멈추어 섰다. 무슨 변명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나는 임하얀한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임하얀이 꼬박꼬박 위치를 보고해야 하는 상사도 아니지 않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해루라는 사람은 대한민국 어디든 나다닐 수 있었다.
“그….”
오늘 임하얀은 안경을 쓰지 않았다. 고개 돌려 나를 본 임하얀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었다. 깜빡거리다가 켜진 주황색 가로등 빛이 임하얀의 얼굴을 밝혔다. 눈은 부어 있고 입술은 더 부어 있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수도꼭지 튼 것처럼 울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대, 장소, 그리고 임하얀의 얼굴을 본 나는 이상이 생겼다.
“여기 왜 있어?”
임하얀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내 숨통을 조였다. 그 조잡한 계단을 허둥거리며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딱히 어쩌려는 건 아니었다. 임하얀이 잘못하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만큼 계단이 가팔랐다. 부주의하면 굴러서 머리를 다치거나 중상을 당할 만한 위험 지대였다.
나보다 한 칸 더 올라가 있는 임하얀은 내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말로 하는 건 내려가서 하자는 뜻으로 임하얀의 팔뚝을 잡았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임하얀의 몸이 쏟아지듯이 내 쪽으로 넘어왔다.
가로등 빛을 받아 유난히 하얀 얼굴이 가슴으로 떨어졌다. 말캉한 뺨이 가슴 부근에 꾸욱 눌렸다. 노란 명찰에 눈물 얼룩이 생겼다.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임하얀의 어깨는 아침에 다려 둔 교복 핏을 망쳤다. 무겁고 불편하고 짜증스러워야 정상이었다.
“무슨 일, 있어?”
한밤중에 봉변을 당하고 있는 건 나였다. 그런데 호구처럼 임하얀이 뒤로 넘어질까, 앞으로 엎어질까, 걱정하며 머리를 감싸 잡고 있었다. 그게 안정적으로 기대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임하얀은 대놓고 내 허리를 손잡이로 썼다. 작은 손이 내 허리춤을 잡고서 놓아주지를 않는다.
가슴이 팽창하듯 커지고 작아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장 난 가로등이 깜빡깜빡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내 가슴팍은 임하얀 눈물을 받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애처럼 길바닥에서 울지 말고 말을 하라며 윽박질러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 맛이 간 가로등처럼 나가 버린 정신머리는 오늘 내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옷 신경 쓰지 말고, 더 울어.”
괴성 지를 만큼 버터를 한껏 바른 목소리였다. 아무리 내 목소리라지만 느끼하고 느글거리고 밥맛 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말의 반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다행히 임하얀은 더 울어 보라는 내 목소리를 듣고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아니, 미안. 그게….”
못다 나온 눈물이 속눈썹에 걸려 있었다. 가로등이 내는 주황색 빛줄기가 눈동자에 맺혔다. 명찰을 적신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온 정신도 손을 잡고 함께 떨어졌다. 나는 나방 한 마리가 되어 환한 가로등 주변을 나는 착각에 빠졌다.
여기가 조잡하고 허접한 뒷골목 계단 지옥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불빛 거리로 변했다. 임하얀의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여 뺨까지 갔다. 통통해진 눈두덩이부터 뺨까지 손등으로 투박하게 문질렀다. 힘을 주면 마구 눌리는 임하얀의 뺨은 여리디여렸다.
“미안해.”
“아, 어, 아니.”
라스베이거스의 폭죽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빛들은 파티가 끝난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양심 없는 손을 뒤로 숨기고 목을 가다듬었다. 임하얀 때문에 단단히 놀랐는지 심장 박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더 있다간 사고를 칠 조짐이라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임하얀의 축 처진 눈꼬리가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기분 안 좋았는데 아는 사람 만나니까 그 감정이 갑자기 터졌어. 진심으로 미안해.”
국어책 읽듯이 나긋나긋 말하는 임하얀의 입술이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임하얀이 소매로 눈두덩을 누르는 걸 보면서 입맛만 다셨다. 어차피 닦을 거 나 주든가 하지.
“미안해서 어쩌지. 옷도 더럽히고….”
“무슨…. 일인데?”
“그냥. 별일은 아니고.”
별일이 아닌데 외간 남자 품에 안겨 그렇게 울어? 이죽거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입술은 이해심 넓은 사람처럼 꿈쩍 안 한다. 내 신체의 모든 부위가 각각의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걸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중이었다.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데 겨우 티 한 장을 걸친 걸 보니 뉴스도 안 보고 사나 보다. 안 그래도 열이 나는 중이라서 재킷이 쓸모없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 임하얀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기가 옷걸이가 된 줄도 모르고 임하얀은 고맙다는 듯이 웃었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나? 나, 있어. 뭐 사러.”
“뭘 사는데 여기까지 와.”
“있어. 네가 알면 뭐, 구해다 줄 거야?”
“궁금해서 그래. 이 동네는 내가 잘 아니까 필요한 거 어디서 파는지 알려 줄 수도 있고.”
아까 준비한 변명은 깡그리 잊어버렸다. 하얗게 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곤 임하얀의 캐릭터 키링과 철물점, 그리고 다 쓰러져 가는 놀이터뿐이었다. 대충 뭉뚱그려 말하면 될 것을 괜히 디테일을 추가하다가 망해 버리고 말았다.
“철물점에, 키링 같은 거.”
“키링? 철물점에?”
임하얀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였어도 저게 본정신인지 의심할 터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창피해서 맨몸으로 이 계단을 굴러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머리라도 깨져서 이 기억을 깨끗이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수치심도 톡, 톡,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로 인해 사르르 녹았다. 아무래도 뇌가 감기에 든 것 같으니 집에 가자마자 병원부터 예약해야겠다. 드디어 스트레스 지수가 한계에 달해 아예 달관해 버린 건 아닐까. 화풀이할 곳이 없어 교복 타이를 되는대로 잡아당겼다.
“정해루.”
“왜 불러. 아니, 부르지 마.”
“길은 알고 가는 거야?”
“알아. 몰라도, 그, 지도 보고 가면 돼.”
알기는 무슨. 여기가 한국이 맞나 싶은데. 하지만 여기도 가다가 보면 길이 나올 테고 택시는 잡힐 거다. 비명 지르고 발을 구르는 건 혼자 있을 때 해도 늦지 않았다. 이 동네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땅은 울퉁불퉁하고 계단은 좀 많은 게 아니었다.
“정해루. 좀 천천히 가. 그러다 길 잃어.”
내 옷을 눈물로 적시고 재킷까지 건네줬으니 쟤도 의심쩍은 부분은 대강 덮고 넘어가 주어야 이치에 맞는 거다. 그러나 임하얀은 은근히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멋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잠깐만.”
부드러운 손이 내 손목을 잡을락 말락 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란 나머지 손목을 휙 빼고 말았다. 내 과장된 몸짓에 놀란 임하얀이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저 혼자 울다가 웃다가 난리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 애간장을 녹였다.
“키링 사러 왔다며.”
“아, 키링? 됐어, 없어.”
“원하던 게 없어?”
이 문제에 대해 길게 얘기하면 지는 건 나였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 같은 걸 능청스레 하는 재주는 없었다. 입을 열면 손해니 입술에 자물쇠를 채웠다. 임하얀은 웃음을 참는 듯이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내가 사 줄게.”
임하얀은 언제 울었냐는 태도로 나를 앞질러서 걸어간다. 나를 얕보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 각자 갈 길 가자고 하면 적어도 모양 빠지진 않는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임하얀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자존심은 개나 줘 버린 놈. 그게 바로 나였다.
***
하얀 털, 노란 털, 갈색 털. 고양이, 강아지, 토끼. 털 색깔 다른 동물들이 고리를 달고 굴비처럼 매달려 있었다. 종류도 많고 색깔도 많은데 마음에 드는 건 한 개도 없었다. 사실 이런 거를 왜 돈 주고 사야 하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여기까지 끌려오는 동안 그랬던 대로 나는 꿀 먹은 멍청이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없나 보다. 여기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거 많이 들어오는데.”
“이게 예쁘다고?”
“다시 찬찬히 봐 봐. 여기 없음 저 뒤에도 많으니까.”
그새 임하얀의 손에는 새로운 볼펜과 인형 고리가 두 개씩이나 들려 있었다. 임하얀은 나를 고치지 못할 불치병에 걸린 환자인 양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이 간질거리는 문구점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아무거나 고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성격상 아무 거나가 허용되지 않는다. 기왕 선물 받는 거 털 색이 독특하고 돈 아깝지 않은 놈으로 고르고 싶은데 이건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흔하게 생긴 것들뿐이다.
“아, 씨, 또 실패했어.”
“이 돈이면 벌써 인형 큰 거 하나 사고 말았겠다. 야, 가자. 이거 다 못 뽑게 조작해 놓은 거래.”
커다란 뽑기 기계가 나를 유혹하듯 도전해 보라는 노래를 불렀다. 상품으로 놓여 있는 수많은 인형 중에 탐나는 놈이 있었다. 당근을 안고 있는 하얀 토끼 인형. 디자인은 흔하지만 임하얀의 그림체와 비슷했다. 임하얀은 내 시선을 따라서 뽑기 기계에 눈을 돌렸다.
“저걸로 할래?”
내가 그러자고 말하기도 전에 동전을 넣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냐고 묻는 건 자존심이 상해 조종대부터 잡았다.
임하얀은 돈을 넣자마자 도전하는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나는 조종대를 조심스레 움직여 하얀 토끼 쪽으로 집게를 이동시켰다. 집게 부분이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잘만 조종하면 뽑을 수 있겠다. 이만하면 됐겠다 싶을 즈음 버튼을 눌렀다. 잘 내려가던 집게가 중간부터 삐걱거렸다. 집는 힘이 약한지 하얀 토끼의 털만 쓰다듬고 허망하게 올라왔다.
“내가 뽑아 줄게.”
“됐어.”
임하얀의 말에 오기가 생겼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아까보다 신중하게 조종대를 움직여 토끼가 든 당근을 노렸다. 힘이 약하면 집게에 걸리게 만들면 된다. 집게가 당근 위에 왔을 때 버튼을 눌렀다. 지잉, 거리면서 내려간 집게는 당근 이파리도 잡지 못하고 올라왔다.
“저 씹새….”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용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차라리 여기 문구점 주인한테 돈 주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해 볼게.”
임하얀은 손에 들고 있던 교복 재킷을 내게 돌려줬다. 얼결에 재킷을 받은 나는 습관처럼 팔부터 넣어 입으려다가 멈칫했다. 조종대를 돌리는 임하얀의 손놀림이 고수 중의 고수였다.
“조금 뻑뻑하긴 하다.”
집게가 양옆으로 움직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돌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집중하느라 미간을 모은 임하얀과 뽑기 기계를 번갈아 보느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뽑기에 몰입한 나는 기계 유리에 얼굴을 대고 집게의 이동을 지켜봤다. 임하얀의 화려한 손놀림에 놀아난 집게가 하얀 토끼의 머리를 쳤다. 굴러 온 토끼가 입구에 걸쳐졌을 때 임하얀은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토끼 귀를 잡은 집게가 입구에 인형을 떨어트릴 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자.”
임하얀은 허리를 숙여 입구에서 하얀 토끼를 꺼내 왔다. 직접 뽑은 인형은 돈을 주고 산 것보다 만족감이 열 배는 컸다. 입다가 만 재킷을 마저 입고 토끼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좋아하는 티가 많이 났는지 임하얀이 나보다 더 밝게 웃었다.
“그렇게 좋아?”
“아니, 뭐, 별거 아니네. 뽑기.”
“네가 좋아하니까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그 말에 웃음을 빨리 거두었다. 나사 빠진 놈처럼 헤헤거리고 있는 꼴 보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좋긴 뭐가 좋아. 솜 뭉치일 뿐인데.”
임하얀은 그러든 말든 제가 산 것을 계산한 뒤 문구점을 나갔다. 나는 임하얀이 안 보는 사이 가방 안쪽 주머니에 인형을 넣었다. 그런데 하도 굼뜨게 행동했는지 밖으로 나간 임하얀이 다시 돌아왔다.
“정해루. 더 살 거 없으면 이만 나와.”
“가려고 했어.”
문구점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일어난 일이었다. 바람에 향기가 엉겨 왔다. 하얀 비누 냄새가 내 재킷에 배어 있었다. 비누 냄새는 영역을 넓히듯 내 몸에까지 묻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요사이 심약한 심장 걱정부터 들었다. 심장 보험도 안 들었는데 이러다가 길바닥에 쓰러지면 어떡하지.
“저기, 오늘 고마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임하얀은 내 심장의 수명을 줄이려고 작정했다.
“앞으로 뽑기 할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뽑아 줄 테니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한 거야.”
“음, 그렇구나.”
“그래.”
임하얀은 지하에 있는 문구점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내 옆에서 재잘거렸다. 내 품에 안겨 눈물 흘린 시절은 다 잊은 눈치였다.
“맞다. 내가 준 노트는? 도움이 됐어?”
“노트? 노트가 뭔데. 아, 그거….”
오토바이 한 대가 임하얀 옆으로 홱 지나쳤다. 왜 이 좁아터진 골목길을 오토바이가 지나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임하얀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끈을 묶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서 자연스레 임하얀의 왼쪽으로 붙었다.
내 수법은 흠잡을 데 없었다. 임하얀을 안전한 오른쪽에 두니 맘 놓고 걸을 수 있었다. 어디 돌부리는 없는지 아래쪽을 확인할 때마다 임하얀과 눈이 마주쳤다. 도통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어 내 얼굴만 화끈거렸다. 그 부담스러운 눈 좀 저리 치우라고 말하고팠다.
“정해루. 기다려 봐.”
“뭐….”
“이쪽이야.”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오자 속이 뻥 뚫렸다. 찻길을 건너 신호등 사이에 선 임하얀이 검지로 옆을 가리켰다. 택시 승차장. 길을 알고 있다는 내 말을 애초에 믿지 않은 것이다.
거짓말을 들켰다는 창피함은 잠깐이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에서도 군말 없이 택시 승강장까지 데려다준 건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택시 승차장 의자에 앉은 임하얀 옆자리가 탐이 났다. 냉큼 다가가 앉으면 속내가 빤히 보일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안 춥냐.”
바람이 쌩쌩 불 때마다 임하얀의 얇은 티가 걱정이었다. 임하얀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저었다.“몸에 열 많아서 안 추워.”
“그런 애들이 날씨 바뀌면 제일 먼저 콜록거리더라. 너무 자신하지 말지?”
“그래. 내일부턴 외투 챙겨 입을게.”
“뭐, 너 걱정해서, 그런 건….”
“오늘 학원 그만뒀어.”
노래방에서 나오는 취객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시끄러운데도 임하얀의 말은 확성기를 단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팔짱을 끼고 서서 듣지 않는 척해 보아도 임하얀에겐 통하지 않는다. 오늘 나는 임하얀의 그림자 같은 거였다.
“내 입으로 관두겠다고 말했는데도 가슴이 허해서 계속 걸었어. 생각이 멈추지가 않아서.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남 생각을 그렇게 해 주는데 내 생각은 누가 해 주나 싶기도 하고.”
수험생이 할 법한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고민으로 들렸다. 학원을 안 다니는 게 걱정이라면 다시 다닌다고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걱정되면 다시 다닌다고 해.”
“못 그래.”
“왜 못 그래.”
“부모님이 학원비를 부담스러워하셔서. 내가 내 입으로 그만둔다고 했더니 미안해하시면서도…. 아니다, 계속 다녀라, 하시진 않더라고.”
지난번에도 미대를 가고 싶은데 학원비가 비싸서 다니지 못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얌전하게 놓여 있는 임하얀의 운동화는 아직도 그 가짜 운동화였다. 나는 생전 남한테 해 보지 않은 질문을 했다.
“집이, 많이 어려워?”
“동생이 많아. 셋이나 돼. 난 첫째이거든.”
내 집안만 해도 골치 아파서 남의 집안 사정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식 넷 가진 집의 큰딸. 대략 집안 사이즈가 나온다. 임하얀의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한 집이니 곱게 보이진 않았다.
“어, 택시 왔다.”
손을 뻗어 택시를 잡은 임하얀이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이게 또 언제 학교에서 잠적할지 모를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임하얀의 손에 들렸다. 내 핸드폰을 건네받은 임하얀이 마취 덜 풀린 사람처럼 어리벙벙하게 굴었다. 나는 택시 뒷문을 열며 모르는 척 임하얀을 재촉했다.
“빨리 줘. 나 이거 타고 집 가게.”
“아….”
“빨리.”
번호 찍으란 말을 알아먹은 임하얀이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어설픈 연기가 탄로 날까 싶어 얼른 택시에 올랐다. 창문 밖으로 손을 꺼내니 임하얀의 번호가 저장된 핸드폰이 돌아왔다. 임무를 완수한 뒤 창문을 닫자 택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면서 핸드폰 연락처로 들어갔다. 3이 많이 들어간 번호가 내 핸드폰에 찍혀 있었다. 무사히 번호를 받아 냈다. 긴장이 풀린 나는 녹초가 되어 뒷좌석에 껌처럼 눌어붙었다.
그런데 뭘로 저장하지.
임하얀. 그건 너무 딱딱하고 모르는 사람 저장해 놓는 것 같다. 하얀이. 말도 안 된다. 자기랑 나랑 뭐라고. 하얀. 만약 임하얀이 보면 왜 그렇게 저장해 놓았냐고 따질 것 같았다. 임하얀 씨. 오버하고 앉았다. 직장 상사냐.
당근. 토끼는 너무 오그라들고 토끼가 든 당근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톡으로 들어가 임하얀의 프로필 사진부터 확인했다. 제 뒷모습이 찍힌 사진과 아무 말도 없는 상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임하얀답다 싶었다.
임하얀다운 것, 그게 나는 몹시 마음에 든다.
***
“정해루.”
“…….”
“너 무슨 중고 사기 당했냐?”
왜, 왜, 왜. 답장이 없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다면 운동장 열 바퀴라도 뛰겠다. 나는 엊그제 고심해서 보낸 내 문자에 오류는 없는지, 제대로 보낸 것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자고 있어?」
문제점 몇 가지를 꼽자면 보낸 시간대가 새벽이라는 것과 일어나 확인했을 땐 시간이 많이 지나 답장하기에 어려울 수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 이외에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1이 사라지지 않을 만한 이유 말이다. 범생이는 핸드폰을 연락 수단이 아닌 호신용 무기로 쓰나.
“봐 봐.”
“당근? 뭐 샀는데.”
“야. 답장 안 오면 경찰에 신고해.”
오죽 미친놈 같으면 구경꾼이 하나둘 몰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끄고 엎드려 있자 요즘 중고 나라 사기가 기승이라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게 들렸다. 중고 나라 사기급으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긴 했다.
그 후미진 골목길로 가지 않으면 임하얀은 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다. 첫 만남을 골목길이 아닌 데서 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만나기 어렵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렇다고 답장이 없는 임하얀에게 연달아 문자를 보내는 건 내가 졌다는 뜻이었다. 노트 말곤 할 얘기도 없는 사이에 답장 안 하냐며 문자를 한다니. 백이면 백 상대한테 관심 있다는 신호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임하얀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매달리는 관계 같은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1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며칠 뒤에 임하얀이 발견하고 답장을 해 준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 기분은 상한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혹시 핸드폰 개통을 오늘 했냐며 성질부리다가 차단당하는 엔딩이다. 깔끔히 마무리하려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하거나 잘못 보낸 척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차마 3학년 교실까지 찾아갈 용기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비상한 수를 낸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또 자존심 지키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시간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핸드폰을 켜는 시간, 그리고 가능한 저녁 8시를 넘기지 않는 게 좋았다.
요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김칫국을 한 대접씩 마시고 있었다. 죽치고 살던 운동장에 가지 않고 일찍 들어와 책상 앞에 앉으니까. 들어가 하는 거라곤 핸드폰밖에 없었지만 두 노인네가 거는 기대는 공부 쪽인가 보다. 제 큰아빠를 닮아서 저럴 줄 알았단 말엔 콱 까무러치고 싶었다.
조부모의 기대가 어떻든 오늘은 이 작업을 위해 특히나 더 일찍 귀가했다. 미리 멘트를 짜 두고 연습하기 위해서다. 저녁 8시가 되기 10분 전까지 임하얀의 밋밋한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긴장을 달랬다. 핸드폰 시계가 정확히 8시를 가리키는 순간엔 이명이 들렸다.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연락처 속 임하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평범한 신호음이 들릴 줄 알았는데 90년대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발라드는 임하얀과 그럭저럭 어울렸다. 발라드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끝날 즈음 전화를 거절당한 줄 알고 낙담했다. 그 비싼 핸드폰을 장식으로 두고 다니는 건지 무언지.
– 여보세요.
임하얀은 줄다리기 선수였다. 막 전화가 끊기기 전에 받아 주었다. 잠이 덜 깬듯한 목소리로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연결되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준비해 둔 멘트를 생각했다.
– 여보세요.
달달 외워 둔 멘트가 긴장감에 밀려 증발하고 말았다.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누구냐고 묻는 걸 보니 장난 전화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곧 전화가 끊어질 기세라서 나는 말을 억지로 짜냈다.
“김형식?”
– 네?
“이거 김형식 핸드폰 아닌가?”
5초간의 정적이 5만 년 같았다. 나는 김형식이란 이름을 창조해 낸 내 혀를 싹둑 자르고 싶었다. 떨리는 목소리, 부정확한 발음, 그리고 위조일 게 분명한 김형식이라는 이름의 삼박자가 이상하지 않길 바란다면 양심에 총 맞은 거다. 될 대로 되라, 씨발.
– 정해루?
“응….”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자 웬 똥 마려운 개처럼 끙끙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야밤에 장난 전화 거는 미친놈이 나라는 걸 알게 된 임하얀은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 어…. 잘못 건 건가.
“…….”
– 미안한데 나 김형식 씨 아니야.
“너, 내 이름은 알지?”
이제는 생각도 않고 아무 말이나 뱉는다. 전화를 건 게 임하얀이 아니라 나라는 점에서 이 계획은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 네 이름은 당연히 알지. 그나저나 내 번호 저장도 안 했어?
하지만 빌어먹게도 다행이었다. 임하얀은 내 얕은수를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허탈하다는 듯이 말해 왔다.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었다. 나는 이 전화를 이어 나갈 목적이 없었다. 전화로 어떻게 해 볼 마음보다 깜깜무소식인 임하얀이 궁금했을 뿐이다. 무얼 물어봐야 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임하얀 목소리를 들었으니 나쁘지 않은 건가 싶다가도 이게 다 무슨 바보 멍청이 짓인가 싶다.
– 전화가 잘 안 들리나 보네. 왜 내 번호 저장 안 해 뒀어.
“난 했어. 넌 내 전화 받고서도 누구냐고 물었잖아. 안 해 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 내가 네 번호를 어떻게 알아서? 핸드폰 번호 찍어 주자마자 택시 타고 가 버린 뒤에 연락 한번 없었던 건 넌데.
전화상으로는 들리지 않겠지만 나는 굉장히 놀라는 중이었다. 씹히거나 무시당한 게 아니었다. 임하얀은 내 번호를 모른다. 등록이 되지 않았으니 읽지도 않은 것이다. 그 과정을 까맣게 잊고선 당연히 번호 교환을 한 줄 알았다. 미친 새끼에 핸드폰을 장식으로 쓰는 건 내 쪽이었다.
– 번호 받고서 문자나 전화 정돈 남겨 놓는 게 매너 아닐까? 아, 그리고 톡톡 앱으론 보내지 마. 공부 때문에 삭제해서 그쪽으론 확인 못 해.
임하얀은 준비된 것처럼 자기가 연락받지 못한 사정을 깔끔하게 전달했다. 문자나 전화는 고사하고 톡으로만 연락했던 내 쪽이 문제라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임하얀의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 김형식한테 전화해야 될 텐데 시간 많이 잡아먹게 해서 미안. 이만 끊을까?
임하얀만 만나면 나답지 않은 선택만 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받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마땅히 풀 곳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책상 위 굴러다니는 검은 펜을 쥐었다. 3년 내내 펼쳐 본 적 없는 하얀 노트를 꺼내고 낙서를 했다. 동그라미 하나, 작대기 네 개를 그리니 사람 모양이 됐다. 거기에 리본을 달고 삐쭉삐쭉한 털 몇 가닥을 그리니 여자처럼 보이는 졸라맨이 탄생했다.
“저녁을 못 먹었어.”
– 응? 저녁을?
“배고파.”
– 난 저녁 못 먹으면 손 떨리던데. 지금이라도 챙겨 먹어.
“그러는 너는 뭐 먹었는데.”
– 된장찌개.
임하얀한테 생쇼할 준비를 하느라 저녁을 못 먹은 게 생각이 났다. 갑자기 생각난 주제라 갑자기 사라질 줄 알았으나 임하얀은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해 줬다.
– 공부하느라 저녁을 까먹기라도 했나?
“음…. 거의, 뭐.”
– 열심히 하네. 밥도 안 먹고 공부할 정도로.
공부라고는 한 줄도 안 한 게 생각이 나서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상대한테 거짓말을 늘어놓을 정도로 내 혓바닥이 길지 않았다.
– 어느 대학이 목푠데?
내 주변 누구도 나한테 묻지 않았던 질문이라서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평소 어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었다. 볼펜으로 한 점만 찍다가 노트에 구멍을 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S 대.”
– S 대학교? 오…. 그래서 저녁도 굶고 공부하는구나.
S 대학교에 가는 인간들은 다 저녁도 처먹지 않고 공부를 한다고? 그런 끔찍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임하얀은 한 번 더 내 양심을 가격했다.
– 그럼 나 국어 부족한 부분 봐 줄 수 있어? 다른 과목은 그럭저럭 되는데 국어가 영….
지금 이게 누구한테 뭘 봐 달라고 하는 건지. 엎친 데 덮친 격이라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곤란한 내 심정을 읽었는지 임하얀은 어색하게 말을 더했다.
– 3학년이 2학년한테 봐 달라고 하는 게 웃긴 건 아는데 팁 같은 거 있음 알려 줘. 이번 달부터 학원도 못 가서 걱정이 많거든.
“결국, 학원 안 가?”
– 안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어느새 모범생을 넘어 임하얀에게 공부를 가르쳐 줘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발을 빼기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볼펜 끝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이마를 툭 쳤다. 마땅한 탈출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 됐어. 내가 괜히 너 공부하는데 방해하는 것 같다. 이만 끊을게. 열공해.
“잠, 깐만.”
– 왜.
“정확히 어떤 부분이 알고 싶은 건지…. 말해 봐.”
나는 죽었다가 깨나도 임하얀을 가르칠 수 없었다. 하지만 임하얀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는 한 트럭이었다. 순진한 임하얀은 밝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 도와주게?
“다 도와줄 순 없어. 그냥, 사정이 딱하잖아. 어떤 게 부족한지 들어 보고….”
– 고마워. 아, 일단 말이지….
임하얀에겐 건성건성 말했지만 실은 노트에 메모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임하얀이 말하는 게 무슨 내용인지는 반 이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빈 종이에 어려운 말을 적으면서 똑똑해지는 기분만 냈다.
– 너 어떻게 하는지 적어 주면 좋고, 아님 내 앞에서 한번 문제 풀어 봐도 좋고.
“어…. 그건 싫어.”
– 왜?
“몰라, 싫어. 여하튼 문제집 같은 것만 빌려주면 된다는 거지?”
– 이왕이면 어떻게 풀었는지도 상세히 적어서.
부탁하는 처지에 요구 사항이 까다로웠다. 그걸 들어주려고 메모하는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말이다. 임하얀은 협조적인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내 양심이 무거워지는 만큼 임하얀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 고마워. 언제 가지러 갈까.
끝없이 이어지는 자책 속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본 것은 그 마지막 말이었다. 이따위 거짓말을 계속할 수 있느냐고 묻던 양심이 처음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성과가 있던 것이다.
“그럼 주말에.”
거기까지만 말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요일. 그날만 시간 돼.”
– 주말…. 나 주말은 6시 이후만 되는데.
“기다릴 테니까 레네로 와.”
– 사거리에 있는 레네?
학교가 아닌 밖에서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별 의심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임하얀과 통화를 끝낸 후 나는 만세 하듯 두 손을 올렸다. 기지개 켜고 목을 한 바퀴 돌린 뒤 적어 둔 메모를 읽었다.
저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바퀴 의자에 앉아 지구본처럼 돌다가 간단한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살다 보니 아래층에 살고 있는 노인네 부부의 말이 옳을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돈으로 해결 안 되는 건 거의 없었다.
***
단둘이 마주하게 된 과외 선생은 연기가 서툴렀다. 상당한 액수를 받고 하는 일임에도 제가 가르치기엔 학생이 성에 안 찬다 이거다. 코앞에선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갈수록 성의가 없어지는 건 분명했다.
“해루야. 또?”
“빨리.”
“하아…. 그건 찍어서 어디에 쓰려고.”
“따라 하게요.”
“목소리도 내지 마? 또?”
막무가내로 동영상 버튼을 누르자 과외 선생은 훈련된 것처럼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지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요약하는지에 대해 필기해 두었다. 막상 과외 선생 없이 혼자 텍스트를 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 근 일주일째 나한테 달달 볶인 과외 선생은 핸드폰 카메라를 손으로 가렸다.
“해루야. 그러지 말고 이거 한 문제만 풀어 보는 건 어때.”
“안 돼요. 저 바빠요.”
“어? 어디 가?”
“가 볼게요.”
“어디를? 지금 수업 아직 안 끝났….”
과외 선생은 작년에 본인이 가르쳤다던 T 대학 합격생의 정리 노트를 내게 주었다. 오늘이 대망의 그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영상으로 내 손을 촬영하면서 연습하는 등 살면서 안 해도 될 짓들을 다 해 봤다. 과외 선생의 필체까지 따라 하다가 때려치우긴 했지만 가르침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됐을 거다.
과외 흉내를 내면서 문제 몇 개를 풀다 보니 요령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수학이나 영어였으면 금방 들통났을 텐데 다행히 국어는 우리나라 말인지라 말만 있어 보이게 하면 들킬 염려는 없을 듯싶었다.
학교 사거리에 있는 카페는 밥 먹듯 드나들던 곳이기에 약속 시간에 늦거나 이상한 메뉴를 시킨다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한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이거 머리 안 감고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모자를 벗고서 벽면 거울에 얼굴을 비춰 봤더니 앞머리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미용실에 가지 않는 이상 이걸 수습할 길은 없어 보인다.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숨을 돌리는 찰나 이번엔 옷이 문제였다.
짝퉁 신발을 신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임하얀의 무딘 행보로 봤을 때 이 바람막이 브랜드도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무난한 검은색 후드티로 입고 나올 걸 그랬나. 아니면 지적으로 보이도록 카디건?
“난 항상 남보다 10분 먼저 오는데.”
깜짝 놀라서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인기척 없이 나타난 임하얀이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모자를 벗었다 쓴 걸 들키진 않았나 보다.
“뭐 벌써 마시고 있네. 나도 시켜야겠다. 기다려 봐. 나 여기 처음이라.”
안경을 벗고 나온 임하얀의 속눈썹은 기린처럼 길었다. 소지품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는 동작마저 우아했다. 다른 사람들은 얼굴에 먹구름을 달고 다니는데 임하얀 혼자만 조명이 따라다녔다. 노랗고, 하얀, 주황색의 조명이 임하얀의 머리 위에 떴다.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메뉴판을 직접 봐야겠는데. 잠깐…. 어디 가?”
이 카페로 오라고 말한 건 나였다. 메뉴판을 보지 않아도 어떤 게 맛없고 맛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임하얀은 나누어 내자며 지갑을 들고 왔다.
“나도 돈은 가져왔는데.”
살 생각이 없었어도 저렇게 말하면 안 사는 사람 쪽이 오히려 좀생이 같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따라온 임하얀은 두 번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이 메뉴를 골랐다.
“화이트 초코. 아이스로.”
주문은 맡겨 놓겠다는 양 내 어깨를 두드리고 떠났다. 나는 발에 쥐가 난 줄 알았다. 아니, 등에 쥐가 났다. 주문하시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어정쩡 끄덕이기만 했다. 간신히 아이스 초코를 말한 후엔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확인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내 정신 나간 얼굴을 돈 한 푼 안 내고 실컷 구경했다. 어떻게 카드를 꺼내고 어떻게 자리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음료를 빨대로 쭉 빨아 먹으며 힘을 보충하는데 임하얀이 물었다.
“의외야.”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이럴 것같이 생겼는데. 민트초코라니.”
“어쩌라고.”
“의외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좋아해.”
“난 아직 어린애인가 봐. 쓴 게 싫어.”
목이 자꾸만 탄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속으로 탈탈 털어 넣었지만 목마름은 여전했다. 나를 놀리듯 웃는 임하얀의 얼굴이 유리컵 위에 둥둥 떠다녔다.
“음? 이게 뭐지?”
음료가 나왔다는 소리에 카운터로 간 임하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받아 온 음료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임하얀이 분명 아이스 화이트 초코라고 했는데 새까만 음료가 나왔다. 임하얀은 카운터에 항의하러 가는 대신 얌전히 앉아 빨대를 음료에 꽂았다. 정신을 엿 바꿔 먹었는지 음료 하나도 똑바로 못 시키고 자빠졌다.
임하얀은 다행히 그 음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신속 정확하게 만남의 이유를 확인해 줬다.
“나 보여 주겠다던 건?”
일주일의 결실을 보여 줄 차례가 왔다. 가방 안에서 노트 두 권과 문제집 하나를 꺼냈다. 말없이 임하얀 쪽으로 밀어 넣어 줬더니 뜻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비장하게 꺼내. 밀수업자같이.”
맹하던 첫인상은 희미해지고 저 쓸데없이 밝은 웃음만 남았다. 임하얀을 대표하는 색인 하얀 물감에 주황색, 노란색, 빨간색 물감이 차례로 섞였다. 밝고 기운찬, 보기만 해도 상쾌하고 따듯한 것들이 임하얀 고유의 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정리를 나보다 더 잘하는데. 아, 잠깐만. 나 이 문제 틀렸었는데.”
“어떤 거.”
“이거. 설명해 주면 안 돼? 볼펜 줄게.”
볼펜을 딸각거리며 종이에 댄 차였다. 잘난체하려던 마음이 닥쳐올 미래를 아는 것처럼 겁을 먹었다. 이 씁쓸한 열등감과 패배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저 노트의 주인, 저 문제집을 필기한 건 내가 아니었다. 며칠을 밤새워 노력했어도 임하얀이 감탄하는 노력의 결과물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겁을 먹은 이유였다. 조부모의 사랑이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에 기생하고 임하얀의 감사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뻐기는 꼴이라니.
“왜 말이 없어. 설명해 줘야지.”
“알아서 잘하잖아, 너.”
“알아서 하는데 너한테 부탁했을까. 갑자기 왜 이래.”
“하기 싫어졌어. 거기 적은 거 읽으면서 풀어.”
“기분 나빠지려고 그러네.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랑하려고 온 거야?”
“내가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왔겠어? 그거, 너 가지라고.”
내가 의욕이 없는 만큼 임하얀도 의욕이 없었다. 내가 건넨 노트를 가볍게 훑은 임하얀이 그것을 내 쪽으로 다시 건넸다.
“정성 많이 들였는데. 이런 걸 어떻게 공짜로 받겠어.”
“갖기 싫으면, 됐어. 가다가 버리든가.”
“뭐?”
이 자리에 나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 돈으로 노트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자존심까지는 만들어 주지 않는다. 가짜로 환심을 얻어 봤자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짐 덩어리 같은 문제집을 뒤로한 채 카페를 나서는데 곧바로 뒤따라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려.”
임하얀을 보겠다고 집에서 이 사거리까지 오는 내내 머저리처럼 설렜었다. 도대체 나는 저 노트 따위로 무엇을 얻고 싶었던 걸까.
“잠깐만.”
다급하게 내 손목을 잡는 힘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손이 감지되자마자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손목이 저릿했다. 바로 팔을 휙 들어 올리자 임하얀의 팔이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누가 봐도 닿기 싫어서 뿌리친 것처럼 보였다. 임하얀은 이 상황이 개운치 않은지 말을 톡 쏘았다.
“갑자기 이렇게 나가 버리면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잖아.”
임하얀의 잘못이 아닌 것은 맞는데 백 프로 아닌 건 아니다. 임하얀은 나한테 깨끗하고 당당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속마음은 더럽고 추하다. 계속 가까이했다간 이 구더기 같은 마음을 들키고 말 것만 같았다.
“가도 이유를 말해 주고 가. 문제 풀어 주는 게 싫어서?”
“이유 없어. 너한테, 할 말도 없고.”
“하. 이 주말에 나 불러 놓고 테스트하니, 너?”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계산 없이 임하얀 앞에서 멋지고 폼 나고 싶었다. 이건 아니었다. 오늘 여기에 오기까지 내가 저지른 일들과 거짓말들이 생각이 나 물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인데 임하얀은 뭣도 모르면서 내 속을 긁었다. 모자챙을 꼭 잡고 아래로 눌렀다. 까만 그늘 안에 내 본심이 숨겨졌으면 했다.
“멈춰.”
“가라, 좀.”
“멈추라고.”
“가라고.”
“내가 거지로 보여?”
사람이 한적한 인도로 걸어가던 나는 멈추어 서서 임하얀을 돌아봤다. 거기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임하얀이 서 있었다.
내 거짓말에 내 자존심과 임하얀의 자존심이 다쳤다. 노트 몇 권 주면서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하고 나왔으니 임하얀의 눈이 돌 만도 했다. 갈색 눈에는 그날 밤처럼 노란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생뚱한 말이지만 내 눈에는 예쁘단 소리였다.
“이거 가져가.”
임하얀이 베이지색 책가방에서 노트와 문제집을 꺼냈다. 몇 번이나 팔을 저어도 가져가지 않자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싸늘하게 등 돌린 임하얀을 붙잡아 봤자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왜 비참해졌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임하얀이 미워지고 말 거다. 임하얀이 버리고 간 노트를 주워 근처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수치의 증거물 같은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분풀이하려 했다. 미어터질 것 같은 쓰레기통에 마지막 권까지 꾸역꾸역 넣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황당한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거다. 남의 칭찬 한번 듣겠다고 나 자신까지 속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공기만 든 가방을 발에 떨어트리듯 들고 다녔다. 택시 수십 대를 놓쳤다. 이 인연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임하얀의 뒤를 쫓아서 그 골목길을 헤맬 때부터였다.
「해루야. 내일 수업은 빼먹지 말고 꼭 열심히 하자. 너도 이제 곧 고등학교 3학년이고 나도 받은 만큼은 하고 싶어. 파이팅!」
띠링, 울리는 문자 소리에 섣부른 기대감만 피었다. 번호는 저장해 놓지 않았지만 안 봐도 누군지 비디오였다. 임하얀이 연락해 주길 기다리는 내가 멍청이지, 다른 누구를 욕할 게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씹고 넘겼을 과외 선생의 문자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임하얀은 목표하는 A 대학이 있는데 나는 그조차도 없었다. 수험생인 임하얀의 금 같은 시간을 나 때문에 낭비하고 말았다. 저 쓰레기통에 들어갈 게 노트가 아니라 나란 생각이 들었다.
한심한 새끼.
***
멋으로 길렀던 머리를 시원하게 밀었다. 과외 선생은 하나에서 셋으로 늘어났고 핸드폰은 전화 통화만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겨울 방학부터 봄 방학까지 과외 선생 셋에게 둘러싸여 공부만 했다. 놀아 본 놈이 공부도 잘한다고 했던가. 그건 놀아 본 놈이 만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쁜 습관이 밴 몸뚱어리를 책상 앞에 앉히려면 매가 약이었다. 약속을 어기면 허벅지에 불이 난다는 걸 알아야 펜을 잡았다.
한번은 1년을 기다린 축구 경기를 보러 밖에 나갔다가 몇 시간도 안 돼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벚꽃이 지는 걸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학원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아까워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조부모는 쌍수 들고 환영했다.
오히려 그 소식을 들은 부모가 더 참견이었다. 이제라도 기초를 튼튼하게 닦아 주는 학원을 알아본다고 했으나 두 노인네 성화에 찍소리도 못하고 수그러든 모양이었다. 그걸 들으니 더 오기가 생겼다.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들을 멍청이에다가, 공부하려고 맘먹어 봤자 기초도 간신히 해내는 얼간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밑바닥을 기던 성적도 그쯤 되니 주인 성질머리에 못 이겨 고개를 들었다. 가을에서 겨울이 될 때까지 성과가 없던 성적이 개나리가 필 즈음이 돼서야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첫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 담임이 나를 찾아와 인간 승리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임하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부채질했다. 다른 번호는 몰라도 임하얀 번호는 숫자 한 자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수학을 끝내고 골이 징하게 아팠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임하얀의 컬러링이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이내 서정적인 발라드는 안내 음성으로 이어졌다.
그날 임하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능 결과도 나왔을 터다. 대학 합격했는지 안 했는지,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임하얀은 1학기가 끝나는 날까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을 걸었는데 두 번 다 거절을 당했다. 사람 심리가 요상했다. 임하얀이 주변에서 얼쩡거릴 땐 멀리 두고만 싶더니 저쪽에서 선을 긋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그때부터 누가 목표가 어디길래 이렇게 애쓰냐고 물으면.
“A 대요.”
“거기 말고는?”
“없는데요.”
A 대. 학교 현수막에 A 대 몇 명, 이라고 적힌 걸 봤다. 임하얀이 합격을 했든 안 했든, 임하얀이 목표로 한 그곳에 가면 임하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서 임하얀을 선배로 모시는 것도, 나중에 임하얀이 내 후배로 들어오는 것도 재밌을 거다.
나는 공부에 대한 의욕이 떨어질 때마다 임하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 전화는 내 꺼져 가는 의욕에 새로운 목표를 달아 주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면담을 할 때 처음으로 담임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개판 5분 전으로 살던 놈이 3학년에 올라와선 보는 모의고사마다 상위권에 드니 말이다. 내신은 망쳤으니 이대로 잘 다듬어서 대학은 수능으로 가 보자는 뉘앙스였다. 수능이든 재주 넘기든 상관없다. 무조건 A 대학만 합격한다면.
– 여보세요.
새벽 1시 30분. 오늘도 받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걸었던 전화였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는지 가을부터 죽어 있었던 세포들이 뒤집히듯 일어났다.
– 왜 매번 이 시간에 전화해?
임하얀이 몇 달간 전화를 안 받은 건 내게 화가 나서였다.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문틀 밖에 손을 내놓고 바람을 맞았다. 임하얀이 없는 학교에서 가을을 맞는다. 그게 퍽 쓸쓸하다는 걸 요즘 들어 느끼고 있었다. 그 쓸쓸함을 메우기 위해 임하얀에게 주기적으로 전화를 했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임하얀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건 더 이전도, 더 이후도 아닌 바로 이 새벽 1시 30분이었다. 깜깜하고 특별할 것 없던, 매일같이 보아서 감흥 없던 마을의 전경이 달라졌다. 가로등의 불빛이, 그리고 이웃집의 코스모스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대학은 갔어?”
임하얀은 한참을 기다려서 들은 대답이 새삼스러워 당황한 눈치였다. 임하얀 안에서 내 이미지는 어떨까. 기분파 멍청이에 그리고 싸가지? 그중 하나라도 긍정적인 게 있으면 다행이련만.
– 갔어.
“학원 못 간다고 울더니. 가긴 갔네.”
– 놀려?
“축하한다고. 나 고3이야. 지금 나한테 대학 합격한 사람보다 부러운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 갔단 말이지. A 대학에 합격한다면 내년 가을은 쓸쓸하지 않겠다. 눈알에 형광등을 켠 것처럼 세상이 훤해졌다. 3학년에 들어와서 침울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아니었다.
임하얀이, 내 인생에 전조등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임하얀은 내 자극제였다. 임하얀이 내게 사랑한다고, 멋있다고 고백하는 걸 보고 싶었다. 임하얀이 나를 아쉬워했으면 한다. 갖고 싶어서 몸살이 났으면 했다.
– 새벽에 전화하지 마. 자다가 깨.
“그럼 언제 해도 되는데?”
– 응?
이따위로 말하면서 무슨. 아쉬워하는 티, 바라는 티를 내면 안 된다. 하지만 벌써 임하얀의 귓구멍을 통과한 후였다. 역시나 임하얀은 내게 여지 따윈 남기지 않는 듯이 말했다.
– 차단할 거야.
“번호 바꿔서 걸면 네가 어쩔 수 있어?”
– 왜 그렇게까지 전화하려고 하는데?
“학교 선배잖아.”
– 선배면 다 통화해야 해?
“난 아는 선배가 너밖에 없어.”
– 그래서? 그게 통화하는 이유라고?
네가 보고 싶어서,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같은 멘트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 말로 임하얀이 감동할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게다가 대학 문턱도 안 간 내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우스워만 보일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임하얀한테 우스워 보이는 건 싫었다.
“후배 심심한 거 좀 달래 줘. 가끔 너랑 말하면 잠 달아나던 게 기억….”
뚝, 끊기는 통화 소리에 가로등 불빛이 약해졌다. 이건 임하얀의 손해였다. 나는 오늘치 의욕을 다 채웠다. 그것도 임하얀이 통화를 뚝뚝 끊어 준 덕분에 속이 불타는 중이었다.
A 대학에 가면, 그 대학에만 가면. 그러면 임하얀이 있다. 창문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오늘 밤도 숙면은 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