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4
04
학교 행사 중에 졸업식이 가장 싫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참석과 부모의 부재. 그리고 교장의 훈화 말씀이 끝나고 찍는 사진 행렬, 미감이 빠진 대량 생산 꽃다발.
호랑이로 유명한 할아버지가 내 졸업식에서 눈물을 보인 건 내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해서가 아니라 염원하던 A 대학 합격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임하얀이라면 경영학과에 갈 것 같았다. 수능을 기대보다 잘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S 대학, B 대학에 들어갈 성적임에도 무난한 A 대학 경영학과를 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심지어 내 성적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부모까지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나에게 대학은 A 대학뿐이었다.
지난 1년간 임하얀과 나의 역사는 이랬다. 통화 열 번에, 만남은 0. 그 통화라는 것도 내가 꼬박꼬박 걸지 않았으면 이루어질 리 없는 숫자였다. 임하얀이 짜증 내는 목소리든, 피곤에 찌든 목소리든, 듣고 있으면 어쨌든 모든 게 헛수고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임하얀이 마침내 순순히 내 전화를 받고 대화다운 대화를 했을 때는 이겼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타민 C 챙겨 먹어. 마그네슘도. 컨디션에 도움 돼.
그게 수능 전날 한 대화였다. 그러나 그 다정함은 큰 함정이었다. 임하얀은 내 수능이 끝난 이후로 작정한 것처럼 전화를 꺼 두거나 1초 만에 전화를 거절하곤 했다. 졸업식이다, 합격 턱이다, 뭐다 해서 먹은 것은 많은데 속은 허했다.
무소식인 핸드폰을 들고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공사를 마친 운동장은 내가 재학할 당시보다 훨씬 넓어졌다. 팥 없는 찐빵처럼, 임하얀 없는 이 교정을 이젠 떠날 시간이었다.
“저기.”
고개를 돌려 보니 화사한 꽃다발을 주렁주렁 들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이름 모를 여자가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하얀 초콜릿 상자를 꺼냈다. 벤치에 상자를 올려 둔 여자는 뒤로 열 발자국 멀어졌다.
“너 초콜릿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만들어 봤어…. 어, 그게….”
“가져가. 산 거 아님 안 먹어.”
“산 거야.”
“아까 만들었다며.”
“어….”
얼굴 볼 일 없으니 냅다 지르고 보는 식의 고백은 최악이었다. 졸업 날, 수학여행 끝 무렵, 혹은 어떤 모임의 끝에서 전해지는 고백에 진실성은 없다고 본다. 남이야 어떻든 난 그런 고백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밤새워 만든 건데. 먹, 먹기 싫음 버려.”
“내가….”
네가 버리라고 하면 버려 주는 쓰레기통이냐, 분리수거 해 주는 사람이냐, 할 말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 새 부리처럼 모인 입술이 누구를 떠올리게 했다. 하필 비슷하게 생겨서 심한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초콜릿 상자를 집어 던지기는커녕 자리도 없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이제 됐냐는 식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자 그 여자는 어떠한 말도 없이 떠나갔다.
임하얀이 내 성격을 바꿨다. 남이 받을 상처 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져 봤자 남들은 나만큼 나를 생각해 주기를 하나, 뭘 하나. 어차피 안 보고 말 사이에 할 말 못 할 말 가려 하다가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낫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졸업식인 거 알면서 그런다. 빈말로라도 네가 졸업해서 다행이다, 대학은 어디 붙었냐 같은 말도 해 주면 어디 잡아가기라도 한다나. 이러면 초콜릿을 건네주는 여자와 내가 다를 게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말, 빈말 같은 건 해 본 적 없는 거였다. 평생 그런 것과 거리가 멀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혀에 꿀 바른 사람처럼 변한다고 임하얀이 전화를 해 줄 리 없었다.
무거운 초콜릿 상자를 벤치에 올려 두고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오랜만에 빙 돌아서. 그 구질구질한 골목길을 빙 돌아서 가 볼 생각이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 골목길이나마 걷는 것이었다.
졸업하면 더는 올 이유 없는 동네, 골목길이니까 말이다. 방정스럽고 비위생적으로 느껴졌던 것들도 그 나름의 감성과 색이 있었다. 문구점에서 뽑기나 한판 하고 갈 생각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골목에 들어서는데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월척이라면 월척이었다. 슈퍼 앞에서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 팔짱을 끼고서 이걸 사니 마니 하고 있었다. 바퀴벌레 한 쌍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면 될 일을 못 지나치고 있는 건 그 바퀴벌레 중 하나가 임하얀이라서였다.
“아이스크림은 네가 골라.”
“누나. 두 개 골라도 돼?”
“그래.”
“아싸.”
임하얀이 남자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한테 해 줬던 거였다.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저걸 보느니 슈퍼 주인이 버리는 구정물을 한 바가지 퍼마시는 게 낫겠다.
아이스크림 고르느라 정신 팔린 놈은 잘 봐줘도 고등학생이었다. 취향이 그쪽이셨어.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어디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고 했더니 내 속이 썩고 있었나 보다. 수능이 끝나고부터 석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전화를 붙잡고 산 결과가 이거다. 바쁜 와중에 남자 하나 끼고 슈퍼 올 틈은 있었나 보지. 더욱이 그 남자가 아이스크림 박스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한심한 새끼라서 물불 가리기 싫었다.
임하얀은 라면 매대 앞에서 쭈그려 앉아 상품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 아이스크림 박스에 머리를 박고 있는 멍청한 새끼는 제가 전세 낸 양 고개를 처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딴 게 임하얀의 취향이란 말이지, 이딴 게.
“아….”
눈치도 더럽게 없다. 제 옆에 선 지가 벌써 몇 초나 지났는데 이제야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 준다. 결정 못 하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아이스크림 쪽을 계속 힐끔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고르세요.”
내가 자꾸 저를 쳐다보고 있기만 하자 찔리는 게 있는 얼굴로 완전히 비켜선다. 그때 종아리가 모기에 물린 것처럼 간지러웠다. 정말로, 다치게 할 생각이 아니라 간지러워서 다리를 폈을 뿐이었다.
“어!”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발목이 내 발목에 걸렸다. 그럴 생각이 전혀, 정말 요만큼도 없었는데 무식하게 대 자로 자빠지고 난리였다. 무릎이 까졌는지 멍청이는 교복 바지를 걷으며 훌쩍거렸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임하얀이 정떨어지지 않을까.
“파랑아!”
나는 무시하고 저딴 걸 끼고 다녔다는 데서 오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허술하게 묶은 임하얀의 머리끈이 풀어져 어깨로 흘렀다. 못 본 사이 등을 가릴 정도로 머리가 길었다. 사과 향 샴푸 냄새가 이 멀리까지 그윽하게 났다.
“괜찮아?”
“누나아. 나 무릎 까졌어.”
“이봐요.”
키는 멀대같이 큰 놈이 어린애처럼 누나, 누나 하면서 찡얼거리기는. 우웩. 토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딴 데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임하얀이 나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정해루?”
알아봐 줘서 고맙다, 아주.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려고 했는데 우연히 그 멍청한 남자애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임파랑. 이름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임파랑. 임파랑. 임하얀….
“많이 안 다쳤잖아. 엄살 피우지 말고. 봐 봐.”
“저 형이…. 발 걸었다고.”
귀가 밝아서 속닥거리며 말해도 다 들렸다. 제 동생의 바지를 털어 주는 임하얀의 표정을 보니 가슴이 화끈거렸다. 제 누나 뒤로 숨는 임파랑은 나를 깡패 보듯이 봤다. 누나와 달리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체구도 남자치고 작았다.
임하얀이 제 동생에게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하며 들고 있던 까만 봉지를 전달했다. 임파랑은 쌩하니 슈퍼 앞에서 사라졌다. 옳다구나 도망치는 임파랑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동네는 비둘기도 이사 다니나 보다. 분위기 칙칙한 슈퍼 앞에는 나와 임하얀뿐이었다.
눈을 세모꼴로 뜬 임하얀은 골목 옆에 난 작은 공터로 나를 데려갔다. 사실 데려간 게 아니라 내가 따라간 거지만, 따라와 얘기하자고 하는 거 아니겠나.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 둔 작은 공터는 이 동네 공용 주차장으로 쓰이는 듯했다. 임하얀은 빌라 계단에 철푸덕 앉았다. 임하얀이 입을 열기 전까지 나는 부하 직원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교복 입고 있는 걸 보니 오늘이 졸업식인가 보네.”
제 동생의 복수를 하듯 임하얀은 차갑게 나를 쏘아보았다.
“너 스토커야?”
“스토커?”
“그래, 스토커.”
“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봐. 지난번엔 키링 사러 왔다더니. 이번엔 또 뭐야?”
차라리 임하얀이 장난치는 거라면 좋겠다. 하지만 스토커 운운은 진심이었다. 임하얀의 샐쭉한 입술로 내게 스토커 낙인을 찍었다. 조리 있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간 내 행보는 변명할 여지 없이 스토커 같았으니까.
“용건도 없으면서 전화에, 찾아오고. 수험생일 때는 힘드니까 그러려니 했어. 그런데 왜 아직도 이래? 여기 살지도 않으면서. 이젠 내 동생한테 해코지하질 않나.”
“…….”
“설마. 날 좋아하기라도 해?”
임하얀의 어조가 덜 건조했더라면, 아니, 나를 조롱하거나 비웃거나 그랬더라면. 감정을 삶은 듯 퍽퍽한 말투와 눈빛, 그리고 새삼스럽게 나를 부끄러움에 빠트리는 그 모든 상황이 내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제야 알았다. 난 내 감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그걸 직접 마주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다.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자 임하얀이 적으로 보였다.
“내가 미쳤어? 너를?”
“하. 아니라고?”
“아니니까…. 아니야.”
전기 합선이 일어나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눈앞이 번뜩번뜩했다. 나약한 본심을 지키기 위해 온몸에 비상등이 켜졌다.
“혹시 기대하고 있었다면 미안해서 어쩌나. 난 너 같은 짤막한 키에 아무거나 주워 입고 다니는 것 같은 여자는, 됐다고.”
“짤막한 키?”
“그깟 전화 몇 번 했다는 게….”
“그만. 알아들었어. 네 마음은 알겠으니까 앞으로 전화하지 마. 성가셔.”
임하얀은 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계단을 내려와 공터 쪽으로 걷는 임하얀이 너무도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 와중에 내 몸을 휘감고 도는 감정은 아직 너무도 뜨거워서, 이 감정이 서럽다는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의 물이 넘치도록 끓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임하얀의 뒤를 쫓아 걸었다.
“내가 성가실 건 뭐야. 전화 한 통 하는데 요금이 수백은 나와? 한 시간을 통화하길 해?”
“그만하자고.”
“널 좋아하진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쪽이 손해거든? 예전에 내 옷에 눈물 콧물 질질 짠 것도 나 암말 안 한 거 알아? 그거 세탁비도 안 받았어.”
“…….”
“내가 네 동생 넘어뜨린 것 때문에 그래? 사과하려면 할게. 사람을 착각해서 그런 거지 네 동생한테 악감정이 있던 건 아니야. 내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애한테 감정 있을 게 뭐야. 안 그래?”
“사과 필요 없어. 그냥 나한테 연락만 하지 마.”
“졸업 축하한단 말 정도는 선배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는데. 얼굴 보자마자….”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잘만 걷던 임하얀이 뚝 멈추어 서서 나를 돌아봤다. 비로소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체면은 깎였지만 속은 시원했다. 이왕 정신 놓은 거 끝까지 놓은 척할까. 자존심이고 뭐고, 속에 있는 말을 반도 못 뱉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어컨을 틀어 둔 양 시원했다. 임하얀은 팔짱을 끼며 나를 째려보았다.
“그만 좀 쫓아와.”
“이 동네가 임하얀 네 거야?”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데.”
“집이 이 근처인가 봐?”
“가라고.”
“걱정 마. 갈 거야. 그런데 어디로 갈지는 내 맘이지.”
무표정한 얼굴보다 감정이 날뛰는 지금이 나았다. 이거였다. 유치한 수법이지만 임하얀이 나를 상대해 주고 있었다. 판을 깐 김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야 했다.
“애도 아니고….”
“나 너한테 볼 일 생겼어.”
“무슨?”
“합격했어, 대학.”
학교에 가면 자연히 알 일이지만 일찍 밝혀 두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았다. 내가 지난 1년간 멀미 나도록 공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기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됐다는 걸 알면 임하얀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 정말 스토커 아니냐고 펄펄 뛰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일단 합격한 건 축하해. 그런데 너 집에 언제 가게.”
“A 대 경영 붙었어.”
“음, 신나겠네.”
그런데 임하얀의 반응은 물에 물 탄 것 같았다. 호기심을 지닌 것처럼 눈은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기대가 무너진 마음은 실망을 불만으로 교환해 왔다. 이것보다 더 격렬하게 질색하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좋지? 또 네 후배 돼서.”
“후배라니.”
“맞잖아. A 대 경영.”
“나 A 대 아닌데.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어?”
당황한 임하얀의 표정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벼락이 쳐서 대가리가 두 개로 쪼개져도 이보다 놀라진 않을 것이다. 임하얀은 금방 들통날 거짓말로 나를 속일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내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를 위해 임하얀한테는 A 대학의 A 자도 꺼내지 않았었다. 임하얀한테 네가 A 대학을 다니는 게 맞냐고 확인하지 않았다. 당연히, 눈곱만치의 의심 없이 임하얀이 A 대 학생이라고 믿었다.
“왜, 그래?”
“…….”
“정해루. 해루야.”
워낙 큰 충격을 받아 코로 피가 몰렸다. 임하얀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나를 한 골목길 앞에 세워 뒀다. 길을 막고 서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까지 하면서 말이다. 예전이라면 좋게 들었을 그 걱정도 지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임하얀이 A 대 대학생이 아니라면 1년 동안 했던 개고생은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그럼 어디….”
“못 들었어. 뭐라고?”
“어디 다니냐고.”
“B 대학.”
쌍시옷 섞인 육두문자만이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피가 흐르지 않게 코를 막고 목을 뒤로 젖혔다. 갑자기 웬 코피냐며 임하얀은 저가 갖고 다니던 티슈를 건네줬다. B 대학. 심지어 가지 못할 대학도 아니었다. A 대학보다 두세 단계 더 높은 대학도 써 봄 직하다고 담임이 꼬드겼으니 말이다.
무식하게 다른 지망은 아예 적어 내지도 않았다. 병균이 득시글거리는 담벼락에 등을 대고 기댔다. 자존심? 가오? 그런 건 휴짓조각으로 변했다. 내게 남은 건 임하얀이 목표로 했던 대학에 간다는 알량한 명예뿐이었다.
“이야기 더 들어 주고 싶은데. 나 이제 알바 가야 해.”
“나 아직도 피 나는데.”
“거의 멎었잖아. 알바 시간 늦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알바?”
아르바이트 소리에 사납던 마음이 한풀 꺾였다. 임하얀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이러다가 늦겠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임하얀의 아르바이트. 대학을 같이 못 다니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큰길까지 데려다줄게. 정신 좀 차려 봐.”
“아직 어지러운 것 같은데. 멀미도 나고.”
“어지럽기까지 해?”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나 혼자 뒀다간 뭔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일단…. 이리 와.”
센 척하지만 임하얀 마음은 말랑말랑한 게 틀림없었다. 눈에 뵈는 것 없는 후배가 샛길로 샐 것 같았는지 임하얀은 친히 내 손목을 잡아다 끌었다.
목줄 맨 개처럼 끌려가는데 좋아서 히죽 웃음이 샜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 기침을 토했다. 임하얀의 손바닥은 이불보다 더 보드랍다. 더 세게 잡아 달라고 하면 꾀병을 들키고도 남겠지. 임하얀이 간간이 확인차 돌아볼 때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음울한 것들을 상상하면서 걸었다. 그러하니 사람됨이 된 임하얀은 엉뚱한 방향을 짚었다.
“네가 원하는 대학 안 붙었다고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어. A 대학도 충분히 좋은 대학이니까.”
“…….”
“스트레스 풀고 싶으면 나 찾아와서 시비 걸지 말고 노래방 같은 데라도 가. 내가 졸업한 지가 벌써 1년이다.”
타박하는 듯하지만 이건 걱정이나 위로였다. 오늘 임하얀한테 스토커로 몰려 꼼짝없이 연락을 금지당할 뻔했으나 다행히 이 일은 원하는 대학에 붙지 못해 우울한 한 고등학생의 히스테리 정도로 마무리된 듯싶었다.
큰길로 나오자 임하얀은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따듯한 온기가 둘러진 손목을 남몰래 만지작거렸다. 얼굴을 찌푸린 임하얀은 택시를 잡으려는 듯 고개를 빼서 두리번거렸다. 자꾸 제 손목시계로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휙 돌아서 나를 본다.
“왜 웃고 있어?”
“안 웃었는데.”
“나 눈 안 삐었거든.”
“내 택시 잡아 주려고 그렇게 열심이야? 선배는 선배네, 임하얀.”
급하게 정색을 해 봤자 이미 다 들통난 마당에 뭘. 그래도 오늘 하나는 건지고 간다. 저 모닥불 같은 손으로 내 손목을 조몰락거린 것 말이다. 임하얀 때문에 재수 생각이 간절했다. B 대학. 다른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시기는 훌쩍 지났으니 노리려면 내년밖에 없었다. 그때 임하얀이 손을 뻗어 다가오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꾀병 부리느라 뭉그적거리던 몸이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저거 안 타. 모범 아니잖아.”
“오늘만 타고 가.”
“내가 택시도 못 잡을까 봐? 그나저나 너 알바 늦은 거 아니었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봤자 진실은 코피와 함께 닦여 나갔다. 시간이 임박했는지 임하얀은 인사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런 임하얀의 뒤를 새끼 오리인 양 쫓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태어나 한 번도 버스를 타 본 적이 없다. 이러니 골목길 아니면 임하얀을 만날 수 없지. 인생을 손해 보며 산 기분이었다.
“너는 버스 탈 필요 없잖아.”
“버스를 필요에 따라 타? 어디 가려고 타지.”
“내 말은…. 택시 타잖아, 원래.”
“원래 나 버스 타. 선배 네가 몰라서 그렇지.”
임하얀은 나와 얘기하면서도 정류장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늦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 어딘가로 급하게 문자를 쳐서 보내고 있었다. 1분도 되지 않아 버스 정류장 쪽으로 파란색 버스가 다가왔다. 임하얀은 미리 카드를 꺼내 준비하고 있었다. 임하얀을 따라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카드라곤 신용카드밖에 없었다. 이걸로 교통이 되는지 모르겠다.
파란 버스의 문이 열리자 임하얀은 쏙 카드를 찍고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서 올라탄 나는 보기보다 비좁은 내부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갑에 있는 카드 중 잘 쓰지 않는 카드를 대었더니 신기하게도 인식을 했다. 버스 무식자가 일차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임하얀은 창가 의자 쪽에 앉아 이어폰을 꺼내고 있었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앉자 이어폰을 귀에 가져다 대던 임하얀이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에 섞인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임하얀의 손에 들린 이어폰 한쪽을 뺏듯이 가져갔다. 훔친 이어폰을 꽂고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임하얀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재밌어?”
“B 대학. A 대학이랑 같은 지역에 있지.”
“…….”
“노래 틀어. 나 어디 이동할 때 노래 안 들으면 심심해서 안 돼.”
팔짱을 끼고 자는 척하자 임하얀은 알아서 포기하는 눈치였다. 가지런한 임하얀의 손톱이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수채화 같은 노래가 귀로 타고 들어왔다.
힙합이나 록이 아니면 간질거려서 못 듣는다고 했던가. 나는 그 과거를 반성한다. 사랑 타령이나 하는 노래에 물들고 말았다.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진 까만 겨울, 그리고 너는 하얀 봄이라니. 임하얀의 옆모습이 봄날 같긴 했다. 하얗고 정다웠다. 고개 숙인 임하얀이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이 노래가 숨겨진 내 마음을 파헤치는 것 같았다. 자석에 끌리듯 몸이 임하얀 쪽으로 넘어갔다.
무거운 건지 임하얀은 팔이 붙는 쪽을 빼내려고 시도했다. 나는 모르는 척 임하얀의 어깨에 내 팔을 가져다 붙였다. 사부작대는 팔과 팔이 맞닿아 비벼지는 소리가 황홀했다. 임하얀은 더운 사람처럼 손으로 머리를 모아 묶었다. 하얀 목덜미로 내려온 잔머리가 히터 바람에 나풀거렸다.
머리를 다 묶은 임하얀은 일어나 버저를 눌렀다. 이어폰을 돌려달라는 듯이 펼친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게 분명했다.
“여기서 내려야 해.”
“알아.”
이어폰을 빼내서 임하얀의 손에 건네줬다. 10분쯤 지났나 했건만 시계를 보니 40분이 지났다. 시간이 네 배나 뻥튀기돼 있었다. 내릴 준비를 하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출구 쪽이 바글바글했다. D 대학 근처 정류장. 대학가라 사람이 몰리는 모양이었다. 임하얀은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능숙하게 사람들 사이를 뚫고서 빠져나갔다.
임하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편의점 옆에 있는 골목으로 직행했다. 임하얀이 시간을 확인해 가며 도착한 곳은 외관이 허름한 호프집이었다. 가게 앞에 선 나는 호프집의 이름을 머릿속에 외워 뒀다. ‘노란 호프’. 임하얀이 일하는 노란 호프라니. 말장난 같았다. 귀여운 앞치마를 두른 임하얀이 한 아줌마와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확인할 것을 다 확인한 나는 뒤돌아서서 다시 그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임하얀이 A 대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건 낭패였다. 앞으로 어떻게 지겨운 4년을 보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몰래 반수를 할까 했지만 군대에 다녀와 복학할 시간을 계산해 보면 임하얀과 같이 학교를 다닐 날이 생각보다 얼마 없었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임하얀은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나설 것이다. 그럴 바엔 졸업이라도 하루빨리 앞당기는 게 나았다.
이 근처에 대학이 세 개가 있다. B 대학, D 대학, A 대학. A 대학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오자면 못 올 거리도 아니었다.
옛말에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까지 가는 버스 번호를 몰라 정류장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임하얀은 매번 그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오는 건가. 지친 몸을 이끌고 탄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멍청이. 쓸데없이 성실한 임하얀 욕을 해 본다. 임하얀은 멍청하고 헛똑똑이다. 그리고 그런 임하얀한테 홀딱 빠진 나는 멍청이 수준도 안 된다. 오늘따라 유난히 도로가 밝다. 눈이 멀 만큼 밝았다.
***
차를 사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할아버지가 입학 선물이라며 사다 놓았다. 그 소식을 들은 아빠라는 인간한테 연락이 왔다. 합격 축하 전화겠거니 했는데 그 인간은 내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 학생한테 그렇게 좋은 차가 무슨 필요 있어.
“있어.”
– 하…. 해루야. 넌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더 좋은 거 주시잖아. 어? 아빠 입장 알잖냐.
적어도 내 앞에서 입장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조부에게 자식 팔아서 연명하는 주제에 그걸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니. 아들이 대학교 다니는 데 불편한 건 없는지, 생활은 어떤지 묻기보다 자기 자동차랑 바꾸자는 소리를 하는 게 내 아비란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쉬운 소리를 한가득 담은 문자가 따라왔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일에 무덤덤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부모가 나 없이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볼수록 복수심만 자라났다. 나를 조부모의 ATM기 취급하는 걸 후회하게 해 주마, 같은 막장 시나리오만 늘어났다.
오늘은 운수가 나빴다. 첫 수업에서 조별 과제 조가 랜덤으로 정해졌다. 성적만 고려하지 인성은 고려하지 않은 인간들과 문자를 주고받아야 했다. 인원이 부족한 것도 짜증 나는데, 남들 앞에 서면 기절한다는 여자 한 명, 모기만 한 목소리로 왱왱거리다가 가는 남자 한 명, 출석하는지 마는지 알 수 없는 외국인 한 명. 그나마 정신머리 박힌 여자애 하나가 있어 어찌저찌해 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자료 조사 잘해 왔네요.”
임하얀 출근 전까지 30분이 남았다. 카페에 모인 건 나와 타과생 여자뿐이었다. 아메리카노가 오늘따라 더 썼다. 운수 나쁜 날엔 커피도 내 마음을 몰라 준다. 한 모금을 마시고 단체방에 장문의 글을 썼다. 오늘 나타나지 않으면 인생 망하는 게 뭔지 보여 주겠다는 문장을 전송한 차였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성적은 조원이 챙긴다더니. 유일한 참석자는 과제 대신 커피를 즐기러 나왔다. 전화로 재촉해도 모자랄 마당에 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들 아직도 처논답니까? 전화는. 안 받아요?”
“글쎄요. 아까 해 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여자의 잔엔 음료 없이 얼음만 달그락거렸다. 모아 둔 분노가 애먼 곳으로 튀지 않게 노력했다. 머릿속으로 1부터 10까지 센 뒤 한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어쩌자고요. 그것들 없이 우리끼리?”
“내가 할게요. PPT도, 발표도. 걔넨 솔직히 있어 봤자 도움 안 돼요.”
“그럼 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대신….”
여자의 손이 덮치기 직전 손을 빼냈다. 테이블에서 사라지는 손을 본 여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여자들 수작이라면 볼 만큼 봐 온 인간이었다. 정작 임하얀은 돌부처처럼 사는데 엄한 여자들만 반 미친 것처럼 난리 블루스를 췄다.
“PPT는 내가. 발표는 그쪽이. 나머지는 이름 빼고. 예? 서로 잘합시다.”
“여자 친구 있어요?”
종교는 없지만 신은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신의 수작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종종 내 삶에 있기 때문이었다. B 대학 근처. 가성비 좋은 카페에다가 여자들이 좋아하는 깔끔한 인테리어. 여기에 임하얀이 올 가능성. 마침 임하얀이 방문할 때 내가 모임을 하고 있어야 할 가능성. 그 가능성끼리 손뼉을 마주치는 건 운명 같은 확률이었다.
분홍 카디건을 입은 임하얀이 메뉴판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하얀색 머리끈으로 제 머리를 질끈 묶은 게 반듯한 임하얀다웠다. 임하얀은 고민 끝에 아이스 초코를 주문했다. 여전히 쓴 커피를 싫어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저기요. 여자 친구 있냐고요.”
“곧 생겨요.”
“곧?”
“나 먼저 가니까 문자 제때 확인하고. 튈 생각 말고.”
임하얀이 카운터에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카운터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임하얀의 옆에 자연스럽게 섰다. 임하얀은 제 옆에 선 그림자가 떠나지 않고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옆을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의아함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다시 차분해지는 그 눈에 입 맞추고 싶었다.
“왜….”
“아이스 초코 나왔습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아이스 초코를 집었다. 잘 마시겠다는 뜻으로 아이스 초코를 한 번 흔든 뒤 빨대에 입을 댔다. 임하얀처럼 달콤한 초코 맛이 혀에 퍼졌다. 눈앞에서 아이스 초코를 뺏긴 임하얀은 빚쟁이처럼 나를 쫓아왔다. 잘 걸렸다. 나는 실실 웃으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거기 서.”
“나 맥주 마시러 가야 하거든. 바빠.”
“돈 내놔.”
“이딴 게 몇 푼이나 한다고. 그냥 나눠 마시지?”
“몇 푼 안 하니까 내놔. 가서 다시 사게.”
“주세요, 해 봐. 그럼 줄게.”
임하얀은 더 이상의 실랑이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카페로 가지 않고 곧바로 직진했다. 제아무리 뛰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었다. 임하얀이 이 시간에 갈 만한 곳은 노란 호프밖에 없다. 좋은 대학도 다니는 애가 왜 그런 구식 호프집에서 알바를 하는가 했는데, 두 번의 방문 끝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임하얀의 고모가 하시는 호프집, 이름하여 가족 경영에 묶인 임하얀은 고등학생 때부터 그 집을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휴일은 고사하고 월급이나 또박또박 받는지 모르겠다, 저 멍청이.
임하얀의 앙증맞은 하얀 머리끈을 훅 잡아당기면 싫어도 아는체하겠지. 아이스 초코는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벌써 반이나 사라졌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냅다 걷는 임하얀과의 거리를 좁혔다.
“임하얀.”
“…….”
“임하얀.”
“…….”
“임검정.”
“하….”
무시는 아무리 임하얀이 주는 거라도 사양이었다. 차라리 짜증 부리는 건 그런대로 보는 맛이 있었다.
“정해루. 오늘도 가게 오는 거야? 아니지?”
하필 서 있어도 거길 서 있냐 싶었다. 뒷걸음질하면 남이 물고 빨다가 버린 담배꽁초를 밟기 딱 좋은 곳이었다. 임하얀이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기 직전에 다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앞으로 주욱 당겨서 데려와 내 앞에 뒀다. 담배꽁초를 밟지 않을 만한 위치로 옮겨 두고 어깨를 놓아주었다. 뒤늦게 버려진 담배꽁초를 발견한 임하얀은 어중간한 투로 말했다.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알 수가 없다.”
“선배 너 알면 놀랄걸.”
진심이었다. 임하얀이 기절하고 일어난 뒤 또 기절할지 모른다.
“선배 타령은.”
“왜. 고등학교 후배는 후배 아니야?”
“안 그러던 놈이 그러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초코 값, 안 받을 테니까. 호프집엔 오지 말아 줄래?”
“아이스 초코…. 4,500원. 호프집에서 내가 시켜 먹은 게 그것보단 많을 텐데?”
“친구 없어? 학교생활 안 해? 왜….”
“나 아싸, 왕따. 그런 거야. 여하튼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나랑 같이 가. 보여 주고 싶은 거 있어.”
임하얀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것 하나. 임하얀은 말로 이길 수 없었다. 내가 임하얀을 이길 수 있는 건 뻔뻔함, 무식함 그리고 철판 같은 거였다. 뇌와 이성을 한쪽에 곱게 개어 두고 임하얀을 대하면 오래오래 상대할 수 있었다.
임하얀을 놀리는 맛이 뭔지도 알게 됐다. 내가 능숙해지면 능숙해질수록 임하얀이 포기하는 횟수도 더 많아졌다. 관계가 나아지는 건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임하얀 성격상 나를 저러다 말 놈으로 취급할 거다. 지금도 유일한 만남의 장소인 노란 호프에서 쫓아내려고 안간힘 쓰는 것 봐라. 임하얀 바람처럼 순순히 퇴장할 거라면 애초에 미친놈처럼 나오는 방법도 쓰지 않았다.
“그냥 지금 보여 줘. 그 보여 주고 싶은 거.”
“지금은 없어.”
“왜 없는데.”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그 정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하얀은 노란 호프가 있는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반쯤 남은 아이스 초코를 빨아 먹으며 임하얀의 걸음 속도에 맞췄다. 담배꽁초나 소주병 조각 같은 게 보이면 발로 쓱쓱 밀어서 치워 냈다.
청소에 집중하면서 걷다가 보니 임하얀과 거리가 좁혀지고 좁혀진다. 좋겠다. 같은 학교 다니는 새끼들은. 임하얀 뒷모습 보면서 수업도 듣고, 임하얀이랑 같이 조별 과제도 하고, 임하얀이랑 같은 책상에 앉을 수도 있고.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학로 중심가 안쪽에 위치한 노란 호프는 싸고 양 많은 것으로 승부를 보는 집이었다. 사장 기분 따라서 맥주도 1,000cc를 마시면 500cc 한 잔은 공짜로 주기도 했다. 그 덕에 힘들어지는 건 임하얀이었다. 성실한 임하얀은 하루도 빠짐없이 제 시각에 도착해 파란 앞치마를 입는다.
노란 호프 단골인 나는 계산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했다. 앉아서 태블릿 PC를 꺼내자마자 사장 남편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학생 또 왔네.”
이 사람들이 임하얀 고모든 고모부든, 인성이 얼마나 좋든, 나한테는 그저 조카 부려 먹는 못된 파렴치한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간 두 번 다시 임하얀과 만나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훤칠하니 우리 하얀이 남자 친구감으로 딱인데.”
“고모부.”
주방에서 나온 임하얀이 낮게 목소리를 깔자 사장 남편은 깨갱하듯이 말을 멈추었다. 간만에 옳은 말이었는데 흐름이 끊겼다.
“프라이드 하나랑 맥주 500이요.”
“네네, 매번 와서 매출 올려 줘 고마워.”
고모부의 영업 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임하얀은 쌍심지를 켰다. 기본 안주를 갖고 테이블로 오는데 심통이 볼에 붙었다. 표정을 풀지 않고 그릇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피식 웃으며 임하얀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너한텐 서비스 후져. 다른 데 가려면 가도 돼.”
“싫은데. 여기 알바만큼 톡 쏘는 데가 없어서 다른 덴 심심해.”
“허.”
“가 봐, 그만. 일해야지, 일.”
약 올라 죽겠다는 표정으로 변한 임하얀이 호흡을 골랐다. 그때 시끌벅적한 대학생 무리가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곧바로 표정을 바꾼 임하얀이 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저희 다섯이요.”
매출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다. 손님이 나뿐이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쫄딱 망했으면 좋겠다. 다른 테이블에 기본 안주를 가져다주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임하얀을 보니 맥주가 당겼다. 사장 남편은 내 심정을 아는 양 차가운 맥주잔을 테이블에 올려 뒀다.
예의상 고개를 까딱이고 받아 든 맥주가 그렇게 달 수가 없다. 한 모금만 마시자 했는데 내려놓을 때 보니 반이 사라져 있었다. 입술에 묻은 맥주를 닦는데 서빙을 마친 임하얀이 갸름하게 뜬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뭘 봐.”
“너.”
술 먹고 시비 거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됐다. 그런데 진심으로 당황해서 말이 그렇게 튀어나온 거다. 임하얀은 다른 테이블의 주문이 적힌 종이를 부엌에 건네주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손님들 눈치를 보듯이 임하얀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가 체해.”
심장이 빙글빙글 돌다가 쿵 떨어졌다. 눈앞에 빛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했다.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감춰 두고 멍하니 풀린 눈에 힘을 줬다. 립글로스를 바른 것처럼 촉촉한 입술이 살며시 열릴 때 내 마음의 문도 같이 열렸다.
“저번에 그렇게 마시다가 체해서 119 부른 손님 있어.”
“알았, 알았어.”
“그런데 너 진짜로 여기서 과제 할 거야?”
“…안 돼?”
“여기 시끄러우니까 그렇지.”
피식 웃은 임하얀이 허리를 폈다. 그런데 임하얀이 이상하게 고분고분했다. 자리 차지하지 말고, 장사 방해되니 썩 나가라고 할 줄 알았다. 웬일로 안주 더 필요하면 말하란다.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낸 임하얀이 팔을 걷어붙였다. 가는 팔목을 훔쳐보다가 들키고 말았는데 임하얀은 입술 끝을 올려 주었다.
저게 오늘 작정한 것처럼 왜 저래. 과제고 뭐고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빈 소주병을 정리하는 모습이 날개옷 입은 천사 같았다. 저게 내 눈에만 예뻐 보일 리가 없다. 못해도 경쟁자가 수십 명은 나올 거다.
“치킨 나왔습니다.”
“사장님.”
“어, 무 더 갖다줄까?”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으잉?”
“일이요, 일. 아르바이트 하나 더 안 구해요?”
“아, 저, 그게….”
“월급 안 줘도 돼요. 대신 임하얀이랑 퇴근 시간 똑같게.”
“내가 사장이 아니라서. 저기, 마음은 알겠는데….”
여기서라도 임하얀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어야 했다. 주문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안주를 추가시키는 저 테이블도 수상했다. 저 중 하나가 임하얀한테 껄떡대면 아르바이트생 자격으로 저지할 수가 있었다. 남자 친구 지망생인 지금으로선 불가한 일을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거다.
치킨을 내려놓은 사장 남편은 거의 피신하듯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장한테 확답을 받아 오지 못했나 보다.
혹시 안 된다고 하면 돈을 낼 테니 일하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 돈 싫다는 사람 못 봤다. 질긴 닭가슴살을 포크로 자르고 있을 때 접시 두 개를 동시에 들려고 하는 임하얀이 보였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임하얀을 안아 들듯 달려가 골뱅이 접시부터 뺏었다. 지금보다 어린 고등학교 때부터 서빙 일을 했다니. 저 가녀린 손목으로 돼지 새끼들 처먹을 안주를 날랐다고 생각하니까 이 골뱅이 접시를 당장이라도 엎어 버리고 싶었다.
“저기 2번 테이블이야, 학생. 얼른 갖다드려.”
임하얀의 고모이자 사장은 이 상황을 받아들인 듯 테이블 넘버를 알려 줬다. 서빙은 난이도 최하의 아르바이트였다. 이미 소주 한 병씩 까 드신 테이블 위에 골뱅이와 치킨을 올려 뒀다.
“골뱅이, 치킨.”
서빙을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임하얀이 입 모양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그간 임하얀 고모부의 서빙 모습을 떠올린 나는 천천히 뒷말을 덧붙였다.
“나왔습니다.”
벽 쪽에 걸린 앞치마 하나를 집었다. 임하얀은 직원용 앞치마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손을 뻗었다. 키가 작아서 손을 뻗어 봤자다. 똑같은 파란색의 앞치마를 입자 한 쌍의 커플 같았다. 내가 히죽 웃으니 임하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서 과제나 해. 고모랑 고모부 보기 창피해.”
“네 고모부가 나 오늘부터 일하라고 했거든?”
“고모부가?”
임하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마침 사장 남편이 화장실에서 물기 묻은 손을 털며 나오고 있었다.
“고모부.”
“어, 하얀아.”
“해루 일하라고 하셨어요?”
앞치마까지 걸친 나를 본 사장 남편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학생, 학생.”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임하얀을 내려다봤다. 사장 남편이라는 분의 인상이 이제 보니 훤칠하니 좋으신 분 같다. 임하얀 쪽을 주시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사장 남편은 곤란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아니, 아직 해도 된다고 말도 안 했는데 벌써 입으면 어떡하나.”
“돈 안 받아도 되는데요.”
“그게 말이 돼? 허, 참…. 아무리 하얀이가 좋아도 그렇지.”
분위기 봐서 정식으로 고백하라는 사장 남편의 조언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임하얀의 얼굴을 감상하는 게 재밌었다. 표정이 다채로워 배우로 나서도 되겠다, 쟤는.
“우리 돈 진짜 조금밖에 못 줘, 학생. 알바 필요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신경질이 나는 걸 참느라 죽을 뻔했다. 임하얀에게 얼마를 주는지 모르겠으나 이 큰 가게에 임하얀 하나만 부리면서 더 뽑을 생각이 없었다니. 말로는 장사가 안 돼서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손님이 그렇게 없는 편도 아니었다. 억지로 수긍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돈이었는지 사장 남편은 협의된 것으로 알겠다며 미소를 걸쳤다. 보면 볼수록 저 사람들이 임하얀의 가족이 맞나 싶었다.
“여기요.”
“네.”
대기 중이던 임하얀이 주문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임하얀보다 앞서서 주문을 받았다. 취한 눈빛의 손님 무리를 보고 대신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소주 두 병 더 주세요. 이슬이로.”
냉장고 쪽으로 가서 소주 두 병을 꺼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손님 세 명이 더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임하얀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할 새도 없이 작은 몸이 튀어 나갔다. 기본 안주를 손님에게 내는 임하얀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를 닫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저거 공부는 언제 해. 저러다가. 소주 두 병을 서빙하는 동안 옛 생각이 났다.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며 눈물 콧물 빼던 임하얀을 당시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보였다. 방긋 웃으며 손님을 응대하는 임하얀이 한쪽 종아리를 발목으로 톡톡 두드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노란 호프를 돌아다니니 다리가 아픈 게 당연했다.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꺼내서 몽땅 마시고 싶었다. 임하얀은 주문받은 종이를 부엌에 건네고 내 옆으로 돌아왔다.
“안 힘들어?”
“이게 힘들면 나가 죽어야지.”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를 품에 얼러 보듬어 주고 싶었다. 내 보살핌을 원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연민부터 느끼고 있으니. 이게 바로 망조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
밤 10시에 퇴근이었다. 옷에서 기름 찌든 내가 났다. 같이 일한 임하얀한테서는 샴푸 냄새밖에 안 나서 억울했다. 손으로 털어 봤지만 냄새가 사라지질 않는다. 호프집 셔터를 내린 임하얀이 가방을 챙겨 내려왔다. 저 혼자 갓 씻고 나온 출근길처럼 산뜻할 일인가.
“아직 안 갔어?”
임하얀은 기다리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내 말을 건성으로 들은 게 분명했다.
“기다린다고 했잖아.”
“힘들어서 갈 줄 알았어.”
임하얀은 허기가 진다며 가방에서 초콜릿 한 알을 꺼내 먹었다.
“너도 하나 먹을래?”
“아니, 됐어.”
“단 거 싫어?”
“뭐가 안 먹혀, 지금은.”
“그래, 그럼.”
마음 같아서는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었지만 지금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손잡기는 포기하고 임하얀과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이럴 줄 알고 근처에 미리 차를 대 둔 게 다행이지 싶다.
술에 취한 놈들이 가게 앞마다 진을 치고 서서 담배를 피워 댔다. 당장 팔로 코를 막았다. 매일 이 길로 출퇴근하는 임하얀의 건강이 걱정됐다. 하지만 임하얀은 코가 막혔는지 담배 연기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내게 임하얀이 말을 걸었다.
“담배 싫어해?”
“냄새가 싫어.”
“의외네. 그런 거 한 갑씩 피게 생겨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냐. 난 오래 살 거야. 오래 살지 않더라도 병원 신세 지면서 노후를 보내진 않을 거고.”
“그렇구나.”
제 몸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놈 하나가 임하얀 쪽으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서슴없이 임하얀의 허리를 감쌌다. 임하얀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동그랗게 말았다. 하얀 이마가 꼼틀대며 가슴팍을 눌렀다.
후드티에 머리를 댄 임하얀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찰나 동안 시선을 나누었다. 광고 전단이 붙은 전봇대 앞에서 입을 맞추는 게 낭만이 있을 리가. 하지만 임하얀과 하는 거라면….
“고마운데….”
내 몽상을 깨려는 것처럼 임하얀은 부드러운 손길로 허리를 밀었다.
“아…. 어.”
사심이 묻어나는 손을 천천히 뗐다. 임하얀은 헛기침하며 몸을 바로 했다. 그런데 나를 피하기는커녕 내 왼쪽으로 돌아와 걸었다. 나보고 보호해 달라는 뜻으로 읽혔다. 임하얀이 듣지 못하게 킥킥 웃었다.
임하얀의 마음이 내 수중으로 들어올 날이 머지않았다. 종일 뼈 빠지게 술 나른 것이 도움이 됐나. 분위기를 즐기며 걷다 보니 목적지를 코앞에 두었다. 공용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임하얀이 곁눈질로 보았다.
“보여 준다는 게.”
“저거.”
공용 주차장 안에 있는 수많은 차 중에 내 하얀 차를 가리켰다. 내 취향은 빨간색이었지만 일부러 임하얀처럼 하얀 것으로 골랐다. 차 키 버튼을 누르자 삐삑 소리를 내며 차의 눈동자가 훤해졌다.
“저걸로 같이 등교하고 퇴근하자고. 버스 같은 거 왜 타, 피곤하게.”
“같이?”
“나도 알바하고 학교도 가깝고. 싫을 이유 있어?”
나의 정성을 알고 감동한 임하얀이 쓰러지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임하얀은 무생물을 보는 듯 관심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피곤하다며 제 손으로 눈두덩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도리어 긴장하고 만 것은 나였다. 차가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색이?
“얼른 타자. 네 말대로 정말 피곤해.”
임하얀은 뚜벅뚜벅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피곤하다는 말을 증명하듯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는다. 나는 남의 차를 얻어 타는 기분으로 운전석 문을 열었다. 조용해진 임하얀 때문에 긴장이 돼 마른침을 삼켰다.
“자?”
“아니.”
“좀 자던가.”
“응, 고마워.”
주차장을 빠져나와 복잡한 대학로로 들어섰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가 집중력을 흩트렸다. 사람이라도 칠까 싶어 어떻게든 집중력을 높였다. 무사히 대학로를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자마자 임하얀이 눈을 떴다. 몰래 훔쳐보던 나는 재빨리 눈길을 앞으로 고정했다.
“확실히 버스보단 편하다.”
승리의 깃발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맘 같아선 임하얀 볼에 뽀뽀라도 하고 싶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단 법. 지금 뽀뽀한 뒤 귀싸대기를 맞는 것보다 정식으로 연인이 된 뒤에 뽀뽀하는 그때가 몇 배는 더 달 것이다.
준비된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핸드폰을 켜 노래 리스트로 들어가 발라드를 틀었다. 차 안을 울리는 여자 가수의 목소리에 임하얀이 아는 척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알아. 그때 들었잖아.”
때마침 빨간색 신호등이 켜져 브레이크를 밟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조수석 쪽을 힐긋거렸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설레발치는 심장을 토해 내고 싶었다.
“해루야.”
더군다나 나를 해루야, 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부디 바라건대 이게 꿈이라거나 임하얀이 아픈 거라거나 그 두 가지만 아니면 좋겠다.
“나 많이 좋아하는 거 알겠는데.”
“…….”
“나는 아직 연애할 생각 없어.”
빵….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나는 핸들에 손을 올린 상태로 숨을 쉬지 않았다. 빵빵…. 연신 경적을 울리는 차들보다 임하얀의 정적인 눈동자가 나를 아프게 쑤셨다.
기계적으로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씨발, 사고는 내면 안 된다. 임하얀 앞에서 쪽팔리게 차 사고를 낼 순 없었다. 오죽 정신이 없었으면 임하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방향으로 운전을 했다. 중간쯤 가고 나서야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전까지 전화하지 마라, 찾아오지 마라, 저리 가라 등의 말은 자주 들어 왔지만 그 안에 관계를 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느낌은 없었다. 속은 쓰리더라도 계속 들이대면 언젠간 뚫리겠노라는 확신이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임하얀은 남자 대 여자로 나를 찼다. 그것도, 뻥.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서 찼다. 문제는 고백조차 해 보기도 전이라는 것이다. 임하얀을 꾀어내서 고백하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뒷전으로 치더라도 이건 나를 한 방에 보내 버릴 치명타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나마 임하얀의 동네 방향으로 유턴하는 길에 들어설 즈음 생각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시내 구경 중인 임하얀의 표정은 동요 없이 고요해서 기가 막혔다. 큰 통증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남은 것은 상처투성이인 자존심과 순정뿐이다. 이 초라한 걸 쥐고서 계속 들이받을 거냐고 울부짖는 속마음이 들린다. 임하얀 같은 여자, 생소해서 그렇지 찾아보면 발에 챌 정도로 흔한 여자일 거다.
얼굴 허옇고 맹한 여자를 찾다 보면 백이면 백 임하얀 같을 거란 말이다. 괜히 안 된다는 거 붙잡고 씨름할 바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 너 같은 거한테 관심 없다고 한마디, 그 한마디면 된다. 껍데기만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저쪽도 나 같은 거 깔끔히 떼어 내고.
“내일 나 일 안 나가. 그리고 차로도 안 데려다줘도 돼. 이제 학교 근처에서 자취할 거라서.”
고로 차 끌고 다닌 것마저 어필은커녕 씨알도 안 먹혔단 소리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 샜다. 안 해도 될 말이 혓바닥 길에 올랐다.
“내가 왜 싫은데.”
“…….”
“너랑 나랑 뭘 해 봤다고, 어?”
“무슨 소리야.”
“손 한번 안 잡아 봤어. 포옹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단 말이야. 나에 대해 다 알아? 뭐를 아는데. 시작도 안 해 보고 찰 정도로 내가 그렇게 아니야?”
“진정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임하얀한테 조금 더 멋지게, 그럼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보자고, 나 꽤 괜찮은 놈이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이놈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멋진 마무리 따윈 허락해 주지 않는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창문을 열고 속도를 높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정전된 머릿속에 불을 켜려고 노력했다. 뭘 해도 나만 보면 엑스 표를 들고 있는 임하얀한테 나를 좋아하라고 윽박질러 봤자다. 그게 글렀으면 포기를 하면 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나 싫다는 여자 아니었던가.
임하얀네 집 주소를 몰라 눈에 익은 골목길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마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차 안에 내 신음만 얕게 울렸다.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해 봤지만 속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미련한 사람만 미련을 떠는 줄 알았다. 이걸 떼어 내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마지막을 미루고 있었다. 다행히 바람처럼 떠나지 않고 기다려 준 임하얀은 안전벨트를 달칵 풀며 말했다.
“상처받지 마. 별 대단한 이유로 너를 차는 것도,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 죽겠어서 차는 거 아니야.”
“그럼.”
“연애할 여유도 없고, 또 우리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아서.”
눈앞에서 희망이 왔다 갔다 했다. 방금처럼 성급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띄엄띄엄 한숨을 내쉰 임하얀의 입술은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솔직히 네가 나한테 이만큼이나 마음을 줬는지 몰랐어. 이렇게 거절하면 네 성격상 잔뜩 비꼬거나 화낼 줄 알았는데….”
“화는 안 나. 그런데 묻고 싶은 거 있어.”
“…….”
“우린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다는 게, 그게 무슨 뜻인데.”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귈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게 있어. 그런데 넌 그게 안 돼. 그것뿐이야.”
“그 중요한 게 뭐야. 성격?”
“성격 아니고 돈 아니고. 그런 게 있어. 백 번을 물어도 말 안 해. 나 내릴게.”
임하얀이 문을 엶과 동시에 나도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내려서 조수석 문을 닫고 가려는 임하얀을 빠르게 쫓아갔다. 내가 앞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멈춘 임하얀은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양심에 가시가 돋았다. 자존심, 개나 줘 버렸다. 계획, 시작부터 실패한 마당에 그게 뭔가 싶다. 놓아주기, 미련, 다 모르는 일이었다. 임하얀이 말한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는 생각에 안달이 났다.
“말을 하고 가. 나는 그게 뭔지 들어야겠으니까.”
“명령이야?”
“명령? 명령 아니고 부탁이니까 말해. 나는, 그게 뭐든 맞출 수 있단 말이야.”
“그걸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아. 넌 못 해. 난 실망만 할 거고.”
“아니, 씨발…. 욕해서 미안. 임하얀. 뭐든 말만 해. 나 할 수 있다니까?”
“…….”
“임하얀.”
“하….”
“하얀아.”
“그만 나 보내 줘.”
비켜서지 않자 막무가내로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 버리려고 했다. 질척이지 말고 보내 주자는 다짐은 1초도 못 갔다. 부딪혀 오는 임하얀의 어깨를 잡았다. 뒷머리를 감싸듯 쥐고서 부드럽게 껴안았다. 품에 꼭 맞는 몸이 안겨 오자 전류가 찌릿 통했다.
“아니라고 하면 좀 들어. 피차 이게 나아.”
임하얀은 노선을 바꿔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피차 나은 게 아니라 저만 좋은 거였다.
“싫어. 네가, 들어준다고 해. 맹세코 놀라지 않을 테니까 말이라도 해 봐. 나 네가 뭘 말해도 안 놀라. 임하얀 취향이 그렇구나, 그게 임하얀 취향이네, 하면서 받아들인다니까.”
샴푸 냄새가 진동하는 임하얀의 머리칼에 뺨을 은근슬쩍 비벼 보았다. 잔머리가 송송 올라오는 느낌이 끝내줬다. 임하얀에 대한 욕심은 굶은 기간이 길어 포옹으로 만족을 못 했다.
임하얀은 이 정도면 됐다는 듯이 안은 팔로 등을 쓸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지랄병을 앓고 있는 아래쪽으로 신호가 갔다. 눈알에 로션이 들어간 것처럼 앞이 흐릿흐릿했다. 임하얀의 그 작은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뽀로통하게 부은 입술이 꼭 다물려 있었다.
가로등 아래만 서면 수만 배는 예뻐 보였다. 깨물 게 없어 내 입술을 자긋자긋 깨물었다. 하지만 임하얀은 환상을 깨듯이 내 손을 뿌리쳐 아래로 내렸다. 미련 남은 손이 혼자 움츠렸다가 펴졌다.
“고마워. 나를 좋아해 줘서.”
“…….”
“너같이 잘생긴 남자가 매달리는 건 어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니까 얼떨떨하다.”
“…너, 내가 우스우니까 아예 놀려 먹기로 작정한 거야?”
“그렇게 들렸으면 미안. 그런데…. 알잖아.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이번엔 다르겠지, 저건 다를 거야 하면서 갔다가 실망감과 상처만 얻고 마는 거. 그게 난 싫어. 바보 같은 짓 안 하고 싶어.”
임하얀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 같은 거, 솔직히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임하얀의 남자 친구는 될 수 없다는 거였다. 임하얀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서 고백하겠다는 건 개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나만의 망상이었다. 싫다는 사람을 밤새 잡아 둘 명분이 없기에 놓아주었다. 잘 지내라는 말도 없이 떠나는 건 임하얀의 배려일 거다. 하지만 그 배려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이나 감동하는 것이지 나 같은 좀팽이는 아니었다.
그전까지 끝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어떻게든 나를 보여 주면 임하얀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임하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도 소용없는 지금은 모든 게 추락이었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임하얀을 보면서 목이 잠겼다.
쟤는 하나도 아쉬운 게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달려가 혹시 생각이 바뀌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나 싫다는 여자한테 아량 좀 베풀어 달라고 빌고 싶었다. 알고 있다. 애정을 얻기 위해 손과 발이 부르트도록 비는 사람은 죽는 그날까지 얕보인다. 하찮은 약자로 전락하는 셈이다. 애정은 실체가 없기에 제가 공들인 만큼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간혹 주어지는 빵 부스러기 같은 애정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사는 거다.
그게 치사해서 부모를 잊고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원망스러워지는 건 나 자신이었다. 타인의 마음조차 가지지 못할 정도로 별로인 내게 상처와 모욕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주머니 속에 누워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갈등 끝에 임하얀의 번호를 삭제했다. 빈자리가 생긴 연락처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예뻐하고, 사랑하고, 달래 주고, 그랬다면 달랐을까? 임하얀의 마음을 얻지 못하게 한 그 조건이 무엇인지 평생을 궁금해할 것이다. 당연했다. 임하얀은 오늘부로 첫사랑이 되었다. 처참히 깨져야 완성된다는 그 첫사랑 말이다.
그리고 나의 첫사랑은 발 한번 떼 보기도 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하얀 페인트로 엑스 자가 그어졌다. 기분이 엿 같았다.
***
밥이 맛이 없다. 일주일째 그랬다. 핸드폰을 꺼 두고 사는데도 학교에 나오면 사람과 부딪쳐야 할 일이 생겼다. 기어코 강의실에 늘어진 나를 찾아낸 동기들이 학식 먹자며 끌고 온 게 화근이었다. 안 먹겠다는 놈한테 숟가락을 쥐여 줘 봤자 밥알 세기밖에 더 하나.
“들었어?”
“어? 정 씨, 이봐요.”
귀찮아서 대답 안 하는 걸 들킨 모양이었다. 밥알 세기를 포기했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식판을 밀고 빈자리에 엎드렸다. 심호흡한 뒤 이마를 식탁에 쿵 박았다.
“가자고. 해루야. 어?”
“그래. 군대 가기 전에 여친 만들어야지.”
의욕이 없어서 고개 들고 입으로만 뻐끔 물었다. 무슨 소리 하느냐고. 내 마른 시선을 받은 동기 놈 하나는 파리처럼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미팅.”
“너 없으면 안 한다고 지랄인데 어떡하냐. 가자. 가는 거지? 간다고 한다?”
미팅. 그런 거 한다고 임하얀이 신경이나 쓸까. 고백한 놈이 제풀에 나가떨어지면 어디 잘못되진 않았나 예의상 한번 전화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밥맛 없고 살맛도 없다. 미팅에 나간다고 임하얀에게 복수라도 되면 몰라. 여자에 환장했다는 비웃음만 살 것 같아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안 해.”
“너 여친 없다며.”
“차였다.”
“여자 친구한테?”
“와, 대박.”
주제 하나를 던져 주니 저희들끼리 물고 뜯으며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잘된 일이었다. 음식 냄새를 맡는 것도 역해서 자리를 뜨려는 차였다. 신나게 망상을 늘어놓던 놈들이 타깃을 나로 바꾸었다.
“그런데 왜 차였는데.”
“순정이다, 순정. 밥도 안 묵고. 눈물 난다, 정해루.”
“여자 친구한테 지금 모습 사진 찍어서 보내 주면 맘 바뀔 것 같은데.”
마지막 말엔 귀가 솔깃하긴 했지만 임하얀은 보자마자 사진을 삭제할 것이다. 유의미한 답은커녕 나를 더 혐오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할 뿐이었다. 됐다. 쓸 데 있는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알아서 먹고 와. 나 간다.”
“야, 야, 야. 잠깐만. 우리 미팅은.”
“못 해. 나가서 분위기 개판 5분 전으로 만들기 전에 난 빼라고.”
“해루야. 어? 너 거기 나가면, 우리가 거 여친이랑 다시 잘되게 도와줄게.”
미팅을 나가면 임하얀과 잘될 거라는 보장이 더 떨어지지만, 다른 의미로 그들의 말에 솔깃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고민 상담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저지른 일들이 결국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게 아닌가 싶었다. 식판을 내려놓자 동기 놈들 눈이 반짝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보는 고민 상담을 이런 것들하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도 자체로는 나쁠 게 없어 보였다.
“내가 싫대.”
“왜.”
“어디가? 정확히 어디가 싫대?”
제 목적이 달려 있어서인지 상담해 주는 자세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미팅에 눈이 먼 새끼들의 집중력은 채 1분도 가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었다. 짤막한 고등학교 에피소드로 밑간을 한 후 노란 호프에 잠입하는 이야기로 들어갔다. 지루한 표정을 짓던 놈 하나가 대뜸 물었다.
“그래서. 예뻐?”
“그럼 안 예쁜데 정해루가 저렇게까지 하겠냐? 어디 S 여대 여신인가 보지. 어, 어, 계속해 봐.”
내 고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의심이 깊었던 나는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결론부터 내보였다.
“내가 한 가지가 없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
“돈은 아닐 거고.”
“뭔데. 성격? 그래, 성격이다.”
“야, 이 빙충이들아. 이거 그거잖아.”
내내 아무 말 없던 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감 가득 찬 표정에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이 중에서 가장 연애를 많이 해 본 놈이기도 했다.
“여자들 그거 있잖아. 자기 나쁜 년 되기 싫으니까 애매하게 돌려서 거절하는 거.”
“오, 일리 있어.”
임하얀한테 거절당할 땐 하늘이 회색빛이더니 이제는 아예 눈앞이 흑백색으로 보였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임하얀이 말한 조건이 나를 가둔 벽처럼 느껴져, 어떤 의미로는 영원히 그 벽이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나를 떼어 내기 위한 거짓말이라니. 두 발로 땅을 딛기가 싫었다. 뱀처럼 기어가 안전한 이불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임하얀에게 모욕당하고 혐오를 당해도 되는 뱀이 곧 나였다.
“야, 야. 아니겠지. 무슨….”
“그래, 인마. 말이 좀 심했다.”
식당을 어떻게 빠져나와 남은 수업 두 개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는지, 무얼 들었는지 불분명했다. 후련하다는 듯이 나를 잊고 살 임하얀의 삶이 어떨지 떠올리느라 바빴다.
기억하는 유일한 건 오늘 운전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동기의 당부였다. 하지만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은 택시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도 말이다.
사람의 뇌라는 게, 정신이라는 게 무섭다. 암전된 시야가 돌아오고 보니 초라한 골목길에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살지는 않아도 뼛속들이 아는 동네였다.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슈퍼가 생각이 났다. 온 김에 소주 한 병만 사 가지고 돌아가야겠다.
차 문을 열자 임하얀 동네로 온 게 실감이 났다. 스티로폼 더미가 개 오줌이 묻은 전봇대 밑에 버려져 있었다. 자주 오니 길을 외웠나 보다. 발길 닿는 데로 걸었을 뿐인데 슈퍼를 발견했다. 슈퍼로 들어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주 한 병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슈퍼 주인에게 카드를 건네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공원이 시끌벅적했다. 공원 벤치를 점령한 학생 무리 중 한 남학생의 얼굴이 낯익어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소주병을 들고 슈퍼 밖으로 나왔다. 가로등 불빛 덕분에 얼굴을 구분하기가 쉬웠다. 강강술래 하듯 빙 두른 남학생 사이로 한 애가 뚝 떼어 낸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임파랑. 내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임하얀의 동생이었다. 분위기를 보면 친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남학생 셋은 임파랑은 교복도 다르고 나이도 달라 보였다. 소주 한 병 들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들리는 대화가 가관이었다.
“아, 그니까. 형들이 주의 돌린다니까.”
“넌 촉법이라 안 걸린다고. 괜찮아.”
술 마시는 게 업적의 전부인 찌질이들이 동네 슈퍼 앞에서 육갑을 벌였다. 발로 기척을 내자 갑자기 나불거리던 입이 다물렸다. 성인인 내가 신고할까 봐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그것부터 하수란 소리였다. 중학생을 쪼느니 성인을 설득하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는 걸 모르는 빈 대가리란 소리다. 시소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임파랑을 구경했다. 임파랑과 학생 셋이 내 쪽을 경계하듯 훑었다.
소주 뚜껑을 돌리고 구멍을 입으로 기울였다. 단순한 취객이라고 생각했는지 가장 덩치 큰 놈이 임파랑의 무릎을 깠다.
“악!”
“야. 형들 너 이름이랑 학교 다 기억했다?”
“이 형 소년원도 갔다 온 사람이야. 너 소년원 어딘지 알지?”
“자랑이다.”
듣자 하니 웃겨서 한마디 보탰다. 눈빛을 주고받는 걸 보니 셋이서 덤빌 만한지 가늠해 보는 모양이었다. 미성년자하고 싸우면 나만 손해였다. 더군다나 임하얀 동네에선 안 된다. 차에 태우고 어디 멀리 데리고 가면 모를까.
게다가 임파랑도 드디어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그때 지나치게 나를 무서워한다 싶더니 이런 일을 종종 당하는 모양이었다. 누나 속 많이 썩이게 생겼다.
“임파랑.”
“네, 네?”
“친해, 쟤들이랑?”
임파랑이 눈치를 보다가 시소 쪽으로 슬금슬금 붙었다. 다행히 저 셋을 쥐어박아도 될 명분이 생긴 셈이다. 임파랑이 배신하자 저쪽도 머리라는 걸 굴린 눈치였다. 소년원 운운하며 자랑하던 태도를 싹 바꾸고 순진한 척 웃었다.
“형. 우리도 그거 사다 주면 안 될까요?”
“우리 파랑이랑 친한데.”
교화한답시고 명언을 날리는 게 안 먹히는 세대였다. 경찰에 보내 봤자 내일은 또 다른 놈을 붙잡고 이 짓을 반복할 놈들이었다. 나는 먹다 만 소주병을 흔들며 물었다.
“얼마 줄 건데.”
“만 원요.”
지갑 사정 뻔하다. 낮에 동네 돌며 삥 뜯은 걸로 저녁에 소주 한 병 마시는 인생이라니. 소주를 천천히 들이켜고 술값에 보탤 수 있게 빈 병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팔 눈치가 아닌 걸 알고는 다른 데로 가자며 침을 짝 뱉었다.
소주는 맛없었다. 이 맛대가리 없는 걸 먹으려고 저렇게 꽁무니 빠지게 돌아다니는 인생이 소주보다 썼다. 반절 남은 소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임파랑을 바라봤다. 가방을 끌어안은 임파랑의 다리가 맥없이 푸들거렸다.
“고마워요, 형.”
이건 임하얀이랑 다른 과였다. 임하얀처럼 대범하지도 세상 달관한 사람처럼 부처 얼굴을 하지도 않는다. 지 누나 반만 닮았어도 인생 살기 편했을 거다.
“저기, 형.”
“왜.”
쟤 누나 때문에 마냥 귀여운 중학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임하얀 때문에 속상해서 술이나 퍼마시는 주제에 그 동생을 도와주고 앉았다니. 남한테 인생이 쓰다 달다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시소에서 일어나자 임파랑이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물에서 건져 줬으면 됐지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인가 하고 쳐다봤더니 눈치를 핼끔 봤다.
“저 집에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아까 그 형들 있을 것 같아서….”
미치고 팔짝 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술을 반병이나 마셔서 대리운전을 불러야 했다. 저대로 두고 가면 또 제 누나한테 달려가 무어라 일러바칠지도 모를 일이고. 앞장서라는 듯이 턱짓하자 재깍 안내를 맡았다. 어깨를 움츠리며 다가온 임파랑이 우물거리듯 말했다.
“형 키가 어떻게 그렇게 커요?”
“…….”
“멸치 먹으셨어요?”
“유전.”
“아….”
임하얀네 집이 전체적으로 키가 아담한 모양이었다. 실망한 임파랑의 얼굴을 보니 다르게 말을 했어야 했나 싶다. 중학생이면 키 몇 센티로 자신감 여부가 갈릴 수 있었다.
“남자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커, 대부분.”
“진짜요?”
“응.”
“우리 누나랑 사귀어요?”
“…아니.”
“왜요? 우리 누나 좋은데.”
네 누나 좋은 걸 몰라서 안 사귀는 게 아니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얼큰하게 취기가 돌았다. 푸른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지방 라디오가 꺼지지 않아서 사색에 잠기긴 글렀다. 중학생의 입술은 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나 자취한다고 집 나간 뒤로 엄마도 아빠도 힘이 없어요. 나도 누나한테 뭐 물어볼 때마다 전화해야 하는 거 싫고…. 연두랑 하늘이도 누나 보고 싶다고 맨날 울고.”
“그럼, 집에 임하얀은 없어?”
“아, 오늘은 있어요. 반찬이랑 남은 짐 가지러 온다고 그랬거든요.”
임하얀이 100M 안팎에 있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임파랑이 나한테 직접 데려다달라고 요청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임하얀네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합법적으로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것이니 모쪼록 오해는 말았으면 한다. 나를 떼어 놓으려고 애쓰는 여자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그 동생을 써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임파랑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200원도 안 되게 생긴 과자를 꺼냈다.
“형, 이거 드실래요?”
“싫어. 그딴 거 먹지 마. 키 안 커.”
“아, 네. 형은 운동 같은 거 해요?”
“가끔 농구.”
“저도 끼워 주시면 안 돼요? 키 크고 싶어요.”
동생이 있긴 하지만 정해리는 여자애이고 나와 따로 살았다. 명절 같은 특수한 날이 아니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내 성격은 이 모양이고 정해리는 넉살 좋은 애가 아니었다.
임파랑은 거의 외동처럼 자라 온 나에게 동생이란 존재가 이렇게 귀찮은 것이었나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임파랑에, 어린 동생 둘과 임하얀. 넷이서 한마디씩만 해도 금세 시끄러워지겠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이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는가. 나도 수다스러운 아이는 아닌지라 집안 분위기는 늘 삭막했다.
“임파랑.”
“누나!”
빌라 단지 앞 2층으로 된 아담한 주택이었다. 담장 밖으로 삐져나온 나뭇가지에 따듯함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대문 앞에서 동생을 기다리는 임하얀이 코를 훌쩍였다. 나를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임하얀의 발 옆에 종이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자취를 위해 집을 나온다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를 알아본 임하얀의 눈은 겨울밤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더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임파랑은 제 누나에게 이산가족이 상봉하듯 달려갔다. 불청객인 나는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 멈추어 서 있었다.
“왜 전화 안 받아.”
“아, 맞아. 아까 그 형들이 끄라고 해서….”
“그 형들?”
팔짱 낀 임하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파란 대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아주머니 인상이 임하얀과 무척 비슷했다. 짧은 파마 머리를 한 임하얀 같았다. 물감 남매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왜 나왔어.”
“누구니?”
다정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누가 봐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 모른 척하며 서 있을 수 없었다.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쳤다.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떠나게 된 데에 아쉬움이 짙지만 임하얀 어머니까지 등장한 마당에 죽치고 서 있을 순 없었다.
“저 형이 나 구해 줬어.”
“무슨 소리야.”
“구해 줘?”
임파랑이 은혜 갚는 까치가 되어 내게 날개를 달아 준 것이었다. 임파랑은 열과 성을 다해서 나와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닭살이 돋아나 죽을 뻔했으나 의외의 성과가 넝쿨째 굴러들어 왔다.
“밥 먹구 가, 학생.”
“엄마.”
“왜에. 너 아는 사람이야?”
“응, 누나 알아.”
이 상황에 밥을 먹었다간 체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바닥에 놓인 임하얀의 짐을 대신 들며 고개를 숙였다.
“저 약속 있어서요. 선배 짐만 정류장까지 옮겨 주고 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하얀이 후배였구나. 그럼 다음에 하얀이랑 날 잡구 우리 집 와요. 응?”
“예, 뭐, 불러 주신다면.”
“훤칠하다. 몇 살 후배야? 그런데?”
난데없이 밥 약속을 한 나를 본 임하얀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 어머니의 손목을 잡아 대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엄마, 들어가. 들어가, 일단.”
“왜에. 파랑이랑은 언제부터 셋이 아는 사이야.”
“임파랑, 너도 들어가. 얼른.”
임하얀이 저렇게 당황하며 허둥지둥하는 걸 처음 보아서 놀라울 따름이다. 임하얀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제 동생과 어머니를 대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땀방울이 구슬구슬 맺힌 임하얀의 이마를 보니 없던 미소가 살아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임하얀은 제 짐을 든 나를 보며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일단…. 다른 데로 장소를 옮기자.”
따라오라는 듯이 앞서 걷는 작은 등을 보는데 입 안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이 설탕처럼 달았다. 술기운에 하는 말이 아니라 임하얀은 어디 하나 모자란 데가 없는 여자였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임하얀의 한숨 소리가 다시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말이다.
임하얀은 제집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 위의 교회로 데려갔다. 신도를 위해 마련해 둔 하얀 벤치에 임하얀이 걸터앉았다. 홀로 빛나고 있는 은색의 십자가가 환한 조명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는 임하얀의 모아진 두 손과 어두운 표정을 심각하게 살피고 있었다. 혹시나 짐을 내려놓으면 그대로 두고 가라는 말을 들을까 봐 상자 두 개를 보물처럼 안고서 서 있었다. 임하얀은 제 앞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랑이 구해 준 건 고마워. 걔가 이상하게 그런 질 나쁜 애들한테 잘 걸려서 늘 걱정이었는데. 나도 못 한 걸 네가 해 줬네.”
임하얀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기에 미치도록 기뻤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는 상자 모서리를 구기고 말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웃음기를 누르기 위해 교회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임하얀의 시선이 뺨에 다다닥 달라붙었다.
“나 보러 왔어?”
임하얀의 말에 긍정했다간 바보로 찍힐 거였다. 상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뒤 할 수 있는 한 차갑게 말을 했다.
“볼일 있어서 온 거니까 착각하지 말지.”
“볼일 보는 김에 내 동생도 구해 주고. 착하다, 너.”
비꼬는 건지 진짜로 칭찬하는 건지. 하지만 직감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임하얀에게 진실을 들을 기회가 없을 거 같았다. 얼굴을 가린 상자 위로 눈을 내밀었다. 차분하자. 차분해야 한다. 속으로 수백 번 다짐했는데도 임하얀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니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감정이 밀려왔다.
“나 빨리 떼어 내고 싶어서 거짓말한 건, 아니지.”
“무슨 거짓말.”
“명확한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고, 네가 그냥, 나를….”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생각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아니, 이 문제는 내가 어쩐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문제였다. 단 한 가지만이 확실하다. 난 임하얀에게 아닌 것이었다. 임하얀이 거짓으로 나를 떼어 놓으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임하얀에게 내가 아니란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나는 자꾸 증거를 요구하라고 떼썼다. 이런 부끄러운 나를 가릴 수 있는 건 누런 상자밖에 없었다. 마지막 기회를 얻었는데 써먹지 못하고 날렸다. 임하얀의 입에서 쏟아질 차가울 말들이 예상됐다.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리눌렀다. 땅으로 처박힌다. 그 안에는 어둠뿐이었다.
“정해루.”
임하얀의 손바닥이 손등 위에 얹어졌다. 나를 잡고 있는 손가락 두 개가 마치 나를 땅속에서 꺼내 줄 유일한 답처럼 다가왔다. 다급히 상자를 내려놓고 임하얀의 앞에 무너지듯이 무릎을 굽혔다.
“이러지 마….”
시선을 맞춘 뒤 임하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꼬물거리는 임하얀의 손을 손바닥 안에 가두어 버렸다. 미동 없이 잡혀 있는 임하얀의 손에선 아기 비누 냄새가 났다. 가냘픈 손을 인질로 잡힌 임하얀이 얼마나 시간을 내어 줄지 모른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입을 통과했다.
“한 달만 나한테 시간을 줘 봐. 아니, 주면 안 돼?”
“한 달?”
“정말 별로인지, 그, 네가 말한 조건에 안 되는지 겪어 봐야 아는 거잖아. 겪어 보지도 않고 내가 마음에 안 들지는 모르잖아, 아직.”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야.”
“그게 아니면, 그러면.”
“말하기… 창피해. 그건, 네가 이렇게 나한테 물어볼 줄 몰랐어. 너라면 그냥, 나한테 차이면 두 번 다시 나 안 볼 줄 알았으니까.”
도저히 나를 허락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임하얀을 묶어서 집에 데려다 두고픈 심정이었다. 차분하게 묻는 건 물 건너갔다. 다소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임하얀의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못 살겠어.”
“…….”
“이대론 못 살아. 나를 이렇게 만든 책임이 너한테 없다고 할 수 있어? 안기고, 울고, 나한테 노트, 그래, 그것도 만들어 준 건 너잖아. 내가 성질 더러운 게 문제야? 고칠 수 있어. 사실, 내가 그렇게 성격이 나쁘지도 않아.”
아, 그쯤 말했을 때 핑크빛 미래를 그리던 하얀 페인트가 눈에서 벗겨졌다. 임하얀은 강요 같은 감정의 부산물에 휩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멋있는 척하면서 쭉 연락하며 지낼 수 있는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자고, 그렇게 말을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네 책임이니까 나 좀 어떻게 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한 번 버림받는 것도 치욕스럽고 상처라서 밥이 안 넘어갔는데 두 번 버림받는 건 얼마나 살기 싫을까. 내 정신은 중지 상태였다. 풀 수 없는 자물쇠로 잠근 방에서 잠들고만 싶었다. 마음 같아선 임하얀 생각이 안 날 때까지.
이불에 눕는 상상을 하며 차분히 땅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임하얀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서서히 숙이는 고개를 붙든 손에서 턱없는 희망이 떠올랐다. 다시 고개를 든 나는 희망의 꼬리를 힘껏 부여잡았다. 조금은 온화해진 임하얀을 마주한 내 입술이 방정을 떨었다.
“좋아해.”
“응.”
“사랑, 하는 것 같아.”
입으로 뱉는 순간 그 말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뱉은 말이 돌아와 내 심장을 찌르는 감각이란. 그 말은 내 심장엔 칼날을 박아 두고 임하얀의 머리 위엔 왕관을 씌웠다. 누가 왕이고 누가 신하인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왕의 손길 하나에 희비가 갈리는 내 처지가 실감이 됐다.
“알겠어.”
“뭐를, 알았다는 거야.”
“사귀어 보겠다고.”
“정말로?”
알아먹었으면서도 나는 의심이 깊어 재차 확인했다. 사귄다는 말의 뜻이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느냐고. 임하얀은 우선 나를 일으켜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옆에서 보니 더 고운 임하얀은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애간장을 태웠다.
“내가 정말 좋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지금의 내 얼굴일 것이었다.
“방금까지 뭐 들었어. 나 뭐 했어?”
“신기하다. 믿기지가 않아.”
내 입장에선 임하얀이 더 신기했다. 하지만 신하는 왕의 사소한 한마디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을 했는데도 임하얀이 믿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하다 하다 우리의 첫 만남까지 복습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뇌의 기억 저장고에서 뽑아낸 한 기억이 죄수처럼 끌려 나왔다.
아버님이 사 준 가짜 운동화를 신랄하게 비웃는 모습이 증거물처럼 뇌에 남아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리였다. 좌절감에 맨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첫인상이 끝까지 간다는 말을 이 세상에서 삭제시키고 싶었다.
그때 임하얀은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처럼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반사적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임하얀은 제집 안방인 양 편해 보이는데 나 혼자 가시방석이었다.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갈 곳 잃은 두 손은 벤치를 짚었다. 고개를 젖혔을 때 보인 은색의 십자가에 대고 기도를 올렸다.
제발 등신 같은 짓 안 하게 해 주세요. 잠든 것처럼 조용한 임하얀을 흘긋흘긋 내려다보다가 비어 있는 옆구리를 욕심냈다. 저걸 폭 끌어안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을 텐데. 가볍게 손만 두르는 게 왜 안 되냐는 흑심이 기승을 부렸다.
“저기,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는데.”
“안 자.”
“허리에…. 손 감아도 돼?”
피식 웃는 임하얀의 얼굴에 입이 벌어졌다. 애초에 강짜를 부릴 게 아니라 무릎 연골이 닳도록 빌었어야 하는 거였다.
“해도 돼.”
임하얀의 후드의 촉감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급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어금니 물고 조절을 했다. 보드라운 후드 위에 손을 올려 두고 있다가, 임하얀의 눈치를 보며 팔에 조금씩 힘을 넣었다. 손바닥 아래에 있는 허리선을 느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미치게 보드라웠다.
“정해루. 내일 바쁜 일 있어?”
“아니, 없어.”
내일이 지구 종말이라도 절대 바쁠 일은 없었다. 임하얀은 그럼 내일 자기 집으로 오지 않겠냐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귀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어떻게 그 교회 앞에서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임하얀이 술 마신 나의 상태를 알고 택시를 불러 줬으며, 집에 도착했을 땐 내가 내일 임하얀 집에 간다고 약속해 둔 상태란 것이었다.
새벽 1시. 집으로 돌아와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옷도 벗지 않은 채였다.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해롱해롱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방으로 들어왔을 당시엔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민트색, 까만색 쇼핑 백이 침대 주위를 병사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임하얀한테 차이고 난 뒤의 이야기였다. 속이 허하다는 이유로 카드를 신나게 긁었다. 사기만 한 뒤 뜯어 보지는 않은 옷과 신발들이었다. 오늘 택배가 도착해 방에 올려 둔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갖고 싶었던 물건들이 어떤 모양을 가졌는지, 어떤 색이었는지, 어떤 질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핸드폰에 임하얀의 이름을 띄워 놓고 건드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조심스레 이름을 엄지로 쓸다가 아까 한 말이 생각이 났다. 한 달만. 머리가 쭈뼛 서고 등에서 땀이 났다. 시간 관계없이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다행히 잠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 집에 갔어?
“응. 그런데 나 할 말이 생각났어.”
– 무슨 말?
“내가 한 달이라고 했잖아.”
– 응.
“그거, 바꾸면 안 돼?”
한 달은 너무 짧았다. 손잡고 뽀뽀도 하기 전에 쫓겨나도 할 말 없는 시기였다. 여하튼 한 달은 너무 짧은 기일이었다. 아무런 계산도 하지 못하고 냅다 한 달이라 약속한 입술을 가위로 자르고 싶었다.
“세 달은 돼야 해. 그렇지?”
– 기한은 상관없어. 네 마음대로 해.
마음이 푹 놓임과 동시에 침대에 기절하듯 누웠다. 발로 침대 주변을 두르고 있는 쇼핑백을 하나씩 밀어 넘어뜨리며 임하얀에게 물었다.
“잘 거야?”
– 내일 학교 가야 해서.
“알바, 그건 아직도 해?”
– 맞다. 고모가 알바 구하셨어. 내가 몸이 안 좋아졌거든.
기쁨에 밀려 올라가던 입꼬리가 급격하게 추락했다. 묘하게 힘이 없던 임하얀의 인상을 생각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큰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임하얀을 상상하니 이 모든 행복과 기쁨이 나중에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무 말이 없는 게 이상했는지 임하얀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감기 걸렸어. 이사하느라 힘들었나 봐. 나 대신 며칠 대타로 쓴 알바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모가 나 보고 더 이상 안 도와줘도 된다고 그래서. 나도 그만둘 생각이었고.
임하얀의 목소리는 이상한 능력을 지녔다. 듣고 있으면 그 어떤 감정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중환자실까지 갔던 상상도 불안 한 점 남기지 않고 말끔히 청소됐다.
임하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잘 준비를 마쳤다. 목소리가 성우 해도 되겠다. 소곤소곤 건네는 말들이 지난 시간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붓이 되어 하얀 페인트 속에 잠기는 꿈을 꿨다. 나는 기꺼이 그곳으로 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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