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5
05
공강 시간에 잠깐 백화점에 들렀다. 필요한 것만 구매하고 가자고 했다가 다음 수업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임하얀 집에 초대된 날이었다. 그냥 빈손으로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몇 번 울린 전화를 전부 거절하고 쇼핑에 집중했다.
과일을 사고, 간단히 캡슐만 넣어도 된다는 커피 머신을 영업당해 구매하고, 여자 친구 집에 집들이 갈 때 필수품으로 사야 한다는 향초와 디퓨저를 샀다. 향기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으니 가장 잘나가는 다섯 개로 추려서 포장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양손에 짐이 넘쳐 나는데 하필 1층에 자주 가는 브랜드의 운동화 매장이 있었다. 딱 한 켤레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집들이 선물로 딱 한 켤레만 사 가려고 했다.
“여보세요.”
– 왜 안 와?
“약속 시간 안에….”
황급히 핸드폰 시계를 켰다. 집에 가겠다고 한 시간보다 20분이 늦은 뒤였다. 백화점에서 임하얀의 집까지는 차로 금방이지만 이건 큰 낭패였다.
“금방 갈게.”
– 30분 안으로?
“응.”
– 알았어.
급하게 골라 두었던 것을 계산하려고 하는 순간 두 번째 낭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나는 임하얀의 발 사이즈를 몰랐다. 늦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종업원과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고선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최선인 결론을 내렸다.
“신발 별로 사이즈 230부터 245까지 주세요.”
“네? 이거를 다요?”
“시간 없어서 그런데. 빨리 좀.”
“아,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그 이후로 직원 세 명이 더 달라붙었다. 이 백화점에서 가장 큰 봉지 세 개에 나눠 담고 직원 한 명이 나와 주차장까지 들어다 주었다. 뒷좌석에 물건들을 싣고서 임하얀네 집까지 무식하게 밟았다. 벌금을 뗄 각오를 하고 달려 임하얀과 약속한 3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하얀은 근방에 자취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차하기가 힘들 거라고, 복잡하니 자기가 나와 있겠다고 한 말을 지켰다. 자리 난 곳에 주차하는 동안 백미러로 걸어오는 임하얀이 보였다. 실수 없이 주차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쉬는 타이밍에 임하얀이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지잉, 소리를 내며 창문을 내렸다. 가느다란 임하얀의 잔머리가 창문 너머로 들어왔다.
“바쁘면 다음에 와도 되는데. 너 저녁은….”
뒷좌석을 본 임하얀은 말문이 막혔다. 뒷좌석에 있는 선물 상자와 종이봉투 여러 개를 보고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가장 큰 짐 몇 개를 들자 임하얀이 종달새처럼 날아와 종알거렸다.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 미안한데. 설마 이게 다 내 거는 아니겠지….”
“그럼 이걸 내가 미쳤다고 샀겠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네 거.”
“…….”
임하얀은 기쁜 나머지 힘 빠진 사람처럼 팔을 늘어트렸다. 자잘한 소품은 나누어서 들여오기로 하고 우선 커다란 커피 머신과 운동화들이 든 짐만 먼저 들기로 했다. 양 옆구리에 바리바리 끼고 임하얀의 집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임하얀 면전에서 짐을 내동댕이칠 뻔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안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원룸처럼 보였다. 출입문에도 그 흔한 비밀번호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원룸 앞쪽에 있는 건물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모를 폐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자기도 짐을 들겠다고 낑낑거리고 있는 임하얀이 안타까웠다. 빈손이 없는지라 발로 뒷좌석의 문을 차서 닫았다.
“안내부터 해. 나 팔 떨어질 것 같아.”
내가 든 짐의 개수를 본 임하얀은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떨어질 것 같다는 말이 신경 쓰이는지 걸음이 평상시보다 두 배로 빨라져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출입문을 잡아 주는 모습이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었다.
기분 좋을 때마다 활짝 활짝 웃으면 바보 같아 보여서 안 된다. 남은 세 달 동안 임하얀을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 놓으려면 멋있는 모습, 그리고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빌라 계단을 세 칸씩 뛰어 올라가는 임하얀의 뒷모습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말이다. 임하얀의 집은 102호였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내부를 구경하는 중에 현관문이 열렸다.
“너 오기 전에 정리 다 끝내 뒀어.”
“굳이 안 그래도….”
좁고 불편할 거란 나의 예상과 달리 방 하나가 딸린 원룸은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거실에서 바로 볼 수 있는 방에 놓인 침대는 노란 이불로 덮여 있었고 그 위는 작은 캐릭터 인형들로 도배되어 아늑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는데 여기저기 임하얀의 손길이 많이 탄 게 보였다. 작은 장신구 하나까지도 임하얀의 취향대로 동물 캐릭터 모양이었다. 하얀 벽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들은 하나같이 따듯한 톤이었다. 가슴이 몽글하도록 사람을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이 집에 있었다.
“마실 거 줄게. 앉아.”
작은 TV 앞에 있는 테이블로 나를 안내한 임하얀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왔다. 다람쥐 모양의 컵에 포도주스를 따라 온 뒤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눈은 쌓아 둔 짐들을 향해 있었다.
“속물 같은 건 아는데. 궁금해서 뜯고 싶어. 그래도 돼?”
포도주스를 향해 손을 뻗던 나는 속물 같다는 임하얀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너 주려고 산 건데. 안 뜯는 게 더 기분 더러…. 아니, 기분이 별로지 않겠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임하얀은 가장 큰 운동화 쇼핑백부터 열었다. 수많은 운동화 중에서 하나를 고른 임하얀은 상자를 열고서 돌 씹는 표정을 지었다. 디자인이 눈에 안 차는 눈치였다. 나는 잔을 입에 댄 상태로 계속 임하얀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면, 이건 그거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가짜 운동화 신고 다닌다고 무안 주던 놈이 내가 아니었던가. 오늘부로 진짜를 신고 다니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임하얀한테 한 실수를 되돌리고 싶어 한 수 더 나아가 생각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예쁘다.”
“미안…. 뭐라고? 예뻐?”
임하얀은 상자를 마저 연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운동화를 꺼냈다. 상자에 235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임하얀은 운동화 한 짝만 제 오른발에 신어 보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졌다.
미소 띤 임하얀이 일어서서 천천히 발을 굴려 본다. 이번 집들이 선물로 확실히 점수를 땄다. 그제야 미소를 만면에 띤 나는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한 번에 잔을 비운 뒤 젖은 입술을 엄지로 닦았다.
그런데 운동화 끈을 손보던 임하얀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심코 지켜보다가 손에서 유리잔을 놓칠 뻔했다. 임하얀이 울고 있었다. 입술은 씰룩거리고 눈두덩이는 빨갰다. 사람이 당황하면 입이 안 열렸다. 운동화를 벗어 다시 상자에 집어넣은 임하얀이 눈물을 매단 채로 웃었다.
“정말 고마워. 나 이렇게 마음에 꼭 들게 예쁜 운동화는 처음이야.”
“아, 마음에 들어?”
“내가 태어나 받았던 운동화 중에 제일로.”
이런 극찬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임하얀은 다른 것도 봐도 되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대에 부푼 눈으로 다른 운동화 상자를 열었다. 처음 보는 운동화가 나오면 양쪽 다 신어 본 뒤 천진하게 웃는다. 그 얼굴만 봐도 종일 심심하진 않겠다. 임하얀은 상자 속에서 똑같은 운동화가 여러 개 나오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똑같은 게 엄청 많아.”
“그거, 너 사이즈를 몰라서. 일단 다 샀어.”
“아, 세상에…. 이건 환불해야겠다. 서프라이즈로 하려고 그랬구나.”
“뭐, 너 안 좋아할 수도 있고.”
“고마워. 이런 건 안 사도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너무 좋아서 그런 거짓말 못 하겠네.”
임하얀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솔직했다. 사이즈 235 신발만 골라내는 임하얀에겐 어떠한 집착까지 엿보였다. 마음에 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처럼 웃음이 헤퍼졌다. 나는 차에 넣어 두고 온 나머지 선물이 생각나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선물 많이 사 오길 잘했다.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었다. 원룸 계단에 서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좋아서 울기까지 한 임하얀을 떠올리면 이 원룸에 금이 가든 말든 망치로 온 벽을 때려 부수고 싶었다. 다음엔 뭘 사 주지. 옷? 여자들 옷은 종류도 많으니까 백화점 열 바퀴를 돌아도 모자랄 거다.
그전까지 감사한 적이 없던 조부모의 재력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하얀이한테 카디건, 바지, 원피스 같은 걸 전부 다 사 줄 수 있었다. 아니, 아예 카드를 줘도 되겠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주차해 둔 차 앞으로 뛰어갔다. 과연 이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잘 해내면 임하얀한테 나는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될 거였다. 분명히.
***
임하얀 집에선 새우튀김을 쌀밥과 같이 먹나 보다. 머슴 밥과 나물 반찬, 보글보글 끓는 동태찌개와 LA갈비를 차려 놓고 임하얀은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이보다 화려한 밥상을 받은 적은 많았지만 그건 전부 일하는 사람들이 해 준 것이었다. 숟가락으로 동태찌개를 떠서 칼칼한 국물을 한 입 먹은 순간 평생 이걸 먹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짜지 않으면서 매콤한 국물이 입에 맞았다. 이 엄청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해 주고 정작 자기는 깨작깨작 먹는 임하얀이 고수처럼 보였다.
밥을 먹는데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주제를 꺼내야 좋을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여러 번 타이밍을 놓쳤다.
“어때?
임하얀이 동태 살을 발라 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다. 이렇듯 연상의 느낌을 줄 때마다 가슴이 주책맞게 들끓었다.
“맛있어. 엄청….”
“다행이다.”
“내일, 또 해 주면 안 돼?”
“뭐 해 줘?”
“그냥, 아무거나.”
“그게 제일 어려운 건데.”
먹는 내내 커피 머신을 어디 둘까 설레하던 임하얀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다른 건 더 필요 없냐는 질문에 더 안 사 와도 된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임하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본 나는 선물을 자주 많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밥을 먹을 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고 그건 임하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얀 쌀밥과 소금으로 간을 한 새우튀김은 은근히 잘 어울렸다. 임하얀이 지나가는 말로 여기에 간장 같은 걸 추가하면 일본식이라고 했다.
나중에 튀김 덮밥 같은 걸 만들어 준단다. 어렵지 않게 다음 약속을 잡은 셈이었다. 밥을 먹기 전이나 후나 나는 간신히 대답만 하며 자리를 지켰다. 혹시 자주 말을 걸다 보면 꿈에서 깰까 봐. 결국 내가 후식으로 사 온 조각 케이크와 커피를 다 먹을 때까지 대화다운 대화는 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니야. 괜찮아. 앉아 있어.”
“줘, 그릇.”
수세미에 세제를 짠 뒤 거품을 내어 접시에 문댔다. 어디 가지 않고 옆에 감시하듯 붙어 있던 임하얀은 수세미를 유심히 보고선 씽긋 웃었다.
“세제를 진짜 많이 쓰는구나.”
“이게 많은 거야?”
“열 번은 할 양이야.”
태어나 한 번도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어 몰랐다. 임하얀은 손을 뻗어 내가 거품 묻힌 그릇을 물에 헹궜다. 다음번엔 설거지하는 방법 같은 걸 인터넷에서 좀 보고 와야겠다. 나 혼자 끝내려던 설거지를 어느새 둘이서 하고 있었다.
내가 거품 묻힌 그릇을 내려놓으면 임하얀이 날쌔게 주워 물에 씻었다. 처음엔 서툴렀던 호흡이 갈수록 척척 들어맞았다. 내가 거품 묻힌 그릇을 내려놓는 속도와 임하얀이 그릇을 줍는 속도가 비슷해지는 차였다. 손이 늦은 내가 한발 늦게 그릇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릇을 가져가려는 임하얀의 손과 거품 아래서 엮였다. 미끄럼틀 타듯 거품 묻은 손 위로 가느다란 게 들어왔다. 모든 건 비누처럼 반드러운 거품 탓이었다. 맞닿은 손을 가만가만 새끼손가락으로 만지작댔다. 틀어 놓은 물소리가 점차 신경에서 멀어졌다.
시선을 떨어뜨린 임하얀이 앙다문 입술을 벌린 순간이었다. 한 발자국 다가가며 머리를 숙였다. 거품 묻은 손으로 임하얀의 손목을 타고 올라갔다. 비스듬히 한 채로 목이 내려갔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나는 순결했다. 이 입맞춤은 거품과 눈을 감은 임하얀 때문이었다. 망설임 없이 그 빨간 입술을 입에 머금었다. 뜨끈한 임하얀의 목뒤를 어루만지며 잡았다. 여린 손마디를 손끝으로 긁자 임하얀이 발끝을 드는 게 보였다. 눈을 감지 못하겠다. 첫 키스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기억하고 싶었다.
서로의 입 안에서 만난 혀는 외부인을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는 것처럼 서툴게 움직였다. 간간이 임하얀은 코로 귀여운 소리를 냈다. 입 안을 정성스레 핥고 탐하는 것으로 나는 비정상적인 욕심의 직전까지 갔다. 개수대에서 잡고 있던 손을 뺀 임하얀이 양팔로 내 허리를 안았다. 자연스레 임하얀의 어깨를 안듯이 들었다. 조금 더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요리조리 내빼는 혀를 가지 못하도록 얽는 게 좋았다. 하지만 더 좋았던 건 그녀의 뺨과 입술에 마음껏 입을 맞춰도 된다는 것이었다. 종종 임하얀은 숨이 쉬기 어려운 듯이 발가락을 오므렸다. 나는 쉬는 시간을 주는 대신 몽톡한 콧잔등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 다음 혀를 삼키면 달콤한 임하얀의 것들이 목으로 넘어왔다.
언제 끝날지, 이 중독적인 행위를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첫 키스가 지나치게 만족스러워 흥분하고 말았다. 키를 맞추기 위해 발끝을 들고 있던 임하얀이 아래로 떨어지듯 주저앉았다. 천만다행으로 허리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앉진 않았다.
임하얀의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그래도 싫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기운 없는 눈으로 그만하자는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머릿속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임하얀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천사였다.
귓불이 붉어진 임하얀은 TV 앞으로 걸어갔다. 행주를 꺼내 테이블을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뇌쇄적인 걸 모른다는 게 아쉬웠다. 잔뜩 놀려 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 뺨이 빨가냐고 묻고 싶었다. 뒤로 다가가 끌어안은 뒤 반응을 보고 싶었다. 개수대를 붙들고 서서 겨우 진정하는 중이었다. 선뜻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으려는 임하얀이 조그맣게 말했다.
“부탁할 게 있어서, 오늘 보자고 한 건데.”
“부탁?”
임하얀이 태어나 처음으로 나한테 부탁이란 걸 말했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절대. 내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자 임하얀은 행주를 꽈배기처럼 꼬았다.
“거창한 건 아니구,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돼.”
“뭔데.”
“친구가…. 나쁜 애는 아닌데 자꾸 나랑 커플 데이트하는 게 자기 소원이래서. 얼마 전부터 남자 소개시켜 준다고 그랬는데.”
“뭐?”
나쁜 애는 아닌데, 라니. 나쁜 애였다. 아니, 임하얀 앞이라서 욕을 할 순 없지만 내가 올해 들어 안 인간 중에 가장 나쁜 인간이었다. 얼굴이랑 이름도 모르는 인간이 이렇게 싫어진 건 처음이었다. 만약 내가 임하얀과 이런 사이가 되지 않았으면 다른 남자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그 인간에 의해서.
“그래서. 받았어?”
“아니. 남자 친구 있다고 말해 버렸어.”
“아.”
신기했다. 임하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흥분한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니, 근데 문제랄 게 뭐야.”
“같이 놀이공원 가자고.”
“커플로?”
“싫지?”
전혀 싫을 게 없었다. 무려 임하얀 남자 친구 자격으로 놀이공원을 가는 거였다.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서 놀이공원 근처도 가 본 적 없지만 임하얀 남자 친구로 가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웬 좆 달린 놈팡이가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가는 걸 보느니 1년을 기다리더라도 그 놀이공원은 내가 가야 했다.
“가. 무조건 가.”
“엄청 걱정했는데. 고마워.”
“네 남자 친구라고, 확실히 소개할 거지?”
“응.”
커플 데이트라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임하얀과 손잡고 데이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고공 행진하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착하기도 하지. 테이블을 닦고 옆자리로 온 임하얀은 매우 수줍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쳐다만 봐도 좋은 걸, 쥐뿔 아닌 자존심 따위 버리고 진작 고백할걸. 손 놓고 멀뚱멀뚱 바라만 봤던 세월이 아까웠다. 임하얀이 교복 입고 다니던 그 예쁘고 청량한 시절을 생각하면 아까워서 자다가도 뜀박질을 할 지경이었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사이기도 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내려 짧은 입맞춤을 했다. 두 번은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던 임하얀이 입술을 빨아 당겼다. 우리는 아까보다 노련해진 느낌으로 서로의 입술을 받았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날이었다.
***
수업을 마치면 임하얀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쯤 끝나냐고 물었다. 이젠 같이 저녁을 먹고 임하얀의 원룸에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처음 일주일간은 얌전히 영화만 보았다. 하지만 열흘을 넘자 영화를 보면서 농담 따먹기도 할 수 있게 됐다.
함께 영화를 본다는 건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취향을 알게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체로 전개가 빠르고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단순한 플롯의 영화를 선호하는 반면 임하얀은 감독이 숨겨 놓은 해석 같은 게 많은 영화를 본 뒤 설명해 주는 걸 좋아했다. 잠들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며 참고 본 영화를 다음 날 임하얀이 해석본까지 가져와 재미나게 해석해 주었다.
임하얀은 똑똑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남의 인생에 쉬이 울고 웃어 주는 마음씨 좋은 여자였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이런 진지한 만남을 가지기 전의 임하얀보다 진지한 만남을 가진 후의 임하얀이 훨씬 좋았다. 임하얀의 호기심과 따듯한 사고방식, 솔직한 말투, 그리고 이따끔 나를 원하는 듯이 만지작거리는 손길까지. 하나하나 세어 보다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좋아해, 임하얀. 좋아해….”
이런 말이 입에 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룸에 둔 정해루 전용 칫솔, 혹시나 몰라서 사 둔 컵과 포크, 젓가락과 숟가락. 하나씩 그 수를 늘려 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임하얀의 작은 원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는 소리였다.
어느 날 임하얀이 바쁜 일이 생겨 원룸으로 가지 못한 날이 있었다. 만나자고 성화인 친구들 모임에 가려다가 그저 저녁이나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손주 얼굴 본다며 은근히 타박이었다. 대꾸 없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방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내 방이 참 낯설었다. 예전에 사 두고 풀지 않은 쇼핑백들은 누군가 정리하여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며칠을 비워 뒀음에도 청결한 그 방은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냉골 바닥에 누운 듯 몸을 떠는 증상이 시작됐다.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어린 시절 숱하게 겪은 느낌이었다. 부모에게서 떨어져 할머니 집에서 자던 날같이. 그날 느낀 소름 끼치는 기운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해루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들어온 할머니가 정답게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눈만 굴렸다. 할머니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손부채질을 했다.
“우리 왕자님. 요즘 연애하지.”
자연스레 떠오르는 임하얀의 미소가 한 줌의 산소처럼 마음속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내 표정을 보고 확신한 것인지 눈을 삼박삼박 감았다 떴다.
“어느 집안 아가씨?”
“임씨 집안.”
“임 씨? 아버지는 뭐 하시고?”
“몰라. 그딴 걸 왜 물어.”
까칠한 태도에 할머니는 한발 물러선 듯 보이지만 할머니가 얼마나 능구렁이인지는 내가 잘 안다. 가진 것 없이 빚만 지고 온 엄마가 영악해서 싫다던 할머니였다. 임하얀에게 전화를 걸어 폭언을 쏟든지 아니면 드라마에서처럼 돈 봉투를 쥐여 줘서 나를 포기시킬 양반이었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지만 할머니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와 헤어지라는 말에 상처를 받고 울 임하얀을 떠올리자 골이 당겼다. 조용히 TV를 끄는 할머니를 보다가, 리모컨을 뺏어 다시 TV를 켰다. 돌발 행동에 놀란 할머니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여자 친구 뒷조사하지 마. 따로 불러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드라마도 안 보는 놈이 촌스럽게 왜 그래. 안 해, 할미가 왜 그런 걸 해.”
“할머니 때문에 걔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나 죽어.”
“거, 괜찮은 아가씨면 네가 걱정할 그런 일도 없지. 그리고 어디서 죽는단 소릴.”
“그래. 안 죽을게. 대신 평생 모은 재산 어떻게 사라지는지 눈 뜨고 봐. 대학 자퇴하고 인생 막장으로 사는 게 뭔지 보여 줄 테니 기대해. 어디 내놔도 쪽팔린 손자 되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다, 응?”
“돈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 그런 취급 받아도 될 사람 아니야.”
농담이 아니었다. 할머니도 그걸 느꼈는지 소파에 누운 나를 낯선 이 보듯이 봤다. 이렇게 해 두지 않으면 할머니 성격상 임하얀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낸 뒤 그 애를 말로, 돈으로 해부해 버릴 거다.
조각난 임하얀이 내 앞에 흩뿌려진 걸 상상만 해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할머니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한테 가는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에 또 불안증이 인 나는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이렇게 진심인 적 없으니까 가볍게 흘려듣지 마.”
뒤돌아본 할머니는 그 이야긴 그만두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기어코 할아버지의 서재방 문을 열었다.
더는 거실에 있기 싫어 방으로 올라갔다. 임하얀이 없을 뿐인데 불안증이 심해졌다. 만에 하나 할머니 문제가 아니더라도 임하얀과 헤어지게 된다면. 결혼을 해도 이혼하는 세상이었다.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랑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단맛에 취해 해롱거리다가 뒤늦게 오는 숙취에 마음이 허약해졌다.
임하얀에게 버려지면 어떡하지. 갑자기 임하얀이 나를 좋아하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가슴에 붙은 불안이 움직일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도 행복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대로’만으로는 안 된다.
***
임하얀은 또래 여자애들과 있을 땐 훨씬 명랑했다. 썰렁한 농담에도 깔깔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이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와 상대편 남자 친구는 몇 시간째 무표정이었다.
이게 더블 데이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나와 상대 남자는 떨어져 다니고 임하얀과 그 친구만이 팔짱을 끼고서 하하 호호 신이 났다. 내 차로 오면서도 그 친구와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건 내가 생각한 놀이공원 데이트가 아니었다. 웬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둘이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 친구가 워낙 수다스러워서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알았다는 것이다. 임하얀이 과락을 간신히 면한 과목이나 싫어하는 교수 같은 것들. 임하얀의 친구는 최근 들어 공연 쪽에 관심이 많이 생긴 모양이었다. 이 더블 데이트를 깰 방법을 찾았다. 잠시 임하얀이 화장실 가느라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친구에게 슬쩍 다가갔다. 마침 상대편 남자 친구도 주스를 사기 위해 떠나 버려 임하얀 친구는 혼자였다.
“주말에 시간 돼요?”
“네?”
설마 자기한테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임하얀 친구니까 표정 관리 해야 한다. 말투도 신경 써야 한다. 피곤하지만 이걸로 임하얀에게 꼬투리가 잡혀선 안 된다. 부들거리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하는 뮤지컬 티켓 두 장이 생겨서. 주연 배우는 임시영이고.”
“대박. 임시영이요? 저 그거 보고 싶었어요.”
“티켓 드릴 테니까 남자 친구랑 가요. 나랑 선배는 시간이 안 돼서.”
“정말요? 와, 주시면 고맙죠. 진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밥은 저희가….”
“그런데.”
“네?”
본론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를 했는가. 짜증 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정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이제 따로 다니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입장한 지 얼마 안 됐는데요?”
“남자 친구랑 둘이 다니고 싶은 게 당연하죠. 안 그래요?”
여자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티켓 두 장이 생각났는지 그건 그렇죠, 했다. 열이 확 치솟는 바람에 감정을 실어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쪽도 얻는 게 있을 테니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임하얀의 친구는 그럼 데이트가 끝날 즈음에 전화 준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로 이만큼 봤으면 됐지, 얼마나 각별한 사이라고 데이트 끝나고서까지 봐야 한단 말인가. 방해꾼들은 손을 잡고 롤러코스터를 타러 갔다. 임하얀은 그 방해꾼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나를 보자마자 생긋 웃은 임하얀은 눈으로 제 친구를 찾았다.
“희주는?”
“갔어.”
“어디로.”
“남자 친구랑 둘이 있고 싶다고 가 버리더라. 몰라, 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임하얀이 핸드폰을 꺼내려 했다. 들킬까 싶어 임하얀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거의 폭 안기는 바람에 핸드폰을 놓친 임하얀이 코를 찡긋거렸다.
“임하얀. 저것부터 탈까?”
“희주가 커플 사진 찍자 그랬는데.”
“커플 사진? 나랑 찍으면 되지. 이따가 돌아와서 찍어.”
“다 같이.”
“그걸 왜 씨…. 아니, 그냥, 나랑 둘이 찍는 건 별로야? 그럼 걔네 데려오고.”
“그건 아니지만….”
임하얀은 이유를 짐작한 듯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첫 번째 타자는 바이킹이었다. 임하얀이 좋아하는 놀이기구랬다. 줄을 선 임하얀의 뒤로 슬금슬금 이동해 와락 껴안았다. 내 여자 친구는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눈치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말을 돌직구로 쏘는 애한테 거짓말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늘 저지른 일을 걸리는 것도 필시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나마 임하얀 뒤통수에 코를 박고 있으니 술렁거리는 마음이 진정됐다.
“사실 나도 둘이 있고 싶었어.”
그런데 임하얀이 뜻밖의 말을 했다. 백 허그 하고 있는 손을 임하얀이 벨트 매듯 꽉 둘러맸다. 아주 가끔씩, 정말 아주 가끔이었지만 임하얀이 이렇게 애정 표현을 할 때마다 폭죽이 터졌다. 줄 중간쯤 갔을 땐 거의 임하얀에게 업힌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차라리 물건이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텐데 사람이라서 임하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 기다려 본 놀이공원 줄은 생각보다 더 빨리 줄어들고 있었다. 이 길이 천년만년 이어졌으면 좋겠다. 임하얀이랑 죽는 날까지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
“해루. 우리 맨 뒷자리 타자.”
“응, 마음대로 해.”
“무서운 거 잘 타?”
“몰라. 안 타 봐서.”
“한 번도?”
“줄 기다리는 거 싫어해. 한 시간 기다려서 2분 타는 것만큼 멍청한….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기다려 보니 별거 아니네, 뭐.”
임하얀이 자그마한 주먹으로 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을 때마다 봉긋 올라오는 광대가 사랑스러워 손가락으로 그걸 콕콕 찔러 봤다. 젤리처럼 말캉말캉했다. 하긴 임하얀의 몸 중에서 안 예쁜 곳은 없었다.
우리는 뒤에 선 사람에게 양보하면서까지 맨 뒷좌석을 노렸다. 한 번을 건너뛴 뒤에 우리 차례가 왔다. 맨 뒷자리에 앉을 수 있어 신이 난 임하얀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 출발 직전 안전 바가 내려올 때까진 기분이 괜찮았다.
초반에 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릴 정도의 속도까진 그럭저럭 버텼다. 어느 정도 몸이 뜨겠다 싶을 높이까지 올라가자 속이 느글거렸다.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최대 높이까지 올라갔을 땐 기어코 두통이 시작됐다. 옆에서 만세를 하던 임하얀이 인상을 팍 썼다.
“괜찮아?”
“괜찮아.”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할 즈음 바이킹이 정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바이킹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멀미 나는 느낌은 세 배로 세졌다.
바이킹이 정차하고 난 후 안전 바가 올라갔다. 임하얀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 길을 터 줬다. 나는 출구로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솔직히 구역질이 났다.
“가서 마실 것 좀 사 올게.”
“…됐어.”
“아니야. 콜라 어때?”
“그러면 같이 가든가.”
“넌 쉬어.”
임하얀은 등을 두드려 주다 말고 주스 가게로 뛰어갔다. 그나마 다리가 땅에 붙어 있으니 멀미는 빠른 속도로 진정이 됐지만 고개를 들어 롤러코스터를 보자마자 없던 멀미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임하얀은 이걸로 내게 큰 실망을 할 거다. 죽어도 괜찮은 척했어야 했다. 밖으로 나가 멀미를 막는 수술이라도 받고 오고 싶었다. 차라리 혼자 와서 타는 연습을 한 다음 임하얀한테는 다른 날에 가자고 할까.
“이거 마셔 봐.”
그사이 임하얀은 콜라 한 잔을 사 들고 왔다. 다정한 갈색 눈동자엔 걱정이 우글거렸다.
“이제 괜찮아.”
임하얀이 사다 준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벤치에 내려놨다. 좋은 날 놀러 와서 폐만 끼친 것 같아 나를 이 땅에 묻고 싶었다.
“놀이기구는 그만 타자.”
“그럴 거 없어. 조금만 쉬면 돼.”
“아니야. 놀이공원 처음 온 것도 아니고.”
“그럼 뭐 하러 여기 왔어. 나 배려해 줄 필요 없으니까 그냥 타자고.”
마침내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임하얀한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어긋난 계획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완벽한 날이었으면 했다. 임하얀 입에서 너와 함께여서 좋았다는 말을 듣고팠다.
“널 배려 안 하면, 네 의사와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인가?”
임하얀은 의미심장하게 말한 뒤 콜라를 치우고 옆자리에 앉았다. 신경질을 부린 게 미안해 입도 뻥긋 못 하겠다. 그런데 임하얀은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거스러미를 뜯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놀이기구 안 타도 놀 방법 있어.”
“그래도….”
“이리 와 봐.”
임하얀은 한 손에 콜라를 들고, 한 손엔 나를 잡고서 수많은 놀이기구 앞을 지나쳐 갔다. 임하얀이 나를 챙겨 줄 때마다 모자란 놈이 된 기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임하얀은 천사였다. 나는 답도 없는 새끼고.
간식을 사 먹자는 뜻인가 했지만 임하얀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중앙에 있는 기념품 가게였다. 비싸기만 하고 실용성은 하나 없는 곳답게 유치한 모양의 머리띠들이 즐비했다. 임하얀은 그중에서 쥐 모양의 귀가 달린 머리띠를 골랐다.
“이거 써 봐.”
“으, 싫어. 이런 걸 어떻게….”
“너 배려해 줄 필요 없다며. 써.”
할 말 없게 만드는 데에는 임하얀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정해루 성질 다 죽었다. 가게 안은 텅 비었다. 구경꾼이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여 줬다. 냉큼 머리띠를 씌운 임하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잠깐, 이건 너무 귀여운데. 다시 숙여 봐.”
한 번 죽인 거 두 번은 못 죽일까. 더군다나 놀이기구도 못 타는 죄인이었다. 간신히 얻은 미소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임하얀 옆쪽에 천사 날개 모양의 머리띠가 있었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 임하얀의 머리에 툭 씌웠다. 딴생각 중이던 임하얀은 거울로 제 머리띠를 확인하곤 나쁘지 않은 듯 씨익 웃었다.
“그럼 난 이걸로.”
“난 뭔데.”
“커플로 해야지. 이리 와.”
임하얀이 커플로 해야 한다면서 집은 건 악마 날개가 달린 머리띠였다. 쥐 귀나 토끼 귀보다는 훨씬 나았다. 순순히 머리를 내려 머리띠를 씌울 수 있게 해 줬다. 막상 우리 둘이 비슷한 머리띠를 하고 있으니 사이좋은 커플 같아 찌뿌드드한 기분이 풀렸다.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임하얀이 손깍지를 꼈다.
“기분 풀렸다.”
따사로운 햇살 같은 눈웃음을 쳤다. 못된 나를 설탕물에 절이고 빼냈다. 임하얀은 기분이라며 기념품 가게에서 머리띠를 계산했다. 싸구려에 한 철도 못 갈 것같이 생긴 이 머리띠가 무엇보다 소중해졌다. 무려 임하얀이 골라 준 선물이니 가보로 모셔야 할 판이다.
임하얀은 내게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없이 노는 법을 가르쳐 줬다. 화려한 퍼레이드 행렬을 보며 서로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하기, 놀이공원 마스코트 캐릭터와 사진 찍어 주기, 놀이공원 내에 있는 네 컷 사진 찍기, 서로가 먹을 아이스크림의 맛을 랜덤으로 골라 주기. 그리고 중간중간 배를 채우기 위해 노상에서 파는 닭꼬치, 케밥, 와플 등을 먹었다.
눈 깜짝할 새에 놀이공원은 폐장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성 모양의 건물에 장식된 녹색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했다. 임하얀은 나를 데리고 한 놀이기구 줄을 섰다. 두 명만 탈 수 있는 작은 기차가 이 놀이공원을 한 바퀴 돌아 준단다. 이것만 타고 집으로 가면 된다는 임하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밝았다. 내가 그녀를 위해 주려고 했는데, 되려 임하얀이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남자가 돼서 울 순 없었다. 기차에 올라 임하얀과 둘이 됐을 때 가능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임하얀은 나보다 착하고 순진하고 어른스러웠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사색 없이 즐기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나에게 놀이공원은 줄곧 불쾌한 곳이었다. 부모가 놀이공원을 데려가기로 한 날 조부의 집으로 끌려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임하얀이 가르쳐 준 놀이공원은 불쾌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꿈처럼 온 세상이 하얬다.
“무슨 생각 해?”
임하얀과 눈이 마주쳤다. 불에 덴 듯 놀라 시선을 떨구자마자 보이는 운동화가 낯이 익었다. 내가 사 준 그 운동화였다. 신고 다니는 걸 보지 못했는데, 오늘 데이트라고 신어 준 것이었다. 자기 운동화를 보는 걸 알아챈 임하얀이 자랑스레 말했다.
“아까워서 아무 때나 신고 싶지 않았어.”
“아무 때나 신어. 닳으면 또 사고. 닳으면 또 사고. 백 켤레라도 사 줄 건데.”
“10년은 신을 거야. 나 이거 받고 운 거 알지?”
임하얀이 제 입으로 그 말을 할 줄 몰랐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임하얀이 창밖의 야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새 신발, 사 본 적 없어. 아빠가 남들한테 선물 받은 거, 아니면 엄마가 신던 거. 특히나 신발 같은 건 소모품이니까. 거기에 돈 쓰게 하는 게 미안해서 새 신발 사 달라고 해 본 적 없었거든.”
“새 신발 사 달라고 하면 사 주지 못할 형편처럼은 안 보였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목소리가 낮게 나갔다. 임하얀 집이 넉넉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2층 단독 주택이었다. 학원 정도야 집안 사정에 따라 못 갈 수 있다고 쳐도 신발까지 못 사 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중학교 때 키가 막 크는 거야. 신발 사이즈도 달라지고.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연두, 하늘이, 파랑이까지. 셋 다 신발 바꿔 달라고 그러는데 나까지 보태기가 그랬어. 나는 신발이 뭐가 중요한가, 해서 지금처럼 중고로 줘도 좋고 아빠가 주는 게 좋다 했더니. 그 이후엔 나만 사 달라는 소리를 못 하게 되더라.”
과거를 되짚는 임하얀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남 일 말하듯 무심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새 신발을 받고 좋아하는 임하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저 완벽해 보이는 여자도 과거에 슬픔이 있었다. 나와 다른 슬픔이긴 하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임하얀이 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나와 동류라고 생각됐다.
“난 점점 뭐든 안 줘도 되는 딸이 됐어. 그런데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게 나라서 원망도 못 하겠고. 난… 이런 가식적인 내가 싫어.”
“그건… 가식적인 게 아니지. 바보. 착해 빠져선.”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었다. 차라리 펑펑 울었으면 내가 달래라도 볼 텐데 말이다. 실 같은 눈물 한 방울만이 기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울적한 임하얀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임하얀이 우는 한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었다. 자존심이 아니라 더한 걸 팔더라도 임하얀이 아니면 안 된다. 임하얀이 내가 아니라 다른 놈 앞에서 우는 걸 보이는 날엔 정말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았다.
작은 기차 안. 마주 보는 그 작은 기차 안에서 든 생각이 고작 이런 험한 것뿐이라서 미안했다. 기차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성 뒤편을 돌기 시작할 때 임하얀이 나를 보며 섧게 웃었다.
“사실 너를 좋아해, 정해루.”
“나를, 좋아한다고?”
“처음부터 그랬어.”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으로 바뀌어 가는 전구의 불빛이 기차를 비추고 있었다. 쉼 없이 퍼부어지는 색색의 빛은 심장에 스몄다. 알록달록해진 심장은 저항할 의지를 잃고 멈춘 듯이 있었다.
“널 좋아해서, 사귀고 싶지 않았거든.”
“난, 잘 이해가….”
“지금은 조금 창피해. 나중에, 말해 줘도 돼?”
“…그래.”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임하얀의 말이라서 그런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외계어를 한다고 해도 외국 말을 한다고 해도 난 평생 이해하는 척하며 살아 줄 수 있었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 문이 열렸다. 우리는 애정 행각을 하다가 들킨 연인처럼 얼굴이 새빨갰다.
그 전과는 달랐다. 임하얀은 제 친구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쑥스러워하는 임하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나누었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다. 오늘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