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7
01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말이 있다. 나는 첫째로 태어난 게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우리 하얀이는 학원도 안 다니는데 1등만 하네.”
“네. 저는 공부가 재밌어요.”
“고마워. 엄마, 아빠가 이렇게 힘든데도 잘해 줘서.”
파랑이는 어리고 나도 어리지만 나는 누나였다. 파랑이는 학교에서 친구도 못 사귀고 약해서 엄마가 걱정이었다. 반면에 나는 학원 한번 안 다니고 미술 대회에서 1등을 하고 학교에서 1등을 하니까.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학교 선생님을 이용하면 된다. 미술 공부는 그래도 동네 학원을 다니니까 괜찮았다. 부모님도 내 생각을 일절 안 하는 게 아니었다. 미술 학원비는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보내 주었는데 쌍둥이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그것도 힘들었다. 하늘이, 연두가 밉지만 나는 미운 티도 내면 안 된다. 정신없는 아빠를 나까지 힘들게 해서는 안 되니까.
“이야, 하얀이. 장학금을 받았다고?”
“응. 그러니까 학교 다니는 돈 걱정하지 마.”
“고마워, 우리 하얀이밖에 없다. 믿고 의지할 건 너뿐이야.”
아빠. 사실 나 하나도 믿고 의지할 만한 딸이 아니야. 성적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 너무 무서워. 학원비를 왜 안 내냐는 선생님의 말에 의연한 척하는 것도 지쳐. 제발 이런 걱정 좀 안 하게 해 주면 안 될까. 창피해서 학원을 안 간 지 오래된 것도 아직 모르지.
결국 그 학원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만두었다. 미술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다고, 대신 더 싼 보습학원에 보내 달라고, 미술 대학은 나한테 너무 사치라고, 혹시 나중에 공부하고 싶으면 학교에 가서 복수 전공을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그 말 중에 진심은 없는데도 사기꾼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입시 전문 미술 학원 금액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성적이나 올리자. 내 주제에 무슨.
그런데 아빠는 나를 나쁜 아이가 되게 두질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선물해 준 비싼 색색의 펜 세트는 늘 갖고 싶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담아 두기만 한 것이었다. 부모님이 미웠다. 마음껏 미워하고 싶은데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착한 아이로 살도록 잊지 않고 애정을 던져 준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리 동네 작은 보습 학원만 다녀서는 상위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목표 대학이 점차 낮아졌다. 장학금을 받고 들어온 비싼 사립 고등학교는 잘 사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 아이들과 어울리려면 나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덤덤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몇 년을 무던하고 사람 좋은 척을 했더니 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인 것처럼 변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병이 생겼다. 무엇을 해도 새롭지 않고 기쁘지가 않다.
그렇게 2학년으로 올라오고 처음으로 그 아이를 봤다. 정해루. 입학 때부터 잘생기기로 유명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나에게 장학금을 준 재단 이사장의 손자라서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장학 재단을 모조리 알아봤으니. 같이 장학금을 받은 친구들에게 손주 이름이 독특하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곧 정해루가 있는 집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나 말고도 전교생이 그 애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해루는 나에게 그저 고마운 분들의 손주에, 부러운 후배일 뿐이었다. 솔직히 잘생긴 것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엔 그 애 귀에 박힌 까만 피어싱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선 저렇게 생긴 외양의 아이들은 피해야 한다는 것만 본능적으로 느낄 뿐이었다.
정해루를 다시 인식하게 된 건 그해 여름, 학교 폭력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열리면서였다. 내 안에 깃든 열등감과 추락하는 자신감은 오로지 그런 대회로만 풀 수 있었다. 그림은 내 자부심이었다. 너희처럼 학원 다니지 않아도 나는 내 실력으로 당당히 1등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오기를 부리면서.
다른 애들은 하기 싫어하는 그 대회를 나 혼자 목숨을 걸고 했다. 며칠 밤을 새워서 제출한 포스터가 1등을 할 거라는 오만한 생각에 부모님께 미리 자랑도 해 두었다.
그런데 결과는….
“빛나야. 너 1등이래.”
“헐, 유빛나!”
반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교무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럴 리가 없다. 유빛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 그 애는 한 번도 나를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1층 게시판에 붙은 1등은 유빛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 2등으로 걸린 내 그림을 보며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학원 한번 안 다닌 게 이렇지 싶었다. 유빛나는 그 학원을 몇 년을 다니고 이제는 내가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입시 전문까지 다녔다. 결국 저렇게 차이가 나기 시작하겠지. 인정하자. 받아들이자. 그림은 내 길이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자.
교실로 돌아와 빛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한 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냈다. 보습 학원에 다니는 것도 미안한 형편에, 이것도 엄마 수술비 때문에 눈치 보이는 형편에, 감사하게 다녀야지.
그렇게 그림을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무실 앞을 일부러 피해 다니고, 은상을 받은 그림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가슴 깊이에서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쳤군. 쪽팔려? 왜 부모님께 보여 드리지 않는 건데.
난 비참했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그림을 포기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술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나 다름없는 그 게시판 앞을 지나가는 게 구역질 나도록 싫었다. 아빠가 준 펜 세트도 꺼내지 않은 지 며칠. 선생님이 불러 어쩔 수 없이 1층을 지나가야 했던 날이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 앞을 지나가는데 정해루를 보았다. 축구공을 든 정해루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내 옆을 지나갔다. 교무실 앞에 서서 단추를 채우고 들어갈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그림 앞에 선 정해루와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이거 내지 않았냐? 발로 그린 거.”
“그거 담임한테 불려 가서 존나 혼났잖아. 색 채워서 내라고.”
“미친 새끼.”
교무실 문고리를 잡고 여는 순간 정해루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그런데 이게 왜 은상이지.”
문을 열려던 손이 멈추고 정해루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유빛나의 그림이 아닌 내 그림을 바라보는 정해루의 눈빛을, 그 그림을 쓰다듬어 주듯 보고 있는 눈빛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다.
“이게 금상 같은데.”
“그런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
“색이 더 좋잖아. 눈구멍 달고 있는 거 맞지?”
제 친구에게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 정해루를 보는 내 눈이 뜨거워졌다.
“이건 뽑은 선생 취향대로 점수 매긴 거잖아.”
“정해루 네가 심사하냐.”
“야, 빨리 가자. 나 목말라 뒈져.”
작게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을 보며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방금 본 그 얼굴을 그리고 싶다. 기억은 불안정했다. 그림으로 남겨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
아빠는 내가 집을 지어 주는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알지만, 그건 아주 옛날에 버린 이상형이었다. 양보하는 사랑은 질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아니, 내가 앞으로 사귀게 될 남자는 단 하나의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내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안 된다. 나를 그 무엇보다도 첫 번째로 생각해 줄 남자. 자신이 사랑하는 많은 것 중 하나가 나인 게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는 남자.
멀어지는 정해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런 애는 절대 그런 남자가 되어 줄 수 없겠지. 저 애는 여자 친구도 자주 바뀌고 같이 다니는 친구들도 자주 바뀐다. 그래도 그림 속에선, 내 것이 될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펜을 잡아 볼까. 취미로.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그를 1년이 넘게 그리게 될 줄은, 나만의 사랑이 시작될 줄은 모르고.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