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8
02
여름 방학에, 잘생기고 자신밖에 모르는 완벽한 남자 친구에, 좋은 날씨까지. 기분 나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하얀은 지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까만 캡모자,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 친구의 복장은 도서관에 완벽히 어울렸다. 왼쪽 귀에 한 까만 피어싱과 늘 하고 다니는 시계가 약간의 위화감을 만들었지만 여자 친구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그것마저 나름의 멋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여름 방학이 시작하고 난 후 해루는 돌연 반수를 선언했다. 하얀이 다니고 있는 B 대학교 건축학과로 오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다른 좋은 학교도 있는데 왜 굳이 B 대학이냐고 물었을 때 여자 친구와 같은 학교 동문으로 남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하얀은 해루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오게 됐다. 다른 동네에서도 찾아올 만큼 책 권수가 많고 책상과 의자가 새것인 구립 도서관이었다.
해루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하얀은 그림을 그렸다. 가끔 발로 장난을 칠 때가 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같이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며 사 먹는 간식들이 하얀과 해루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하루하루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하얀의 기분이 다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친구인 해루 때문이었다.
해루의 외모가 튀는 것은 인정했다. 선키가 큰 만큼 앉은키도 큰 해루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고 앉아서 봐도 눈에 띄었다. 매일 봐서 적응한 얼굴도 가끔 감탄할 때가 있으니 남이 봤을 땐 더욱 눈이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모자를 쓰고 다니라 말한 것이었다. 물론 해루는 이런 하얀의 마음을 쥐뿔도 모르고 자외선 차단에 좋다며 쓰고 다니지만 말이다.
아까 목이 말라 잠깐 밖으로 나온 하얀은 해루의 것까지 자판기에서 두 캔의 음료를 뽑았다. 탄산음료를 싫어하는 해루의 입맛에 맞춰 심심한 이온 음료를 골라 도서관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여자가 해루의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보였다. 남들이 보기엔 자리를 고르느라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하얀의 눈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이윽고 그 여자가 비타 음료를 꺼내 해루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하얀은 이온 음료를 든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가슴에서 질투의 불이 일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여자는 며칠 전부터 저러고 있었다. 유난히 해루의 뒷자리, 옆옆자리만 고집하는 게 은근히 거슬렸는데 결국 자신의 감이 맞았던 거였다. 해루는 그 여자에게 반응하지 않고 문제집에 시선을 돌렸지만 하얀은 기분이 좋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들고 있는 음료 두 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판기 옆 화단에 앉아 있었다.
해루를 만나고 깨달았다. 자신의 안에 이렇게 강한 소유욕과 질투심이 있는지를. 해루는 자신을 무슨 부처로 알고 있지만 이런 부처가 있다면 스님들이 질겁하며 도망갈 것이었다. 오늘은 영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다. 해루에게 해 줄 말이 있었는데 이런 식이면 망치고 말 터였다. 하얀은 핸드폰을 꺼내 해루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이만하고 가자고, 짐을 챙겨 나오라고. 해루가 하얀의 짐까지 같이 가방에 들고 다니기 때문에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한숨만 폭폭 쉬었다.
“저기.”
안경을 쓴 남자가 자신을 보며 민망한 듯 웃고 있었다. 생긴 건 평범해 보이는데 또 모를 일이었다. 요즘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아 하얀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남자는 다 안다는 듯이 자기가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여기 자료실이 어디에 있어요?”
자료실 사진을 보여 주며 묻는 남자에게 하얀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이 구립 도서관은 책이 많은 만큼 넓기도 넓었다. 가끔 대출증을 만들기 위해 자료실을 찾는 이들이 있었는데 하얀 자신도 처음 왔을 때 헤맸던 기억이 생각났다. 하지만 시대가 좋아졌다. 하얀은 자신의 핸드폰을 켜서 남자에게 내밀었다.
“대출증 만들려고 그러시죠? 요즘은 이 앱 까시면 대출증 없어도 돼요.”
“아, 정말요? 잠시만요.”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앱을 검색하는 사이 열람실의 문이 열렸다. 자판기 앞에 있는 하얀을 발견한 해루가 미소를 지으려다 말았다. 눈썹을 위로 올린 해루는 검은색 백팩을 신경질적으로 고쳐 매며 자판기 앞으로 왔다. 대화하고 있는 하얀을 방해할 생각이 없는 듯이 자판기에서 음료를 고르고 있지만 심기가 불편한 게 눈에 보였다. 질투하는 해루가 귀여운 하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 고맙습니다. 제가 계속 공부만 해서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요.”
“네.”
“혹시 여기 열람실에서 공부하세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자신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단순히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주는 관심이라고 하기엔 남자의 눈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얀은 남자 친구와 같이 공부하고 있음을 밝히려 했다.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는 해루의 기세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얀의 질투가 홀로 가만히 삭이는 것이라면 해루의 질투는 꼭 누군가 피해를 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서는 사이에 일이 발생했다. 쾅, 소리가 나서 남자와 하얀이 옆을 돌아봤다. 쓰레기통을 발로 찬 해루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누나. 이거 안 돼.”
“아….”
“음료가 안 나온다고.”
짜증이 난 얼굴로 자판기 버튼을 계속 누르는 해루의 눈빛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저러다가 자판기를 고장 내겠다 싶어서 하얀은 얼른 남자의 옆을 벗어났다. 그런데도 해루는 남자를 쳐다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빛에 질겁한 남자가 열람실로 도망가기 직전까지 눈이 따라갔다. 해루는 남자를 쫓아내고 나서도 이를 갈았다.
“음료가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돈을 안 넣었네.”
돈도 안 넣고 음료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던 해루가 웃겨 하얀은 킥킥거렸다. 그러나 해루는 그런 하얀에게 몹시 상처받은 것처럼 등을 돌렸다. 머리에 난 뿔이 보이는 것 같아 쫓아가면서도 하얀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같이 가.”
“알아서 잘 쫓아오네.”
“화났어?”
“내가? 아니?”
그러면서도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꼭 차고 다녔다. 하얀은 웃겨 죽을 것 같지만 이대로 해루를 내버려 두면 고생이 자신에게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얀은 언덕을 빠르게 내려가 해루의 손을 잡았다. 비어 있는 손을 잡자마자 해루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나 없었으면 번호도 주겠더라.”
“아…. 아까 그 남자.”
“열람실에 나는 가둬 두고 혼자 나와서 바람 쐬니까 좋아? 그래서 내가 음료 같은 건 같이 사러 가자고 그랬어, 안 그랬어. 음료도 두 개 뽑아서 그 남자랑 나눠 마시려고? 아, 더 늦게 나올 걸 그랬나. 아예 카페를 가지 그래?”
“하하.”
“왜 웃어. 웃겨, 지금?”
“귀엽잖아. ‘누나, 이거 안 돼.’라니.”
“놔, 이거.”
잘못 생각했다. 해루의 기분은 말로 풀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젠 진짜로 화가 난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는 해루를 보며 하얀은 어쩔 줄 모르고 뒤를 따라갔다. 이미 고생문은 열렸지만 질투로 가슴앓이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 하얀은 달려가 해루의 허리를 안았다. 그런데도 저 냉정한 얼굴은 겨울 한복판이었다.
“놓으라고.”
“왜 그래. 자료실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준 거야.”
“자료실 알려 주는데 왜 폰 같이 보면서 시시덕거려.”
하얀은 제 안 좋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해루를 보며 내심 각오했다. 요즘 들어 많이 안 싸운다 싶었더니 기어코 한 건을 올리려나 보다. 하얀과 해루는 잘 싸우지 않지만 한번 싸우면 크게 싸웠다. 그리고 해루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제 할머니 집으로 간 것인가 했더니 아빠 목공소에서 먹고 살고 있었다. 해루는 아빠와 죽이 잘 맞았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모를 만큼 둘이 목공소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고 그랬다. 여자 친구와 싸우고 가서 여자 친구의 아빠와 밥을 먹고 여자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잤다. 결국 하얀이 찾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하긴. 하얀도 그의 할머니와 자주 통화를 하긴 했다. 처음 막무가내로 자신의 집에 쳐들어왔을 땐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던 그의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간드러진 목소리로 우리 해루와 잘 지내냐고 물었다. 철마다 맛있는 반찬을 보내 주고 자신의 안부도 챙겨 주는 할머니를 싫어할 리 없지만 해루가 워낙 그쪽으론 예민하기에 말도 못 꺼내는 상태였다.
“또 우리 아빠네 가게.”
자기를 두고 떠나는 해루가 야속해 그렇게 한마디 했더니 잘만 가던 게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에선지 가방을 열었다. 해루는 가방 속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가방 지퍼도 못 건들게 하더니만 저런 게 들어 있어서 그런 거였다. 아직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온 해루는 그 상자를 하얀에게 내밀었다.
“이거 주려고 했는데 너 필요 없지?”
“이게 뭔데.”
“…….”
심통 부리던 해루의 입이 꾹 다물렸다. 솔직하지 못한 그의 입술 대신 빨갛게 변하는 귓불이 답을 대신해 줬다. 하얀은 상자를 묶은 노란 리본을 끌렀다. 새로 나온 운동화를 사 준 것인가 했는데 전혀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하얀이 놀란 눈으로 해루를 바라봤다. 엉성하지만 그건 나무판자로 만든 작은 집 모형이었다. 초보자가 만든 이 엉성한 집 모형은 분명 혼자 해내진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하얀은 그 집 모형이 든 상자를 소중하게 안았다. 요 며칠 그녀의 아빠와 저녁마다 낚시를 간다고 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빨간 입술이 훅 들어왔다. 하얀의 뺨을 누르고 도망간 그 입술은 어느새 서운함이 다 풀린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바보.”
그러면서 해루는 조심히 다시 상자의 리본을 묶었다. 가방에 상자를 도로 넣은 해루가 하얀의 손을 잡았다. 바보는 누가 바보인데. 하얀은 제 손을 꼭 잡는 해루를 보며 조금은 슬퍼졌다. 자신만 바라보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서 그런 것일까. 해루는 자신이 없으면 유독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해루의 모습에서 안정을 찾는 자신이 하얀은 끔찍했다.
“나도 너 보여 줄 거 있는데.”
“보여 줄 거?”
“집에 있어.”
“저거, 마음에 안 들겠지만 그래도 일단….”
“마음에 들어. 나중에 집 지어 줄 때 딱 저대로 지어 줘.”
“…그럼 우리 둘 다 판자촌 가서 살아야 하는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해루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하얀은 해루의 손을 놓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는 선물을 생각했다. 해루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청개구리 캐릭터가 최근 플랫폼 심사를 통과했다. 제 모습을 본뜬 이모티콘을 선물로 준비한 걸 알면 어떨까. 좋아할까. 아니면 창피하다고 할까. 저 집을 준비하면서 설렜을 해루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하얀은 해루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
다시 보니 참 좋은 날씨였다.
ⓒGOOF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