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sen Mansion RAW novel - Chapter 158
158. 희망
여광이 사위고 어스름이 내릴 동안 적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성을 포위한 채 사정거리 밖에 있어 기다리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밤을 틈타 쳐들어올 거란 예측이 돌았다. 멘델 성의 남자들은 싸울 준비를 마쳤다.
아성의 여자들은 2층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헤이스 가문의 세 귀부인과 아기 제니스, 성에 거주하는 하녀들이 서른 명 남짓이었다.
노인과 아기, 임신부까지. 로렐리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람들을 살릴 방법이 없는지 끝까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방도가 없었다.
진실로, 이제는 방법이 없다.
마릴린과 엠마는 의연한 태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노부인 카트린은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두 살배기 제니스는 인형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하녀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응접실의 풍경은 언뜻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을 때, 여자들이 흠칫 놀라며 긴장하는 것을 로렐리아는 보았다.
“마님. 올라브입니다.”
“들어오게.”
마릴린이 대답하자 의전관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는 영주 부인에게 공손히 예를 갖춘 뒤 눈을 돌려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로렐리아는 그가 제게 눈길을 주었다가 얼른 거둬들이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영주님의 명입니다.”
“로렐을? 무슨 일로?”
“접견실에 전령이 와 있습니다.”
마릴린이 입을 다물었다. 로렐리아는 모두의 시선이 제 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전령. 그 말을 듣자 일순 눈앞이 확 밝아졌다.
“트리센군의 전령이 아가씨를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승낙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걸음을 뗐다. 입구 쪽에 선 의전관의 안색으로는 정확한 상황을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희망에 대한 예감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람들을 살릴 방도를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
1층에 위치한 영주의 접견실 앞은 평소와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사슬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쇠뇌수들이 장전된 무기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장 대응하기 위해겠지. 로렐리아는 무기를 든 채 귀를 기울이는 남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어디에도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로렐리아는 그들 사이를 지나며 발소리를 죽이려 했다.
카펫이 깔리지 않은 석재 타일은 타각타각, 뚜렷한 소리를 울렸다.
“모셔 왔습니다, 영주님.”
접견실에 들어서자 영주 의자에 앉은 랜슬롯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곁에는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여섯 명이 서 있다.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로렐리아는 그들이 쥔 검 날의 번뜩임을 외면하며 영주 앞으로 걸어가 예를 갖췄다.
“아버지.”
“내 딸아.”
숙였던 몸을 똑바로 세우며 로렐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랜슬롯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품위 있게 용건을 전했다.
“트리센 영주가 전령을 보내왔다.”
긴장과 고요가 흐르는 공간에 그 목소리만 울렸다.
“그의 서신을 가져왔는데 반드시 네게 전해야 한다는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이 멎었다. 서신. 입속으로 되뇌자 뜨거운 감정이 왈칵 치밀었다. 로렐리아는 동요하는 마음을 누르려 애써야했다.
기다렸는데.
나는 내내 기다렸어.
그래서 온종일 멍하니 하늘만 봤어. 멧새나 박쥐를 검독수리로 착각했어. 낮에는 햇빛 때문에, 밤에는 달빛 때문에 괴로웠어. 그럼에도 날마다 미련하게 기다렸어.
당신이 편지를 보내오기를. 그만 돌아오라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돌아오라고 말해 주기를.
“나를 사랑하나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니 다 그만두겠다고.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함께 있자고.
과거의 일은 그곳에 두고, 과거의 죄도 덮어버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만 하자고. 그렇게 우리도 오랫동안 함께 하자고.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지.”
그저 부부로. 처음부터 다시.
“그대가 남편인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함께 살자고. 트리센 저택에서.
비로소, 로렐리아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를 저주하고 증오하던 순간에도, 모든 것이 망가진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남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 결국 마음을 돌릴 거라고. 무엇이 진정 옳은 길인지 깨닫게 될 거라고.
그 냉혹하고 이기적인 남자를 용서하고 또 용서한 것은, 수없이 상처 입으면서도 끝내 그를 끌어안으려 했던 것은 그 희망 때문이다.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미련한 줄 알아도.
“내 딸이 왔으니 서신을 전하게.”
랜슬롯의 말에 로렐리아가 천천히 돌아섰다.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은빛 갑옷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망토를 두른 사내를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테오볼드의 거처 앞을 지키는 위병. 매번 그녀에게 그의 행선지를 일러주던 이였다.
예상치 못한 전령의 정체에 로렐리아는 놀라움을 숨겼다.
“그대는… 근위대 소속이군.”
“마님.”
귀부인이 말을 걸자 전령이 대답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어 예를 갖추는 모습을 로렐리아는 선 채로 지켜보았다. 머리칼을 검게 염색했는데도 즉시 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잘 아는 이를 전령으로 보낸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겠지. 하나는 이 성에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영주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반드시 내게 전해야 할 서신이라서.
전령이 두 손으로 올린 서신을 받기 위해 의전관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렐리아는 계속해 생각했다. 저 사람은 근위대인데. 저택에 있어야 할 위병이 왜 여기 있을까. 이 서신을 전하러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
재빨리 생각하며 의전관으로부터 서신을 받아 들었다. 서명도 봉인도 없는 종이가 쪽지처럼 접혀 있었다. 기본적인 격식조차 갖추지 않은, 급하게 써낸 것 같은 편지였다.
“그대는 내게 이것을 전하려고 이센에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래서 로렐리아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기엔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 급조한 듯한 편지도. 눈앞의 위병도.
그녀가 미심쩍게 여긴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무릎 꿇은 전령이 더욱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님. 저는 근위대와 함께 영주님을 호위해 왔습니다.”
로렐리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것을 알아챈 것처럼 전령이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페르브란테 공께서 지금 진영에 와 계십니다.”
그가 성 밖에 있다니.
“마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멘델에 왔다니.
서신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희망이 부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로렐리아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뻣뻣한 손가락으로 간신히 편지를 펼쳤다.
∞
로렐.
지나간 일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내 생각에 너는 분명 이 서신을 헤이스가 사람들과 공유할 테고, 나는 너와 나 사이의 대화가 누구에게든 알려지길 원치 않으니까.
전령이 말했듯 내 요구는 두 가지야. 내 아내와 아이를 돌려받는 것. 헤이스 공이 항복하고 성을 넘기는 것.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인다면 멘델은 더 이상의 싸움 없이 나의 영토가 될 거야.
이것이 내 마지막 자비라는 것을 너는 알겠지. 내가 이런 자비를 베푸는 이유는 오직 너를 위해서라는 것도.
나는 네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너를 데리고 무사히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해. 내가 원하는 것은 그뿐이야.
네가 지금 전령을 따라 내 진영으로 온다면 이 전쟁은 끝나. 멘델 성에 더 이상의 죽음이 없을 거라는 걸 약속하지. 내 군대는 휴식을 취한 뒤 다음 정복지를 향해 떠날 거야.
그러니 어서 내게 와.
기다리고 있으니.
너의 남편. 테오.
∞
접견실에는 기침 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무장한 남자들이 갑옷을 절겅대는 소리조차 없었다. 로렐리아가 선 채로 편지를 펼쳐 눈으로 읽고 난 후, 천천히 종이를 내릴 때까지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적을 깬 것은 영주의 목소리였다.
“올라브. 전령을 옆방으로 안내하게.”
랜슬롯의 말에 전령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아직 전언에 대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였다.
“잠시 기다리게. 우리에게도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전령은 순순히 일어나 의전관을 따라갔다. 그 뒤를 성주의 위병들이 따랐다. 접견실은 신속히 비워져 부녀만 남게 되었다.
모든 이가 퇴장하고 문이 닫힌 뒤에도 실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렐리아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싸움을 피할 수 있어.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돼. 엄습해 온 희망 속에서 그녀는 아버지 쪽으로 돌아섰다.
영주 의자에 앉은 랜슬롯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비스듬히 허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아주 약간의 반색도, 안도감도 없었다.
그래서 로렐리아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속임수가 아니라고 날 설득해 다오.”
희망은 아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