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sen Mansion RAW novel - Chapter 176
176. 네가 원하는 것
오늘은 확실히 추운 날씨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입김이 났다.
두 사람이 아성 밖으로 걸어 나올 동안 곳곳에 선 위병들이 경례했다. 트리센 저택에서 이동해 온 것은 근위대뿐만이 아니었다. 시종장과 요리사, 하녀장까지 이제 멘델 성에 있다.
“후원으로 갈까요?”
“원하는 대로.”
두 사람은 나란히 후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회랑을 통해 연무장을 지나서 내성벽을 통과할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묵례를 받았다.
멘델 성은 전쟁을 치른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너졌던 성벽의 보수가 끝났고 사용인들도 모두 돌아왔다. 아버지와 오빠가 없지만 남은 가족들이 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괜찮아질까. 로렐리아는 오늘도 조심스레 기대해 보았다.
테오볼드가 이곳에 온 것도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가 멘델 성에 있는 모습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나란히, 겨울용 망토를 두르고 입김을 뱉으며 산책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언젠가는, 정말로 괜찮아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망토 여밈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황금색 태양의 뾰족한 꼭짓점들이 손에 익었다.
두 사람은 곧 후원에 당도했다. 메리골드 꽃밭은 검게 얼어붙었고 할아버지 나무는 잎을 모두 떨궈 나목이 되었다. 가지에 매인 그네만 그대로였지만 테오볼드는 이곳을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로렐리아가 후원을 행선지로 자주 택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아요.”
나지막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들고, 회색으로 부푼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눈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안다. 태어나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기대될까. 로렐리아는 하늘을 향해 턱을 든 남자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로렐.”
“응.”
“축일 선물로 뭘 줄까.”
그래서 대뜸 나온 그 질문에 얼른 답하지 못했다.
“원하는 걸 말해 봐.”
그가 답을 요구하듯 고개를 돌렸다. 회색 하늘과 눈의 기미에는 이미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예고 없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한담. 서둘러 고심해 보았으나 로렐리아는 그럴듯한 대답을 포기하고 말았다.
“글쎄요. 너무 많아서 하나만 고르기가 어려운데.”
“왜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되묻는 남자는 웃음기가 없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다. 그 진지한 눈을 마주 보며 로렐리아는 웃음을 참았다. 이런 식의 무심함이라면 나쁠 것이 없었다.
“음, 그럼 우선 슈테른을 좀 찾아 줄래요?”
“이미 사람을 보냈어.”
로렐리아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딴에는 용기를 내서, 장난기로 포장까지 해서 말한 거였는데.
“다른 곳으로 되팔리지 않았다면 이미 찾았을 거야. 늦어도 해가 바뀌기 전엔 찾아내겠지. 조금만 기다려.”
슈테른을 다시 찾아 줄 생각을 했을 줄이야. 그를 떠날 때 탔던 말, 변장을 위해 팔아치운 결혼 선물을.
“또 다른 건.”
테오볼드는 자신의 배려에 대해 조금도 생색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 때문에 로렐리아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것 같아서.
아니다. 이 남자는 이미 그렇게 했다. 그 자신의 목숨마저 내주려 했으니.
“엠마 언니를 살려 줘요.”
그래서 그녀는 잠깐 염치를 잊어 보았다.
혹 네가 나를 안타깝게 여겨 무언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부디 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자비를 빌어 줘.
오빠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렐리아는 제니스와 곧 태어날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서 어머니까지 빼앗을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은 레더하트의 자식, 로렐리아의 조카였다.
엠마 헤이스는 여전히 자신의 침실에 구금돼 있다. 배 속의 아이도 다행히 잘 자라고 있다. 테오볼드는 깨어난 직후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처분을 논하지 않았다. 저를 공격해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한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가 관심 갖는 여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면… 해 준다는 뜻이에요?”
“약간의 명분은 필요하겠지.”
테오볼드는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그 여자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멘델 영주로 삼지. 아이가 자랄 때까지 영지를 돌볼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어머니만큼 그 역할을 잘 해낼 사람은 없으니까.”
좋은 방법이었다. 랜슬롯의 영주 지위는 빼앗되 그 자손으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하는 것. 관대하고 평화로운 방식이었다.
“아이가 아들이라면 헤이스 가문은 영주의 지위를 유지할 거야. 만약 딸이라면 그 여영주는 내 차남과 결혼해야 해.”
트리센의 귀족들은 딸에게도 영지를 물려줄 수 있다. 다만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혼한 후에도 자기 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자는 페르브란테의 가주들뿐이다. 그러니 엠마가 여자아이를 낳는다면 그다음 대부터 멘델 영주는 헤이스의 성을 지닐 수 없었다.
“신들이 어느 쪽을 택할지 궁금하군.”
그가 웃었다. 로렐리아는 따라 웃지 못했다.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짐짓 면박을 주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뭘?”
“당신한테 차남이 있을지 어떻게 아냐고요. 아예 아들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는데.”
“그야 낳아 보면 알겠지.”
테오볼드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었다. 아이는 또 가지면 되지.
“내 계승자가 유일한 아들이라면 그 애와 결혼시켜도 돼. 아들이 하나도 태어나지 않으면 방계의 적당한 이를 찾을 수도 있고. 방법은 많아.”
로렐리아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에게는 계승자조차 달리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은 모든 남자가 아내에게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을, 그녀의 몸과 마음, 관심과 애정만을 원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이 상태만을 원했다.
“또 다른 건.”
그러니 당신은 내게 무엇을 더 주려는 걸까.
“원하는 걸 말해 봐.”
내게 어디까지 줄 수 있을까.
“이센을 줘요.”
그녀가 원하는 것.
“나는 이센의 주인이 되고 싶어.”
로렐리아는 남자의 눈을, 저를 바라보는 그 푸른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갖고 싶었다. 이센에 있는 모든 것을 원했다. 오각형의 거대한 성벽 안에 있는 도시, 그곳의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와 창공을 지나는 새조차 빠짐없이 갖고 싶었다.
트리센 저택과 그곳에 사는 남자를 갖고 싶었다. 아름다운 백금발과 짙푸른 눈동자를 지닌, 이 반짝거리는 남자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로렐리아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다. 처음 그 도시에 갔던 날부터.
“네가 원한다면.”
테오볼드는 흥미롭다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든지.”
그러나 대답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마주 선 남녀가 서로를 바라본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 그 상태로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로렐리아는 남자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두 팔로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차가운 얼굴을 어루만져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헤이스가 조상들이 묻힌 성. 그 정도로 염치없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잔뜩 부푼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테오볼드가 시선을 들어 허공을 보았다. 솜털처럼 낙하하는 눈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로 하얀 눈송이들을 좇다가 가죽장갑 한쪽을 벗었다.
그러곤 맨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뚫어지게 보았다.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그 결정들을 지켜보다가, 눈을 들어 곁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경이가 담긴 눈. 그것을 마주한 채 로렐리아는 미소 지었다.
“춥겠어.”
중얼거리며 테오볼드가 손을 뻗어 왔다. 여자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끝으로 닦아 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로렐리아는 순수한 충동으로 그곳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염치없게도.
남자에게 다가가 망토 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보잘것없는 힘에도 그는 기꺼이 당해 주었다. 따스한 입술의 감촉이 황홀했다.
유난히 추운 겨울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테오볼드는 생애 처음으로 눈을 맞으며 소년처럼 웃었다. 눈송이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고요한 눈발이 세상을 채웠다. 검게 시든 꽃밭과 나목 위로 쉼 없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함박눈의 정경 속에서 로렐리아는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눈물이 날 만큼.
∞
…테오볼드 1세의 대관식은 제국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날이기도 했다. 이날 세 개의 대귀족 가문에 신설된 공작위가, 그 휘하 봉신들에게 총 44개의 작위가 수여 되었다. 건국제는 군소 귀족들과 직접 군신 관계를 맺음으로써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했다. 왕국 시대 이전부터 확고했던 대귀족 세력은 이때부터 크게 약화되었다.
…이날 건국제가 황후를 이센의 영주로 임명했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테지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 일은 예고 없이 벌어진 돌발 사건이었다. 당시 황궁 시종장이었던 벤자민 아인스의 일기에는 테오볼드 1세가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없었던 터라 신하들이 몹시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트리센의 황제는 황후의 영토에 살 것이다. 폐하께서 그리 선포하셨을 때 나를 비롯하여 사원에 있던 2천여 명이 하나같이 놀랐다. 황궁이 있는 땅을 황후의 영지로 맡기는 것은 파격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제국이 존속되는 날까지 새로운 규칙을 따르라 하셨으니 자문관들이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중략)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폐하께서는 워낙 성정이…(후략)’
…그렇게 로렐리아 황후는 황도 이센의 초대 영주가 되었으며, ‘이센의 주인’이라는 황후의 경칭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1874년 3월 3일 ‘건국 290주년 특집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