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sen Mansion RAW novel - Chapter 5
5.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남부의 새벽은 이르게 다가와 빠르게 밝아졌다. 긴 여정에 쌓인 피로가 로렐리아의 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홀린 듯 잠에 빠졌던 그녀는 가만히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외친 첫마디는,
“조찬!”
눈앞이 삽시간에 밝아진다.
“나 늦은 거야?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위급하고 간절한 눈으로 저를 보는 로렐리아에게 알리샤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 지금부터 단장하고 나가시면 돼요.”
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로렐리아가 곧 제풀에 킥킥 웃었다. 설마하니 늦잠 자도록 그냥 놔뒀을까 봐. 스스로 면박 주면서 몸을 덮은 이불을 젖혔다. 가벼운 새털 이불에서 낯설고도 좋은 향기가 났다.
“피로는 좀 풀리셨어요?”
“보다시피 가뿐해. 아주 죽은 듯이 자 버렸지 뭐야.”
“다행이에요. 전 또 아가씨가 설레서 한숨도 못 주무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눕자마자 잠들었어.”
“젊은 사람은 원래 잘 자기 마련이래요. 심신이 건강하단 증거라나요.”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요.”
“옳은 말 같아. 참, 내 아버지는 오셨어?”
“네, 아가씨. 어제 밤늦게 도착하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알리샤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다니엘이 그러는데요, 어제 페르브란테 공이 직접 맞으셨대요.”
“아버지를?”
“네에! 영주님이 오실 때까지 도개교도 올리지 않고, 저택에 당도하셨을 땐 공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대요. 아주 늦은 밤이었는데도요.”
소곤대는 소리에 로렐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족의 성은 해가 지면 경계가 심해진다. 외출한 주인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더라도 도개교는 일단 올리는 게 상례였다. 늦은 시간까지 영주가 손님을 기다렸다가 직접 맞이하는 것 역시 매운 드문 대접이었다.
“다니엘 말로는, 공의 정성이 마치 국왕 전하라도 맞는 것 같았다던데요?”
속닥이는 알리샤의 얼굴에서 로렐리아는 뚜렷한 자부심을 보았다. 랜슬롯 헤이스를 극진히 대접한 것은 로렐라이아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기도 했다. 영지민이자 영주의 가솔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페르브란테 공은 정말 다정하신 분이구나.”
“그리고 아가씨,”
알리샤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찰나, 방문이 열리고 시녀장이 들어왔다.
“세안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가씨.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로렐리아는 입을 다문 알리샤와 공모하듯 눈을 맞춘 뒤, 미소를 머금은 채 시녀장을 따라갔다.
욕실은 유리창의 커튼을 모두 젖혀 몹시 환했다. 하얀 대리석에 세밀히 양각된 타일의 무늬가 낱낱이 보였다. 지난밤에 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젯밤, 저 커다란 금빛 욕조를 보았을 때 로렐리아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더운 물이 저절로 쏟아지는 마법 같은 시설보다 그게 더 놀라웠다.
설마 순금은 아니겠지. 욕조에 몸을 담근 내내 그게 너무 궁금해서 손톱으로 표면을 살살 긁어 보기도 했다. 긁어 본들 도금과 순금을 구분할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도금이라도 욕조에 금을 발라 놓은 것 자체가 이미 호사의 극치였다.
황금 욕조라니. 레더 오빠는 말해 줘도 믿지 않을 거야. 사냥 여행 때문에 이 멋진 기회를 놓친 레더하트가 가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긴 세숫물도 황금 수반에 담는구나.”
로렐리아가 조그맣게 감탄하며 더운물에 손을 담갔다. 곁에 서 있던 시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변기도 금인걸요.
세수를 마치고 난 뒤에는 시녀들이 나설 차례였다. 미리 손질해 걸어 둔 하얀색 모슬린 드레스를 가져다 입히고, 앞가슴의 매듭을 여미고,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도록 팽팽하게 당겨 리본을 묶었다.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빗어 주고 가벼운 화장을 했다.
로렐라이아에서 결혼 전의 처녀들은 장신구를 하지 않는다. 보석은 남편이 주는 애정의 상징이므로, 구혼자가 내민 보석을 받아 약혼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몸에 장신구를 달았다.
“어머니는 사파이어가 참 잘 어울려요.”
단장을 마친 로렐리아가 어머니의 보석함을 구경하며 말했다.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마릴린은 짙은 남색의 공단 드레스를 입고 큼직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었다. 남편에게서 약혼 예물로 받은 그 목걸이는 트리센의 장인이 만든 것이다. 트리센은 예로부터 세공술이 발달했다.
“너도 슬슬 그런 게 갖고 싶은 모양이구나.”
화장대 앞에 앉은 마릴린이 딸을 보며 웃었다. 로렐리아는 괜히 멋쩍어져서 어머니의 보석함만 들여다본다. 마님의 단장을 돕던 시녀장이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아가씨께 누가 감히 보석을 선물할까요? 어떤 걸 가져와도 빛을 잃을 텐데요.”
“놀리지 말아요, 마이어 부인.”
“놀리다니요? 로렐리아 로렐라이아의 미모는 온 왕국이 다 안답니다.”
시녀장이 능청을 떨자 모두가 웃었다. 마릴린은 말없이 화장대 거울에 비친 딸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막내도 이제 결혼을 시켜야 할 나이였다. 장녀 엘레니아와 아들 레더하트 모두 스무 살이 되기 전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로렐리아는 곧 스물이지만 막내라 그런지 그녀의 눈엔 아직 어리기만 했다.
마릴린 헤이스는 이 여행의 목적을 알고 있다. 세드릭 글랜이 초대장을 가져왔을 때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초대장은 로렐라이아 영주 부처와 그 영애만 특정했을 뿐 계승자인 레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콧대 높은 트리센 영주가 친히 서신을 보낸 것도, 전혀 교류한 바 없는 중부의 귀족을 극진히 맞아들인 것도, 이 저택에서 5일간 성대한 연회를 여는 것도,
모두 로렐리아를 만나기 위함이다.
“다 되었습니다, 마님.”
시녀장이 물러난 후에도 마릴린은 잠시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발딱 일어서서 이쪽을 보는 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남편은 무슨 생각일까. 이 애를 여기로 시집보낼 생각인 걸까. 큰딸은 북부의 계승자와, 막내딸은 남부의 주인과 결혼시켜 대륙 전체에 혼맥을 뻗을 심산인가.
그럼 알베르 왕자는?
“어머니?”
로렐리아의 부름에 마릴린은 퍼뜩 상념을 털어 냈다.
“…그래. 나가자꾸나.”
자리에서 일어서자 딸이 웃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감싸인 로렐리아는 두렵도록 아름다웠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 세상의 무서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마릴린은 트리센의 영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지금 느끼는 이 막연한 불안은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테오볼드 페르브란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위험을 가져올 이라면 엿새 뒤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면 된다. 집으로 돌아가 왕비에게 서신을 보내면 된다. 당신의 막내아들과 나의 막내딸을 서둘러 결혼시키자고. 셀린 왕비는 기꺼이 왕의 재가를 얻어 낼 것이고, 왕은 남편에게 두 아이의 결혼을 명할 것이다.
“아버지는요?”
“이미 가 계신단다.”
“벌써요?”
“아침 일찍 공을 만나러 가셨지.”
“두 분이 벌써 좋은 친구가 되셨나 봐요.”
글쎄다. 마릴린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집사가 보낸 시종이 앞장서 그들을 안내했다. 화려한 무늬의 푹신한 카펫 덕분에 모두의 발소리가 완전히 흡수되었다.
바닥 전체에 이런 카펫을 깔아 둔 건가. 움직이는 사람의 기척을 들을 수 없는 저택이라니. 마릴린은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
저택의 시종과 두 모녀, 시녀들까지 여섯 명이 움직였지만 발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로렐리아는 바닥에 카펫을 깔아 소음을 감춘 발상에 감탄했다. 발아래가 푹신해서 마치 구름 위를 디디는 기분이었다.
조찬실은 멀지 않았다. 귀빈들이 머무는 방에서 계단을 지나 한 층 위였다. 로렐리아는 널찍한 복도의 화려한 장식을 눈으로 살피느라 바빴다. 천장이 둥글고 높아 매우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저 높은 곳을 빈틈없이 채운 천장화는 대체 어떻게 그렸을까 신기했다.
벽은 온통 하얀색과 금색, 반짝이는 반사광이다. 복도 왼쪽의 거대한 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오른쪽 벽에 빼곡한 거울들이 그 빛을 반사했다. 벽에는 금장 촛대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촛대 주위에 크리스털을 매달아 반짝이게 한 샹들리에를 로렐리아는 왕궁 이외의 곳에서 본 적이 없었다.
“내 남편은 조찬실에 계신가?”
마릴린이 묻자 앞서 걷던 시종이 대답했다.
“예, 마님. 헤이스 공께서는 조찬실에 영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천장화를 힐끗힐끗 올려다보던 로렐리아가 얼른 고개를 똑바로 했다. 복도 끝에 커다란 아치형의 문이 있고 양옆으로 두 명의 시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저기가 조찬실이구나. 확신이 들자 가슴이 쿵쿵 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될까. 오늘따라 드레스는 또 왜 이리 갑갑한지. 로렐리아는 편하게 숨을 쉬려 노력하면서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턱을 당겼다.
그리고 눈앞의 문이 활짝 열렸다.
“로렐라이아 영주 부인 마릴린 마님, 영애 로렐리아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입구에 선 의전관이 귀빈들의 당도를 알렸다. 로렐리아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묵직한 의자 다리가 드륵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뚜벅뚜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 소리에 로렐리아는 이 조찬실 바닥에 카펫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남자들보다 반 뼘쯤 낮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태양 같았다. 굵직하고 낮아 강렬한 음색이지만 말투가 부드러워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어른 남자의 목소리. 로렐리아가 내리뜬 눈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녀는 지금껏, 저토록 찬란한 머리 색을 처음 보았다.
“헤이스 부인.”
트리센의 영주가 미소 지으며 마릴린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손에 입 맞추는 남자를 로렐리아는 바라보았다. 화려한 백금발이 빛처럼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았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브란테 공.”
남자는 달콤하게 웃으며 마릴린과 눈을 맞춘 뒤, 잡았던 손을 놓아주고 그 딸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향내가 짙어졌다. 측백과 사향. 그것들을 불에 그을린 듯한 냄새.
“헤이스 양.”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로렐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