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ller RAW novel - Chapter (400)
400화
경비병들에게 안내된 사람들은 소지품을 검사받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여기까지는 기동 요새를 드나들 때의 통상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과정이 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라.”
무기를 든 경비병의 재촉에 따라 한 사람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비병 두 명과 고글을 쓴 남자 하나, 그리고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 하나.
“이리로.”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자 두 명의 경비병이 우악스런 손길로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리고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당황해 하는 틈을 타 고글을 쓴 남자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으윽…”
이마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머리 속에 이물질이 주입되었다.
일부러 욕망을 부추기는 행위 따위는 추가되지 않았다.
이곳의 나약한 인간들은 다크 시드에 의해 의식이 장악되는 과정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노예로 전락했다.
물론, 이런 표현도 어디까지나 이전에 노예가 아니었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준상은 무감동한 표정으로 사지를 떨고 있던 자의 몸짓이 희열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떨림이 끝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손을 떼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히 그렇다는 느낌으로 준상에게 복종을 표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준상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이상하다.
하지만 정확히 이상한 점이 무어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도 해답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출 수도 없다.
화가 잔뜩 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것처럼, 이제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튜토리얼에서 늑대와 검치호를 쓰러뜨리고 숲에 불을 질렀을 때와 같았다.
불을 붙이기 위해 준비를 하고 불씨를 준비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 였지만, 막상 불을 붙이고 난 뒤에는 그 불이 숲 안에 존재하던 모든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까지 손 하나 깜짝하지 못했던 것처럼, 준상이 피워낸 불씨는 브리아넬라를 상징하는 기동 요새 안에서 빠르게 번져 가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하면서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결과였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행했던 모든 행동의 주체는 준상 바로 자신이었다.
은연중에 누군가가 알게 모르게 그의 행동을 조절했을지도 모른다.
퀘스트라는 형식은 임무 수행을 위한 목표 설정이라는 형식으로 그를 임의로 조종하기에 매우 유리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정령계를 거쳐 가면서 퀘스트를 벗어난 이후로는 어땠을까.
퀘스트에 불려가고 그것을 수행하며 성과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벗어난 뒤의 일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즉흥적이고 돌발적이었다.
그는 항상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다행히 그 과정은 큰 실패 없이 이어져 지금 이렇게 칠대 황가의 하나를 손안에 넣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성공이 과연 우연의 연속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이런 결과가 도출된 것은 아닐까.
준상은 그런 불안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다크 시드를 주입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단 한 명도 저항하지 않았다.
벨 라야의 차원 요새에서 사로 잡았던 앙가라드는 세례의 의식이 무조건 성공하는 종류의 행위가 아니라고 했었다.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열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는 세례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처음에 광기의 정령이나 애욕의 정령을 주입해 내재된 욕망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기계적으로 다크 시드를 주입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는 적지 않은 수의 저항자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명도 다크 시드가 의식의 기본 틀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그런 식으로 지배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칠대 황가라는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하여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만을 선별하여 모아놓은 것이 이유인 것은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단지 지배의 대상이 바뀌고 지배의 매개체가 바뀔 뿐, 지배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요정들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하면 어떨까.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크 시드가 자극할 만한 다양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욕이나 식욕과 같은 생명으로서 지녀야할 극히 당연한 몇 가지 욕망 밖에 없는데다, 사회나 조직이나 신앙 같은 어떤 형태의 지배도 무의미한 그들에게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벨 라야는 그런 요정들을 실패작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토록 자유 의지를 쉽게 저버리는 인간들이 요정에 비해 나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들 뿐만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지구에서 사는 인간들도 다를 바가 없다.
사회라는 형태로 계급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종속시키고 그 안에서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자랑스러워 하는 행동이 지금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준상님.”
문득 귓가에 들려온 부름을 듣고서야 준상은 기계적으로 다크 시드를 주입하던 과정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라트나가 공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끝났습니다.”
“…”
그런가.
벌써 다 끝난 건가.
“남은 것은 최상층의 몇몇 뿐. 명하신다면 바로 제압을 시작하겠습니다.”
“게이트를 통해 탈출할 가능성이 있을텐데.”
그러자 마유나가 다가와 말했다.
“최상층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게이트를 무력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가.”
이미 기지 내의 모든 인원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준상은 바로 허락을 내렸다.
“좋아. 시작하도록.”
“네!”
허락이 떨어지자 발레라는 경비병들을 지휘해 주요 시스템의 제압을 빠르게 시작했다.
애초에 각 위치를 관리하는 당직들을 모두 장악한 상황이다 보니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기지 내의 시스템 권한이 준상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준상은 양 옆에 마유나와 라트나를 거느리고 대광장으로부터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상층으로 향하는 문앞에 섰을 때 그 아래층의 권한은 모두 준상에게로 귀속된 상황이었다.
“열겠습니다.”
마유나의 말과 함께 최상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고, 곧바로 완전무장한 경비병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누구냐!”
갑작스레 쏟아져 나오는 무장 병력의 모습에 안을 지키고 있던 몇몇 시종과 경비병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발사한 광학 무기에 벌집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반란이다!”
그렇게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발사하는 경비병들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부족한 숫자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발레라는 잠시 후 준상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주요 시스템의 제압을 완료했습니다.”
“게이트도?”
“물론입니다. 게이트를 비롯한 시드 무력화 장치 등 대부분의 시스템을 무력화한 상태이니 주인님께서 힘을 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말하라.”
“가주가 지닌 최고 권한은 직접 회수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주전의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광학병기들이 발사되었지만, 다크 시드의 세례를 입은 병사들은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은 것처럼 돌진하여 내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을 도륙했다.
달구어진 공기와 피 냄새, 그리고 살과 의복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뒤섞인 공기 속을 준상은 천천히 걸었다.
안에는 몇몇 시녀들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주 부부는 고색창연한 두 개의 의자에 평상복으로 보이는 단정한 옷을 차려 입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끌고 가라.”
“네.”
발레라의 명령에 따라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시녀들이 경비병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잡혀 끌려 나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가주 부부 가운데 부인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발레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말에 발레라는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저 주인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어머님.”
“무슨…”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발레라는 다시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셔라.”
“…”
뒤따르던 의무 시녀가 다가와 제1황자와 마찬가지로 약물을 주입하자 부인은 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을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가주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 속에는 창조의 씨앗이, 그리고 손가락에는 저주받은 욕망의 씨앗이라… 그것 참.”
일부러 평온을 가장한 것일까.
가주의 표정에는 약간의 놀라움을 제외하면 당혹이나 황망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네는 이곳을 빼앗아 무엇을 할 셈인가.”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준상을 바라보며 가주는 다시 말했다.
“하긴 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지.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가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난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항상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있네.”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칠대 황가의 인간들은 스스로 불멸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불멸이라는 가치를 손에 넣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러지 않는 것일까. 하다못해 성좌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들조차 반쯤은 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나이를 먹고 자신의 후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하고 말일세.”
“…”
준상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주는 그런 준상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
“그래. 이제 날 어쩔 셈인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발레라였다.
“그라우엔이라고 아십니까?”
발레라의 말에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관리국이 만들어낸 여러 실패작 가운데 하나라지?”
“그 실패작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발레라의 말에 가주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어째서 그렇게 간단하게 지배당하는 건가 싶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
가주는 의자에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세월 동안 얽매여 있던 순수한 인간이라는 굴레를 이런 식으로 벗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건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발레라가 경비병으로부터 대검 하나를 받아들고 그에게 다가섰다.
준상은 칠대 황가의 하나를 지배하는 가주가 아들의 손에 의해 숨이 끊기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가주의 생명이 끊기자 일시적으로 기동 요새 나스툼이 진동을 일으켰다.
최고 권한을 지닌 자가 사망함에 따라 몇가지 시스템이 초기화된 탓이다.
준상은 가주가 완전히 사망했음을 확인하고는 그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주의 흑혈을 이용해 그 몸을 되살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가주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싸움 하나가 끝을 맺었음을 깨달았다.
*
이후, 칠대 황가 가운데 하나인 브리아넬라 가문은 타랄라 가문과의 협상을 벌였다.
누명이나 다름없는 죄를 뒤집어 쓴 타랄라 가문이었지만, 칠대 황가끼리 전쟁을 일으키는 식의 결말은 원하지 않았던 터라 협상은 순조롭게 타결되었다.
그 결과 브리아넬라 가문은 지금까지 칠대 황가에 귀속되어 있지 않던 몇 개 행성에 대한 권리를 추가로 획득했고, 이것은 칠대 황가 간의 협의체인 위원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이미 은하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브리아넬라 가문이 행성 몇 개를 더 지배하는 것 정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식 행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도 의결도 별 저항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브리아넬라 가문은 협상의 진행과는 별도로 새로운 성좌의 주인은 선임했다.
벨 라야라고 불리던 전대와는 달리 새로운 성좌의 주인은 벨 가이아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새로 선임된 성좌의 주인이 영지로 부여받은 행성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벨 가이아는 선임되고 난 다음 은밀한 경로를 통해 타랄라 가문에 속한 성좌의 주인인 벨 페오르와 마주했다.
그 만남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몇 개월 후 타랄라 가문은 브리아넬라 가문과 전격적으로 결혼 동맹을 맺게 된다.
다른 황가들은 이 강대한 두 가문의 결합을 크게 경계했지만, 의외로 브리아넬라와 타랄라 가문은 이후로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면서 평온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는 두 황가에 속한 젊은이들 사이의 로맨스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 우주를 뜨겁게 달군 결혼 동맹의 얘기가 조금씩 수그러들 즈음, 지구의 어느 외딴 섬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다.
“반갑습니다.”
“…”
준상은 미국의 대표로 참석한 국무부 장관과 악수를 나누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국무부 장관은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존대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지만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자답게 얼른 그 말을 받아넘겼다.
“별 말씀을.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국무부 장관은 준상과 그의 옆에 선 다른 사람들을 한쪽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모형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른쪽이 약간 뭉개진 느낌의 V자 형태의 섬, 그리고 그 위에 정밀하게 표현된 여러 가지 시설물의 모습을 보고 준상의 옆에 서 있던 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임산부용의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갈색머리의 미녀와 하얀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묘한 분위기의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아이를 안고 있는 무지개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보시는 바와 같은 섬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집니다. 우측의 필 섬, 그리고 중앙의 웨이크 섬, 마지막으로 좌측의 윌크스 섬이 그것입니다. 필 섬에는 주로 주거를 비롯한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의 웨이크 섬에는 누리 랜드라고 이름 붙여진 유원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웨이크 섬의 양 끝 부분과 윌크스 섬에는 아름다운 숲과 화원이 만들어져 있지요.”
국무부 장관이 모형의 각 부분을 가리키며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아이에게 말했다.
“누리야. 마음에 드니?”
“응!”
국무부 장관은 아이의 힘찬 대답과 표정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싫은 표정을 짓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오오오오오!”
“꺄하하하하하!”
벌써부터 운행을 시작한 놀이기구에는 어느 틈엔가 등에 날개가 달린 기묘한 자들이 올라탄 채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 섬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방인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빡빡 민 기이한 거구의 사내들이라든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기이한 옷차림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장식인지 뭔지 머리에 동물 귀를 단 사람들의 모습들도 보였다.
뿐인가.
알록달록한 털빛을 가진 고양이들이 두 발로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을 본 국무부 장관의 수행원들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엄마! 나두! 나두!”
“그럴래?”
품에서 내려주자 붉은 나비 넥타이를 맨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등 뒤에 섰다.
아이는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늑대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허공을 떠올라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다람쥐와 고슴도치가 후다닥 달려 나와 늑대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는다.
“가자!”
마침내 아이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늑대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예쁘게 꾸며진 화단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하…”
국무부 장관은 어디서부터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지개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아이가 늑대를 타고 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그래.”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허공에서 아름답게 세공된 지팡이 하나를 꺼내고는 곧바로 마법을 발동했다.
“어?”
“세상에…”
갑자기 그녀의 주위에 아름다운 형태의 마법진들이 나타나 허공을 수놓기 시작하자 국무부 장관을 비롯해서 이번 행사를 위해 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구구구구궁…
가장 먼저 짧은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그 울림은 약 일 분간 지속되다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풍경에 변화가 일어났을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이, 이럴 수가!”
떠오르고 있었다.
웨이크 섬이라고 불리는 지형과 그 인근의 바다가 마치 둥근 국자로 푹 떠올린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주위를 돌아보니 동물귀를 머리에 단 사람이라든가 등에 날개를 단 사람들이 섬 곳곳에서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처럼 마법진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국무부 장관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통째로 띄워 올리다니.
도대체 이들의 능력은 어디까지가 한계란 말인가.
섬은 그대로 창공을 떠올라 위성 궤도까지 올라갔다.
국무부 장관은 시시각각 변하는 섬 바깥의 풍경에 얼이 빠져 있다가 섬이 완전히 우주 밖으로 나오자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준상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국무부 장관과 수행원들은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국무부 장관이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갈색 머리의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나요?”
“네?”
국무부 장관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폈지만, 역시나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준상이 대답했다.
“우주.”
“…”
국무부 장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가…”
갈색 머리의 여인이 그런 국무부 장관을 향해 말했다.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 작품 후기 ============================
지난 10월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습니다.
이야기는 끝을 맺었습니다만, 미진하다 느끼시는 부분은 외전 등으로 보충해 나갈 생각입니다.
보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덧글이나 뜰의 방명록 등에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당분간은 오랜 연재를 통해 쌓인 피로를 풀면서 느긋하게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아마도 차기작은 빨간 딱지가 아니라 파란 딱지가 붙은 청소년 노블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트롤러를 아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