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ller RAW novel - Chapter (401)
401화
[뒷 이야기] – 회담벨 라야의 영지였던 라야는 작은 섬과 같은 육지가 포도처럼 연결되어 바다 위에 자리 잡은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라야라는 이름부터가 위성 궤도로부터 이 행성을 바라본 첫 번째 이주민들에게서 나온 ‘포도’라는 의미의 방언으로부터 생겨난 것일 정도다.
커다란 바다가 없는 대신 대부분의 육지와 해안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곳은 개척이 시작된 이후 귀족들의 개인 휴양지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성내 지각 운동이 둔화되면서 자기장이 약해졌고, 그 결과 항성풍을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사라져 감에 따라 행성 표면의 수자원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말라붙어 가는 행성의 모습에 아쉬워하면서도 그것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 행성을 살려내기 위해 들일 노력으로 다른 행성을 개발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성 라야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라붙은 사막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지하의 얼마 남지 않은 수자원이 이 행성에 남은 물의 전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그냥 버려진 행성이라면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졌겠지만, 이 행성에는 과거 귀족들의 저택을 관리하던 시종의 후손들이 여전히 지하에 도시를 이룬 채 살아가고 있었다. 벨 라야는 그런 지저인의 후손이었다.
벨 라야는 성좌의 주인이 된 이후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이용해 다른 행성으로부터 물을 수입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당사자가 이미 소멸한 이상 그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사람들은 벨 라야가 아마도 이곳을 과거 물이 충만하던 시절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항성풍을 막을 수 있는 수단, 이를테면 행성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의 방어막 같은 것을 건설하고 혜성이나 다른 물이 풍부한 행성으로부터 수자원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면 이곳의 모습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일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러한 예산과 비용을 투자해야할 당위성이 없어서 그만두었지만, 벨 라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볼 따름이다.
이곳이 회담 장소로 정해진 것에는, 새롭게 벨 가이아라는 이름을 받은 준상이 자신의 전임자가 태어나고 자라 영지로 받은 행성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설령 벨 페오르와의 회담이 결렬되어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된다는 점 역시 큰 이유였다. 적어도 라야의 지표 상에는 더 이상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상과 벨 페오르는 정해진 시간이 되자 약속했던 좌표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지표를 조금 걸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벨 페오르였다.
“설마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벨 페오르도 자신의 말에 대답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준상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벨 페오르의 시선은 준상의 손에 끼워진 반지로 향해 있었다. 허나 이미 육체 변이를 일으켜 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방법이 있는 걸 알게 되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 완전히 소용없는 건 아닌가. 그의 후대라면 지금 준상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성좌의 주인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몸에 직접 이식하지 않고 창조의 씨앗으로 제어를 위한 장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의 일부가 아닌 이상 망실의 우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강력한 또 하나의 힘인 육체 변이 또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장일단.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벨 페오르는 부러운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벨 페오르는 허공에서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마른 대지 위에 늘어 놓았다.
“앉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
준상이 자리에 앉자 벨 페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보았던 요정과는 무슨 관계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싶다면 먼저 대화를 이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캐비닛 하나를 꺼내고는 집사 고양이 이고르를 불러 다과를 준비하게 했다. 붉은 나비 넥타이를 맨 검은 고양이가 작은 앞발을 지휘하듯 휘두르며 다과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준상은 입을 열었다.
“나의 반려이며, 또한 내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
벨 페오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그의 음성에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마저 담겨져 있었다. 준상이 느끼기에 리체스와 자신의 관계는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인 듯 했다.
“그걸 물은 이유는 뭐지?”
“음…”
벨 페오르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준상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몸에 걸치고 있던 의복을 벗기 시작한다.
갑자기 뭐하는 짓인가 하고 바라보던 준상은 그의 어깨에 자리 잡은 반투명한 작은 날개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크기가 너무 작아 거의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요정의 날개가 분명했다.
벨 페오르는 옷을 다시 어깨 위에 걸치고는 의자에 앉았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남자의 그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있다.
“봐서 알겠지만, 내 몸에는 요정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랬군.”
“그래봐야 날지도 못하는 작은 날개의 흔적을 제외하면 보통의 인간과 그리 다를 것도 없지만.”
준상은 관리국의 기지에서 그가 느닷없이 공격을 멈추고 돌아갔던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요정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아인종들은 본래 창조의 씨앗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인간을 개량한 결과다. 창조의 씨앗을 성숙시키는 요소가 욕망이라는 건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고, 그 이전에는 갖가지 동물이나 식물들에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이식해서 경과를 살피는 식이었지.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부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준상이 물었다.
“창조의 씨앗은 도대체 뭐지?”
벨 페오르는 이고르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글쎄. 그것에 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 감정이라는 형태의 확정적이지 않은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라는 규소질의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현재로서는 가장 우세하지만,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야. 성숙하지 않은 창조의 씨앗이 생명체를 변이시키거나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자신이 깃든 숙주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지.”
“생명체라…”
“겉보기에는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한 느낌이라 별로 믿기진 않지만, 에너지를 받아들여 성장하고 번식 또한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라는 얘기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싶어.”
시드의 개체수를 임의로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브리아넬라 가문에 속한 자들로부터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본래 50레벨의 시드들은 그 이하 레벨의 시드와는 달리 추출시 별도의 처치가 필요하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누락된 채 일방적인 추출이 이루어지면 시드는 자기 분열을 일으켜 레벨 만큼의 새로운 시드를 탄생시키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고레벨의 시드가 아닌 수확의 제한선을 간신히 넘긴 저레벨의 시드들의 가장 큰 용도가 이러한 시드 개체수의 확보이다.
생물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증식 능력, 물질 대사 능력, 그리고 항상성 유지 능력의 세 가지로 나뉜다. 시드는 그 외형이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크게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셈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 시드가 창조신의 파편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야.”
“어째서?”
“과거에 우주가 존재하지 않을 무렵, 커다란 태초의 알이 펑 하고 터지면서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거지. 허무맹랑한 얘기 같기는 하지만, 창조의 씨앗이 지닌 힘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아.”
벨 페오르는 찻잔을 완전히 비우고는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서론은 이쯤 해두고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볼까.”
“말해라.”
“타랄라 가문을 지우는데 협력해 줬으면 한다.”
“…”
“도와주면, 그 이후엔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 네 여자로 삼아주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반려가 있는데 이런 괴물 같은 여자에게 흥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건 포기하도록 하지.”
준상은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난 이미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있나?”
“쳇.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벨 페오르는 혀를 차며 투덜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만약 지금 브리아넬라의 상황을 다른 황가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아?”
“…”
“모르긴 해도 모든 황가들이 연합해서 브리아넬라를 밟아 버리려고 들겠지. 과연 그걸 너 혼자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겠지.”
지구를 영지로 받고 헤네스의 고향인 행성 히딕스, 그리고 하라바나 케이드가 살고 있는 행성 파두스를 브리아넬라 가문의 휘하에 편입함으로서 관리국이나 다른 가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다른 가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 브리아넬라 가문이 아무리 칠대 황가 가운데 수위를 차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해도 전부 막아내기는 힘들다.
벨 페오르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머리 속의 검은 씨앗이 존재하는 한 죽었다 깨어나도 타랄라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다른 가문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거지. 뭐… 네가 나타나서 전부 뒤집어 버리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
“내가 그간 들인 공을 한 번에 꿀꺽 말아먹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날 도와줬으면 해.”
준상은 벨 페오르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타랄라의 멸망인가?”
“아… 그건 아니야.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일을 벌였다가는 아까도 말했듯이 다른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
벨 페오르는 이고르가 새로 따라준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내 목표는 타랄라의 현 가주. 그 자 뿐이야.”
“복수인가?”
“그런 셈이지. 생각해 보면 시시할 정도의.”
“…”
벨 페오르는 완전히 육체와 시드가 융합해 버린 탓에 따로 준상과 같은 형태로 타랄라 가문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타랄라 가주가 사망하더라도 그 혈족이 뒤를 이으면 말짱 도루묵.
하지만 새로운 가주를 준상이 지배하게 되면 간접적으로 벨 페오르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브리아넬라 가문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벨 페오르 역시 그러한 사항을 충분히 알고 있을터.
처음에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오래도록 염원해 왔던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너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육체 변이가 불가능한 이상 다른 칠성좌들과 싸우려면 아무래도 힘든 것도 사실이잖아? 그럴 때 내가 도와줄 수도 있겠지. 게다가 나라는 전례가 있다면 다른 칠성좌 녀석들을 포섭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고. 손해는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씩 웃으며 말하는 벨 페오르의 모습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겠군.”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뒤, 브리아넬라와 타랄라의 두 가문은 결혼 동맹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