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53
외전―남양항로 1만 리 (1)
1471년은 대단한 열광의 파도가 온 조선반도에 밀어닥치던 해였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의용군 출신들이 소련 성립의 그날, 보여 준 열정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학문적 성취감 외에는 다른 흥분감을 느낄 줄 모르는 노신사라 생각했던 나의 은사 바빌로프 교수님 역시 나를 이끌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날 사람들이 보여 준 고취감은 대단한 것이었고, 나 또한 그 흥겨움에 취하여 동료들과 함께 인근의 펍과 객잔들을 돌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술을 머리로 들이부었다.
“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 몹시도 ‘연광(kemegehan)’입니다.”
“나도 그렇소. 허나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자면 ’연광’이 아니라 ‘영광(kemegahan)’이라오.”
“아, 죄송합니다. 제 말레이어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말레이어 통역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곧바로 신청서를 작성한 것도, 그때 일어난 내 가슴속 모험심이 동한 탓이었다.
적당한 자격 검증 정도만 치른 채(애초에 소련에 말레이어 능력자 자체가 많지 않을 테니), 내가 마주하게 된 ‘손님’은 무려 믈라카의 재상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장식한 큼직한 사파이어 반지와 진주로 장식된 치렁치렁한 비단 드레스는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반지에 예를 다해 입을 맞추니 그는 당혹한 듯하다가 껄껄 웃었다. 그 얼굴에는 낯선 것에 포용적인 호기심을 품을 줄 아는 품위가 베어 있었고, 웃음은 호쾌하면서도 사려 깊었다.
“신기한 인사법이로군. 헌데 이 나라의 어느 누구도 이렇게 인사하는 걸 보지는 못했는데!”
‘천일야화’ 그림책에서 읽었던 인사법은 써먹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판명되었다. 실례를 저지른 건가 싶어 머뭇거리던 나에게 그는 정중히 오른손을 심장에 가져다 댄 채 고개를 숙였다.
그게 저들의 정중한 인사법이었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니 혈맥이 두근두근 뛰어오르는 것이 조금씩 느껴진다.
그게 나, 윈스턴 로밀리와 믈라카의 재상 툰 페락의 첫 만남이었다.
* * *
이쯤에서 독자 제현들에게 이 글의 저자이자 화자인 ‘윈스턴 로밀리(Winston Romilly)’라는 사람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잠시간 이야기를 멈추고 나의 신변잡기를 풀어놓으니, 그저 다소 장황한 나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의 인내심이 허락하기를 바란다.
나의 어머니는 이름 일곱 자가 제시카 미트포드(Jessica Mitford) 되시는데, 그 역사는 짧으나 엄연한 귀족가인 미트포드 남작가의 여섯째 여식으로 태어나 그분 특유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으로 사교계를 놀라게 하셨다.
그분의 열정과 실천력, 타고난 지성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자매들이 파시스트라는 불명예와, 또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으로 인한 멸시를 겪어야만 하였다.
또 나의 아버지는 함자가 에스먼드 로밀리(Esmond Romilly) 되시는 분이다. 그분은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그 특유의 가슴 따뜻함과 연민으로 귀족 사회에서 이야기가 자자하셨다.
그 때문에 다소 좋지 않은 평판을 듣기도 하였으나 아버지와 깊이 교우한 이들은 당신의 사려 깊음과 순수한 이상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다. 물론 심성 고약한 삼촌인 처칠(여러분이 아버지의 회고록을 읽었다면 잘 알고 있을 그 사람이 맞다.)의 모욕에 고생이 많으셨지만.
그러니 이 사교계의 이단아이자, ‘고결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자애롭고 따스한 심성’을 지녔다 평가받으시던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나누게 되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두 분은 귀족적 생활을 포기하며 궁핍하게 사시다 곧 스페인행을 택하셨고,
여러분 모두가 알 기가 막힌 사건을 통해 조선에 정착하셨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RMS 켈틱 1호에서 내려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것이 서너덧 살 적이었으니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나의 고향은 언제나 조선이고, 원산이었다. 아주 희미하게밖에 기억나지 않는 잉글랜드 어드메보다는 이야기책 속의 캐멀롯(Camelot)에 더 정감이 가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 주위에 얽힌 인간관계들은 나의 고향에 대한 ‘독특한’ 정체성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였다.
내가 사랑하지만 때로는 나와 갈등하던 잉글랜드인 공동체는 끊임없이 나에게 잉글랜드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가르쳤으니, 부모님을 닮아 약간의 반골 기질을 지녔던 나는 거꾸로 누구도 파고들어 가지 않을 잡다한 지식들, 지금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들에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의 소소한 반란은 나를 박물학자로 만들었고, 반항이라는 것에 흥미가 떨어질 정도로 나이 먹은 뒤로도 이런저런 잡학들을 쌓는 데 취미가 붙게 되었다.
그렇기에 내가 말레이 통역사라는 ‘모험’을 감행했을 때 그리 빠르게 말레이어의 문법과 어휘를 흡수할 수 있던 것이리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후로 이어지는 툰 페락과의 일정은 첫 만남처럼 모든 것이 느긋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 관하여 나의 실수를 시정하고, 툰 페락과의 조율을 이뤄 낼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의 말레이어는 조선에 오고 나서, 그러니까 누군가가 쥐고 있던 현대 말레이어 사전과 문법서에 의해 완성된 것이었다. 수백 년 전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나는 꽤나 중용되었다. 주상 전하께 나아가 믈라카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온갖 공문서의 편집과 윤문에 참여했으며,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툰 페락의 수행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대가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툰 페락은 첫 만남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훌륭한 교양, 그리고 손짓 하나하나에서 묻어 나오는 기품이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특히 그의 재주는 기품 있는 행동을 통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신 편안하게 만드는 데 있었는데, 본래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그 반대의 행위에 능숙함을 생각한다면(나를 믿으라. 나는 한평생을 귀족 출신 부모님과 그 지인들 사이에서 자라났으니.) 그는 내가 가졌던 첫인상보다도 훨씬 더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경복궁을 들락날락하며 바쁘게 지내던 나날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문화의 심오한 내면을 탐구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어느새 그의 귀국 날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사실, 실제로 툰 페락의 일정이 빠르게 마무리되기도 하였다.
물이 맞지 않았는지 사신단의 몇몇이 조선에 온 뒤로 내내 설사를 하는 바람에 괜히 이방의 사신들을 오래 붙들어 놓지 말자는 여론이 득세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융성하는 나라였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백성들이 전하를 사랑하니 나라에는 평화와 자비가 가득했고 길가에는 거지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멀리 원방에서 덕을 좇아 먼바다를 건너온 너를 기특하게 생각한다. 너와 네 주군에게 비단과 문방구와 서책을 하사하니 백성을 평안케 하는 데 힘을 다하라.”
어찌 되었건, 툰 페락은 이런저런 하사품을 조선 국왕 전하께 챙겨 받고 한양 인근을 짤막하게 구경한 뒤 다시 그가 왔던 제물포로 향했다. 물론 나 또한 동반한 채였다. 그 짧은 새 우리는 제법 우정을 쌓았고, 그가 귀국길에 동반할 통역으로 나를 당국에 요청했던 것이다.
열차 안에서 우리는 소련과 믈라카의 풍속 차이에 관해 재잘거렸고, 내가 막 첫 만남의 실수에 관해 즐거이 언급할 때쯤에는 이미 항만에 도착한 뒤였다.
우리를 위하여 기다리고 있던 WRS 엥겔스 호는, 곧 내가 갑판을 딛자마자 얼마 안 되어 그 몸을 육지로부터 밀어냈다.
바다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툰 페락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눈으로 선박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 배는 신기하게도 흰색이로군. 내가 왕국의 근해에서 보았던 그대들의 배는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숨을 필요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숨을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군사용이 아니니 매복의 필요성이 없지요. 오히려 그 의도를 생각하자면 상시 눈에 띄는 순백색의 외관인 것이 낫습니다.”
WRS 엥겔스 호는 주로 대민 지원과 의료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선박이다. 백색의 선체 한켠에는 붉은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데 아버지께 듣기로는 옛 ‘적십자’라는 단체의 마크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
용적 수는 켈틱 2호와 같은 2만 톤급에, 속도는 16노트, 족히 2천 명은 넘는 승객이 수용 가능하며 민간용이라는 특성상 당구장이나 테니스장, 카페와 음악 감상실 등 편의 시설들이 다수 갖춰져 있으니. 한 나라의 재상이 지내기에도 넉넉히 편안하고 호사스러운 배였다.
“허면 무장은 갖추고 있지 않은가? 해적이 들끓는 저 근해를 지나가면서?”
“무기가 있기는 하나 초라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희 선박은 거대합니다. 이 갑판까지 기어오르는 해적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거야 그렇군. 정말 거대한 배일세.”
“며칠 내에 제가 아는 선원과 함께 배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초대라면 기꺼이 응하겠네.”
* * *
그렇게 지루한 잡무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배가 남중국해를 지나갈 때쯤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렇게 깡마른 20대 중반의 박물학자, 휘황찬란한 복장을 갖춘 귀족 남성, 그리고 내가 선원학교에서 강사를 맡았을 때 가르친 바 있는 올리비에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 3층 갑판부터 저 아래 지하 갑판까지 쏘다니게 되었다.
“바로 저기가 선장실이고, 저기는 레스토랑입니다! 각하께서는 아마 매일 12시와 6시에 저곳에서 식사를 대접받으실 겁니다!”
그리 설명하며 올리비에는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마치 사람이 나이가 들면 관절이 삭기도 한다는 점을 모르는 듯했다. 그의 젊음은 싱그럽다 못해 주위로 푸른빛의 아우라가 도는 듯했고, 나와 툰 페락 역시 그의 곁에서 생기를 받아 나이 든 다리가 절로 젊은이처럼 쌩쌩하게 움직였다.
물론 내 나이 아직 스물여섯이니 젊음을 운운하기에는 어리다 할 수 있겠다만, 박물학이란 끊임없는 걸음과 고행을 동반하는 직업이란 것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교수님! 교수님을 위해서 말씀드리자면 독서실은 책들의 하중을 견디느라 하층 갑판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의 흡연실 근방에는 허브 태우는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 그리고….”
우리가 가지 못하는 저 멀리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종달새처럼 떠들던 올리비에는 잠시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달려가 보니 올리비에는 입을 쩍 벌린 채로 나에게 “교수님, 교수님….” 하고 읊조리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기는 했다.
“향유고래, 고래목 향유고래과. 대체 왜 향유고래가 남중국해까지 왔을까? 원래 일본 근해에 서식하는 놈들인데….”
“교수님, 저렇게 커다란 고래는 처음 보는데요?”
“누가 들으면 우리가 뱃사람이고 네가 육지 사람인 줄 알겠어.”
“하지만 이번이 제 두 번째 항해인걸요. 고래를 본 것도 서너 번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올리비에가 툴툴거리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툰 페락 역시 흥미로운 듯 난간 너머로 조금 고개를 빼고 있었다.
“맙소사, 정말 거대하군. 향유고래는 말만 들어 봤을 뿐이지 직접 본 적은 없네.”
“보통 몸길이가 성인 키의 10배 정도 합니다. 아마 각하께서 사시는 믈라카반도에서는 보기 힘든 종일 겁니다.”
“교수님, 저 녀석을 잡으면 다챠를 몇 채 정도 지을 수 있을까요?”
“우선, 이제 소련에서는 포경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기름을 얻으려고 고래를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만약 저 정도 크기의 향유고래라면… 네가 그냥 원산을 다 사 버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로밀리 선생.”
“예, 각하?”
“조선과 소련에서는 용연향을 살 수 없는 것이오? 채산성과는 별개로 말이오?”
“그렇습니다. 포경이란 게 좀 위험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웬만하면 기름이나 다른 사치품도 대체재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하하, 그건… 아쉽군. 만일 고래 사냥이 활성화되면 제일 먼저 나를 불러 주시오. 저 귀한 녀석을 이렇게 그냥 보내 주자니 마음이 아프구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향을 얻자고 죽이기에는 아름다운 생물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내 면을 세워 주려고 그러는지, 마침 외따로 헤엄치던 향유고래가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든다.
그 광경에 감탄하고 있던 올리비에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물살이 그에게 끼얹혀 오자 어푸어푸거린다.
그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곧 물보라가 가시자 다시 청명한 바다가 내다보인다. 올리비에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며 방정맞게 계단으로 뛰쳐 들어간다.
“참, 귀여운 녀석 아닙니까?”
“꽤나 어려 보이는 소년인데 나이가 얼마나 되오?”
“저래 봬도 이제 투표권도 있는 성인입니다. 15살이죠.”
나는 올리비에의 아버지를 여러 번 만나 본 적이 있는데, 원산에 선원학교를 설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기 때문이었다.
켈틱 1호의 선장이기도 했던 그분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에 풍채가 좋고 미식을 즐기는 여유로운 성격의 남성이었다. 내가 부모님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던 프랑스 신사의 이상적인 모습 그대로였달까.
그리고 소문으로만 듣던 올리비에는 처음 보았을 때 그 아버지와는 다르게 성급하고 마른 체형에 입이 짧아 어딜 데리고 나가 식도락을 즐기기에도 마뜩찮은 소년이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아버지를 닮았다 생각했던 부분이 있으니 그 신사다운 낙천성이었다.
나는 짠 바람이 부는 난간에서 떨어져 툰 페락을 이끌고 흡연실로 향했다. 올리비에가 말해 준 그대로 허브향이 폴폴 풍기는 방이었다.
흡연실의 테이블들에는 입에 굴뚝을 물고 질겅질겅 씹어 대는 남녀들이 여럿 보였는데 전부 중년 이상의 백인들이었다. 담배라는 물건을 잊지 못해 그 대용품이라도 피워 대는 이들은 대개 시간 여행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였다.
몇 안 되는 조선인들 역시 담배를 피우는 이들과 함께 포커를 치거나 주사위 놀이를 하러 왔을 뿐, 입에 뭔가를 물고 있는 이는 없었다. 나는 흡연실 한쪽에 비치되어 있던 간식을 챙겨 자리에 앉았다. 류큐산 설탕과 찹쌀을 버무린 꿀떡과 수정과였다.
그렇게 올리비에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것저것 담소를 나누던 때에 의외의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해적들입니다, 해적!”
올리비에의 부름에 급히 흡연실을 나섰다. 우리의 소란에 다른 흡연자들 역시 뛰쳐나와 수평선 너머를 지켜보았다.
저 멀리서 정크선 십수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작가의 말
윈스턴 로밀리는 가상 인물입니다.
에스먼드 로밀리와 제시카 미트포드 사이에는 1937년생 딸 하나가 있었을 뿐이고 그 또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맙니다.
외전―남양항로 1만 리 (2)
정크선들의 형태는 해적선답게 가지각색이었다.
돛의 색깔부터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까지 다양했고, 그 크기로 가면 10미터짜리로 어떻게 이 원양까지 끌고 왔나 싶은 것부터 20미터에서 30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그 선수의 장식 역시 어떤 것은 사자 머리를 새겨 놓았나 하면 어느 것은 그냥 수수한 나무 형태 그대로였다.
마치 통일성이라는 것을 기피하다 못해 증오하는 듯하기까지 하던 그 기묘한 구성의 선단들은 단 하나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우리 선박의 진행 방향 쪽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거리가 좁혀진 거지?”
“암초 사이에 숨어 있다가 나왔습니다! 배들을 포위하는 데 익숙한 녀석들 같았습니다!”
내가 혼잣말로 이야기하자 어느새 내 곁으로 와서 서 있던 올리비에가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올리비에가 말한 바가 옳았다. 해적들이 출몰하기에는 천혜의 환경이다.
“스프래틀리 군도(Spratly Islands)로군.”
남중국해는 조선의 16배나 되는 넓이를 가진 거대한 바다의 평원이다. 북쪽으로는 광동성과 광서성에 잇닿아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대만섬이, 동쪽으로는 필리핀 군도, 남쪽으로는 보르네오섬, 서쪽으로는 인도차이나반도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은 마치 바다의 목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인데, 대두이석태, 벤자리, 감성돔, 매퉁이, 밴댕이, 말쥐치, 정어리 등 다양한 어종들이 쏘다니며 수많은 어민을 먹여 살린다.
또한 이 바다의 풍요는 단지 자연 그 자체에서만 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남중국해는 중국 대륙의 뭇 황제가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등과 교류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쳐야 할 해상 관문이었다.
지금처럼 명나라 남조(南朝)가 해금령을 풀고 외국과의 사적인 교역을 재개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황금과 비단이 넘실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소련 역시 명나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 항로를 이용하지 않으나, 우리가 탄 WRS 프리드리히 엥겔스 호는 툰 페락을 데리고 믈라카로 향하는 겸, 이 근방을 측량할 겸 예외적으로 남중국해를 경유한 것이니.
그런고로 소련 해군의 영향 바깥의 그늘에서, 해적들이 자라나기 무척이나 좋은 환경이었다.
둘러싸인 육지가 많다는 점은 여차하면 도망쳐서 숨을 나라와 무인도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러 문명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역시 약탈할 품목의 다양성을 보장하였다.
향신료, 비단, 차, 도자기, 석재, 향목, 서책, 약재 등등 지금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치품은 이 남중국해 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만일 욕조 마개를 빼듯 이 바다의 물을 모조리 사라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 해저에 잠든 무수한 보물선들 역시 쉬이 찾아볼 수 있으리라.
해적들에게 공격당하여 좌초하거나 침몰한 배들의 무덤을 말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놀라거나 흥미로워하는 모습을 보일 뿐 누구도 긴장하지 않는다. 나 또한 약간의 흥분감과 열기에 도취되었을 뿐 그다지 걱정스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로밀리 선생도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함선은 전투를 위해 건조된 것이 아니니 본래 도주가 가장 우선적인 전략일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전투용 함선에 비하면 훨씬 변변찮은 장비들을 가지고 있지요.”
“허면, 싸움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크게 고전하지 않겠는가? 그대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지금 전투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네.”
물론 미지는 두려움을 낳으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툰 페락만이 다소 조급한 기분을 느끼며 나를 채근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적들은 결코 이곳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물론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상당히 자신감이 넘치는군. 저들은 우리가 속도를 높여 도주하지도 못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사방에서 조여 오고 있지 않는가?”
“물론 저들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능숙한 뱃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저리 제멋대로인 선박들로 저렇게까지 호흡을 맞출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허면 대응을….”
“아마 하고 있을 겁니다.”
―“푀(Feu, 발사하라)!”
―쾅!
역시나.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쿠쾅!
―끼거거거기기기긱!
곧 나무로 된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선두로 달려오던 배의 돛대가 부러진다. 혼비백산하던 선원들은 곧 배를 버리고, 옴싹달싹할 수 없게 된 해적선은 이미 모든 위엄과 공포를 잃고 걸레짝이 되어 갔다.
선원도 없이 흘수선 아래로 구멍이 뚫려 가라앉아 가는 빈 배는 마치 오래되어 이름조차 잊힌 두개골 화석처럼 쓸쓸하고도 처연했다. 저 배가 저질러 왔을 숱한 강탈과 범죄를 생각한다면 온당한 최후이리라.
“브라바(Brava)! 부숴 버려!”
이미 몇몇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한두 줄씩 경탄을 내뱉고 있다. 이미 그들에게 해적과의 전투는 승리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기에, 엥겔스의 분전은 그저 문장 끝에 찍는 마침표나 다름없었다.
함포들이 불을 뿜자 한 척씩 한 척씩 정크선들은 좌침되었고, 그 위에 올라 있던 해적들 역시 목숨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거나 어떻게든 배를 살려 보려 기를 쓰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내다보였다.
그렇게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엥겔스 호를 포위한 듯 보였던 제각각의 정크선들은 더욱 불규칙하고 불균등한 형체로 변해 있었다.
멀쩡한 것들은 이제 빠르게 방향을 틀어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고, 그러지 못한 것들은 근처 섬의 해안에 들이받아 승무원들의 익사만큼은 막으려 두리번거렸다. 침몰보다는 좌초가, 익사보다는 표류가 낫다는 생각인 듯했다.
“저들은 어떻게 될까요?”
올리비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묻는다. 아마 좌초하게 된 해적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것이리라.
“이 근방은 남중국해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어. 근방의 상선들이 지나가면서 이곳에 잠시 머물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우리 소련의 선박들처럼 형편이 좋은 것이 아니니 말이야. 다들 웬만하면 무시하고 지나치게 될 거야.”
“저 섬들에서 농사는 지을 수 있나요? 제대로 된 뗏목을 만들 나무도 없을 것 같은데….”
“이 근방에 규모 있는 섬들은 그리 많지 않아. 이 요충지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섬만 있었더라면 이미 중국과 베트남의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거야. 대부분이 모래톱이나 암초 수준이고 주기적으로 태풍이 불어오니 무인도로 방치되어 있지.”
“그러면….”
“괜찮을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위안시키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올리비에는 그 따뜻한 심성을 발휘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진행될 일들에 대해 대강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그 일은 아마 우리의 눈앞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진행될 것이기에 내가 굳이 올리비에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건넬 필요도 없으리라.
“여기! 혹시 툰 페락 재상 각하께서 계십니까!”
“계십니다! 지금 제 곁에 함께 계십니다!”
계단을 통해 상층 갑판으로 건장한 선원 한 사람이 달려오자, 나는 손을 흔들어 그를 불렀다. 견장이 번쩍이는 정복 차림새로 다가오는 것을 보아 분명 고급 선원이었다.
“툰 페락 각하, 로밀리 동지, 안녕하십니까. 1등 항해사 김민혁입니다. 선장님께서 부르십니다.”
“흠, 대체 나를 무슨 일로?”
“해적들에 관한 급한 용무입니다. 선교로 행차할 수 있으실지는지요?”
“내가 꼭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
“감사합니다. 이쪽 계단을 타고 오시면 됩니다.”
“올리비에, 잠시만 기다려 주렴. 돌아왔을 때 네 걱정은 내가 해소해 주마.”
항해사가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붙이니, 이런 문화에 익숙지 않던 나 역시 무심결에 따라서 경례하였다. 그의 조심스러운 안내에 따라 우리는 계단 위로 이동하였다.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의 올리비에를 남겨 둔 채였다.
널찍한 곡선 계단은 마치 어느 오페라 하우스에서 떼어 낸 것 같은 호사스러운 모습이었다. 근처에 널린 테이블과 소파에서는 밖으로 서둘러 나오기 어려웠던 노인들이 바깥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성의 수다를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