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54
그들을 지나쳐 마르크스의 흉상과 오망성 무늬로 장식된 홀을 빠져나와 보다 소박한 철제 계단을 올라가니, 곧 선교였다. 이 배에서 가장 높은 곳, 가장 널찍하게 뚫린 시원한 창문이 달린 곳이었다.
배의 전방 360도로 사방의 풍경과 햇살이 모두 막힘없이 눈에 들어왔고, 방금의 전투가 연상될 수 없을 정도로 바다는 평온하며 광활했다. 우리는 푸른 거인의 손바닥 위에서 뛰노는 작은 모래알에 불과했기에, 그의 거대한 평화를 깨뜨리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 속에서도 섬 하나하나, 깨지고 흩어진 선박 잔해 한 조각 한 조각을 꼼꼼한 눈으로 살피는 어느 중년이 보였다.
외견상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기는 하였으나, 차분하지만 성실하게 지시를 내리는 그의 몸가짐과 화려한 제복 덕분에 그가 동안일 뿐 실제로는 40대 이상의 나이일 거라는 사실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복 가슴 한쪽에는 놀랍게도 연방 소비에트 대회 의원직을 상징하는 배지가, 그것도 초대 의원임을 나타내는 연도 수 ‘1453’이 새겨진 것이 달려 있었다.
“선교에 오신 두 분 귀빈을 환영합니다. 선장인 민해(民解) 박정남입니다.”
“민해…?”
“아하하, 그래요. 다소 반동적인 취향일지는 몰라도 이름 앞에 호를 붙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농민 무지렁이 출신이던 이가 호라는 것을 가져 보는 것도 나름의 혁명성 아니겠습니까?”
농민 출신, 초대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 의원, 박정남. 내 머리는 곧 켈틱 1호의 홀에 길게 전시된 일련의 기록화들을 기억해 냈다. 소련의 길지 않은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순간들이 보존된, 때로는 입체파 같은 전위적인 양식으로 때로는 고전주의적인 그림체로 그려진.
그림 속 마티스풍의 원색적인 모습과 하도 닮지 않아 알아보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 대회당 기록화에 나오던 최초의… 조선인 의원 입안자이시군요! 의외의 유명 인사를 여기서 뵙습니다!”
“하하, 별것 아닙니다. 먼 옛날에 운 좋게 얻은 명성보다는 엥겔스 호의 선장으로 기억되고 싶군요.”
그리 이야기하며 쑥스러운 듯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기록화에 나와 있던 것보다 머리가 더 희끗희끗해졌고, 차분하고 세련된 표정을 지을 줄 알게 되었다. 18년이라는 세월은 농군을 선장으로 만들었다.
“일단 귀빈분의 시간을 낭비할까 걱정되니 잡담은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소집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좌초한 해적들을 구출하는 데 대해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시나 그랬군요.”
“우리 소련의 선원들은 언제나 진보와 인도주의를 제1 원칙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역사에서도 제국주의의 최선봉에는 뱃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소련의 선원들은 모두 유사시에는 해군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국가에 긴밀히 소속되어 있으니 사실상 준(準)군인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린다. 그런 이들이 전투 이후에 난파자와 패잔병들을 내버리고 간다면 그는 곧 소련 정부의 의지나 다름없게 된다.
“물론 저희의 원칙은 일괄적인 구조와 포로 수용입니다만 지금 저희가 국빈을 선내에 모시고 있는 바, 절차상의 동의를 구해야 하게 되어 이리 호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각하께 수고스러운 부담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오. 적병들을, 그것도 해적들을 노임과 자원을 들여 구조한다는 발상이 놀랍기는 하나, 그 근저에는 아름다운 자비가 있으니 역시 알라의 뜻과 합치하는 것이겠소. 이 사안에 대해 제가 동의할 권리를 얻게 되니 그 또한 영광이오.”
그렇게 말하며 툰 페락은 선장이 건네는 손을 맞잡아 흔든다. 어느덧 그 역시 소련식의 인사법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흡연실 앞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군중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올리비에가 다급히 다가와 해적들에 관한 이야기라니 어떻게 된 것이냐며 물어 오니 차근차근 사안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긴장되었던 올리비에의 얼굴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역시나 사람들이 굶어 죽도록 놔두지는 않게 되겠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네가 아직 생도에 가까워서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일이란다. 바다가 있는 한 해적은 사라지지 않을 테고 네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너도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해지겠지.”
“만약 온 세상이 소련이 된다면 해적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언젠가 그렇게만 된다면. 네 말대로 되겠지. 모든 육지에 사회주의 국가가 자리 잡는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선장이 되더라도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고, 아마 선원들은 함포를 사용하는 법을 까먹어서 제가 주기적으로 재교육을 시켜 줘야 하겠죠. 아마 길을 막아서는 바위 더미를 부수거나 사나운 고래들이 도망가도록 놀라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면 포를 쏘지도 않게 될 거예요.”
나는 잠시 올리비에의 낙관주의에 크게 놀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그와 나의 열 살 정도 터울 되는 세대 차이에서 오는 사고방식의 차이였다.
내가 어렸을 때 소련은 존속의 위기를 맞아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군사 훈련을 받고 국경을 경계했었다.
소년 시절에 나는 방음 기능도, 방한 능력도 형편없는 합판으로 지은 공동 주택에 살았는데 벽을 두드려 보면 퉁퉁 소리가 나서 옆집의 소년과 서로 모스 부호로 대화를 나누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과 같은 풍요와 사치는 사실 몇 년 사이에 급속히 이루어 낸 성과였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었고, 노인들이 가끔씩 “시간 여행 전에 우리는 하늘을 날았지!” 하는 말을 던지더라도 나의 눈에는 오늘날의 번영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56년생인 올리비에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달랐다.
그가 신생아이던 시절부터 이미 소련은 어느 정도 원산에 자리를 잡아 갔고, 사람들은 만주족 난민들을 위한 자원 봉사에 기꺼이 동참할 정도로 여유가 생겨 있었다. 그가 열한 살, 열두 살을 넘어갈 때쯤에는 이미 화학 비료가 널리 퍼져 가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에게 풍요는 당연했고, 사회주의의 확대 또한 운명적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순수한 이상론에 감탄하며 툰 페락에게 말했다.
“정말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 않습니까? 저 또한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지금의 변화상을 다 모르겠는데, 저와 올리비에가 겪는 세상이 이렇게 차이가 크니 어떻게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게 될지 모르겠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는 법이네. 자네와 이 배의 선장, 그리고 저 소년이 모두 나이와 출신이 다를지 몰라도 난파자들을 구하겠다는 숭고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알라께서 소중히 빚어내신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흘러가더라도 변치 않을 걸세.”
역시나, 비록 봉건 귀족 중의 봉건 귀족이며 언제나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이 말레이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시금 그의 대답에서 드러났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마치 태양처럼 밝고 환하기에, 그의 무슬림으로서의 신앙과 귀족적인 자세는 그의 고결한 품성을 가리는 구름이나 먼지가 아니라, 도리어 그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 비춰 주는 프리즘처럼 작동하는 것이리라.
이내 엥겔스 호는 스프래틀리 군도의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한다. 몇 번의 위협 사격과 함께 선장의 엄포가 가해지자, 이미 전의를 상실한 해적들은 대개 무장을 해제하고 구명보트에 올랐다.
몇몇 난파자들은 이성을 잃고 엥겔스 호에 공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보트를 보내지 않거나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구명정들이 돌아오자 물에 쫄딱 젖은 채 구속된 여러 무리의 남녀들이 엥겔스 호의 주갑판에서 줄을 지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곧 각각의 선실에 감금되어 숙식을 제공받게 될 것이다.
“저들은 어떻게 되나요?”
올리비에가 다시금 묻는다. 아무리 이 배의 생도라고는 해도, 엥겔스 호 자체가 원래 조선과 일본 연안을 주로 항해했기 때문에(당연하다. 이 정도 의전이 필요한 귀빈들이 많은 곳이 어디겠는가?) 이번 원양 항해에서 익숙지 않은 점들이 많은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근방에 있는 소련군 주둔지로 보낸 뒤에 그 처우를 결정했겠지만 이징옥 동지가 드막을 점령한 뒤로 해적들은 모두 그곳에 정착시키고 있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는 이제 그들 스스로의 태도에 달려 있지.”
설명을 마치자, 주위에는 마침 교대하고 나온 보일러실의 인부들이 바깥 공기를 쐬러 나와서 승객들과 선박에서의 노동이 얼마나 고된지, 또 한편으로는 어떤 뿌듯함이 있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뱃일에 익숙지 않은 승객들은 그들의 장광설에 혹하여 박수까지 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흥분되고 긴장된 공기가 가시고, 다시 일상의 분위기로 매끄럽게 돌아가려는 찰나,
“맙소사! 안 돼!”
한 줄기 비명이 들려온다. 방향은 주갑판 쪽
놀란 사람들의 무리가 그쪽 난간을 향하여 달려갔고, 나 또한 시선을 돌려 보자 어떤 험상궂은 사내, 소금기에 쫄딱 젖은 사내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그의 자식이 아닐 게 분명한 어린 소년이 안겨 있었다.
“#$&$$#!”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언어였지만 나는 쉬이 해독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면 죽인다!’
인질극이다.
외전―남양항로 1만 리 (3)
사내는 이미 아이 한 명을 포로로 잡고 있었다. 시커먼 칼등이 아이의 목 가까이에 들이대어 있어 누가 보아도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해적인가? 대체 어떻게 풀려난 거지! 저렇게 큰 칼은 어디에 숨겨 놨던 거야!”
올리비에가 경악하여 외쳤고, 나는 그의 행색과 위치를 살펴보았다.
땀과 물을 온몸에서 뚝뚝 흘릴 정도로 젖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는 추위와 긴장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옷과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아까까지 어딘가에서 호되게 고생한 듯하였다.
그 해적은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밖에 걸려 있는 로프와 쇠사슬, 그리고 매달린 구명보트를 어떤 방식으로든 부여잡고 등반하듯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차갑고 높은 선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올라오는 과정을 거치며 악에 받친 듯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에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 그의 눈이 만나 증기라도 뿜어낼 듯하였다.
“#@$^&*@#*&!”
뭔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외쳤다. 납치범의 요구 사항? 아니면 어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욕설과 모욕? 무엇이든 간에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결코 순순하지 않았다.
길들여지지 않을 분노와 요동치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지배하여 야수처럼 만들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억센 왼팔로 아이의 몸을 둘러싼 채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바닷물에 젖은 칼날을 휘두르며 위협했다.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그리고 올리비에가 팔을 걷어붙인다. 그의 눈은 무모함 어린 용기와 정의감이 가득했으니, 갑자기 상층 갑판 어딘가에 있던 로프를 쥐고 자신의 몸에 묶기 시작한다.
“자네, 뭘 하려고!”
“각하와 교수님께서는 거기 서 계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올리비에는 한쪽 기둥에 빠르게 매듭을 묶은 뒤, 자신의 허리에 있어서도 그렇게 했다. 잠시 몸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뒤늦게 눈치챈 내가 말리려고 외쳤을 때, 이미 그는 도움닫기를 마친 뒤였다.
“아이를 풀어 줘!”
“끄아아악!”
올리비에는 상층 갑판의 난간에서 날아오르듯 뛰어올라 정확히 유괴범의 몸 위로 떨어졌다.
유괴범은 충격에 칼과 아이를 놓쳤고, 그와 뒤엉킨 채 올리비에는 관성에 따라 주갑판의 한쪽 끝까지 굴렀다. 두 사람이 난간을 넘어 배에서 떨어질까 싶어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던 찰나, 올리비에의 허리에 묶여 있던 밧줄이 그를 붙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유괴범을 향하여 올리비에가 손발을 모두 써서 공격을 가하자, 유괴범 역시 올리비에를 떨쳐 낸 채 소리를 지르며 공격해 왔다.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니 사람들은 그 주위 사방으로 물러났다.
“올리비에! 올리비에 르루아!”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던 나만 빼고.
나는 그가 걱정되어 내 옆에 툰 페락 각하가 서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와 주갑판에 닿았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곳으로 뛰어가자 곧 해적과 뒤엉켜 레슬링을 하고 있는 올리비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비열한 놈이 허리춤에 감춰 뒀던 단도를 빼 들고 올리비에를 향해 돌진하자,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의 머리를 지팡이로 내려쳤다.
“컥, 크헉….”
예상치 못한 일격에 놀랐는지 해적의 눈이 크게 떠지다가, 상체가 거꾸러지며 곧 갑판에 처박혔다. 맥박을 재어 보니 살아 있었고, 동공이 풀린 것을 보니 단순 기절이었다.
“다들 물러나십시오!”
그제야 칼과 소총을 빼 든 항해사들이 전번에 보았던 김민혁 군의 지휘에 따라 난동꾼을 포위하였다. 그들은 기절한 해적의 손에 수갑을 채운 뒤 들것에 실어 데려갔다. 아마 구속된 채 의무실에서 간단한 검진을 받고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수감되리라.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위험했지 않니! 용감했지만, 웬만하면 그러지 말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었는데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네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올리비에를 혼내려던 나는 곧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돌아보았다. 납치되었던 아이의 부모인 듯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 모두 벌벌 떨리는 눈빛으로 나와 올리비에를 번갈아 쳐다보니 나는 비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곧 두 사람이 올리비에의 손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전하였다. 그들이 걸친 두루마기의 옷소매가 눈물 콧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무모했으나, 분명 영웅적인 행동이기도 하였으니 올리비에가 저 정도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은 있었다.
나는 괜한 훈수로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잠시 뒤로 물러났다. 나를 기다리던 툰 페락이 감탄하며 물었다.
“지팡이를 휘두르던 솜씨가 아주 깔끔하더군.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호신술 정도는 익혀 두라고 어릴 때부터 닦달을 하셔서 말입니다.”
아무튼 잠시간의 해적 소동을 거친 뒤, 올리비에는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와 그의 앞으로의 장래, 해상에서의 안전 등에 관한 몇 가지 따끔한 충고들을 건넸고 그는 다시는 몸부터 움직이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렇게 사태가 모두 진정되자, 이제 올리비에가 이끌어 주던 해상 투어도 슬슬 흐지부지된지라 다시 서로 헤어져 각자의 객실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며칠 동안 바쁜 나날이었다. 올리비에는 용맹한 행동과 제 몸을 아끼지 않는 감투 정신을 치하받으며 선장에게 직접 이런저런 포상을 받았고, 그 뒤로는 동기들과 해후를 위한 파티에 불려 다니느라 얼굴 볼 틈이 없었다.
나 역시 모리셔스 제도에 도착하여 수집할 표본들을 목록화하고, 드막에 도착하자마자 바빌로프 선생님께 부칠 편지를 쓰는 등의 잡무가 밀려 있었다.
나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박물학자고, 이번 툰 페락과의 여정을 떠나는 김에 디에고 가르시아, 그리고 그 너머 모리셔스 제도까지 탐험하며 이런저런 연구를 진행할 욕심이 있었기에, 툰 페락 역시 나의 직업적 열성을 존중하여 그동안 다른 통역자와 동행하며 나의 업무 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렇게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났을까? 툰 페락의 고향인 말레이반도로부터 잠시 멀어져 WRS 프리드리히 엥겔스 호는 드막에 정박했다.
스프래틀리 군도에서의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들이 하나둘씩 하선하여 각자가 수용될 마을로 이동하였고, 그들을 진두지휘하게 될 현지 향민계와 엥겔스 호 사이에 이런저런 인계 작업을 마친 뒤 다시 출항하였다. 드막에 잠시 머무르던 일본 상인들이나 향민계원들 역시 승선한 채였다.
그리고 툰 페락이 나를 다시 호출한 것도 그렇게 드막을 떠나가던 참이었다.
“로밀리 선생, 와 주어서 고맙네. 바로 옆 객실에 있는데도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구려.”
“제가 연구나 작업 중에는 방을 잘 나오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그게 말일세….”
툰 페락은 평소의 여유롭고 기품 있던 얼굴 대신 어쩐지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곁눈질로 침대 옆의 협탁을 가리키자 나 역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비단으로 감싸인 서신이 한 장 있었다.
그 비단 봉투의 파도 무늬는, 누가 보아도 일본풍이었다.
“초대장일세. 읽어 보게나.”
그가 손짓하며 권하자 나는 정성스레 포장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당연하지만 겉봉은 약간 뜯어진 채였다.
그 내용은 한문으로 적혀 있었으나, 아마 나 대신 붙어 있던 다른 통역인이 툰 페락에게 전문을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각하께 삼가 편지 글월을 띄워 보냅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인연이 닿지 않으면 이뤄지는 것이 없습니다.
엥겔스 호가 우연히 해적을 마주하여 드막에 들르게 된 것도, 저희가 마침 배편이 미뤄져 계획과 다르게 엥겔스 호에 승선하게 된 것도, 이렇게 우연과 우연이 만나 저희가 한배에 타게 될 것도….”
“앞에는 그저 화려하고 정중한 인사말들일 뿐일세. 그 뒤의 내용이 중요한 부분이라네.”
나는 툰 페락에 제언에 곧 몇 줄을 건너뛰었다. 실제로 이 근해의 따스한 날씨나 상업의 중흥 등에 관한 미사여구들이었다. 그런 구절들을 넘기고 나니, 나오는 것은….
“비록 각하와 저희가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를지 모르겠으나 인류는 하나의 형제이며, 언젠가 다가올 공산 세계에서 진정 그리될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앞서 저희는 저희의 기도 시간과 독서회 시간에 귀하를 초대하려 하니 만일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모쪼록 초청에 응해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총총.”
맙소사.
“마극종에서의 초청이 온 모양이군요?”
“아하, 일본의 이교도들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군? 아마 불교나 힌두교의 일종이라 생각하는데 아시다시피 나는 무슬림이라….”
“상대가 덜 불쾌하게 거절하는 법을 부탁하시는 것이군요.”
“바로 그걸세. 내가 아무리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다 한들, 어찌 알라 외의 다른 신에게 부복하고 마지막 예언자가 아닌 다른 이를 보고 신의 사도라고 기도하겠나?”
툰 페락은 다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추측건대,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볼 때 아마 이 문제로 한동안 골머리를 썩였을 게 분명하다.
특히 그에게 민감한 무슬림으로서의 신앙에 관한 문제가 걸린 데다가, 그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문화에 대한 건이었으니까. 무슨 무례를 저지를지 몰라 아직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그의 걱정을 다소 덜어 줄 수 있을 듯하였다. 생각한 것보다 문제가 심각하지 않자 나는 안도하여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참석하셔도 됩니다.”
“음? 하지만 저들은 이교도가 아닌가? 내가 이교도의 의식에 참여하기에는 마음에 거리낌이 생겨서 말일세….”
“물론 일본의 경우에는 저희 소련식의 구분이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마극종의 이론과 체계는 신앙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철학이나 이념, 사상에 가깝습니다. 이슬람의 신앙과는 궤가 크게 다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다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들의 믿음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로군.”
“맞습니다. 종교의 형식만을 빌렸을 뿐 결국에는 사고방식의 문제일 뿐입니다.”
“허나 자네들… 그,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은 무신론자라고 하지 않았나? 저들 역시 그러하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네. 내가 무신론자들의 의식에 참여하는 건 더더욱 허용치 못할 일이 될 테니 말이야.”
“그 역시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극종의 신도들 중에 태반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흠…? 그건 어째서인가?”
“일본과 마극종의 상황 때문입니다.”
마극종이 아무리 세가 커져도 불교 국가인 일본 내에서의 공식적인 취급은 어디까지나 ‘불적(佛敵)’이다. 부처의 적, 불법(佛法)의 적, 계율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극종 역시 생존 전략을 짜내는 과정에서 신도들에게 일종의 양면 전략을 권장하였다. 마극종과 다른 불교 종파를 함께 믿어 위장하는 행위를 적극 권장 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일본에 가 본 적은 없으나, 아직까지도 일본 내부에서는 마극종 신도들 대다수가 그런 ‘위장용 신앙’을 하나둘씩 갖추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위장용이라 한들, 실제로 그런 과정에서 ‘진심으로’ 두 종파를 함께 숭앙하는 이들이 생기니 마극종 역시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마극종은 그래서 이제 무신론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등한 종교’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며, 신적인 존재들이 존재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니 툰 페락이 참여하여, 극단적으로는 거기서 코란을 낭송한다고 한들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런 설명들을 듣고 나서야 툰 페락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좋네. 참석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도 내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니 자네가 동행해 주었으면 하네.”
“물론입니다. 초대일자는 그러고 보니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언제죠?”
“바로 내일이라네. 아침이지.”
믈라카의 재상은 이제 평상시의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띠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불안하게 꼼지락꼼지락거리던 손가락들도 이제 차분하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내일까지인데, 뭐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기라도 한가?”
“딱히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마극종의 의식은 그러면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으신 상태 아니십니까?”
“맞네. 나에게는 완전히 낯선 종교지.”
나는 겪어 본 적 있다. 얼마 전부터 렌뇨 선사 본인이 이런저런 의식과 제례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어 낸 마극종만의 독특한 교의들을.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툰 페락에게 인사를 건넨 채 그의 객실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벌써 야심했기에 나는 쓰던 원고들을 간단히 정리만 해둔 채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가 올리비에를 불러 선내에 마련된 마극종 사당으로 향하니, 곳곳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기도문을 외고 합장을 하며 경전을 낭독하는 사람들.
기묘한 향내를 맡음과 함께 툰 페락의 얼굴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하다. 정말 이게 철학이 맡기는 하냐고 묻는 듯하다. 나 역시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난 제의들에 잠시 당황하였으나 결국 본질은 같았다.
“마극종의 핵심은 철학이 맞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때 툰 페락에게 그리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던 것은 내가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만일 내 옆에 있던 여성이 마르크스에게 며느리의 안전한 출산을 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조금 더 당황했으리라.
외전―남양항로 1만 리 (4)
마극종 신도들을 위한 간이 본당(本堂)을 지나치자 곧 원형으로 된 공간이 나온다. 마극종의 독서회가 열리는 회당 특유의 형태였다. 초대받은 툰 페락 외에 나나 올리비에가 참석해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들은 친절하게 맞아들여 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간략하군요.”
철학자 승려들이 모여 사람들을 훈화하는 곳이라 하니 지루한 교양 강의와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던 올리비에는 승려가 짤막한 이론 설명과 기도문 암송으로 진행을 마치자 의외라는 듯 속삭였다.
“당연한 일이야. 아직도 마극종의 신도들 대부분은 일본 내에서 공공연히 모이지 않으니까. 모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회합에 1시간 이상이 걸리지 않아.”
원래 마극종의 기도회와 독서회는 시간이 길게 걸리지 않았다. 렌뇨 선사가 기도와 조직의 법도를 제정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포되고 체계화되기부터 단 몇 년이 지났을 뿐이었기에 대부분의 예식은 퍽 간략하고 소박했다.
내 말을 듣고 난 올리비에는 뭔가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붉은 장삼을 걸친 승려의 말에 몰두했다. 마치 자신이 비밀 결사의 일원이 된 듯한 흥미진진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승려는 이런저런 비유와 간단한 일화들로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의 삶에 대해 설명하다가, 입을 닫았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니 자신의 말은 무가치하다며 선언하는 듯했다.
“오늘은 또한 귀빈분들께서 오셨으니 여기까지 진행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노동자라야 새로운 세상을 만듭니다. 천하노동자합일.”
“천하무산자합일.”
마극종 신도들을 위하여 마련된 홀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은 오직 단상 위에 놓인 낫과 망치 모양의 도금된 동상밖에 없었다. 인상적인 장면 또한 그 형상을 통해 연출되었는데, 승려가 그 동상의 손잡이 부분에 보관되어 있던 떡과 청주를 꺼내어 신도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떡과 청주를 마극종 신도들이 하나씩 받아서 영(領)하는데, 떡을 입에 문 뒤 한 모금 분량의 작은 잔에 담긴 청주와 함께 삼키는 그 모습의 모티프가 어디서 나왔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