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57
그들이 겨우 살아 있었던 그때만 하더라도 차마 똑바로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광경이었는데, 그들을 망자로서 만났더라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올리비에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저도 모르게 나의 뒤편에 바짝 붙어 섰다.
“가장 곤란한 것은 소통의 문제입니다. 난파자들의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말 사이사이에 짤막한 아랍어 단어를 내뱉기는 하나 그들 역시 아랍어가 서툴어 보였습니다.”
여기부터는 내가 개입할 차례였다.
“제가 아는, 저와 함께 엥겔스 호에 승선했던 인류학자가 두 사람 있습니다. 최주민 동지와 나타샤 안드레예바 동지입니다.”
“그들을 통해 저들과 소통이 가능하겠소?”
“가능성은 있습니다. 난파자들 대부분이 흑인이었고, 이곳이 동아프리카 인근의 수역임을 생각해 볼 때 아마 저들의 언어 역시 동아프리카의 반투어군(스와힐리어가 대표적인 언어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언어군)이나 인도양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마다가스카르부터 태평양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언어들이 속한 어족)에 속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두 사람은 각각 동아프리카 지역과 인도양―태평양 지역을 전공한 학자들이다.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보시죠. 아마 머지않아 제한적 수준의 소통 정도는 가능해질 겁니다.”
“흠… 알겠소. 그 조언에 따르겠소.”
이징옥 사령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정남 선장이 김민혁 동지에게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한다. 1등 항해사가 급히 이징옥 동지의 집무실을 나섰으니 이제 곧 엥겔스 호에도 이에 관한 소식이 퍼지리라.
회의가 끝난 뒤 착잡하고 복잡한 기분으로 나와 올리비에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어두워진 바다는 이전처럼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저 너머 어딘가에는 고통이, 어딘가에는 불운과 부조리 속에서 힘겹게 삶을 투쟁처럼 살아갈 이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파 왔다.
그러나 전날에 밤을 새워서 그런지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나를 곧 수마(睡魔)가 덮쳐 왔다.
나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잤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최주민 동지가 우리 둘이 묵는 숙소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뛰쳐 들어온 그는 의자에 앉을 생각도 못 하고 불안하게 서성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빠르게 소통이 이뤄졌습니다. 저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고전적 형태의 스와힐리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는 서로 제각각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더군요.”
그가 무거운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으나, 인류학적 지식이 깊지 않았던 나는 아직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최주민 동지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쉰다.
“…분명 동아프리카 권역 어딘가에서 모인 이들은 맞겠지만 교역어로서 스와힐리어를 익혔을 뿐 결코 같은 지역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양 상태, 옷가지를 보건대 높은 신분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그들은 표류 전부터 영양실조 상태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야 사태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내가 입을 벌리자 올리비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여 나와 최주민 동지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최 동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마구잡이로 잡혀 온 이들입니다.
노예로서 말입니다.”
* * *
/ 작가의 말
이 에피소드는 아마 내일로 마무리될 듯합니다.
+‘바다는 살아 있는 무한’이라는 표현은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 속 네모 선장의 대사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쥘 베른은 해당 대사를 프랑스의 작가인 쥘 미슐레의 ‘바다’에서 가져왔습니다.
+듀공의 사냥은 ‘해저 2만 리’에서의 한 에피소드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아로낙스 박사와 함께 신비로운 잠수함 ‘노틸러스 호’에 납치된 그의 조수 콩세유와 고래잡이 네드는 듀공을 두고 대강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콩세유: 듀공은 멸종 위기종인데, 과학을 위해 살려 두는 게 맞지 않겠나?
네드: 식탁을 위해 잡는 게 낫다.
그리고 잡아서 먹습니다.
이번 화와 지난 화는 해당 장면에 대한 비틀기였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전―남양항로 1만 리 (8)
이제 다른 모든 문제들, 말라리아의 퇴치를 위해 잠자리를 방생하는 일이나 듀공들을 구원하는 일은 모두 잠시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 대신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 비쩍 말라서 소금물에 불어 죽어 가던 노예들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리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신의 먼 형제에게, 벗에게 그리 가혹하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시금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이번의 인원수는 전번의 8명보다 두세 배로 불어나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당연히 디에고 가르시아의 통치자인 이징옥과 이아구였다. 이징옥은 바위처럼 단단한 얼굴로 그 자신의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이 동요하는 무리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고, 이아구는 적극적으로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 가며 이 공황 상태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두 사람의 분투로 논의를 위한 분위기가 잡히자, 회의의 포문을 연 것은 아까까지 바삐 움직이던 이아구였다.
“여러분께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보고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태 파악에 도움을 주신 최주민 동지, 안드레예바 동지께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며칠 밤낮으로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많은 부분 답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목례함으로써 이아구의 감사 인사에 화답했다. 이아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빠른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짚어 주신 로밀리 동지에게도 역시 감사를 표합니다. 동지의 지시로 인하여 많은 수고와 시행착오를 생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던지라 고개 숙이는 이아구에게 나 또한 급히 고개를 숙였다. 특유의 밝은 활기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이 그토록 진중하게 바뀔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아구는 몇 초 뒤, 날 향해 숙였던 몸을 일으킨 뒤 말을 이었다.
“우선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정보는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기다란 지시봉으로 벽면을 두드렸다. 인도양 서부 일대, 그러니까 디에고 가르시아로부터 모리셔스 제도와 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등을 포함하는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는 굵고도 선명한 붉은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프리카 어드메로부터 출발하여 시원스레 죽 뻗어 나가던 선은 중간부터 갈피를 잃은 산책자처럼 인근 해역을 이리저리 헤매이다 곧 우리가 있는 디에고 가르시아 인근까지 동진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선은 끊겼다.
독자들께서도 쉬이 짐작하실 수 있었겠지만 그 붉은 선은 우리가 발견한 난파자들의 이동 경로였다.
“보면 아시다시피 일단 저들의 항해는 여기서 끝납니다. 우리 디에고 가르시아섬으로부터 서쪽으로 그닥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근해였죠.“
그는 지시봉으로 붉은 선이 끝나는 점을 짚은 뒤, 그것의 시작점을 향하여 역으로 훑어 나가며 말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표류 기간은 약 20일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인원들이 부유하는 뗏목에 매달린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저체온증에 걸릴 때쯤이면 돌아가면서 뗏목 위로 올라가 몸을 말리고 햇빛을 쪼이면서 수명을 연장한 듯합니다.
갈증은 주기적으로 내리던 스콜을 통해 해결하고, 운동량을 최소화하여 해류를 따라 움직이면서 탈진의 위험 역시 줄였습니다. 그리하여 증언에 따르면 표류자 중 두세 명을 제외하고서는 모두가 구출에 성공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박수를 쳤고, 누군가는 못내 구해 내지 못했던 그 ‘두세 명’에 대한 언급이 마음에 밟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올리비에는 역시 후자의 부류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배가 난파되기 전에는 아마 세이셸 제도를 경유하여 인도 케랄라(인도 남부의 지역, 대표적인 도시로 코지코드가 있다.) 지역을 향해 항해하던 듯합니다.
해적들을 만나 난파 이후에는 적도 반류(赤道 反流, 남적도와 북적도 해류 사이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흘러오다 디에고 가르시아에 닿게 됩니다.”
이아구의 지시봉이 그렇게 셰이셸 제도에 가 닿고, 다시 그 끝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거슬러 간다.
“그리고 이들의 전반적인 증언들을 취합할 때, 항해의 시작점으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곳이 바로 여깁니다.”
그가 가리킨 지도상의 한 점은 남위 5도선에서 살짝 아래, 동경 40도선에 거의 걸치는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동아프리카의 해안으로부터 약 3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 나는 그곳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펨바(Pemba)섬의 남쪽에, 탄자니아의 동쪽에 위치한 열대의 향신료 섬이다. 동인도양의 진주이자 잔혹한 노예 무역으로 번성한 무역 도시이며, 1,000년도 넘는 시간 동안 돌들이 켜켜이 쌓여 건설된 유서 깊은 시가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곳이다.
그곳을 선주민인 흑인들은 웅구자(Unguja)섬이라 불렀고, 페르시아인들은 검은 해안이라는 의미의 잔지바르(Zanzibar)라 하였다.
“아마, 동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 노예 무역으로 끌려온 이들이 잔지바르에 집결하여 출항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저 동아프리카 내륙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들의 고향 마을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집으로 되돌려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 지점에서부터는.”
여기서부터 이징옥 동지가 입을 열었다. 그의 굳건하던 얼굴에 문득 피로감이 감돌았다.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소.”
“이징옥 동지께서는 근방 무인도에 정착시킨 뒤 저들의 항산(恒山)을 마련해 주자 제안하셨습니다. 인근에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 섬들을 많이 발견하였으니 저들의 정착지 삼을 만한 곳은 많습니다. 저는….”
이아구는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씹다가, 곧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연다.
“잔지바르로의 송환을 제안하였습니다.”
“뭐라고요!”
자리에 앉아 있던 올리비에가 저도 모르게 일어나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제야 올리비에는 자신이 무슨 무례를 저지른지 깨달았지만 다시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그, 그건 분명히 잔인한 일입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 자부하고 또 아, 어, 사회주의자임을 자칭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런 짓을….”
“나 또한 생각은 비슷하오.”
올리비에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에도, 이징옥 역시 그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저들은 단지 말업에 종사할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 가장 가까이해서는 아니 될 분야에 몸담고 있소. 양민을 붙잡아 그 일신의 자유를 점탈(占奪)하고 노예로 만들어 부리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작자들이오. 어찌 저들과 교분을 나누고 대화를 시도한다는 말이오?
차라리 창칼과 총포로 크게 싸움을 벌여 저들의 악행을 다스리고 억류된 이들을 풀어 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여러분, 나의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이아구가 이징옥과 올리비에의 말을 자르며 좌중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손동작을 취했다.
“저 또한 노예제와 노예 무역에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저들의 행태가 어찌 되었건 몹시 비도덕적이라는 바는 의심할 여지 없으며 비록 우리 두 사람이 제국주의의 오명을 쓸지 몰라도 그 굴레를 끊기 위하여 개입할 수도 있을 터입니다. 하지만.”
주지할 사실이 있다는 듯 이아구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우선 우리의 목적이 노예들의 해방에 있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그리고 유물론자로서 해당 지역의 경제 구조 또한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잔지바르를 깨부수고 그곳을 점거하며 일대의 해안을 모조리 봉쇄한다 하여 노예 무역이 끝나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이곳을 무역항으로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의 상선들이 여기 디에고 가르시아를 비롯한 소련의 기지들을 중간 기착지로 삼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해적들을 소탕하니 소련과 친교를 맺고 싶어 하는 한편, 잠재적 경쟁자들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들과의 교역 협정을 통해 노예 무역을 체계적으로 말살해 버려야 합니다. 다른 무역과 산업을 키우든 뭘 하든 말입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저들과의 친교가 필요합니다. 물론 저 난파자들을 그냥 송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도 노예 신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자유민의 신분으로 데려갈 것이고, 저들에게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르치든 뭘 하든 하여 잔지바르의 노예 무역에 또 한 가지 불안정 요소를 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예 출신의 부유하고 강력한 뒷배경이 있는 사회주의자들이란 요소 말입니다!”
이아구 동지가 설명을 보태자 반발은 줄었으나 불편한 기류가 감돌았다. 특히 이징옥 동지는 여전히 이아구의 방안이 노예상들을 징치하지 못하고 그저 ‘업종 변경’을 통해 떵떵거리도록 만들어 줄 것이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징옥 동지의 가장 큰 난관은, 이아구 동지의 말에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더하여 이미 장기적으로 소련이 해군력을 투사해야 할 곳이 많다. 이미 인도네시아 교역로의 보호자를 자청하였고, 일대에서의 외교적 영향력 유지와 마극종 신도들의 보호를 위해 끊임없이 자원을 들여야 한다.
이 상황에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그리고 동아프리카 일대의 상인 세력을 모조리 적대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 그 타협을 모르는 것 같던 이징옥 동지 역시 결국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끝이었다. 결정은 이미 분위기만으로도 마무리되었다.
“잔지바르로 갑시다. 기선 제압부터 해야 하겠소.”
이징옥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항해의 준비는 빠르게 끝났고, 비전투용 함선인 WRS 프리드리히 엥겔스 호와 더불어 디에고 가르시아에 정박해 있던 KCS(Kingdom of Chosŏn Ship) 광제(光濟)호가 동반했다.
두 척의 선박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 인류학자 동지들은 난파자들과의 더듬더듬 대화하며 사태의 정황을 밝혀 내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전달하여 애썼다.
“우리가… 당신들… 돌려보낸다….”
“아, 안 돼! 제발! 자비를!”
그리고 마침내 낯선 언어로 해당 문장을 말했을 때 그들은 다시금 경악하였으나, 곧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다들 서로의 마음을 추스리는 듯했다. 결국 그들 역시 고향에 대한 기대는 버린 채였다.
“…응구자섬(잔지바르섬), 간다.”
그들은 차라리 고향과 가까운 잔지바르로 가겠다고 결정했고, 당사자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곧 엥겔스 호와 광제호는 물살을 밀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결연한 표정에 나 역시 마음이 단단해졌다.
우리는 숭고한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잔지바르의 노예 무역을 끝장내러 간다.
나는 툰 페락과의 조우 이후 다시금 눈앞에서 겪게 된 외교적 대사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언제나 인류애와 정의를 향한 열정에 토대를 두지 않은 어떠한 행동도 행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다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며칠 동안의 항해 속에서 공기와 물결이 스치는 소리마저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올리비에 역시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노예상들, 우리가 듀공 사냥에서 마주쳤던 그 끔찍한 광경을 빚어낸 인신매매꾼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망설임과 회의감이 우리를 지배하기도 했다.
디에고 가르시아에서 잔지바르까지의 3천 킬로미터 거리가, 예민과 긴장 속에서 마치 두어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여정의 마지막이 될 날. 나는 다른 인류학자들과 함께 표류자들과의 대화에 참가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점차 매끄러워져 갔고, 손짓 발짓을 통해 우리들끼리의 제스처도 만들어졌다.
안드레예바 동지와 최주민 동지의 분투 끝에 그들이 표류하게 되던 상황의 자세한 묘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올리비에는 나의 조수로서 그 모든 인터뷰 내용을 기록, 정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해내어 두 동지들도 모두 그의 성과에 만족하였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죠?”
안드레예바 동지가 난파자들과의 인터뷰 도중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미간에 손을 올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제가 아시아의 해양사 역시 전공했다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태평양과 인도양이 제 전공이니까요.”
“물론입니다. 동지의 박학함은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저들이 묘사하는 ‘해적선’들의 형태와 작동이 조금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 시기에 이 해역에서는 보일 수가 없는 뭔가였습니다.
그 해적선들이 동원해 낸 화력이 멀리서 이들이 탄 배를 산산조각 냈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한 거리와 선종(船種)을 따 이 근방에서 그렇게 강대한 화력을 갖춘 선박이 이 시대에 있을 리가….”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이날이 잔지바르까지의 항해가 이어지는 마지막 날이었다.
하필 기적 소리가 안드레예바의 말을 끊으며 울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부우우우우!
“저기! 잔지바르다!”
누군가가 뱃전에서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엥겔스 호의 고물을 향하여 몰려갔다. 과연 저 멀리 작열하는 아프리카 대륙과 그 앞에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섬이 보인다. 너무도 가까워 육지의 일부처럼 보였으나 이내 그 사이의 해협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들이 줄줄이 잔지바르섬의 해안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그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섬과 바다가 맞닿는 부분마다 불꽃이 치솟아 오르니 마치 아프리카라는 왕이 재와 연무로 된 가시 면류관을 쓴 채 피 흘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비명 지르고 있었다. 조롱당하며 십자가에 매달리는 가운데, 절규하고 있었다.
―“해, 해적이다!”
―“지금 어서 대피하십시오! 비전투 인력들은 갑판 안으로 진입하십시오!”
“오, 맙소사….”
“교수님,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저는 소련 해군 소속이라 갑판에 남아야 합니다!”
“올리비에!”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총 쏘는 일이 낯선 16살 소년은 갑판에 남아 해적들을 조우하고, 사격과 승마가 취미이며 그보다 열 살은 더 나이 먹었을 어느 박물학자는 비겁하게 도망쳐야 한다니.
하지만 군인이 아닌 이가 갑판에 있어 봤자 걸리적거릴 뿐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급히 하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복도와 계단에는 급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나와 같은 소수의 비전투 인력들은 선창마다 다닥다닥 달라붙어 전황을 알고자 안달이 났다.
“저기! 해적선이 옵니다!”
모두가 두려움과 경악, 긴장감에 가득한 눈으로 눈앞에 드러난 적들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그때 나 역시 두 눈 가득 그 낯선 배들의 형태를 보았다.
그리고 그 돛에 그려진 문양도.
모두가 적들의 정체를 두고 술렁였으나 나는 역시나 답을 알았다. 그들이 모두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페르시아도, 아라비아도 아니다. 인도나, 에티오피아나, 이집트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세게 주먹 쥔 채 다시 내려왔던 계단으로 달려 나갔다. 주갑판으로 올라오니 물살이 튀고, 선체에 잠시간의 진동이 일었다. 투사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어찌 되었건 우리가 피격당한 것이다.
나는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도록 애쓰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벤 투락과 함께 거닐던 카페와 흡연실이 있던 층에서 올라, 다시 그와 송별 연회에서 눈물 어린 이별을 했던 홀을 지나쳤다.
그리고 꼭대기 층의 선교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랐다. 수병들의 제지에도 나는 고래고래 선장을 만나야겠다고 소리치며 앞길을 뚫었다.
그렇게 진입한 선교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박정남과 이징옥이 무언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장교들은 발포를 위해 적들의 위치를 확인해 기록했고, 곧 숱한 쪽지와 고성이 순간순간의 정보들을 실어 날랐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나는 외쳤다.
“선장 동지! 사령관 동지!”
두 사람은 나를 향하여 돌아보았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는 단 한마디로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적선에 달린 저 문장, 고리타분한 잉글랜드 귀족가 출신 노인들이 내게 주입했던 수백, 수천 가지 문장(紋章)들 중 하나.
아비스의 십자가(Cruz de Aviz).
“적은 포르투갈입니다!”
본래의 역사보다 20년에서 30년은 이르게, 유럽인들은 당도했다.
노예와 향신료와 사도왕을 찾아서.
거리의 전투 (2부 시작)
세심하게 고정된 활자들 위로 잉크가 묻고, 다시 종이가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흰 글씨에 까만 것들이 묻어 나오니, 그렇게 수십 장, 수백 장이 찍혀 나온다. 마치 뜨겁게 달궈져 발사되는 총알처럼 빠르다.
그리고 그것들이 곧 원산의 각 거리의 상점 가판대에 발사되고, 시민들의 뇌리에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힌다.
―“목도하라! 저 화마와 비극을 보라!”
―“나는 감히 쓴다. 이번에 잔지바르에서 타오른 화염은 단지 단 한 번 일어나고 말 전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제 곧 다가올 제국들의 시효이며, 세계를 불태우려는 야욕의 시작이다. 인민들이여, 숭고한 의무가 그대들을 부르니 무기를 들라!”
“오늘자 ‘라 리베르테’의 기사 내용이 이러하였소! 참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소?”
한 중년이 광장에 설치된 단상에 올라 외친다. 곳곳에 트로츠키와 스피리도노바의 초상화를 든 시위대가 보인다.
“우리가 한때 멋모르고 비난했단 이아구 동지와 이징옥 동지는 숭고하고 인류애적인 열성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이어 가고 있소. 그들은 잔지바르를 구했고, 동시에 아랍 노예상들을 구금해 노예들을 해방했소. 이제 쑥대밭이 된 잔지바르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소!”
“맞다! 맞다!”
“식민주의의 불길을 막아 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두 동지의 노력을 돕는 현 정권을 적극 지지해야 할 것이오!”
“옳소!”
“오히려 이 상황에서 정권을 흔들기 위해 비과학적인 헛소리들을 지껄이는 이들더러 나는 식민주의의 벗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소!”
“우와아아아아아!”
아주 오랜만에 펼쳐진 정치적 목적의 가두 행진. 붉은 깃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성난 표정의 인민들이 몰려든다.
“억압받는 이들에게 연대를!”
“혁명과 자유를!”
잘 정돈된 구호와 깃발, 플래카드 외에도 그들은 효과적인 설득 수단들을 갖추고 있었다.
“본질을 가리지 말라! 트로츠키의 노선에 반한다 하여 우리가 어떻게 식민주의의 벗이란 말인가!”
“어떻게 고작 15세기의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좀 돌았다고 그것을 식민주의의 시효라고 볼 수 있겠소? 자신들이야말로 비과학적이기 그지없는 주장을…!”
“그래서 유럽을 무슨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인가? 몽골처럼? 뭘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