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60
통일된 당론 따위 존재조차 불가능했고, 누가 지도자이고 누가 누구의 지휘를 받는지도 불명확하다.
“그야말로 악몽 같은 조직이었다네!”
“그렇군요, 동지.”
스물세 살의 몸으로 악덕 관료 루제노프스키(Луженовский)를 쏴 죽일 때까지만 해도, 젊고 열정적이던 스피리도노바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그 뒤로 러시아 농민들의 성녀 소리를 들으며 정치적 거물로 떠올랐고, 10년 넘게 감옥에서 썩다 차르가 물러나던 1917년 2월에야 바깥의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10여 년 동안의 기다림에도 러시아는 나를 잊지 않았다. 농촌으로 연설을 나가면 열광에 찬 농민들이 몰려들어 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스피리도노바는 인생에서 몇 안 되게 감옥 밖에 있던 그때 그 순간을 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감각이 들 때쯤이면 모든 게 잘못되기 직전인 법이다.
몇 달 만에 정권이 휙휙 바뀐다.
‘사회’‘혁명’당이 혁명하자는 사회주의자를 때려잡는다.
당에서 제일 밍숭맹숭하던 케렌스키가 러시아 총리가 되더니 전쟁이고 뭐고 말아먹는다.
당내에서는 당장 다시 혁명하라는 놈부터 자본주의 좋다는 놈들까지 왁자지껄하니, 볼셰비키들과 함께 10월 혁명에 가담하고 바로 분당했다.
그 뒤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헌 의회 선거에서는 분당 사실이 반영 안 된 투표용지가 배포돼서 표를 눈앞에서 우파들에게 도둑맞는다든가.
볼셰비키에게 봉기를 일으키다 패배해 다시 10년 넘게 감옥에서 썩었다든가.
“그렇게 해서 원산으로 오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내가 사회혁명당에 몸담고 혁명가로서 자각해 온 그 시절 동안 배운 게 뭔지 아나?”
“역시 인간의 의지와 숭고한 신념은 감옥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듣고 보니 볼셰비키 혁명은 너무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하던 사회혁명당을 숙청할 수가! 어떻게 동지같이 헌신적인 혁명가를 그리 캄캄한 쇠창살 속에 가둬 둘 수가!”
“…뭐?”
스피리도노바는 잠시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 보게나.”
“네?”
“캄코프 동지!”
“부, 부르셨소, 동지?”
스피리도노바는 멀리 창가에 알짱대던 보리스 캄코프 동지를 부른다. 한때 함께 좌파 사회혁명당을 창당한 동업자 관계.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안절부절못하는 하급자 같다.
“지난 분기 양조장 수익률 그래프 좀 정리해 오시오, 30분 안에.”
“그, 그래프 말이오? 지금부터 30분 안에 자료를 다 취합하고 하는 건….”
“그대가 자금 담당 아니었소? 만일 어렵다면 담당이 아니게 해 줄 수는 있소.”
“당장 정리해 오겠소!”
급히 그는 회의실을 나선다. 마구 소리치는 걸 보니 휘하 보좌관들을 닦달하는 것 같다.
“내가 캄코프 동지와 ‘민주적으로’ 토론했으면 얼마나 걸렸겠나?
아마 그래프가 필요하냐 여부만 가지고도 15분은 다퉜을 것 아닌가? 그리고 짜오는 데는 또 한참 걸렸겠지.
이게 ‘효율’일세.”
‘민주적인 다당제를 위해’, ‘트로츠키에게도 합리적인 반대파가 필요하지 않겠냐’며 슬슬 꼬드겨 트로츠키 휘하에서 몰래 빼내 온 블레어의 입이 떡 벌어진다.
“저, 저는 정치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동지!”
그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귀는 얇고 생각은 좁은 사람 특유의 경탄하는 눈빛으로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한다. 벌써 쉰은 넘은 중년을 데리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기억하시게. 회의하느라 예닐곱 시간 동안 말만 빙빙 꼬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조직은 무조건 부숴 버리거나 뛰쳐나와야 하네.”
“알겠습니다, 스피리도노바 동지!”
“저 쇼비니스트들에게도 곧 서신을 보낼 걸세. 지금 당장은 우리가 자기들을 버렸다며 길길이 날뛰지만, 저것들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놈들이니 기어들어 오겠지. 적당히 거리만 두고 이용할 버리는 패로는 딱이네.”
그렇게 말하며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은 스피리도노바는 몸을 일으켜 한쪽 벽에 그려진 온갖 도표와 시간표, 화살표들을 바라본다.
그 난잡해 보이는 그림의 제목은 ‘1482년 사회혁명당 집권 계획’.
딱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다.
“료바와 내가 둘 다 몇 년 안 있으면 저세상 갈 나이란 말일세….”
“아닙니다. 아직도 정정하신걸요.”
“정정한 건 지금 시위대를 이끄는 자네 딸이고. 일흔 먹은 노인한테 쓸 말이 아닐 것 같네만.”
나와 료바, 10년 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골로 가 있을 터.
“블레어 동지, 한양에서 올라올 때 부탁했던 무장상선은 잘 준비되고 있는 것 같았나?”
“예, 그렇습니다! 부산포 쪽 조선소에 최금옥 동지가 발주를 넣어 따로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최금옥 동지가 사비로 마련했으니 자유롭게 운용 가능할 겁니다!”
“좋아. 아주 좋아….”
유럽행 자체를 기획한 게 우리 사회혁명당이다. 지금 화두가 된 대외 정책에 있어 당연히 저들보다 빠르고 치밀하게 의제들을 내놓고 지지를 끌어모을 수 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집권은 못 해도, 언젠가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를 이겨 봐야 하지 않겠나?
언젠가는….
그 많던 사회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
켈틱 1호는 사실 정부청사로서 문제가 많다.
물론 지금이야 해안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니 사무 하나 보러 쪽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바보 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럼에도 선박이라는 공간 자체가 지니는 한계가 넘쳐 났다.
좁고 길게 뻗은 수많은 계단, 복잡한 내부 구조, 사무실로 개조하기에는 협소한 객실 공간 등등 세려고 하면 얼마든지 불편한 점을 세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상징성도 있고, 지금까지 청사로 써 왔다는 관성도 있기에 국가 원수의 공식 관저이자 원산 소비에트 대회장, 연방 인민위원평의회 회의장 등으로 활용되고는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모든 행정 업무를 켈틱 1호에서 처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3층 붉은 벽돌 건물들이 자리 잡아 대부분의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 정부 최상위 기관의 활동이나 상징적인 행사 외에는 행정작업 거의 전부가 이 ‘원산 중앙청’에서 이뤄진다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어지는 건 매일같이 한가로운 일상이다. 건국 초기의 혼란이나 지저분한 행정 관제들, 조선과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협업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며 마침내 원산의 공무원들은 안정기를 맞이하였다.
20대부터 어쩌다 보니 서류를 만지게 된 어느 네덜란드 청년이 이제 머리가 벗겨진 아버지가 되었고, 노조 간부로서 그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던 깡마른 중년인도 이제는 이가 흔들리는 노인이 되어 간다.
이제 웬만한 소란에도 그들은 감당해 낼 자신이 있었다. 무려 한 나라의 건국부터 온갖 사건을 마주쳐 온 그들이다. 이제 웬만한 일은 그들의 눈꺼풀조차 깜빡이게 할 수 없다.
…고 생각했던 네덜란드 출신 민원과 간부 얀센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문서를 받게 된다.
“그… 이런 법이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소련 헌법을 다시 보십시오.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여기, 여기 안 보이십니까?”
민원인은 끝내 답답하다는 듯, 아예 사무실 한편에 꽂혀 있던 법전을 끌고 와서 펼친다.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예?”
―“인민은 자유로이 정당을 설립할 수 있다.”
“그러니 저희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창당을 선언하더라도 별문제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있던 줄도 몰랐던 문서 양식,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사문화되어 가던 조항,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의기양양하게 흔들며 그에게 폭탄을 던지고 있는 폴란드계 원산인 청년.
“그, 잠시만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하기는 할 텐데, 전례가 없는 일이라 제 윗선까지 보고를….”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얀센이 후다닥 뒤쪽으로 뛰쳐나가니 민원인으로서는 팔짱만 끼고 기다릴 뿐이다.
졸속으로 마련된 헌법, 이곳저곳에서 대강 구절들만 따와서 만든 헌법, 그중에서도 어차피 소비에트 체제가 공고해졌으니 사문화되어 있던 정당 창당에 관한 조항.
모두의 기억 너머로 망각되어 가던 그 조항을 누군가가 되살려 주었다. 공무원들은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고대 유물을 보듯 민원 사항을 듣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기 시작한다. 점차 수군거림과 웅성거림이 커져만 간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게 무슨 불씨를 키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이 폭탄의 서두는 조금 앞으로, 이른바 ‘쇼비니스트’들 사이의 끝장 회의로 거슬러 간다.
“젠장! 당신네들은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 줄 알기나 합니까? 저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리 조직 기반을 다 파먹으면서!”
“결국 우리가 얻어야 할 건 뭐겠습니까? 의석입니다. 조직입니다. 조선인들과 학생들이 우리에게 가졌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하나의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의견이었다. 조직을 정비하고, 각 소비에트 내에서 대표직들을 차지해 나가면서 소비에트 대회 의석을 하나하나 늘려 나가자는 노선.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원산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들은 분파주의나 쇼비니즘이라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 지금껏 취미 모임 같은 작은 동아리로 모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문제는 그런 비공식적 조직들 속에 옹송그리고서 트로츠키에게 깔짝깔짝 불만을 토로하니, 젊은 층이나 조선계 인사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저 비겁하고 비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에 딱히 반박할 논리도, 의지도 갖추지 못한 채 그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목소리들.
냉정하게 보자면 딱 그 정도 수준의 조직들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 준 무능하고 음습한 모습이 인민 대중들로 하여금 우리를 경멸하게 만들었습니다!”
“옳소! 우리도 이제 공식적인 조직을 꾸리고 체계적인 입장을 세워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하오!”
그런데, 여기에 찬성하는 면면을 보면 또 재미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폴란드 시계 수리공, 아일랜드 제철공, 스코틀랜드 방수용 직물 제조업자 등등….
대부분 아직 잃은 게 없고, 앞으로 잃을 것은 많은 이들이었다.
각자의 작업장 내에 꾸려진 소비에트에서 선거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이들.
예컨대 방수용 직물 산업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의 숙련된 노동을 빼놓을 수는 없기에, 그들이 아직도 새로 유입된 노동자들까지 포섭해 내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런 이들은 손쉽게 소비에트 대표를 선출하고 지켜 낼 수 있다. 장내에서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꾀할 수도 있고, 목소리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사상누각이고 이룰 수 없는 꿈이오. 이미 판이 저들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는데 알아서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고? 그런 투쟁 방식으로 역량을 소모하기보다는 지금처럼 가두시위 중심으로 여론을 흔드는 게 낫소!”
“저 말이 맞소! 우리는 기존의 장 바깥에서 투쟁해야 하오!”
그러나 운이 나쁜 이들도 있었다. 반정권 성향의 시위대 모두가 조직적 기반이 강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로 가장 돈이 되는 업장들을 사회혁명당에 빼앗긴 이들, 그리고 숙련공이 아니라 빠르게 조선인들에게 소비에트 내에서의 주도권을 넘겨준 이들이었다.
“더 이상 가면 우린 모두 끝장입니다! 지금 원산의 양조장은 반 이상이 저들 겁니다!”
“옳소! 저 새끼들이 자금원이 되어 주던 사업체들은 다 가져갔단 말입니다!”
특히 당장 게거품을 물고 날뛰는 것은 아일랜드계 양조업자들.
“지금 우리가 무슨 상황인 줄 알기나 하시오? 우리 양조장 경영권이 그냥 통째로 사회혁명당 계열에 넘어가게 생겼다고! 지금 그런데 조직을 보전하고 어쩐다는 한가한 이야기가 나와?”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고, 그렇기에 해당 커뮤니티에 기반을 둔 생산자조합들이 꽉 쥐고 있던 산업, 그리고 전통적으로 돈줄이 되는 산업.
바로 술이다.
이렇게 반정권 세력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도, 양조장 쪽의 소비에트들이 선거 이후 남겨준 자원들 덕분이다.
또한 숱하게 흩어진 펍과 바를 비롯한 주점들이 이들이 일상적으로 모이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더욱 중요했다.
“말해 보게! 우리보다 여기서 기부금 더 많이 낸 사람 있나? 아니면 우리보다 더 성과를 낸 양반들은 있나?”
“우리 생산자조합에서 수익을 모아 십시일반 기부금이라도 안 댔으면 이런 회의실이 갖춰지기라도 했을 것 같아?”
“뭐… 그거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은. 언제까지나 옛날 얘기에 빠져 있을 겁니까?”
“뭐라고? 옛날 얘기? 지금 여기를 지은 게 10년도 안 됐는데!”
“이 나라가 건국된 지도 20년밖에 안 됐습니다. 2년만 지나도 건국 이래 십분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요성도 업장의 주도권이 전부 스피리도노바와 사회혁명당에 넘어간 이상 옛말일 뿐이다.
양조장인들이 호소해도 이미 저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받을 후원금은 다 받았으니 상관없다는 배짱 장사.
그나마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양조업자들도 피가 말릴 지경이다.
이게 다 사회혁명당원들이 은근 슬쩍 그들 중 일부에게 접근하고부터 생긴 문제다.
핵심 디스틸러(Distiller)와 브루어(Brewer)들에게 이런저런 보상을 약속하고, 그 휘하에는 조선인들을 꽂아 넣어 기술을 전수받은 뒤 다른 기술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게 되면 협력자가 아닌 아일랜드계들을 모조리 밀어내고 새로 소비에트 대표를 선출한다.
눈앞에서 조직적, 경제적 기반을 도둑맞으니 모두가 사회혁명당의 악독함에 치를 떨면서도, 이제 자신들이 끝장났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스피리도노바가 당신네들은 가만히 놔둘 것 같소?”
“그래! 우리 양조장까지 먹혔으니, 자네들도 결국에는 작업장에서의 영향력을 뺏길 것이네!”
“무슨 소리! 사회혁명당에는 지금 그럴 만한 역량이 없습니다! 당신들로부터 양조장을 빼앗는데 대부분의 정치적 자원을 소모했으니 이제 숨 고르기에도 벅찰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것도 양조업계에서 조선인 조직화에 무관심해서 생긴 결과 아닙니까? 결국 조선인들이 새로 대거 등용되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당한 게 우리가 무능해서란 말인가?”
“그것도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겠죠. 당신들 세력권 챙기는 건 당신네들 일 아닙니까?”
“뭐라고!”
그렇게 입장 차가 벌어지니 서로 원색적인 비난도 오가기 시작한다.
그건 슬슬 서로가 중요한 사실을 지각했기 때문도 있었다.
“제기랄! 내가 이런 새끼들이랑 협력을 하겠다고 그 고생을… 나는 일어나겠네!”
“나도 일어나겠네! 이건, 우리 아일랜드계와 스코틀랜드계 전체에 대한 모욕이야!”
“그러면 당신들 말대로 장외 투쟁해서 얼마나 잘되는지 한번 봅시다!”
이미 이해관계가 갈라졌다.
이미 몇몇 소비에트들을 장악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과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양자 중 한쪽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나머지 한쪽이 심대한 손해를 입어야 한다.
공식 조직을 설립하는 노선대로 간다면 거기에 역량을 쏟느라 양조업자들과 비숙련공들은 영원히 찬밥 신세로 남아야 하고, 반대로 장외 투쟁을 택하면 지금 소비에트를 움켜쥐고 있는 숙련공들은 그나마 가진 조직 기반을 흔들며 리스크 높은 정쟁에 나서야 한다.
결국 그중에서 열세인 이들은 떠나고, 우세한 이들만 남았다. 이제 그들은 조직의 구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쇼비니스트라고 비난받았으니, 이제 민족주의적 색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도 공격에 방어할 수 있을 만한 이론적 논거가 필요하네.”
“그건, 지금 만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참고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만주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민족주의 조직이 성장세입니다. 일단 해당 조직들을 견학하면서 친분도 쌓고….”
일단 한 번 뭉치기가 힘들었던 이들이다. 드디어 공동의 이해관계로 모여 논의가 시작되니 시작이 어려웠지 그 뒤로는 술술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봉착한 문제 한 가지.
“…그런데 우리가 조직을 세운다 해서 뭐가 달라지기는 하겠습니까? 조직 자체가 분파주의 취급받고 좌초되면 어쩝니까?”
“당장 소비에트들마다 의원을 내고, 다시 그들을 묶어서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법적으로 보호도 받았으면 좋겠고.”
“정당 말인가? 뭔가 엄청 길게 표현하는구만그래.”
그렇게 40대 이상들이 낄낄거리며 웃는데, 발언자를 비롯한 20대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어… 정당이 뭡니까?”
“뭐?”
그렇다. 생각해 보니 지난 20년 동안 정당이란 게 없었다! 한 서른 살 이하의, 이론 공부 귀찮아하던 인간들은 모조리 쩔쩔매고 있다!
“자, 이게 [정당]이란 거다. 이렇게 하면 당원들도 중앙 정치에 개입할 수 있지.”라고 말하면, “에엣? 대단하잖아, 젠장! 상상도 못 했다구!” 같은 반응이 돌아오니 시간 여행 이전을 기억하는 구세대들은 왠지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트럭 대신 어뢰에 맞았으니 그게 맞기는 하다.
* * *
한편, 버림받은 이들은 길을 잃고 떠돈다.
“저 새끼들은 정당을 차린다는데? 허, 끝까지 우리는 안 부르는군. 트로츠키랑 경쟁해서 얼마나 잘나가는지 한번 보자고.”
“그래! 이제 우리는 돈줄도 아니고, 의석도 못 준다 이거지! 그런 놈들이랑 뭘 같이 큰일을 도모하겠나!”
“우리 같은 세력이 장외에서 투쟁하면서 정치를 건전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나? 저런 타협 분자들과 빠르게 분리되다니 아주 잘한 일일세!”
“맞네! 우리가 뭐가 부족한가!”
자금, 인력, 조직, 정치력, 인물 등등.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투쟁함으로써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진정한 비타협적 야당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우리는 트로츠키, 스피리도노바, 그리고 그들에게 굴복한 투쟁가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대안적 세력을 만들어야 하네!”
그리하여 만들어진 그 이름도 거창한 신당 ‘제3지대’(1지대는 트로츠키와 그 따까리들이고, 2지대는 변절한 민족주의자들이니).
조직도 잃고, 작업장 내에서의 주도권도 잃고, 오직 원한으로 똘똘 뭉친 조직과 숙련된 기술만 남은 이 제3지대의 회원들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트로츠키에게는 당연히 숙이고 들어갈 수 없다. 초장부터 아일랜드 공산당이니,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니 하는 자신들 조직을 모조리 박살 낸 인간에게 숙여 버리면 이들이 뭉칠 이유는 또 뭐였다는 말인가?
한때 동지였으나 그들을 버린 놈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언젠가 힘을 합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