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83
“좋네. 그 일은 내가 처리할 터이니 이아구 동지와 로밀리 동지는 좀 쉬게. 고단한 밤이었을 테니.”
그리 말하며 이징옥은 성큼성큼 걸어 숙소를 나선다. 이징옥의 말 그대로 살육의 밤이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의 피로감 역시 크게 쌓여 있던지라 두 사람은 의자에서 손도 하나 까딱 않고서 한동안 대화만을 나눌 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며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징옥 역시 일흔이 넘은 노구로 무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세 사람은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휴양을 선물하였다.
그렇게 어느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포르투갈의 따뜻한 햇살과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대서양의 상쾌한 전망을 즐길 뿐이었다.
―똑. 똑.
무쇠로 경칩을 단 커다란 나무 문이 작게 울렸다.
“주님의 신실한 종인 에보라의 주교께서 포르투갈의 정당한 군주 아폰수 5세의 명을 받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대사 각하 여러분을 뵙고자 청합니다.”
그 손님이란 바로 에보라의 주교였다. 조약식에 참여하러 상경했다가 아폰수 5세가 아끼는 신하였기에 숙청의 그날 겨우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행운아.
그 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만큼 살아남음이 당연하다 생각하겠지만… 글쎄다. 왕세자 주앙의 성격을 본다면 그야말로 그의 생존은 행운인 것을.
어쨌든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사들은 급히 다과를 내왔고, 로밀리 역시 가까이에 착석하여 왕이 보냈을 사절의 접대 준비를 마쳤다.
물론, 이상한 점은 고작 전령 격으로 주교씩이나 되는 양반이 왔단 것인데.
“주님께서 여러분께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길 바랍니다.”
“각하 역시 무탈하심에 저희의 마음이 놓입니다. 밤사이 삼가 평안하셨는지요?”
“물론입니다. 주님의 검날이 악한 무리를 쓸어 없앴으니 마음에는 안정뿐입니다.”
일단 주교는 어떤 이상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차분히 차를 홀짝인다. 아니, 동방의 귀한 음료라 생각하고 미친 듯이 빨아 마시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다른 특이점은 없다.
한담이 몇 마디 오가고 나자, 이제 찻물로 배가 부른 듯 주교는 잔을 내려놓고 슬슬 입을 풀기 시작한다.
“…그, 세뇨르 징옥 이, 세뇨르 아구 이, 두 분을 곧 다가올 미사에 초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에 리스본 대성당으로 와 주십시오.”
“네? 하지만 저희는 불신자라….”
“상관없습니다. 제가 미사를 집전할 터인데, 영성체만 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무어라 말하지 않을 겁니다.”
“에보라의 주교께서 어찌 리스본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십니까?”
“하하, 제가 아마 포르투갈에서 살아남은 성직자 중 가장 직위가 높을 겁니다.”
“….”
“…여하튼 이번에 고결한 ‘경건공(El pio)’께서 오시니 반드시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께도 아마 좋은 기회이리라고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전하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다고 두 분 대사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은인입니다. 모쪼록 편히 머무르시길.”
…경건공이 누구지?
로밀리는 ‘경건왕’은 몇 명 알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2대 황제였던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Ludovicus I Pius)라든가, 프랑스의 국왕인 경건왕 로베르 2세(Robert II le Pieux)라든가.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죽은 지 400년은 족히 지난 사람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과 프랑스에서 해골들이 일어나 리스본의 미사에 참석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그날 온다는 귀빈이 누구인가?”
“저로서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 곧 알게 될 겁니다.
바로 다음 주이기도 하고, 굳이 국왕의 칙사로서 온 인물이 직접 언급하는 걸 보면 어지간한 거물이 아닐 테니 소문이 파다하겠죠.”
실제로 그러하였다.
“식인공(El canibais)이 리스본에 온다!”
“부귀공(A rica)이? 그거 참 구경거리겠는데?”
“내 생애 미남공(El belo)을 만나 보는 날이 오는 건가? 허참, 오래 살고 볼 일일세.”
“순례 여행을 오가다 사라고사의 성 빈센티(Vicente de Saragoça)의 유해를 보러 온다더군.”
문제는….
“다들 어째서 별명으로만 부르는 건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다들 경건공 이작(Isaac)이라고 부르더군요.”
“이자야스(Isaías)라고도 하던데. 이작이 별칭인가?”
“아닙니다. 이작은 이사악에서 나온 이름이고 이자야스는 이사야에서 따온 것이라 서로 같은 이름일 리가 없는데….”
“알아볼수록 미궁으로 빠지는군요.”
무슨 천의 얼굴이라도 가진 것인지, 별명도, 소문도, 심지어 이름조차도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사실 여부를 가리기도 어려웠다.
정작 주교나 국왕 전하에게 물어보면 이상하게 말을 얼버무리니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결국 바로 하루 뒤가 미사에 참여할 날 아닙니까?”
이아구가 특유의 낙천성을 발휘해 이 사태를 단칼로 정리하니, 그게 끝이었다.
일주일에 걸친 지난한 탐색은 무위로 끝났고 피로만 쌓인 채 로밀리는 방 안에 돌아왔다.
“선생님?”
“아, 올리비에.”
“내일 미사에 저도 따라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니 누워 있거라. 어차피 종자(從者, squire) 비슷한 관계라 생각하니 잘 알아듣더구나. 내일 미사는 아침 일찍이니 우선 잠에 들렴.”
“네, 교수님. …그런데 그 황금공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가시나요?”
“황금공? 내가 모르는 별명이 또 있었군. 전혀 모르겠구나. 내일이 되어 봐야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일찍 잠에 들라는 말이 무색하게 올리비에는 로밀리에게 이것저것 온갖 것을 캐묻고 떠들다가 세 시간은 지나서야 잠에 들었다.
로밀리는 로밀리대로 올리비에가 던져 준 ‘경건공’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이 신경 쓰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로밀리는 퀭한 눈으로 밖에 나와 이아구와 이징옥을 끌고 리스본 대성당에 가야 했다.
그런데, 대성당 앞에 모여 있는 막대한 인파들.
사방이 거미줄같이 가느다란 골목으로 얽힌 리스본에서, 몇 안 되는 탁 트인 공간이 사람으로 답답하게 북적거렸다.
그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명백했다.
“저기, 경건공 이자야스다!”
“맙소사 주님, 온 세상이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경건공, 황금공, 식인공, 부유공, 미남공… 말 그대로 수백수천의 이름을 가진 대귀족.
귀족 하나를 마주쳤다고 주기도문까지 외운단 말인가? 대체 무슨….
본래대로라면 행차하는 것만으로도 온 사방의 구경거리가 되었어야 할 조선의 병사들과 이징옥 일행은 도리어 저 ‘경건공’을 보고자 모인 구경꾼 무리에 묻혀 무시받고 있었다.
“비키시오! 비키시오!”
“인도양 해군 총사령관 납시오!”
하지만 경건공이 어떻든 그들 일행도 대성당에 입장은 해야 했기에 그 인파를 헤치고 그들은 전진했다.
마침내, 이징옥과 이아구를 선두로 한 무리가 대성당 입구 앞에 다다랐을 때,
“아, 그대들이 저 멀리 동방에서 왔다는 기인들이구려!”
유려한 라틴어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뒤돌아본 뒤, 로밀리는 경악했다.
맙소사.
* * *
한편 한성 남쪽의 소련 정부 청사.
조금 전까지 아메리카를 향한 진출 계획에 대하여 심도 깊은 토론과 세부적인 설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행되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현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가 펼쳐져 있다. 1470년대 현재 아메리카 각지에 각 세력이 어떻게 진출해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이 그려진.
마야가 아직도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저항하고 있을까? 아즈텍처럼 몇 해 만에 무너졌을까? 포르투갈은 신대륙에 얼마나 진출했을까? 다른 세력들은?
이제, 위의 문장에도 과거 시제를 써야겠다.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어떤 미친 노인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대체 유럽은 어떻게 개뼈다귀처럼 굴러가기에 이딴 꼴이 나!”
“트로츠키 동지! 지금 조선 국왕 전하께서도 와 계십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다 필요 없어! 이것 때문에 몇 달을 밤새웠는데! 그냥 선박 아무 데나 보내! 뭘 생각하든 아무짝에도 쓸모없겠네!”
그렇게 광분하는 트로츠키, 말리는 에티앙블, 망연자실한 채 엎드리거나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다른 인민 위원들.
거기에 던져진 정신적 폭탄은 바로 로밀리의 편지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희가 누굴 만났는지 아신다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겁니다. 무려….”
* * *
“하하, 유럽인들은 소개해야 할 이름이 많더군. 티소크!”
“예, 주군.”
“나를 동방의 이방인들에게 소개해 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화려한 천연색의 망토를 걸치고, 허리춤에 흑요석이 여럿 박힌 곤봉을 찬 어느 위엄 있는 전사가 앞으로 나서서 어떤 문서를 펼치고 읽는다.
“주님의 신실한 종이자, 거룩하고 공변된 교회의 신앙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카스티야 국왕의 봉신이자….”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 유럽인이라기보단 차라리 아시아인에 가까운 생김새를 잘생긴 남자.
“…메시카의 대공 아샤야카틀(Axayacatl)의 봉신인 셈포알라의 공작, 파판틀라와 메카틀란과 추마틀란과 테콜루틀라의 백작이자 티우아틀란과 코아트신틀라와 코유틀라와….”
메시카(Mēxihcah)?
“…토토나카 족의 적법하고 유일한 군주인 틀라카엘렐 데 셈포알라(Tlacaelel de Cempoala)께 경의를 표하시오!”
…멕시코(Mexico)?
* * *
/ 작가의 말
사실 15, 16세기경 서구식 귀족 문화, 사회 구조가 다른 지역에 전파되는 경우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과 교역한 많은 아프리카의 도시 국가, 전근세적 공동체들에서 교역대상과의 우호적 관계 수립을 위해 기존의 사회 구조를 서구식으로 재해석하는 경우도 있었고, 콩고왕국의 은징가 은쿠누(Nzinga a Nkunu), 은징가 은멤바(Nzinga Nbemba) 부자처럼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가 지는 대륙에서 (1)
주님께서 이 지상에 육화(肉化)하신 뒤 1천4백 년하고도 64년이 지난 해였다.
바야흐로 이교도 카간이 루스를 다시금 손에 넣어 유럽이 충격에 빠지고, 저 동토에서는 레닌그라드가 건설되어 가며, 카지미에시가 서서히 몽골을 향한 전쟁 준비를 시작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의 시작은 포르투갈이 있으니.
“묵시록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푸르스름한 말을 탄 죽음이 이 땅의 사 분의 일을 차지할 것이라고!
죽음의 뒤로 지옥이 뒤따르며 칼과 흉년과 땅의 짐승으로써 뭇 사람들을 죽인다고! 푸른 깃발을 쓰는 타타르가 다시금 루스를 얻었으니 이는 종말의 징조입니다!”
“사도왕을 찾아야만 하오! 동방의 기독교 왕국만이 오스만과 타타르의 침략에 신음하는 유럽의 희망이 될 수 있소!”
일련의 종교적 열광, 또는 외부적 침공에 대한 정신적 도피가 전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다.
온갖 신비주의와 종말론이 나돌았으니 그에 따라 국내 정치에 질려 있던 아폰수 5세의 마음 역시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전설 속 동방의 사도왕을 찾는다. 겸사겸사 점차 오스만에 의해 먹혀들어 가는 지중해 항로의 대체 무역로를 찾는다.
그렇게 목적이 세워지고, 왕의 지원 아래 포르투갈인들은 우선 아프리카를 항해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크기를 잘 몰랐다는 것.
―“전하, 이제야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닿은 듯합니다. 곧 인도의 후추와 육두구를 전하께 궤짝으로 바칠 수 있을 듯합니다.”
―“…전하, 다시 대륙이 남쪽으로 뻗어 있으니 남단을 찾으려면 아주 조금 더 걸릴 듯하나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주신다면 동방의 재보를 들고 전하께 돌아가겠습니다.”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이 대륙은 너무도 거대합니다. 허나 주님은 참을성 있는 이에게 복을 주시나니….”
아프리카란 유럽보다 3배는 넓은 거대한 대륙이었으니, 여정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고 투자금은 몇 배로 불어나며 그에 반비례해 성과는 지지부진해진다.
열대의 기후는 끝나지 않고, 기독교인 왕국은커녕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사라센인들조차 잘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폰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드디어 종말의 세계가 가까웠습니다. 지구는 둥그니 이제 서쪽으로 간다면 동쪽 끝의 에덴동산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덴이라….”
다시 실망할 준비를 마친 포르투갈 왕의 가호가 이어지자, 한 척의 범선이 마데이라와 아조르스 제도를 넘어 미지의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전하, 이곳의 진귀한 작물과 이교도들을 보냅니다! 이들은 신을 알지 못하나 누구보다 순박하니 곧 하느님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신대륙과의 조우였다.
콜럼버스가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던 1464년, 그가 본래 역사에서 서쪽으로 향하기까지는 거의 30년 전이었으니.
사람들은 철기로 무장하는 법을 모르고 헐벗었으며, 기후는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다는 편지에 아폰수는 희열에 차올랐다. 개인의 흥미로 후원한 탐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막대한 영지를 얻은 것이다.
천사도, 기독교인도, 그들의 앞길을 막는 불의 칼도 없었으니 에덴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이 놀라운 발견에 주교들 역시 기도를 올렸으며 곧 이는 전 유럽으로 퍼졌다.
“서방의 새로운 땅?”
“그렇사옵니다, 전하! 지금 포르투갈의 상선들을 타고 간 선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선점한 아폰시아 제도 너머에는 더욱 드넓은 대륙과 도시와 왕국들이 있다 하옵니다!”
“호오….”
그리고 바로 이웃 나라, 귀족들의 견제와 잔혹한 왕위 쟁탈 과정으로 인망과 권위를 모두 잃어버렸던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역시 거기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식과 귀족들의 간섭 없는 왕실 직할령이었다. 이미 수익을 내고 있는 마데이라 제도처럼, 사탕수수를 기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렇기에 인구 밀도가 낮은 인근의 섬들을 지배하고 거기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꾸리는 데 열심일 뿐이었다.
뭔가 토착민들의 도시와 왕국이 있다는 대륙? 굳이 전쟁까지 하면서 그곳을 얻을 필요는 없었다.
반면 카스티야와 레온을 다스리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였다.
저잣거리만 가도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총신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았는지, 그가 아버지를 독살한 것은 아닌지, 집권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쳤던 계모와 이복형제들을 어떻게 배신했는지에 대한 소극(笑劇)이 펼쳐진다.
자신은 성불구자이며 딸아이 역시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 왕비가 외도한 결실이라는 소문이 반쯤 기정사실로 퍼져 있다. 자신이 죽는다면 딸의 안위 역시 크게 위험하리라.
실제 역사에서도 그를 명분으로 사후 그가 배신했던 이복 여동생이 내전을 일으켜 이사벨 1세로 즉위하고, 그의 딸 후아나는 패배한 뒤 포르투갈에 갇혀 평생을 비참하게 보내니 그가 걱정하는 바가 정확히 실현된다.
엔리케는 위업과 명예가 그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그대들은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인 나의 명을 받들어 서쪽 땅에 복음과 문명을 전하라.
사람을 헛되이 죽이지 말며, 성 보니파시오(San Bonifacio)가 독일에서 사목하다 장렬히 죽음을 맞은 바와 같이 저 야만의 땅을 복음화하는 데 몸과 영혼을 모두 바치라.”
“예, 전하. 주님의 광명이 저 미개지에서도 찬란함을 잃지 않도록 전념하겠습니다.”
그렇다. 이익이 아니라 명예, 하찮은 금과 노예가 아니라 위신.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 엔리케 4세가 필요로 하던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선단과 탐험대를 꾸렸다. 교회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는 그의 여정에 응원을 보냈다.
본래 이사벨 1세의 콩키스타도르가 출세를 열망하던 하급 귀족, 일자리를 찾던 잔인한 용병, 오직 착취해낼 이윤을 위하여 바다를 건넌 이들이었다면,
엔리케의 표면상 숭고한 목적에 따라 신대륙에 가길 자청한 이들은 모두가 신실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끼어든 부유한 귀족들과 상인들, 복음화의 열정에 찬 선교사들이었다.
또 이사벨 1세가 내전기에 끌어모은 용병과 군사들을 활용하려 레콩키스타를 열성적으로 이어 가고, 다시 처치 곤란이 된 병력을 방출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진출했다면,
엔리케 4세는 기독교의 확장과 서방의 복음화라는 대의를 위하여 사람과 재원을 끌어모았으니 그 성격 자체가 달랐다.
엔리케의 선교 사업에, 잇따른 침략과 패배에 절망으로 차 있던 기독교 세계 곳곳에서의 후원 역시 줄을 이었다.
교황이 대서양을 건너는 선원들을 축복하였고, 세비야 대주교가 떠나는 선박들을 축성하였다.
그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탐욕스러운 약탈자 대신 고결한 봉사자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니
역사가 다시 한번 비틀어진다.
* * *
온화한 기후. 눈이 시릴 정도의 초록빛, 그리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광.
“눈이… 부시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발 디딘 이들이 처음 느낀 인상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사장에 서서, 정착 후 수개월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아열대의 풍경을 구경하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벨트란 데 라 쿠에바(Beltrán de la Cueva), 엔리케 4세의 총애를 받아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단장 자리를 꿰차고 최근 알부케르케 공작의 작위를 받은 당대의 총신이다.
그러나 동시에 엔리케 4세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지금 카스티야의 왕녀 후아나가 왕비와 데 라 쿠에바가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파다하기에.
엔리케 4세와 그가 동성 연인 관계라는 악의적인 왜곡 역시 곳곳에 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