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
다시 고개 조금씩 들면서. 목소리 톤도 점차 끌어올리고.
“그러나 여러분은 프랑스인입니다. 저 파리의 골목골목마다 바리케이드의 함성과 혁명가들의 피가 여전히 끓어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시선 약간 하늘로. 목에 핏줄 설 정도로 힘줘서.
“자유가 위험에 처한 순간!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히는 순간에 항거하는 민족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감히 저는 청합니다. 저 이국에서 피를 흘려달라고! 그리하여 스페인의 메마른 민주주의가 다시 되살아나도록! 그 땅에 정의가 다시 설 수 있도록!”
대중들이 환호한다. 트로츠키를 연호한다. 이제 여세를 몰아서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바로 옆에 신청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와 함께 있어주십시오!
6주 뒤, 떠납시다! 스페인 땅으로!”
“민주주의 만세!” 자유주의자들이 외쳤다.
“트로츠키 만세! 사회주의 만세!” 이건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 만세!” 어중이떠중이들이 분위기에 떠밀려 소리쳤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렇게 연호했다.
“스페인으로! 스페인으로!”
//
연설을 마친 뒤 트로츠키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연단 뒤로 내려왔다. 등 뒤로 여전히 소란스러운 청중들의 반응이 느껴졌다.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고 목을 축이려는 찰나 수첩을 든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특히 급진적인 부분을 빼고 말랑말랑한 자유주의자들도 납득할 만한 내용이 되도록 신경 쓰신 게 보이더군요.”
“고맙소. 전 오히려 그 부분이 계속 걸렸는데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억양을 들어보니 영국인 같은데 그쪽이 편하시다면 영어로 말해도 좋습니다.”
“하하. 영어도 아주 유창하시군요. 앞으로 여시는 참전홍보용 연설회는 웬만하면 다 돌아다닐 테니 앞으로도 자주 뵙겠습니다.”
“아 기자이신가 보군요.”
“그래봐야 졸문이나 쓰는 알려지지 않은 기자일 뿐이죠. 여기 명함입니다.”
작고 하얀 종이카드를 받아 든 트로츠키는 재빨리 이름과 소속을 훑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릭···블레어 씨.”
────────────────────────────────────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시작 (2)
연설, 집필.
요 며칠 동안 트로츠키의 생활을 요약하자면 저 두 단어밖에 남지 않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숙소에서 일어나 세수한 뒤, 열차를 타고 행사장으로 향한다.
열차에 탄 동안에는 연설문, 논설, 인터뷰 답변을 작성한다.
행사장에 도착해서는 두세 시간 동안 연설과 질의응답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언론 인터뷰.
그렇게 행사장 한두 곳 더 들른 뒤, 근처의 새 숙소에 짐을 풀고 침대에 눕는다.
다시 다음날 일어나 위의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한다.
정치인으로서 몸이 바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잊혀지지 않았단 뜻이니까.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시베리아를 들락날락하며 몸 험하게 굴린 중장년 남성에게 몸이 바쁘다는 건? 앓아 눕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사가 처방해준 쓴 약을 꿀꺽 삼키고 쪽잠으로 밤을 지새운다 하더라도 트로츠키는 지금 속 편히 누워있을 심정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중요한 순간에 몸이 힘들다고 요양이라도 한다면, 혁명가로서, 정치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도 실격이다! ···이렇게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트로츠키는 이 정신나간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기만 한 시간도 아니었다.
연설, 집필.
가장 자신 있는 장기를 꼽으라면 트로츠키는 저 두 가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침을 튀겨가며 스페인 반란군의 사악함을 목놓아 부르짖고, 정의로운 자들의 피를 갈구하는 저 히스파니아 땅의 비극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야말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또 펜을 들어 집필 작업에 들어갈 때마다 자신이 쓰는 줄글이 지난 몇 년간 써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아른거렸다.
한때 있었던 인생의 전성기! 영웅으로서 러시아 땅을 밟아 인류 최초의 공산국가를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차 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이렇게 매일매일 열차에 올라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일도, 적백내전 당시 군용열차에서 거의 내리지 않고 지휘에만 열중하던 시절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일이 어렵다 하더라도 조력자가 있었다.
“이 부분에선 오히려 감정적으로 세게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무 잔인한 묘사를 넣다 보면 대중들이 질색하지 않겠나?”
“프랑스인들은 왕 모가지도 직접 잘라봤습니다. 반동들 죽이기를 싫어하면 프랑스인이 아니죠! 오히려 최대한 피칠갑 된 묘사를 넣어야 이 족속들은 흥분할 겁니다.”
에릭 블레어, 지금 쓰는 필명은 조지 오웰.
이 기자 양반은 지난 연설회에서 만난 뒤로 기삿거리를 찾는다며 뻔질나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연설이 끝날 때마다 그가 내리는 짤막한 평이 조금씩 마음에 들어 아예 같은 열차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할 일도 없으니 집필 활동이나 연설문 짜는 데 조금씩 참여를 권해보니 꽤나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아무튼 블레어 덕에 일도 덜고 결과물도 썩 괜찮게 나오니 트로츠키로서는 마다할 것이 없었다.
“내일은 니스에서 강연을 할 걸세. 갈 길이 꽤 멀 테니 일찍 자두라고.”
“좋습니다. 아 그런데 료바,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더군요.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당신과는 큰 인연도 없는 저에게 안부를 부탁하더라고요.”
“음 누구지? 짐작 가는 인물이··· 너무 많구만.”
“이름이랑 억양을 보면 러시아 사람 같더군요. 아마···니콜라이 바빌로프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
니콜라이 바빌로프.
천재 유전학자, 소련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 그리고··· 리센코에게 찍힌 남자.
1933년, 그가 남북 아메리카를 돌아다니며 종자를 수집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소련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추천해 과학계로 입성한 리센코가 어느새 슬그머니 실권을 꽉 잡아 놓았고, 회의 때든 연구성과 발표 때든 정치인들과 동료 과학자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바뀌어 있었다.
“선생의 연구 결과는 너무 사상적으로 편향된 듯 하오?”하고 리셴코가 뚱딴지 같은 소릴 던지자 당황해서 사방을 둘러봤었던 그 순간.
시선이 닿은 동료들이 나 몰라라 눈을 피하고 있었던 그 순간.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자리는 이제 이곳에 없다. 충성을 바친 조국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바빌로프는 이 기회에 필사적으로 명분을 짜내어 상부에 요청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현지의 유전자원들과 연구자료들이 유실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현지에서의 자료 인계와 연구를 위해 스페인 파견을 자청해도 괜찮겠습니까?”
해석: 스페인 촌구석으로 사라질 테니 보내주길 바람.
“허허, 전쟁터 한복판으로 뛰어들다니 동지의 충성심은 역시 훌륭하군. 인민을 배불리기 위한 동지의 노력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는구려.”
해석: 허가, 웬만하면 다시 돌아오지 말 것.
그렇다. 그는 추방을 자청했다. 그가 전세계를 굴러다니며 모은 종자들 중 극히 일부만을 연구차 챙겨가도 좋다고 허락받았을 뿐이었다.
바빌로프는 몰락했다.
심지어 소련은 그를 직항으로 스페인에 보내주지도 않았다! ‘트로츠키, 그가 프랑스에서 스페인행 의용군을 모집한다던데···’라고 서두를 떼며 결국 트로츠키에 끼워서 보내버린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트로츠키 같은 반혁명분자랑 붙어먹은 반역자로 엮어버릴 수 있다는 은근한 암시와 함께 말이다.
그렇기에 바빌로프 입장에서는 트로츠키의 의향에 모든 게 달려있었다.
전쟁에 전혀 쓸모없을 유전학자를 이런저런 장비들과 함께 스페인행 선박에다 태워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처지였던 만큼, 그의 태도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극적이고 비굴했다. 트로츠키가 스페인으로 같이 안 가주면 본인은 그냥 드네프르 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테니.
이런 사정을 한참동안이나 눈물 어린 얼굴로 트로츠키에게 털어놓은 바빌로프의 얼굴에서는 그의 절박함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바빌로프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정치인이다.
재기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트로츠키에게 바빌로프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선생.”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트로츠키는 벌떡 일어나 바빌로프의 두 손을 잡았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빌로프를 향해 트로츠키는 열변을 토했다.
“선생은 참 애국자요, 위대한 지성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정치인들이 제 잇속만 챙기느라 학자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고 결국 추방하다니!”
바빌로프는 어쩔 줄 몰라 따라 일어나며 트로츠키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결연한 분노에 찬 저 얼굴! 그야말로 구원자의 얼굴이 아닌가!
바빌로프로서는 참아 왔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눈물 흘리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은 안전하며 이제 저, 트로츠키가 힘닿는 한 선생을 지원할텐데 눈물 흘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선생이 스페인에서의 연구에 필요한 것은 말만 하십시오! 제가 프랑스 정부에 청해서 어떻게든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흑···정말 감사합니다, 트로츠키 선생! 정말···정말···감사합니다!”
“감사해야 할 건 오히려 저와 전세계의 노동대중일 겁니다. 당신 같이 떳떳한 과학자가 공산주의자라니 역시 이 시대는 축복받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당신 같이 올곧은 학자를 쫓아내다니 역시 지금의 소련은 사악한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사실 트로츠키도 바빌로프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냥 가끔 보고서에서 이름 몇 번 본 게 전부일 뿐.
그리고 비전문가인 그가 리센코가 뭐가 틀렸고 바빌로프는 또 뭐가 옳은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 저 인간 부르주아지적 반동 과학자라는데요? 누가 그렇게 전했다면 트로츠키도 ‘뭐 그렇겠지···’하고 넘겼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트로츠키는 소련이 버린 비운의 천재를 끌어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고, 이 절절한 감동의 현장은 바로 옆에 서 있던 블레어 동지가 사실 그대로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이번 출정을 ‘허락’해준 공산당의 눈치가 안 보일 수는 없으니 자제해야겠지만 적어도 암시하는 정도로는 기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소련에서 좌천당한 천재 과학자, 트로츠키를 만나 눈물을 보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사악한 스탈린! 되갚아주는 트로츠키! 두 공산주의자의 대결!
아무튼 복잡한 정치와는 연이 멀었던 이 순진한 학자는 트로츠키의 속내도 모르고 연신 눈물의 감사인사를 올릴 뿐이었다.
감정에 복받친 그는 트로츠키와 블레어가 은밀히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뒤 프랑스 유전학회에서 표창을 받으며 트로츠키는 외쳤다.
“오늘 이 표창은 제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빌로프 박사가, 그리고 사악한 독재권력에 맞서 인류의 지성을 수호하는 수많은 양심적 과학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때, 부들부들 떨리는 스탈린의 콧수염을 상상하던 트로츠키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환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트로츠키 동지, 다시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트로츠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료바, 정말 오랜만일세! 내 얼굴을 잊은 건 아니겠지?”
소련에서 건너온 이들이 뭔가 이상하게 많다.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그냥 줄 잘못 서서 출세길 꼬인 듯한 양반들이 많이들 보였다.
‘혹시 잔반처리인가?’
마음에 안 들던 양반들 그냥 죄다 스페인으로 보내버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
전쟁에서 이겼다? 그러면 거기 눌러 살고.
전쟁에서 졌다? 패잔병에다 역적 트로츠키랑 붙어먹은 반역자니까 죽이고.
정치공학 전문가 스탈린의 잉여인간 처리법에 트로츠키는 한동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키워 보낸 정치장교를 비롯한 군인들, 끈 떨어진 학자나 정치인들, 그리고 어중이떠중이 등등.
아무튼 달리기 되고 총 쏘기 되면 트로츠키에게는 하나하나가 값진 인력이다. 그는 다시금 스탈린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먹었다.
물론 의용군 중 소련에서 등 떠밀린 추방자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작가들, 예술가들, 지식인들이 의용대를 꾸려 속속 파리에 도착했고, 트로츠키는 시간을 쪼개 그들과의 대담을 진행하며 언론 홍보용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콧대만 높고 총은 쥐어 본 적도 없으며 기술도 없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멋진 선전용 장식들 아닌가?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역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드워드 바스키입니다. 스페인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미국 의료 사무소(the American Medical Bureau to Save Spanish Democracy)의 회장입니다.”
“노먼 베순입니다. 캐나다 공산당원이고, 의사죠.”
의사라니! 그것도 의료기술자들과 의료기구를 한 보따리씩 싸들고 오다니 이 기특한 인간들에게 트로츠키는 몇 번씩이나 감사인사를 올렸고 이들에게도 바빌로프와 동등한 수준의 최우선적 지원을 약속했다.
바빌로프 같은 식물학자는 대체 어디에 쓸모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사는 가장 중요하고 구하기 어려운 기술자 아닌가?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세계의 노동자 조직들.
그들을 모금회가 끝나 한산해진 호텔 홀에 불러모아 한 명씩 인사를 나누었다.
“올리버 로입니다. 이쪽은 로버트 헤일 메리먼. 미국 공산당에서 왔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이유는 많다. 그리고 올리버 로의 경우에는,
“더러운 깜둥이, 그것도 빨갱이 깜둥이도 용기 있게 싸울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동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언젠가 미국 흑인 민족에게도 자유가 찾아오길 빕니다.”
“여기 메리먼 동지는 우리 미국인 자원자 중 몇 안 되는 ROTC 경험자입니다, 하하.”
“아 그렇소? 정말 환영하오, 메리먼 동지!” 트로츠키는 반색하며 말했다.
물론 프랑스 정부가 지원한 ‘군 출신 자원병’들은 매우 많다. 이름만 바꿨지 정식 군인들이 파견된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 중 영어가 유창한 인간은 손에 꼽는다. 수백 수천 명의 미국인 자원병들을 통솔할 군 출신자는 매우 귀중한 자원이다.
“트로츠키 동지에게 영국 탄광 노조들의 대표들로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프랑스 금속 노동자 연맹입니다. 트로츠키 선생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들 와주셔서 정말 고맙소. 같은 노동계급을 위해 이렇게 나서는 여러분의 숭고한 의지가 스페인에까지 전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 노동조합들. 체계 잡힌 조직과 단합력으로 상당한 숫자의 자원병들을 이끌고 스페인 땅을 밟을 준비를 마쳐 놓았다.
단순히 사람만 모은 것이 아니라, 없는 후원금 한 푼 두 푼씩 모아서 꽤나 큰 규모의 기부금까지 내놓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스페인 의용군의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1할, 소련 출신 망명···아니 자원자가 3할, 마지막으로 전세계 노동자 조직이나 정치조직에서 온 자원병들이 6할 정도. 전투인력 4,000명, 그 식솔들과 비전투인력까지 포함하면 총 1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자원자들이 모였다.
연설장에 모이는 군중들의 규모도 초반의 두세 배는 되었고, 트로츠키를 한 물 간 망명자라고 무시하던 이들도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며 이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의 지휘관이자 선봉장’을 추켜세웠다.
그야말로 고공행진. 민간에서의 기부도,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도 충만했고 전세계에서 자원병이 들어온다. 이제 스페인 행 배편을 보고 일정을 조율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
그리고 낙점된 것은 RMS 켈틱 1호와 2호, 그리고 RMS 게르마닉 호. 총 세 척이었다.
원래는 고철이 되었어야 할 퇴역 직전의 선박들이다. 좌익정권이 이어지면서 불안정한 프랑스에서 도피하려는 이들 덕에 미국행 배편의 수요가 올라 폐기만큼은 면한 채 계속 운영되었다고 한다.
속사정이 어떻든 트로츠키는 이 수명이 다해가는 함선들을 싼 값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수송선으로의 가벼운 개조와 내부 리모델링이 있은 뒤에, 각 함선은 이제 한 척에 5,000명 정도는 너끈히 수송가능한 군용 무장 수송선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칼레 항에서는 성대한 출정식이 열렸다. 사회당의 레옹 블룸 총리나 공산당의 모리스 토레즈 서기장 등 웬만한 좌익 계열 인사들은 빠짐없이 얼굴을 비췄다. 지루한 연설과 교향악단의 공연이 있은 뒤로 트로츠키는 배에 올랐다.
대서양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빙 돌아 지중해로, 그리고 혁명의 도시 바르셀로나로.
트로츠키는 갑자기 수년만에 엄습해오는 긴장감에 고개를 숙였다.
스페인은, 단순히 정치적 스타 트로츠키를 위한 영광된 무대가 아니다. 자신이 데려갈 15,000명이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전장이다. 왕당파들, 파시스트들, 아나키스트들, 공산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제각기 이상과 권력과 생존을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며 수많은 목숨을 전장으로 내모는 곳이다.
뒤를 돌아보자 배 위에서 분주히 돌아다니는 선원들, 난간 너머로 고향에 작별인사를 보내기 위해 몰려 있는 프랑스인 자원자들이 보였다. 그 외의 인원들은, 각자에게 허락된 선실에서 긴장과 두려움을 되씹고 있을 것이다.
저들 중 얼마나 살려 보낼 수 있을까?
저들의 피를 값으로 치르고 승리할 수는 있을까?
트로츠키는 고개를 저으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런 바보 같은 고민은 어렸던 유대인 소년 브론슈테인의 것이지,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 트로츠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져 있던 어수룩한 지휘관들은 모두 적백내전에서 죽었다.
백군의 손에 의해서든, 트로츠키 자신의 손에 의해서든.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아군은 많이 살리고 적군은 많이 죽이는 것. 더 효율적으로 살리고 죽이며 승리를 얻어내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을 숫자로서 바라보는 단호한 냉정함이 그를 위대한 군사지도자로 만든 비결이었다.
“이제 출항합니다!”
그 외침에 트로츠키도 항만의 군중들을 향해 손을 몇 번 흔들고는 자신의 선실을 향해 들어갔다.
이제 전쟁 준비다.
────────────────────────────────────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시작 (3)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물 밀 듯 밀려오는 자원자들의 물결! 차곡차곡 쌓이는 기부금!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스페인 내전의 현황! 대중들의 관심!
마지막으로 화려한 출정식과 함께 수많은 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푸른 대서양의 물길을 향해 나아갔을 때! 그 위풍당당한 출항을 보면 누구라도 이들이 스페인 땅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오리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배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