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23
“죽여 버리겠다! 이베리아 야만 족속들아!”
“주님의 배반자들아, 지옥으로 보내 주마!”
그리고 적들을 원수처럼 베었다.
짠 내음이 난다. 그것이 피 냄새인지 바다 냄새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이 해역에서 그 두 가지의 구분이 이제 무의미해졌는지도 몰랐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나뭇조각이, 사람과 밧줄이 뒤엉키고 마치 화물들처럼 이리저리 던져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포도가 짓이겨지면 붉은 물이 나오는 게 당연하듯, 사람 또한 그러했다. 모든 이들이 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도즙을 맛보기 위해 걸신들린 듯 달려들었다.
아메리고는 용케도 가까이로 다가온 이들 한둘을 베어내고, 높이 솟은 선미루에서 호위 병력에 둘러싸여 전황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바다 위의 지옥을 보았다.
카스티야 군인들은 점차 지쳐 갔고, 이전의 패배로 인하여 기세 또한 낮았다.
그들은 복수심으로 불타는 피사인들과 피렌체인들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이내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카스티야인의 목이 베어지고, 마지막으로 항복한 카스티야인의 몸에 밧줄이 묶였다.
그 모습을 본 고르고나섬의 잔병들은 백기를 휘날렸다.
그렇게 섬 하나가 점령되었다.
며칠 뒤 다시 그와 비슷한 희생을 치르며 카르파이아섬까지 탈환하였다.
공화국은, 적어도 바다에서는 승리했다.
당장 육지로 황제군이 밀려올지언정 바다만큼은 안전했다.
두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피사 시민들이 던지는 꽃잎과 비단에 휘감긴 상태로 자신의 침소에 돌아왔고.
죽음보다 깊은 피로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로렌초.”
당신에게, 이 모든 죽음과 희생을 바칩니다.
당신이 이런 성대한 제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공화국 만세!”
―“지롤라모! 지롤라모! 로렌초! 로렌초!”
―“아메리고! 아메리고!”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리들이 멀어져 간다.
아메리고는 잠에 들었다.
깃발 아래서 (6)
독일 땅에서 온 병사들은 제 고향의 음률을 흥얼거렸다.
승리의 기쁨과, 손안에 든 약탈물이 주는 뿌듯함에 차서.
그러나 이 땅의 시민들은 그러한 흥겨운 노랫소리들, 자신들에게는 낯선 저 북방 게르마니아의 노래들을 곧 공포로 여기게 되었다.
관습으로 약속된 3일의 약탈이 지나가고서도, 갑옷 입은 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갈 때마다 가게들의 문이 닫히고 행인들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뒷골목에서는 압제자가 돌아왔다며 수근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잠자코 숨어서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누구도 자신들을 제지하지 못하니, 병사들은 더욱 목청 높여 노래 부른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는다.
아무런 깃발도 달리지 않고 덩그러니 남은 깃대들은, 마치 아직 효수되지 않은 죄인들의 머리를 꽂기 위해 준비된 자리 같아 살풍경하다.
밀라노 공화 정부의 깃발은 모두 수거되어 창고 깊은 곳으로 처박혔다. 추방되었던 귀족들은 다시 돌아와, 시의 소유로 환원되었던 자신의 저택에서 피난민들을 쫓아내었다.
밀라노의 자치권은 무기한으로 유예되었다.
그곳에서 자유를 허락받은 용병들은 밀라노 시민에게서 약탈한 금으로 밀라노 시민들의 재산을 사들였다. 술과 육류, 남자와 여자, 광대와 배우까지,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도시의 상황이 퍽 암울하게만 들린다.
물론 실제로 암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자비’가 있었다.
약탈은 당연히 있었다. 용병들이 반수 정도를 차지하는 군세에 그 정도 권리도 보장해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허나 방화와 파괴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여러 교회와 궁전, 공공시설들은 약탈 대상에서 발 빠르게 제외되어 시민들은 충분히 신변의 안전을 위해 대피할 여유가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이 정부 청사로 사용하던 스포르체스코 성에는 황제의 깃발이 매달렸으나, 대평의회의 의원들은 ‘자비롭게’ 구금되었다.
교수대와 사형 집행자들에게 일감이 생기는 일은 치안 목적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없었다.
점령당한 밀라노인들이 황제의 관대함에 감사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황제는 정복자치고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황제가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대계 때문이었다.
“피렌체와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둬야 한다. 당분간은 절도죄에 관해서도 교수형을 중지하라. 사형 집행은 자제해야 한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
“예, 폐하.”
황제는 잠시 고개를 까딱거리며 자신이 자리한 알현실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한때 비스콘티 공작 가문의 방어용 요새였고, 찬탈자 스포르차 가문이 들어온 뒤로는 다시 그들의 궁전이 되었던 이 스포르체스코 성.
공화국의 정부 청사를 거쳐, 이제는 프리드리히의 것이 되었다. 곳곳에 널린 합스부르크의 독수리 깃발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황제가 바라는 것은 고작해 봐야 이 궁성 하나가 아니었으니,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고민이 스쳤고 머리에는 정략의 거미줄이 얽혀 갔다.
…결국, 황제는 이탈리아 양 세력의 분쟁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한쪽 세력의 날개 하나를 과감히 꺾어 버리는 방식으로. 어찌 되었건 피렌체가 아닌 로마의 편을 들어 준 모양새다.
황제 프리드리히 자신의 영향력을 지우려 애쓰던 그 로마의 편을 말이다.
정치란 이다지도 복잡한 모순 속을 헤쳐 가야만 하는 일이다. 고되기가 짝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의 멍청이들 좋으라고 피렌체를 박살 내 줄 이유는 없다.’
만일 그리한다면 이탈리아의 세력 균형은 또 얼마나 엉망이 되겠는가?
피렌체를 적당히 달래고 협박한다.
동시에 로마를 어느 정도 압박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는다.
그를 위해서는 밀라노를 짓밟아 피렌체인들의 반감을 사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프리드리히의 ‘중재’와 ‘경고’에 피렌체인들이 순순히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 황제가 데려온 군세는 마리아 장벽을 지켜 내고 몽골과 싸우며 유럽에서 가장 고도로 숙련된 이들이다. 그것도 5만이면 밀라노나 피렌체의 도시 인구와도 비슷한 수.
온 이탈리아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무력을 가져왔으니 이제 누구도 황제의 권위를 그저 말뿐이라 할 수 없으리라.
궁전에서 현지 유력자들의 접견을 마친 뒤, 황제는 밀라노 시내를 나섰다.
북쪽 성문 바깥에는 그 자체로 도시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주둔지가 있었다.
5만의 인원이라면, 실제로 도시 하나를 몰고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도 했고.
황제가 지휘부 군막으로 들어서자 한창 회의 중이던 기사와 영주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논의를 멈추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방금까지는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나?”
“폐하, 밀라노 시민군 중 상당수가 국경을 넘어 피렌체로 망명하였다 하옵니다. 저들이 곧 피렌체 시민군에 합류할 테니 피렌체 공략은 이번보다 한결 까다로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효는 얼마나 되나?”
“5천 명에 달합니다.”
“5천이라….”
만만찮은 숫자이기는 하다.
“우선 피렌체 국내의 방어 요새들을 하나하나 깨뜨려 가면서 진군하려 합니다. 인근 소국들은 분쟁에서 중립들을 지키고 있었으니 아군을 문제없이 통과시킬 듯합니다. 문제는 국경을 넘은 이후부터인데….”
그 조부의 대부터 합스부르크에 고용되어 온 어느 용병대장이 황제의 눈앞으로 지도를 가져와 가리키면서 설명한다.
“그만.”
프리드리히의 계획에 따르면 그가 진군 계획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그 대강의 개요만 파악하면 족하다.
“제군.”
“예, 폐하.”
“짐은 호위 병력들만 대동하고 우르비노를 지나 로마에 방문하겠다. 그대들은 짐의 군대를 잘 이끌어 밀라노 일대를 정리한 뒤, 피렌체 공화국의 숨통을 적당히 조여 주면서 진군하라.”
“알겠습니다.”
장수들에게 군 지휘권을 맡긴 프리드리히는 슬며시 자리에 앉는다. 나이도 들어가는 몸으로 이리 강행군을 뛰고 있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표는 이탈리아다.
이 모든 과업을 마치고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대가가 기다린다.
회의 바로 다음 날, 황제는 말 위에 올라 달린다. 이제 예순이 된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빠르게 행군은 이어진다.
마치 짝사랑의 비밀스러운 초대를 받은 젊은이처럼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스로와 호위병들을 보챈다. 몸 어느 한 곳이 상하더라도 하루빨리 로마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아… 성스러운 도시여….”
“황제 폐하를 환영합니다. 보시기에 로마가 어떠십니까?”
“아름답구나. 아주 훌륭하다. 짐의 벗이던 바오로 2세 성하께서 훌륭히 단장해 놓으셨어.”
“….”
그러니 프리드리히가 로마에 닿았을 때 느낀 환희는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리라.
교황을 언급하니 표정이 썩어 가는 추기경들의 얼굴 따위 무시하였다. 교황이 조금만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실제로 교수형을 당해서 썩었을 얼굴들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드디어 로마의 황제가, 로마를 손에 넣으러 왔도다.
* * *
며칠 동안 노독을 푼 황제는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교황령을 지배하는 추기경단이 비어 있는 성좌(聖座)를 배후에 두고서 그를 맞이하였다.
누구 하나 대표로 나오는 이가 없이, 연장자순으로 자기를 소개하며 허리 숙여 인사할 뿐이다.
…아하, 이것들 내부 정리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애당초 절대 권력을 이룩하려던 교황을 몰아내고 나온 집권 세력이다.
결국에 ‘생존’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만이 이들을 묶어 놨던 만큼,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이들은 분열했을 것이다. 만일 그 분열을 수습하려는 자가 있었다면 전임 교황과 같이 ‘독재자’라는 비난을 사고 실각했으리라.
이들이 제대로 서열을 정하고 단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교황께서 승하하시고 난 뒤에는 그대들끼리 이렇게 사도좌를 관리하는가? 어찌 교황을 새로 선출하지 않고….”
“교황 성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당연히 살아 있겠지. 설령 정말 죽었다 하더라도 살았다고 우겨야 한다.
교황이 죽으면 신임 교황을 선출해야 하고, 교황 자리를 노린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와중에 위험 요소들이 창발할 테니.
“성하께서는 지금 중태에 빠져 누워 계시니 몇 달 동안 의사들이 죽과 물을 먹여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가 말을 얹는다.
“짐이 성하를 만나 뵙고자 한다. 교황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너무 쇠약하셔서 정해진 의사들 외에 다른 이들의 방문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성하께서 쇠약해지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겠지만 의사들의 이야기로는 자신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면 ‘나쁜 공기’가 옮을 수 있다 하더이다. 저희조차 교황 성하를 뵙지 못하는 처지이니 부디 이해를 청합니다.”
뻔한 거짓말이다.
교황이 죽어 있다면 당연히 그 위치를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관 속에 담겨 썩어 가고 있을 테니.
반대로 교황이 살아 있다 한다면 황제에게 교황을 탈취당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도 위치는 숨겨야 한다.
교황은 죽어 있는 시체가 되었든, 숨만 쉬는 시체 꼴이 되었든 간에 여전히 강력한 정통성을 한 몸에 쥐고 있었다. 그걸 놓치면 추기경단은 끝장이다.
지금, 바오로 2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시체였다.
짐작하던 교황령의 상황들을 대강 확인하고는 그에게 주어진 거처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서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을 시작한다.
사방을 향하여 비밀스럽게 눈과 귀를 뻗어 가는 일.
곧 비밀스러운 쪽지들이 황제가 자주 머무르는 방의 문틈으로 끼워져 왔다.
―“현재 시에나에서의 전황은 매우 부진합니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분전을 이어 가고 있지만 나폴리 측의 횡포가 너무도 심합니다. 무엇보다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함대는 대부분 격퇴당했습니다. 현재 폐하의 군세가 없다면 전쟁은 그대로 소모전으로 고착될 듯합니다. 더하여 지금의 전장에서….”
―“교황은 살아 있습니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후방에서 로마와 시에나 사이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으며 또한….”
잠깐.
그는 개중 간략하게, 단 한 줄로 적혀 있는 서신 한 장을 집어 든다.
뒷면을 바라보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의 종복, 로드리고 보르자가.”
* * *
“자네는 그렇게 태평한가? 지금 자네 입으로 로마에 황제가 당도했다 하지 않았나?”
“뭐, 그렇지.”
“뭐가 그렇지는 그렇지인가! 황제가 피렌체파였던 밀라노를 치고 로마에 왔다면 결국 지금의 추기경들과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교황의 측근들인 우리는 버리고!”
“진정, 진정하게나.”
“어찌 진정을 하겠나?”
벗의 말에 로드리고는 여전히 웃음만을 지을 뿐이다. 보는 사람의 속이 다 답답해진다.
“이거, 여기서 피우는 마지막 연초일세. 자네 정말로 안 피우겠나?”
그리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돌리자 로드리고를 보던 벗도 포기하여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징글징글하구먼. 난 그 냄새가 도무지도 적응이 안 되네. 자네나 실컷 하게.
…그리고, 요새 보안이 강해지기라도 했나 보군? 자네가 여기 들어온 뒤로 연초든, 찻잎이든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푸흐흡….”
“아니, 왜 그러나?”
“재미있어서 그러네.”
“뭐가?”
불붙인 연초를 허공에다 대고 지휘봉마냥 빙글빙글 돌리며 로드리고는 말을 잇는다.
“생각해 보게나. 이곳의 경비들을 매수하여 나는 저 멀리 시에나에서의 전황이든, 피사에서 일어난 해전의 결과든 바깥에서의 정보들을 물어왔네.”
“그, 그렇지?”
“그리고 매번 이렇게 연초도, 찻잎도, 다구(茶具)도 들여오고.”
“다 알고 있는 걸 뭘 새삼스레….”
“아니,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네.”
―“마, 막아!”
―“무슨 소리야! 저걸 어떻게 막아! 그, 그냥… 항복! 항복!!!”
“바깥이 뭔가 소란스러운….”
“물건도 들여오고, 정보도 들여오는 상황일세.”
갑자기 경비병 중 한 사람이 그들이 앉은 응접실로 난입해 온다.
깜짝 놀란 벗이 의자에서 일어나나, 로드리고는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서 끌 뿐이다.
“그러면 내가 왜 바깥으로 정보를 내보내지는 못 하겠나?”
“로드리고 추기경이십니까?”
“맞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벗이여,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자네, 내가 부탁해 놨던 건?”
“여깄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