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85
“하하, 마분지를 씹는 질감일 겁니다. 관상용으로 만족하시죠.”
회의가 끝난 이후로는, 은퇴 뒤의 생활 준비에 대한 이야기나 나누면서 바빌로프와 시시덕거렸고.
“…동지?”
이홍위와 마주해야 했다.
깨어난 뒤에 다시 만난 조선국 대군주의 표정은 ‘복잡했다’.
복잡했다, 라는 표현의 의미는 그를 보고 트로츠키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홍위라는 사람은 자기 감정을 능숙하게 숨길 정도로 철두철미한 철혈의 정치인이 아니다. 그렇게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얼굴을 들고서 자신에게 왔다는 것은, 트로츠키에게 품은 심경 자체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의미일 터.
이홍위는 트로츠키를 이끌고, 소련 정부 청사 한편에 마련된 다실(茶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이홍위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입에는 다디단 다과를 넣고 우물거리면서 트로츠키를 살폈다.
“…안색은 이제 괜찮아 보이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동지라고 해 주시오.”
“예, 동지.”
“….”
이홍위는 이번에는 트로츠키의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마냥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동지가 없던 기간이 한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많은 생각이 들더구려.”
“….”
아마 다들 그랬을 것이다.
공산당 지도부는 집단으로 공황에 빠져 순간 중추 신경계가 마비되었을 것이고.
사회혁명당은 볼 것도 없이 행복의 나라로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스피리도노바가 갑자기 고꾸라지면서 바로 피폐한 내전으로 빠졌을 게 뻔하다. 하하, 이건 즐겁다.
그리고 조선은….
“모두가 충격 받고 슬퍼하였소.”
“….”
“신숙주 동지 빼고.”
“그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하, 농담이오.”
“….”
“아무튼, 다들 잠시간의 충격이 가신 이후에는 그대가 떠난 뒤의 소련에 대해 상상하더군.”
겨울에 태어난 파리에게 세상은 눈과 얼음판과 썩지 않는 동물들의 사체다.
여름에 태어난 하루살이에게 세상은 태양과 아지랑이와 말라 가는 샘물이다.
그리고 소련 30년의 역사를 보아 온, 소련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소련이란….
“곧 트로츠키 동지요.”
30년 동안의 집권이라니, 웬만한 독재자도 이뤄 내기 어려운 성과를 용케 빌빌거리면서 달성해 냈다.
수차례의 위기, 수십 번의 탄핵 기도와 수천 번의 반대 시위를 거치면서 걸어온 30년.
때로는 철혈의 통치자 같다가도, 어느 때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소련은 곧 트로츠키였다.
스탈린주의자라는 말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도 곧 역사 속으로 흩어지고 사라졌다. 트로츠키의 존재는 공기처럼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홍위는 트로츠키를 변함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트로츠키는 그 눈동자 속에 얽힌 수많은 감정 속에서 애수를 읽어 내었다.
“…제가 얼마 남지 않았지요.”
“우리가 그대를, 떠나보낼 때가 말이요.”
“너무 당연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는다.
트로츠키는 사람이다.
고로 트로츠키는 죽는다.
누군가는 트로츠키를 현현하는 공산주의의 화신 정도로 숭앙한다 하더라도, 그는 유치한 망상일 뿐이다.
트로츠키는 나잇살을 먹어 배가 나오고 팔다리가 깡말랐으며 노안이 와서 돋보기 없이는 글도 못 읽는 사람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은 죽는다.
“그대의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해 놓았소?”
“무슨 뜻입니까?”
“그대가 떠난 이후의 소련은 어떻게 될지, 그대의 후임은 어떻게 될지 같은 것들… 그런 것들 말이오.”
이홍위의 질문에서, 트로츠키는 이홍위가 그 당연한 사실을 잠시 잊었음을 깨달았다.
“폐하.”
“동지라고 불러 주시…”
“폐하.”
…소중한 제자를 위한 마지막 수업이다.
“저는 후임 인민 위원장이 누가 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당은 계획을 짜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트로츠키는 방금 바빌로프에게 받은 양파 씨앗을 내밀며 말한다.
“제가 돌볼 것은 이제 곧 강원도 북부의 행정 구역 개편에 대한 서류가 아니라, 세 가지 색깔로 자라나는 양파입니다. 보십시오. 이 양파는 껍질이 주황색인데, 이놈은 보랏빛이라더군요. 이걸 뽑아다 걸어 놓으면 보기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대는 소련의….”
“저는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입니다. 골골대는 노친네죠. 곧 죽을 겁니다.”
방금의 삼단 논법에서 도출한 결론을 약간 수정해야겠다.
“저따위의 사후 안배와 그림자에 영향을 받고 흔들리는 체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존망이 달린 사회는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소멸합니다. 아니면, 그 우상의 죽음을 외면하고 그의 시체를 되살려 좀비처럼 만들겠죠.”
피와 살로 된 인간은 죽어야 한다.
그들의 넋두리와 망령과 아집과 잡념이, 훗날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악몽처럼 짓누르는 일이 없도록.
“저는 죽을 겁니다. 저는 정치꾼들의 흑마술 속에서 되살아나, 썩은 몸을 움직이는 시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훗날의 소련에 대해, 트로츠키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후계자 따위 없다. 소련의 모두가 영원토록 새기고 따라야 할 유고 같은 것도 남기지 않는다.
소련은 역사에 따라 흘러갈 것이다.
그 행보의 끝에 해방과 자유가 있기를 바랄 뿐.
이홍위는 트로츠키를 내려다보고는 조용히 말한다.
“…동지의 말을 기억하겠소.”
그러나 누군가는, 어느 늙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혁명가를 기억해 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대군주 동지를 믿겠습니다.”
그런 이를, 후계자라고 해도 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로츠키는 은퇴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는 그의 텃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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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의 (8)
원산 외곽에는 어느 러시아인 노부부가 사는 작은 저택이 있다.
외관이 대단히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련 사회 일반에서 아직 실험적으로 쓰일 뿐인 자재나 공법들이 여러 곳에서 유감없이 활용되어 마감이 깔끔하다.
거기에 그 구조나 장식이 세련되게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심미안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단층 저택을 건축한 이의 능력과 노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탄하던 이들은 저택의 뒤뜰에 마련된 어느 통나무집을 보고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었다.
소박하기보다는 조잡하고, 기능적이라기보다는 투박한 별채.
“…여기를 지을 때 마이어가 엄청나게 반대했었네. 다른 부분은 웬만하면 마이어의 원안대로 따랐는데, 이 부분만 내 고집을 꺾지 못했지.”
“왭니까?”
“위대한 혁명가의 말년이라면서 사진 같은 거 찍을 때, 검소한 이미지를 연출하기 좋잖나?”
“….”
“농담일세.”
바빌로프나 에드워즈, 블레어 등을 초대한 트로츠키는 오랜 동지들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냥 정말 별생각이 없었네. 노친네 망령이지. 왠지 허술하고 하찮은 공간 하나쯤은 갖고 싶었어. 이 별채를 빼면 저택이 너무… 빈틈없이 훌륭했으니까.”
“정말 그런 이유가 맞습니까?”
“그럼.”
트로츠키는 주름진 손에 작업용 장갑을 끼고서 거슬거슬한 통나무 내벽을 쓰다듬었다. 잔가시가 많아 맨손으로 만지기도 뭐했다.
안에는 이런저런 종자가 담긴 선반, 호미나 물뿌리개, 간단한 침상과 전화와 벽난로뿐이었다.
“하지만 이 뒤쪽의 풍경은 절대로 이곳처럼 초라하지 않다네.”
트로츠키는 주석으로 된 찻주전자를 기울여 뜨거운 물을 모두 비운 뒤, 잔을 들고 일어나서 뒤뜰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한번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가? 나 혼자선 힘들어서 아들이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는데….”
아주 작게 피어난 불꽃들.
은과 색유리와 에나멜로 만든 작은 종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색색의 꽃들이 여기저기에 구름처럼 떠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바빌로프가 작은 탄식을 터뜨리자 트로츠키가 함박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것보다도, 저 나무를 봐 주게.”
트로츠키는 순무와 당근밭을 건너 걸어가면서 약하게 헉헉댄다. 손님들의 걱정하는 시선을 손을 훼훼 휘둘러 뿌리치고는 손가락으로 기묘하게 휘어진 어린나무를 가리킨다.
철사와 말뚝으로 이리저리 뒤틀려 있는 형태가 마치 거대한 분재 같기도 하다.
“바빌로프 동지, 저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식물학자지만 조경에는 조예가 없어서.”
“살아 있는 의자일세.”
어리둥절해 하는 동료들에게 트로츠키가 말한다.
“나무를 특정한 형태로 고정해서 가구의 모습으로 만드는 걸세. 아직은 나무가 충분히 자라지도 않았고, 형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완성만 된다면 누가 봐도 의자처럼 보이도록 자라나겠지.”
“…꽤나, 오래 걸릴 듯합니다만.”
담배를 태우던 블레어가 머뭇머뭇 말하자, 트로츠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작게 웃음 짓는다.
“그래, 몇 년은 족히 더 걸릴 걸세. 내가 이 의자에 앉아서 쉬지는 못하겠지.”
트로츠키는 뒤를 돌아본다.
…그래도 짧은 시간 안에 꽤나 훌륭한 정원을 일궈 내었다. 혼자 다 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래도 그 역시 이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꽤나 공헌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도, 대강의 설계는 가까운 가족들한테 전해 주었네. 그리고….”
트로츠키는 배낭에서 수첩 몇 개를 꺼낸 뒤 여기 모인 이들에게 넘긴다. 펼쳐 보니 간단한 스케치와 이런저런 식물들의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그것 때문에 자네들을 부른 것이기도 하네.”
트로츠키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흩어지며, 차분함만이 남는다.
“내가 이걸 완성 못 하면… 대강 심심할 때 찾아와서 보살펴 주게. 노인네 취미 거들어 준다 생각하고. 아마 내 아들 세르게이가 도와줄 걸세.”
아마 완성 못 할 테다.
대뜸 이런 말을 들어 버린 손님들은 얼떨떨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고. 그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트로츠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부담 갖지 말고… 난 그냥….”
―따르르르르르.
그리고 이 순간에 절묘하게 울리는 전화 소리. 작은 금속이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에 트로츠키는 급히 걸어가며 수화기를 집어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트로츠키가 잠시 당황하였지만, 그 너머에서는 어느 관원의 간청이 이어진다.
그러다 수화기 너머로 엿들리는 목소리가 변한다. 손님들은 그 목소리가 말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지 …방문 …부탁이오….”
“…알겠습니다, 동지.”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가 경어를 쓸 상대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저 너머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는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저기, 초대해 놓고 내 미안하게 되었네. 갈 곳이 생겼어.”
대강 그의 행선지를 짐작한 손님들은 뭐라 말을 더 붙이지 않고 일어날 채비를 한다.
트로츠키는 얼마 안 가 한양행 열차를 잡아탄다.
오랜 벗을 만나러, 인경궁에 간다.
* * *
세계의 어떤 군대도 감히 이 혁명의 수도를 범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
사대문 안의 면적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게 된 한양의 인구·경제 규모에 대한 고려.
그리고 만일 이곳까지 적들이 당도했다면 구시대의 낡은 껍질인 석성 따위가 도움이 될 수 없으리라는 실리주의적 판단.
그를 근거로 한양 도성의 일부분은 한창 해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도성의 일부분이 철거된 뒤 도로와 철로가 깔렸고….
“이제 마차를 타고 한양 시내까지 오지 않아도 되어서 좋지요.”
태우던 담배의 불을 죽이고서, 한 남자가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박팽년 동지.”
“트로츠키 동지, 회의가 아닐 때 뵌 것이 얼마만인지요.”
“어쩌면 1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네.”
“하하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서두르지요!”
박팽년이 비서로 보이는 이를 향해 손짓하자, 거대한 한양 역사의 문 바깥에서 마차가 달려 들어온다.
딸랑딸랑 종을 울리며 마차가 몸을 움직이자, 창밖의 풍경이 환등상처럼 빠르게 지나쳐간다.
뭘 기념하는지 주장하는지 모를 대로의 가두 행진, 자전거로 거리를 질주하며 신문을 던져 대는 배달부들, 10층 또는 그 이상의 높이로 솟아오른 고층 건물들과 그 사이에서 떡이나 꼬치 등으로 간단히 요기하며 뛰어다니는 흑립 부대….
이리저리 뭐가 그리 바쁜지 벌처럼 쏘다니는 사람, 간식을 한 손에 마실 거리를 다른 손에 쥐고서 산책하듯 걷는 사람, 길가의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사람….
그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엮여 만드는 진귀한 풍경에, 트로츠키와 박팽년은 잠시 홀린 듯 시선을 두었다.
“질리지도 않는 광경이군요….”
박팽년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고개를 돌린다. 트로츠키의 매부리코는 햇빛을 받아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기도 그만둔 듯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가 미련을 놓는 방식 중 하나인가?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박팽년은 트로츠키에게 소맷부리에서 꺼낸 책자를 건넨다.
“이건, 폐하의 최근 저작 초고입니다. 한번 훑고서 조금 이따 페하를 뵈었을 때 같이 이야기나 나눠 주시지요.”
그 제목을 훑은 트로츠키는 피식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시답잖은 잡담이 조선의 세 정당 사이의 세력 구도나 자동차 산업의 전개 현황, 만주국 북방 지역의 본격적인 경제 개발로까지 이어지다 보니 점차 마차 바깥에서 와글거리던 소음은 줄어들고 어느새 정숙한 분위기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