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86
아까보다 층고가 급격하게 낮아진 건물들, 곳곳에 꽂힌 붉은 깃발과 민련, 인민당, 공산당 세 주요 정당의 상징들.
각 정당의 당사들이나 주요 관청들이 자리한 도심 지역, 이곳에는 층고 제한이 걸려 있어 건물들이 어느 높이 이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한다.
그 층고 제한의 기준은,
“경복궁이로군.”
이 도시에서 30년 전과 같이, 변하지 않은 듯한 이전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은 저것뿐이다.
물론 착시다. 저 또한 복원 사업을 통해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을 뿐, 이제는 거창한 의례가 없는 한 사용되지 않는 조용한 상태일 뿐이라는 것 자체가 변화가 아닌가?
한양의 무엇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이 없다. 지형도, 건물도, 기물들도, 사람도.
마차는 경복궁을 지나쳐 계속 동편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주위의 4, 5층 규모의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솟아오른 고층 건물들의 숲이 서 있다.
마치 번창하는 도시의 일부분을 뚝 떼어다 놓은 듯한 모습.
박팽년도, 트로츠키도, 그 풍경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익숙하게 응시한다.
“인경궁에 거의 다 왔군요.”
기와와 목조와 강철과 유리로 건설된 한양의 심장.
마차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그 대문을 향해 걷는다.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관원들은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를 올릴 뿐, 급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뒤로도 문턱을 몇 번이나 넘고 담장을 몇 겹이나 지나치고 나서야 그를 초대한 장본인을 볼 수 있었다.
“트로츠키 동지, 앉으시오.”
노구에 어울리지 않게 오랜만에 긴 여정을 감행했더니, 트로츠키의 몸에는 노독이 잔뜩 쌓였다. 어디서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만큼 사양 않고 계단을 올라 누각에 앉으니, 대도시의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록이 펼쳐져 있다.
인경궁의 원림에서는 곳곳에 심어진 오얏나무가 개화기를 맞아 조금씩 하얀 꽃망울을 들이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새가 지저귄다. 박팽년은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간다.
마침내 둘만이 남았을 때 조선의 대군주, 이홍위가 말을 꺼냈다.
“트로츠키 동지, 아마 병부시랑이 전해 준 초고는 읽어 보았으리라고 믿소.”
“이걸 제게 전해 주시다니 참 고약하십니다.”
트로츠키는 말과는 다르게 즐겁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박팽년에게서 받은 종이 뭉치를 꺼내 놓는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평전’
“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여 주는 게 아니겠소?”
이홍위는 트로츠키에게서 돌려받은 평전 초고를 찬찬히 넘겨 가며 묻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무엇을 감추고 싶거나 드러내고 싶은지 산 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 아니오?”
“…그거야 그렇군요.”
“내용이 완성되지 않아 부족함도 많고, 그대에게 더 묻고 싶은 것도 많다오.”
이홍위가 그에게 낱장 낱장을 꺼내어 내밀자 트로츠키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이홍위와 함께 읽어 나간다.
“언제 인터뷰를 다 하셨답니까?”
“인민 위원들 간의 회의가 끝났을 때, 조선 사람이라면 평상시에 궁으로 불러서.”
그리고 트로츠키에게 웃어 보이며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가 모를 때.”
“꼭 제가 몰랐어야 했습니까?”
“그럼, 당연한 일이지. 그대가 손을 대면 객관성이 떨어지잖소? ”
에드워즈, 블레어, 유자공, 최금옥, 스피리도노바….
그와 연이 있고, 함께 일했던 거의 모든 이들에게 면담을 시도하거나 최소한 질문지라도 돌려 본 듯했다.
“그대에게 직접 묻고 수정해야 할 것들은 맨 마지막까지 미뤄 두었소. 이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어느 정도 완성이 될 것이오.”
이홍위는 트로츠키가 내용 대부분을 훑어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수첩과 펜을 소매에서 꺼낸다.
“그러니 지금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런저런 인터뷰 요청들이 있어 왔고, 기자 회견도 수없이 겪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술하기를 요구받은 적은 없었다.
평전이 쓰이기에는, 그가 아직 왕성히 활동 중이었으니까.
이제야 모든 것을 정리할 순간이 왔으니까.
“트로츠키 동지, 동지는 본인의 창작극을 통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반성하고 있소?”
“…꼭 그 질문부터 나와야 했습니까?”
“제일 많은 이들의 요청을 받은 질문이라 그렇소. 에드워즈, 블레어, 에티앙블, 스피리도노바, 로… 사실상 전부로군.”
“다른 것부터 하죠.”
“흠, 알겠소.”
이홍위는 미련이 담긴 듯 머뭇거리다 수첩의 맨 윗장을 뜯어 내고 새로 쓰기 시작한다.
그 뒤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에드워즈나 블레어 등을 콕 집어 험담하는 트로츠키의 태도에 이홍위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모름지기 평전에는 서문에 들어갈 괜찮은 장면이나 질문이 있어야 하겠지.”
이홍위는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듯 새 수첩을 꺼내 펼친다.
즐거운 표정이다. 그가 천상 학자라 불리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집필에 열심이다.
“약간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겠다만, 정 힘들면 그냥 그럴듯한 대답 하나 던져 준다 생각하고 답해도 되는 질문이오.”
“대체 뭐길래 그러십니까?”
“크흠.”
이홍위의 펜 끝이 멈춘다.
일찰나 트로츠키는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동지가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는 무엇이오?”
순간 그는 이홍위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침묵 말고 다른 대답을 꺼내지 못하다가, 이홍위의 두 번째 질문이 날아오고서야 힘겹게 사고가 작동한다.
“동지가 혁명가가 된 이유가 무엇이오? 보통 그대와 같은 사람의 평전을 집어 들었을 사람들이 묻고 싶어 하는 질문일 게요.”
“….”
“그런 만큼, 방금 이야기했듯 그럴 듯한 대답만 남겨 주면 되오. 세인들이 이 책을 읽고 그대를 평하며 기억할 테니. 그저 후대에 남기고픈 모습대로 이야기를 해 주어도….”
“정말, 전혀 모르겠군요.”
트로츠키는 머릿속이 멍해진 상태다.
무슨 저주라도 걸린 듯, 그는 입을 다물고서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다.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아 온 질문이다.
이홍위의 저 분석하는 듯한 눈동자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공산주의자? 혁명가? 노인? 스승? 멘토? 동지?
별것 아닌 질문이다. 이홍위가 이야기했듯 아무렇게나 답해도 되는….
그 몰아치는 잡념들을 물리치고서… 트로츠키는 말을 꺼냈다.
“사람은 보통 관성으로 움직입니다. 제 인생의 아주 초입의 어느 순간부터 저는 공산주의자였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트로츠키는 마치 시집을 읊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얼핏 질문과 상관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홍위는 신중하게 그의 말을 옮겨 적는다.
10대 때다.
그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처음 부른 것은.
“많은 이들은 그런 관성에 따라 움직이며 사는 데 궤도에 오르면,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춥니다. 이전에 정한 방향이 옳았기를 바라면서 그대로 나아가지요. 경제적인 판단입니다. 이미 결정하고 걸어온 길에 의심을 품고 서성이는 것보다는 앞을 보는 게 낫지요.”
지하 독서 모임에서였고, 그의 연인 알렉산드라 스콜롭스카야가 그에게 마르크스를 가르쳤다.
유대 공동체의 자유주의자에서, 인민주의자를 거쳐, 과학적 공산주의자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그는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서 알렉산드라와 첫 결혼을 마쳤다.
“하지만 정치인은… 다릅니다.”
시베리아, 추방, 고통, 탈출, 딸들의 죽음….
소년 ‘브론시테인’은 그 끓어오르는 고통 속에서 청년 ‘트로츠키’가 되었다.
망명자 트로츠키는 나라 없는 사람이 되었고, 온 유럽을 배회하는 유령이 되었다.
“끊임없이 후회해야 합니다. 때로는 매 순간 말을 바꾸면서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야 하고, 또 반대로 원치 않더라도 어떤 입장을 고수하기를 강요받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를 영영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계 대전, 혁명, 집권, 내전.
건국, 집권, 레닌의 죽음, 패배, 다시 추방과 망명….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지난날들.
이제 레닌과 함께 걸었던 빈의 어느 거리로 가더라도 익숙한 카페의 간판이나 전차 따위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것이다.
말똥냄새 나는 중세의 시궁창에서 파리가 끓고 근친혼으로 피가 혼탁해진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궁성 안에서 으스댈 뿐이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 상태로 머무른 적은… 없습니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떨고 있는 줄도, 눈가에서 턱까지 투명한 선이 그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한다. 이홍위는 그의 말을 말리려다 멈춘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묻습니다. 너는 공산주의자인가? 너는 혁명가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합니다.
그렇다. 나는 브론시테인이 아니라 트로츠키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는 말했다.
“제가 왜 공산주의자냐고, 혁명가냐고 묻는다면 그건 제가 매 순간 저를 보고 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번 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너는, 료바는,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고 혁명가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돌리고 싶은가? 세계가 그 무거운 궁둥짝을 쳐들고서 일어나 다시 전진하기를 바라는가?
물론이다. 내 자신의 피와 기름이 역사의 윤활유가 된다 하더라도.
나와 타인의 피를 얼마나 많이 흘리더라도, 어떤 부덕과 악행 속에서 잠기더라도, 고통 속에서 살고 또 죽어 가게 된다 하더라도.
트로츠키는 그리 말하고서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다. 이홍위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인경궁의 누각들, 고층 건물들을 지나 정문으로, 다시 마차를 타고서 운종가로….
그 모든 세상의 음향과 색채와 역동들.
환희와 고통과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좌절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맥동하는 심장과 운동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
모든 것이 흐르고 움직인다. 매 순간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모든 것은 운동 속에서, 순간순간의 호흡 속에서 살아 있는다.
이홍위는 피로에 잠긴 듯 서서히 눈이 감겨 가는 트로츠키를 보며, 트로츠키는 창밖으로 명멸하는 한양의 풍경을 본다.
트로츠키는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너는, 할 일을 했는가?
그렇다.
그러니 나는 공산주의자다.
트로츠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아늑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完)
인경궁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바빴다.
전임 인민 위원장,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정권의 대표자는 은퇴하더라도 쉽게 은퇴할 수 없었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수많은 집회, 식사 모임, 강연회, 학술회의 등에서는 누구나 이 막 ‘시간이 남아돌게 된’ 노회한 정치인을 초청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게다가 정치인이란 신세를 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게 만드는 것이 일이다 보니 트로츠키로서는 그런 자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동안 져 왔던 빚들을 갚아야 했다.
“트로츠키 동지? 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오늘만 여덟 번째로 연설을 하고 다섯 번째로 식사 약속을 잡은 상태인데… 좀 바로잡아 주겠나?”
한동안 안 쓰게 될 줄 알았던 비서와 경호원들이 다시 그의 옆에 붙었으니, 그는 여전히 공인이나 다름없었다.
늘어지게 즐기는 낮잠이나 한가로운 산책 등을 기대했건만, 피곤한 식사 예절과 접대용 미소에 여전히 시달리다니….
그래도,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동지, 우리가 구세계의 기술력을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나는 공학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군. 이제야 막 제대로 된 자동차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1936년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는 또 몇십 년이 걸리지 않겠나?”
트로츠키에게 말을 걸었던 마이어는 천천히 과학기술박람회를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성과들을 음미하고 있었다.
다소 원시적인, 흙으로 만든 항아리나 벽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저것들은 아프리카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보낼 소위 ‘적정 기술’ 개발의 성과들이다. 저것들을 잘만 움직이면 화로가 되고, 냉장고가 된다던가.
그리고 저기는 디젤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사가 디젤 엔진을 내놓은 것이 1923년이라고 하니, 적어도 엔진 공학에 있어서는 1920년대까지 따라잡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석유는 어디서 구하나?”
“몽골이 페르시아만 일대를 장악했고, 저희가 남(南)오스만과 이런저런 무역 협정을 맺지 않았습니까? 뭐, 그게 아니더라도 캘리포니아가 있지요.”
“하기사….”
지금 소련 영토가 아마 대영 제국보다 넓을 텐데 그중에 유전 지대 하나 없으려고.
“어쨌건 방금의 질문에 답한다면, 한 30년은 더 걸리지 않겠나?”
지금까지 30여 년. 조선 내의 인구가 수백만씩 뛰어오르고, 세계 모든 대륙과 대양에까지 소련의 영향력을 뻗치는 데까지 걸린 시간.
열차가 만주에서 제주까지 나다니며, 한양에 고층 건물들이 올라가기까지 걸린 시간.
15세기의 농업 국가에서 이제 전화와 인쇄기와 강철선과 자동차를 생산한다.
이미 밝혀진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를 재현할 의지도 있다. 다시 30년만 있으면 조선과 소련은 20세기의 문명을 온전히 재건할 것이고 100년이 있다면 전 세계가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면 말입니다, 동지.”
온갖 신기한 기물들 사이로 트로츠키를 안내하던 마이어가,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 앞에는 팻말이 서 있다.
‘지구는 이성의 요람이다. 그러나 영원히 요람에서 살 수는 없다.’
물리학자 치올코프스키가 남긴 경구다.
트로츠키가 그 글귀를 읽는 모습을 보며 마이어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사람이 우주로 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우주 여행―꿈이 아닌 미래―을 향해 가는 인류!”
“이런… 전시관도 있었던가?”
“물리학자 소비에트들에서 강력히 주장하길래 급히 기획에 끼워 넣었다 하더군요.”
“뭐, 아직도 조선과 만주의 인구 대부분은 흙을 파먹고 사는데 우주라니 너무 거창하지만.”
“제정 치하의 러시아는 뭐 달랐겠습니까? 치올코프스키가 겪었던 러시아도 그랬을 텐데.”
…생각해 보니, 전심전력으로 달려오기는 했다만 30년만에 러시아 제국의 수준을 따라잡았다. 차르가 다스리던 러시아란 정말 어떤 의미에서 봐도 대단했다.
트로츠키가 약간 관심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마이어가 설득하듯 말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무한한 공간으로 뻗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하늘에는 천국이 아마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