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3
역시, 몇 초 동안 침묵이 감돈다. 트로츠키는 답답함에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외친다.
“아무라도, 아무거나 좋으니 의견만 내시오. 아무리 말도 안 되더라도, 정말 허무맹랑할지라도 아무튼 문장으로 내뱉을 수 있으면 내뱉고 보시오!”
“정말 아무거나라도 괜찮습니까?”
“아 바빌로프 동지, 말씀 먼저 꺼내주시면 감사하겠소.”
“아예 우리가 먼저 중국을 쳐부순다면 어떻겠습니까!”
트로츠키의 독려에 바빌로프가 호기롭게 제안했으나 당연히 트로츠키의 반응은,
“아··· 그건 좀···.”
“···역시 안되겠죠?”
“아니, 울지 마시오! 괜찮소! 처음으로 의견을 내기 정말 힘들었을 텐데 가장 먼저 나서준 바빌로프 동지께 모두 박수 부탁하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바빌로프의 첫 번째 안 기각.
아예 무기를 자체생산 돌릴 산업능력을 갖추자는 베순의 의견도 쳐냈다.
이 쬐그만 땅뙈기에서 탄약공장 돌리고, 그 원료들을 어찌어찌 마련해서 그걸 가공할 여유가 없다. 그 모든 걸 원산 근교에서? 그 전에 켈틱 1호에 명나라 군기가 꽂힐 것이 뻔하다.
결국 무기 생산을 생각하려 해도 조선 곳곳을 소련이 적극적으로 장악하기 전까지야 불가능한 얘기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베순 동지가 조선에서 온 망명자분들을 안내할 때 진행된 회의 결과, 병장기의 자체적 수급은 힘들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끙··· 그럼 이번 안도 기각이군요.”
그 다음으로는 문화예술인민위원 에릭 블레어.
“미···미국으로 도망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직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당도하기까지 40여 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우리가 아예 신대륙으로 향하는 최초의 구대륙인이 되는 것은···.”
“그것도 기각. 선박도 아직 다 못 고쳤고, 애초에 RMS 켈틱도 SS 게르마닉도 대서양에 최적화된 기선들이오. 안 그래도 워낙에 노후해서 수명이 간당간당한 증기선들을 끌고 중간 기착지나 저탄소(貯炭所, 석탄을 저장해두는 장소)도 안 거치고서 어떻게 태평양을 건넌단 말이오!”
“아니, 왜 제 제안에만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허무맹랑해도 너무 허무맹랑하지 않소! 차라리 남극으로 가서 펭귄 군단을 이끌고 조선에 돌아온다는 쪽이 현실성 있겠소!!”
“아니 아무거라도 좋으니 의견 좀 꺼내보라던 건 트로츠키 동지 본인 아닙니까?”
“아, 그 아무거나란 게 진짜 아무거나라는 뜻이 아니잖소! 왜 이렇게 눈치가 없소!”
블러어가 트로츠키를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음식 배달시킬 때 ‘아무거나, 네 맘대로.’라고 말해놓고 나중에 투정부리는 사람 보듯 하였다.
그 와중에 푸츠는 “꾹꽉, 꾹꽉꽉 꾹!”하며 펭귄들에게 전쟁 준비 연설회를 개최하는 트로츠키를 상상하며 웃음이 터졌다가, 트로츠키의 싸늘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다시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다시 침묵.
누구도, 아무 말도 없이 약 2분 정도 지나자 트로츠키의 머릿속에는 슬슬 ‘···우리 좆된 건가?’라는 생각이 진지하게 피어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제발 어디서 해결책이 뚝, 하고 떨어지기를 모두가 고대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해결책이 있기나 한 건지···
“늦어서 정말로 송구하옵니다!”
“···로 동지? 결원 1명 지우고 지각으로 바꿔주시오.”
“예, 기록했습니다.”
급하게 들어온 신숙주는 뭔가 기묘하게 지쳐 있고, 또 다크서클이 눈 밑에 길게 늘어진 모습.
그런데 묘하게 눈빛이 생생히 불타오르고 있다. 마치 부두 주술로 살려낸 좀비 같다.
“크흠, 혹시 동지께선 하고 싶은 발언 없소?”
트로츠키가 신숙주에게 슬쩍 눈치를 보낸다.
‘제발, 뭐라고 헛소리라도 지껄여 봐!’
‘이 침묵을 좀 깨 봐!’
그리고 신숙주는,
“물론입니다! 트로츠키 동지!”
호기롭게 대답한다.
···그런데,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다.
트로츠키 ‘동지’? 트로츠키 ‘의장’이 아니라?
신숙주는 회의실 칠판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더니 뭔가 손에 들고 있던 큰 종이를 주섬주섬 펼쳐서, 칠판에 고정한다.
지도다.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그 주위의 세계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온갖 기호와 글씨가 난잡하고 복잡하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 지도의 상단에는 제목으로 보이는 것이 한문으로 크게 쓰여 있다.
‘동아시아 공산주의 혁명 대전략’
트로츠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제야 신숙주의 두 눈에 가득한 것이, 생기가 아니라 광기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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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봉건주의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오직 소련만이 타오르는 공산주의의 붉은 기치로서 도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의 붉은 물결을 위협하는 반동적 세력들은 곳곳에 잔존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동아시아에서 ‘앙시엥 레짐(Ancient Régime)’의 마수는 궁극적으로 바로 이곳! 중화로부터 뻗어 나옵니다. 그리하여 소련의 생존과 더 나아가 공산주의적 이념의 생존 그리고 확산을 위해서는 우선 중국 중심의 지배 권력으로부터 멀리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략··· 충격과 공포.
인민위원들은 물론이고 조선에서 온 신료들과 어쩌다 불려 나온 이명민까지, 안색이 새파래지는 것이 얼굴에 ‘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오직 이홍위만이 아직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신숙주는 열변을 이어갔다.
“소련의 생존은 곧! 역사의 진보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발달된 물적 토대를 미흡하게나마 갖추어 나가고 있는 이 소련이 봉건사회들을 분쇄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근대의 씨앗인 것입니다!”
어··· 틀린 말은 아니다. 미사여구가 휘황찬란하게 들어갔지만 의외로 마르크스주의라든가, 역사학, 경제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있는 수사들이다.
단지, 이러한 말들이 그 ‘앙시엥 레짐’에서 나고 자란 봉건 관료의 입에서 총알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지.
아니,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대체 ‘앙시엥 레짐’ 같은 표현은 어디서 배워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민위원들은 낯선 문화와 언어에 완벽히 적응한 신숙주의 천재성과, 말도 안 되게 신속한 태세전환, 그 두 가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 보한재? 질문이 있네만.”
“나를 ‘보한재’라 부르지 마시게! 자호(字號)란 봉건적 유습이니 이름으로 부르시게, ‘박팽년’ 동지!”
“업··· 어버버법···.”
“그럼 신숙주 동지, 질문이 있네만?”
“예, 전하. 무슨 질문이 있으시옵니까?”
“자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게 봉건 유습이라고 하지···”
“하위지 동지! 지금 전하의 앞에서 무슨 불측한 망발인가!”
문득 바빌로프는 조선에서 종자를 수집하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건 뭡니까? 일본인들도 먹는 콩나물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두꺼워 보이는데?”
-아 이것은 숙주나물입죠. 빨리 쉬어서 신숙주란 개새끼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요.
-아니 신숙주란 인물이 누구기에 그리 욕을 하십니까?
-뭐, 변절 하면 신숙주고, 신숙주 하면 변절 아니겠습니까? 저놈이 스스로 뫼시던 임금님을 배반했으니 이리 욕을 먹어도 싸죠.
그제야 얻은 깨달음.
발전과 변절은 한끗 차이다.
그리하여 경악에 빠져 있던 좌중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발견했다.
동아시아 전역의 무역망과 외교관계를 표시해 놓은 복잡한 약도의 한구석을 가리키는 신숙주의 모습을.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동아시아에 속하면서도 그 국제적인 질서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는 곳! 중국 중심의 지배체계로부터 살짝 떨어져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곳은 어딥니까!
북방? 아닙니다! 중국과 유목민들 사이의 긴장 및 대립 양상은 오히려 중국에 대한 그들의 의존적인 관계를 선명히 보여줄 뿐입니다.
조선? 당연하지만 역시 아닙니다! 도리어 현재의 조선은 중국의 국제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최중요 번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국과 동떨어진 곳.
중화로부터 권위를 빌리지 않는 ‘황제’의 상징적인 지배가 이뤄지는 곳.
어느 정도 거대한 규모의 인구와 국토를 보유한 곳.
그러면서도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혼란스러운 곳.”
신숙주의 손가락이 닿은 곳은 바로 한반도 동쪽의 호상 열도, 네 개의 커다란 섬이 자리잡은 나라였다.
“여러분, 저는 일본으로의 진출을 제안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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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네 미쳤는가?”
“어찌 오랜 친우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가?”
“그야 자네가 미친 것 같으니까 미쳤다고 말하지 않겠나!”
“흐음··· 전혀 이해할 수 없구만 그래.”
“자네는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고 임금의 말씀을 받잡아 이 땅을 덕화시켜야 할 사대부가 아닌가? 어찌 선비 된 자로서 제 책임을 방기하고 그 입에 오랑캐 같··· 아니 이국의 말을 주워섬기는가!”
자신들을 보살펴주는 이들을 오랑캐라 부르는 것이 실례되는 일이라 여겼는지, 박팽년은 쏘아붙이다가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신숙주는 일부러 보란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나를 사이비(似而非)라 할 셈인가? 이단(異端)이라고? 그리고 트로츠키 의장과 소비에트 연맹의 모든 이들까지 그리 매도할 생각이라면 납득하겠네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유자(儒者)가 아닌가? 성현들께서 남기신 성스러운 말씀을 어찌 저버리겠는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박팽년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분명, 그의 눈은 트로츠키 의장이 주도하는 경연에도 자주 엿보이던 그런 빛을 띠고 있었다.
주상 전하의 호기심 어린 얼굴, 동경과 열망이 뒤섞인 그 표정을 보면서 박팽년은 오랫동안 가슴이 불편했으리라.
그것은 다른 신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주상을 봴 때면 단순히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유학이 밀려난다는 정신적인 변화뿐만이 아니라, 어떤 심원한 것이 영원토록 달라지시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눈이 세 개가 되는 것처럼, 몸에 비늘이 달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상 전하가 그들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그 복잡한 마음과 시선이 오늘은 신숙주 자신을 향한다.
신숙주 스스로도 이 문제로 몇 날 밤을 지새웠다.
저들의 주장, 저들의 생각, 저들의 사상을 촘촘히 톺아보았다. 미래의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다양한 구라파(歐羅巴)의 언어들로 얽힌 서책들을 빨아들일 듯이 탐독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기를 바랐다.
아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마음속 불안감과 두려움은 가시고 공허함만이 남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 자신과 싸우고 지식들과 씨름하면서 겪었던 변화다.
저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련은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다. 다른 세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저들의 ‘외무인민위원’은 우리네 “예조판서”와 완전히 다르며 같은 관료라 할 수 없다.
어디 관료뿐인가? 농민들도, 대장장이도, 목수도, 어민도, 군인도, 지도자도 모든 것이 비교하는 것조차 벅차다.
그리고 소련의 것이 조선의 것보다 강력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물을 조선에서 어설프게 흉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라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소련은 온 천지를 바꿔놓을 텐데.
이제 저들의 시대가 온다. 원산은 아직 날아오르지 못한 대붕(大鵬)이 머무르는 작은 알에 불과하다. 그 알껍질을 깨는 순간 저들의 힘이 폭발하여 조선을, 명을, 일본을 산산조각 내리라.
신숙주가 그 모든 것을 동료 신료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고작 자신의 어줍잖은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납득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생각의 변화는 생살을 찢고 이마에 뿔이 돋아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기에.
그리하여 박팽년에게 마르크스니, 엥겔스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신숙주는 이렇게 운을 떼기로 하였다.
“자네들.”
신숙주 답지 않은 심각한 어투에 신료들의 이목이 모인다.
“조선이 어떻게 망하는지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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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의 확장주의적 행보 (2)
사실 이야기를 들을 기회 자체는 많았다.
조선의 신료들이 원산으로 망명해왔다. 그것도 왕을 데리고.
소련에 있던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보기에 이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료’ 그 자체.
한동안 신료들의 일과 중 상당부분이 이들 역사학자들을 위한 면담시간에 할애되어 있었으니, 그들의 열광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는 신료들 입장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신료들에게서 정보를 채록해 간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의 이야기, 곧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
자신들이 온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소련인들은 구태여 퍼뜨리려 하지 않았지만, 또 굳이 자신들에게 망명해온 인사들에게 자신이 미래인임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신료들은 그렇게 구라파의 대략적인 역사라든가, 약 500년 뒤의 발전된 문물이라든가, 저들이 국호로 삼은 ‘소련’(신숙주는 조선이 옛 단군의 나라에서 이름 따왔음을 떠올렸다.)의 짤막한 건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억만리 타향의 이야기보다 궁금한 것은 바로 자신의 나라, 자신의 고향의 이야기다.
헌데 기이하게도, 미래의 조선에 대해 물어보면 학자들은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이곳과 밀접한 미래의 지식을 알리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닐까, 싶었다.
구라파의 역사면 몰라도 저들이 발 딛고 선 조선의 역사는 사실상 전략적인 기밀이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여 신료들로서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신숙주는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라졌다.’
원산을 기행하고 온 다음부터, 이번에는 신숙주 쪽에서 학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물산의 생산과 이동을 연구한다는 ‘경제학자’라는 인간들이나, 사상에 대해 논한다는 ‘철학자’들, 하다못해 물과 기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물리학자’에 이르기까지.
소련에 대해, 그리고 소련인들이 넘어왔다는 ‘근대세계’란 것에 대해 알고자 온 힘을 쏟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등 복잡한 언어들이었으나 마치 조선어와 일본어가 그러하듯 서로 닮은 데가 있어 하나를 뚫으면 다른 하나를 배우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학자들에게 열성적으로 매달리니 학자들로서도 자신들에게 신료들이 해준 바가 있고, 또 이리 열정적인 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감복하기도 하여 이런저런 미래의 지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끝내 말하기를 망설이던, 조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일단 덜 충격적인 것부터 말하겠네. 금상께서는 본래 수양에게 살해당하신 것 같으이. 금상 전하 다음으로 수양이 왕위에 오르네.”
“뭐··· 뭐라고? 안평이 아니라?”
“소련에는 조선의 사정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어 그 이상은 알지 못하나, 아무튼 수양의 집권 이후로 수양으로부터 조선의 왕통이 이어진다 하더군.”
“맙소사, 그 정도라면 저들이 우리에게 미래 얘기를 하길 꺼렸던 이유를 알겠군.”
그리고 신숙주가 던진 말에 꽤나 충격에 빠져 있던 신료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박팽년이 곧 지적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무어란 말인가? 자네가 방금 이야기했던 조선국이 멸망한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 것인가?”
“···그렇네.”
신숙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지도다.
“저들의 달력으로 193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83년 뒤의 지도일세.”
483년. 지금 숨이 붙어있는 그 누구도 살아서 이 세월을 견뎌내지는 못하리라.
기백 년의 장구한 시간이 주는 압박감에 모두들 잠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