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54
-책봉이 취소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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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명국에서 따로 사신이 찾아오려는 기색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또 따로 황제 폐하의 조서가 내려온 것도 아닐세.”
조선의 중심. 경복궁 근정전에서 저런 말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주상 전하.
“그런데 이리 흉참하고 또 어리석은 소문이 돌고 있음은 누구의 소행이겠는가? 누구의 이익에 맞아떨어져 퍼지는 헛된 말이겠는가!”
또는 참칭자 이유(李瑈).
물론 이 자리에 그를 그렇게 부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럴 이유가 있는 사람도 없으니.
그는 오로지 안평의 졸개 신숙주와 박팽년 등에게 참살당하신 ‘단종대왕’의 뒤를 이은 조선의 하나뿐인 주상 전하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높으신 전하께서 다시금 역정을 내시는 이 순간에 누구도 무어라 말을 덧붙일 수 없었으리라.
다들 입으로는 참으로 옳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이 되는 소문이 아닌가?’
소문의 내용은 대강 한확을 살해한 ‘수양대군 이유’의 범죄를 알게 된 뒤 격분한 그 누이동생이 대명의 황제 폐하를 움직여 책봉 취소를 이끌어냈다는 것.
수양대군··· 아니 주상 전하께서 한확을 죽이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니만큼,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물론 전하께옵서는 언제나 그를 죽인 것이 갑자기 미쳐버린 종놈의 돌발행동이라고 누누히 해명하셨으나, 한확이 죽은 뒤 최대 수혜자가 그 자신이었던 만큼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이번 책봉 취소가 사실이라면, 그저 모두가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책봉을 취소하는 사신이 오지 않았다? 조서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 또한 누가 임금인지 불분명한 데다 전란에 휩싸여 있는 조선 땅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신료들이 자신을 전혀 신뢰하지 않음을 알기에 주상의 분노는 더더욱 커져만 갔다.
“누군가가, 소문을 낸 누군가가 바로 어딘가에 있지 않겠나? 이 도성에도 이리 널리 퍼진 것을 보아도 누군가 힘과 재물 있는 이가 손을 쓴 것일세!”
그 말에 신료들은 몸을 흠칫 떨었다.
한양에서 힘과 재물 있는 이들이라면 지금 이 근정전에 모여 있지 않은가?
주상의 의심병은 점차 방향성을 잃고 사방팔방 온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갔다.
저것이 암살 위협 이후의 상흔 같은 것임을 알았으니 더더욱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고.
겨우 박종우와 한명회 등 공신들이 나서서 진정시킨 후에야 주상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천천히 식어갔다.
“이리 흉한 소문이 도는 것은 곧 적도들의 간계이옵니다. 하루 빨리 저들을 토벌해야 할 것입니다.”
박종우의 말에 주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모두가 맞장구를 치며 옳은 말이라고 치켜세운다.
실제로도, 이리 정통성이 깎여 나가고 상대의 수작이 교묘해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이든 물질적이든 역량이 소모되고 정권의 안정성이 위협받는다.
빠르게 난을 평정함이, 그들로서도 답인 것이다.
“홍윤성을 경기, 황해, 충청, 강원 4도의 찰리사(察理使)로 임명한다. 모든 군세를 모아 김종서 등의 헛된 야심을 꺾으라.”
“국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렇게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황해도로 온 조선의 군세가 몰린다.
내전의 향방을 결정지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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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전투 (1)
결론적으로 책봉 취소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한계란이 단 아래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사실을 고하자 대소 신료들이 술렁인 것은 당연지사.
한계란 왈, 일전에 고명 받아간 사신들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했으니 이는 제 오빠를 살해한 죄상을 숨기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명 황실의 인척을 살해하였으니 이 또한 대국에 대한 큰 죄가 아니겠느냐 하는 말이 이어졌다.
물론 폐주 주기옥(朱祁鈺, 경태제의 본명)을 옹립한 우겸 등 폐주의 치세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이들을 주살하는 데 바쁘시던 황제 폐하다. 당연히 저 조선 여인의 울음이 가련하여 책봉을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정황들을 보아 한확의 살해 혐의는 확증은 없더라도 의심스러운 것이고, 만일 현 조선국왕이 굳이 한확을 살해하는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이유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반역의 은폐.
만일 천자가 반역자에게 고명을 내렸다 한다면, 이는 대국이 지닌 권위의 실추로 이어지는 것이니 극심한 손해다.
반대로 고명을 취소하고 내전의 향방을 지켜본다 하면, 이 또한 새로이 조선을 평정할 왕이 누가 됐든 그의 목줄을 쥘 수단이다.
불안정한 정통성의 조선국왕에게 고명을 대가로 많은 것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고명의 취소는 일사천리로 결정되었고 그 소식은 민신의 편지와 함께 평양의 김종서에게 부쳐졌다.
물론 정식 사절 따윈 없다. 평양의 칭왕자를 쉽사리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허나 그것만으로라도 대신파는 큰 이득을 얻었다.
편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문을 퍼뜨려 수양의 정통성을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그를 통해 수양의 몸이 달아올라 건곤일척의 전투에 응하도록 강요한다.
공표는 불가하다. 어디까지나 민신의 서신이라는 빈약한 증좌뿐이니, 차라리 출처를 흐리고 사사로운 가담항설(街談巷說)처럼 퍼뜨리는 편이 나을 터.
“적도들이 홍윤성을 위시하여 북상하고 있다 합니다!”
“황해도 곳곳에 퍼져 있던 군세가 한 곳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아마 평양으로 단숨에 치고 들어오려는 수작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승기에 취한 수양대군은 정통성이 흔들리자 참지 못 하고 바로 승부를 걸어온다.
그 결과, 실제로 다급한 쪽은 대신파 측임에도 전장을 고를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우리도 군사를 물려 후방에서 합류할 지원군과 합세하겠소. 우리 군의 우세가 병마(兵馬)에 있으니, 반드시 그를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마주해야 하오.”
그렇게 말하며 이징옥이 가리킨 곳은 바로 황주목(黃州牧)과 봉산군(鳳山郡).
“적들이 평양을 노리거든 반드시 이 두 곳을 거쳐야 하며, 또한 황주와 봉산, 재령 일대에는 너른 평야가 있으니 마병을 통해 싸우기에도 제격이오.”
결국 저들이 평양을 향하여 치고 올라오려 하는 한, 그것도 만 단위의 군대를 이끌고 오는 한 가용한 경로는 한정되어 있다.
개성에서 금천, 평산, 봉산, 황주를 거쳐 북상하는 수밖에 없을 터.
그 중에서도 기마병을 활용하기에 용이한 곳에서 회전을 펼치려면 평산 북쪽과 봉산까지 거의 내어주어야 한다.
“그러니만큼··· 이곳에서 결단을 보겠소.”
이징옥이 평안좌도 도절제사 박이령과, 평안우도 도절제사 이승평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징옥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바로.
정방산성(正方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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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이 봉산군 읍내요.”
이번 정벌의 부사 겸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임명된 강순(康純)이 말하자, 홍윤성이 고개를 대강 끄덕인다.
지금껏 크게 어려운 습격이나 견제 없이 봉산군 역내로까지 진입해왔다. 이런저런 소규모의 전투도 있었으나, 1만 8,000명이라는 수적 우위 아래 쉽사리 끝났으니 싸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웠다.
연이어 조정으로 승전보를 보내며 꽤나 호쾌한 진행속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제 슬슬 평양으로 가는 문턱이 보인다.
봉산군을 넘어서면 정방산성과 대동강 이외에는 큰 장애물이 없으니, 홍윤성 또한 슬슬 금성을 사로잡고 다시금 공신이 되어 가자(加資)를 받는 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가 되었다.
“조심해야 하오. 저들이 이제껏 별다른 저항이 없었음은 한 차례 큰 회전을 노리기 때문일 수 있으니.”
그리고 그렇게 들뜬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는 것 또한 강순의 역할이었다.
이적(夷狄)들의 암살 위협 이후 의심증이 도지신 금상께서 대군을 쉬이 믿지 못 할 자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이번 북정(北征)의 지휘관으로 정난의 1등 공신인 홍윤성이 발탁된 바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허나 결국 벼락출세한 무관 하나를 충성심 하나만 보고 내보낼 수는 없었기에 그를 받쳐줄 인물로서 뽑힌 것이 노장 강순.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오. 허나 역적 무리들에게 무슨 의리와 충심이 있겠소? 삼남의 역도들이 흔들림에 따라 북방의 역적들도 함께 전열이 흐트러졌을 공산도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만큼 감시역이자 실질적 지휘관인 강순의 말에 홍윤성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홍윤성의 대책 없이 낙관적인 대답에 강순은 찰나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홍윤성을 보좌하는 부사. 장수는 언제나 최악을 상정해야 한다는 훈수는 가슴속에만 담아두고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저기 사람이 무리 지어 있는 형세가 아른거리지 않소? 읍내 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구려.”
“그렇다면 일단 병졸들을 전투에 대비시켜야···”
그러나 강순의 말은 곧 무리의 형상이 분명해지며 자연스레 끊겼다.
백기를 들고 있다.
곧 그들이 병사들의 인솔 아래 홍윤성과 강순의 앞에 당도했다. 이미 전방에서 무장해제를 끝내 놓은 듯 그들의 손에는 칼 한 자루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꾀죄죄한 사내들 몇몇이 선비로 보이는 이를 꽁꽁 묶어다 둘러싸고 있는 모습.
그 사내 중에 딱 한 명 멀끔한 자가 앞으로 나와 읍하며 말을 올린다.
“저는 봉산군 서리(書吏) 오성우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놈팽이들은 봉산군 백성입죠.
여기 군수 놈이 싸움을 벌이려고 근처의 장정들을 긁어모으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쪽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이 수만 명이라니 투항하기로 하여 여기 나으리들을 뵙니다요.”
“그렇다면 여기 묶인 자는?”
“봉산군수 되는 놈입니다.”
홍윤성이 투항해온 장정들을 물리고 그 군수라는 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살펴본다.
“자네가 봉산군수인가?”
대답은 없고, 군수라는 작자는 침을 뱉어 온다.
“이 망할 역적놈의 새끼들! 원봉(圓峰, 이징옥의 호) 영감께서 북변에 나가지만 않으셨더라도 네놈들은 몰살이었을 게다!”
“역적이라니? 역적은 주상 전하를 거역하고 금성을 옹립한 너희가 아니더냐?”
“닥쳐라! 옛말에 아비나 임금을 시해하는 일에는 따르지 않는다 하였거늘, 네놈들이 대행대왕 전하를 시해하고 멋대로 이유를 옹립하였으니 천하의 쓰레기가 아니냐!”
“영해(領海, 홍윤성의 호), 잠시만 나와보시오.”
강순이 눈치를 주자, 홍윤성은 연로한 군수의 뺨에 주먹을 갈기고는 뒤돌아 강순이 이끄는 데로 가본다.
그러자 강순이 속삭여 온다.
“방금 들었소?”
홍윤성 또한 바보가 아니니 답해온다.
“이징옥이 북변에 나가서 이 근방에 군사가 없다고 한 것 말이오? 당연히 들었소.”
“반드시 그 연유를 캐물어야 하오. 이 지역에 도사리는 역군(逆軍)의 수효가 얼마나 되고, 또 어떤 장수들이 와 있으며, 다른 장수들과 병력은 어디로 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건, 내가 해 보이겠소.”
그리 호기롭게 말한 뒤 홍윤성은 다시 군수의 앞에 선다.
그리고 방금 주먹으로 쳤던 뺨을 발로 찼다.
“크악!!”
“영해, 무얼 하는 것이오!”
“이 새끼가 전하를 능멸하지 않소?”
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쭈그려 앉아 넘어져 신음하는 군수에게 장난처럼 모래를 뿌린다.
“지금 이곳에 군사가 있든 없든, 결국 이징옥이나 김종서나 둘 다 계집아이처럼 울면서 도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러면서 거병이니 뭐니 웃기는 변명 줘어섬기기는···.”
“그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겠다! 종사를 위하여 일신의 안녕도 버리고 야선(也先)의 목을 취하러 가신 분들이다! 네놈에게 모욕받을 분들이 아니다!”
“하, 굳이 그럴 필요 없었거늘. 어차피 너희 역괴들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두드리면 북방의 야인들 따위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말하고는, 뭐라 더 발악하는 군수의 얼굴을 밟고 몸을 일으킨다. 우드득 소리가 나며 군수의 이빨 몇 개가 부러져 땅에 떨어지나 홍윤성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강순은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홍윤성의 얼굴과, 봉산군수의 참담한 꼴에서 애써 시선을 피한다.
“되었소. 저놈이 멍청하여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소. 적도들은 야선의 무리를 상대하러 북방에 나가 있다고 하는군.”
“···꼭 그래야 했소? 그러지 않아도 도발로 정보를 캐낼 것이라면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지 않았소?”
“어차피 투항을 거부했으니 죽을 목숨 아니오? 왜 거기에 신경을 쓰고 그러시오?”
“···.”
“이제 납득한 모양이군. 여기! 아까 그 서리라는 놈이나 데려와라!”
홍윤성의 말에 끌려온 오성우는 군수의 꼴에 질겁하더니, 곧 겁에 질린 눈으로 홍윤성을 올려다본다.
“봉산 읍내는 비었느냐?”
“예, 예, 비었습니다. 장정들은 모두 돌려보내거나 날붙이를 빼앗아 두었습니다.”
“잘 했군. 내, 장계를 올릴 때 자네 이름을 기억하겠네. 자, 태초(太初, 강순의 자)? 이제 봉산 읍내로 진입합시다그려?”
“상호군(上護軍, 중앙군 5사의 고급 지휘관).”
“왜 그러시오?”
갑작스레 본래의 직책명으로 불러오는 강순의 모습에 홍윤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한다.
홍윤성이 지금은 지휘관의 몸이나, 본래 벼락출세한 무관임을 각인시키려는 것인가?
“이징옥 정도 되는 무관이 난중에 직접 군을 이끌고 북정해야 할 정도라면 사태는 심각한 것이오. 야선이 조선 깊숙이 들어온다면 아국(我國)의 큰 변고가 아니오?
그런데 그렇게 태연하니, 마치 종사(宗社)의 존망에는 연연하지 않는 것만 같아 두렵소이다. 어찌 걱정하는 기색이 없소?”
“당연히 걱정되오. 그저 태연함을 유지하려 할 뿐.”
거짓말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강순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그저 홍윤성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중앙군이 봉산에 무혈입성하였다.
병사들 중 일부는 간만에 따뜻한 방에서 참을 청했고, 장수들은 모여서 공성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었다.
황해도 제일의 요지라는 정방산성, 그 가시만 빼낸다면 평양이 눈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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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다.
몇몇 협객들 부리는 일 이외의 군무(軍務)를 맡은 바는 없으나, 한명회의 머리에는 한 줄기 의심이 피어난다.
김종서··· 이징옥··· 조선의 정예라는 익속군을 이끄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2만에 가까운 대군이라 할지라도 보병 중심의 공세에 이렇게 쉽게 밀려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비록 홍윤성이 승전보를 계속 보내오기는 하나 모두 자잘한 것들이 아닌가?
만약에 함정이라면?
우리가 공세로서 응하기를 포기할까 봐, 혹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일부러 견제를 위한 기습이나 매복전조차 시도해오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위의 추측들이 사실인 경우에, 저들이 원하는 때와 장소가 갖추어진다면···
“···그렇다면 참으로 큰일이 아니겠는가?”
군사에 대한 재능과 별개로 탁월한 모사꾼으로서, 한명회 자신의 촉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허나 어쩌겠는가? 전하께서는 저리 기뻐하시니 누가 감히 나아가 그런 흉한 말씀을···.”
답해오는 권람의 그 말이 맞다.
그러나 저 말이 맞음을 앎에도 그 답답한 마음 풀 길이 없어 이리 친우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풀어내는 것이었으니··· 한명회의 흉중에 들어찬 한숨만이 늘어갈 뿐.
“자네도 이리 나라 걱정이나 좀 해보게. 요새 피리인가 소금(小笒)인가를 연습한다 들었는데, 듣다보니 잘하지도 못하여 한 가지 음색만 삑삑거린다 들었네!”
그러니 괜히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권람을 놀릴 뿐인 한명회였다.
“아니 사람이 모든 것에 능할 수 없거늘! 어찌 벗의 허물을 입밖으로 내는가?”
“이 사람아, 국체의 평안이 달린 문제가 눈앞에 있거늘 어찌 풍류에 빠져 소일하는가?”
“크흠, 어···어디서 그런 사실을 듣고 그러나?”
“어디서 듣기는! 저 마당 쓰는 종놈들이 우리 나으리 피리 연주는 최악이라 비웃더만!”
“그놈들 아주 혼구멍을 내줘야 쓰겠구만!”
“예끼! 하하하하!”
이 따위 실없는 소리나 주고받으니 한명회 또한 어느 정도 속이 풀어진 듯싶어 문간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확실히 나간 것을 본 권람은 몰래 집안의 으슥한 곳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