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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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실세’에게 잘 보이려는 강화부사가 한사코 붙잡으니 하루쯤 머물면서 환영의 술자리에 끼고, 그렇게 교하현감, 고양현감 등과도 친목을 다지니 며칠이 더 소요되어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돌아와 협상의 내용을 고하자 대소신료들의 얼굴이 찌그러졌다가···
“하오나 조선국왕 전하, 목면과 철광석의 이용만 허락해주신다면 그 비용은 모두 우리가 부담할 것입니다.”
“이제는 아국의 변경을 평안케 하며, 그 대가 또한 대신 치러 준다는 것이오? 내 의장께 감사하는 마음 외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가 없구려.”
그렇게 말하며 이홍위가 빙긋이 웃으니 신료들 또한 고개를 숙이며 “참으로 그렇사옵니다, 전하.”를 합창했다. 트로츠키로서는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곧 이홍위가 준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이제 이홍위의 ‘감사 인사’가 있었으니만큼, 웬만하면 신료들도 외부인인 트로츠키에 대한 의심을 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국왕이 트로츠키의 귀찮은 일거리를 덜어준 셈이다.
그 잠시 동안에, 소년이 정치인으로 자라난 것을 보고 트로츠키는 놀라움을 느꼈다.
조선국왕은 말을 이었다.
“또 이리 트로츠키 의장이 나라의 큰일을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니 이제야 나라의 근본을 되찾는 일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속 불안이 평안케 되는도다.”
“감사합니다, 조선국왕 전하.”
한 나라의 지도자다운 말투다.
그 섬세한 완곡어법까지.
트로츠키는 ‘나라의 근본을 되찾는 일’이 무엇일지 쉽게 짐작해낼 수 있었다.
되찾는다는 말은, 곧 한때 무언가를 빼앗겼었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나라의 근본을 되찾으려면···
“전하.”
“말하라.”
그걸 빼앗아간 인간들을 죽여놔야 한다.
하위지가 엎드려 간하노니,
“청컨대 미루어 두었던 죄인들의 국문을 진행하여 주소서.
역적 이유와 한명회의 국문을 허하여 주소서!”
그 많은 피를 흘리고서, 마침내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순간이 왔다.
“대사헌 권람은 들으시오.”
“예, 전하.”
권람의 눈빛에 떨리는 바가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당장, 옛 ‘주군’과 ‘벗’을 친국하러 가기 직전에 임금이 불렀으니 말이다.
“그대는 간흉한 무리들의 동향을 속 깊이 파악한 뒤, 나와 트로츠키 의장에게 미리 고하였소.
그대가 먼저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음모를 내게 알렸고, 능히 왕돈(王敦, 진나라의 반역자)과 왕함(王敦, 왕돈의 형)의 반상(反狀, 모반의 형상)을 밝혀내었으니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소?”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홍위는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신료들의 수는 본래 근정전에 차 있어야 할 숫자의 반 정도뿐이다.
그러나 시나브로, 조선은 돌아오고 있었다.
흐르던 피가 멎고, 부러진 팔이 다시 붙듯이.
지난 60여년동안 견뎌온 사직(社稷)은 이 정도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듯이.
모든 것이 막 문종대왕이 돌아가셨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그러니 그대가 이번 친국에 함께하여 주기를 바라오. 트로츠키 의장은 어찌 생각하오?”
“흠··· 괜찮은 생각인 듯합니다. 국문에 내부자적 정보가 더해지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트로츠키의 존재만 빼고.
블레어는 문화예술인민위원으로서의 업무를 정리하러 원산에 간 참이니 이 자리에 있는 소련인은 경비병들을 제외하면 트로츠키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 단 한 사람의 존재가, 모두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 나라는 다신 옛날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조선의 모든 것이 영원히 변화하게 되리라는.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친국을 시행하겠소.”
그리고 지금 그 변화의 첫 단추가 끼워지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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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적’ 정보가 더해지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좆됐다.’
권람은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기혈이 뒤틀리는 기분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권람은 반역 경험이 두 번이나 되는 (또 그러고도 살아남은) 이 조선에 흔치 않을 반역전문가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권람의 낯짝이 두꺼워도 자신이 배신하고 잡아넣은 예전 임금과 친구를 보러 갈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도 들지 못하고 트로츠키와 주상 전하, 하위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보니···
사정문(思政門)이다.
“끄아아아아! 풀어라! 풀라고 하지 않았느냐!! 끄아아아아악!!”
젠장.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권람이 움찔거리자, 트로츠키가 친근한 체 권람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토닥거린다.
“워워, 너무 겁먹지 마시오.”
“가, 가, 감사하옵니다?”
지금껏 트로츠키라는 인물을 오해하고 있던 것 같다. 다른 이들의 묘사를 들으면서 굉장히 성질이 고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면 또 따뜻하게 상대를 챙겨주기도 하는···
“그대의 옛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오? 긴장 좀 풀고, 오랜만에 만나는 벗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소?
줄타기에서 조금만 삐끗했어도 그대 또한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건 잘 알 것이오? 앞으로도 처신 잘 하시오.”
취소다. 저 마귀 같은 새끼.
권람의 몸이 더욱 격렬하게 떨리니, 그제야 트로츠키는 만족했다는 듯 앞서서 걸어나간다.
“문을 여시게.”
“예, 의장 전하.”
백성들이 공화(共和)로써 다스리는 나라의 지도자에게 ‘전하’를 붙이는 것을 트로츠키는 다소 꺼림칙해 하였으나, 주상 전하와 동격으로 의전을 집행해야 하다 보니 다소 기묘한 호칭이 성립되게 되었다.
뭔가 공산주의니, 계급이니 하는 더 속깊은 사정이 있는 듯하였으나 권람은 아직 거기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정문이 열리니, 사정전의 전각이 보인다. 앞서 와서 참관하고 있던 이개, 성삼문, 신숙주, 그리고 박팽년이 나란히 늘어섰다.
“공판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지지당(知止堂, 이명민의 호)은 안타깝게도 몸이 좋지 않아 국문에 참여하지 못 하였네.”
거짓말. 아마 꾀병일 것이다. 이명민 본인도 안평대군의 편에 섰었으니 가슴이 섬찟하여 감히 이곳에 참여하지 못했을 터.
그러나 이명민은 꾀병을 부릴 만한 위치이고, 권람은 그렇지 않으니 가슴이 아프기만 할 뿐이라.
“어이! 소한당, 왔는가!!”
“죄인을 그 입을 다물라.”
“송구하옵니다, 평판 나으리. 제가 기르던 개가 여기까지 쫓아오니 어찌 반가이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발, 진짜···.
권람은 겨우,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올려 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수양대군 이유와 한명회가 보인다.
당연하게도 만신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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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던 개도 먹이를 잠시 안 주면 토라질지언정 배반하지는 아니하는데, 어찌 사대부가 그리한다는 말인가?”
“조용히 하라고 하였을 터.”
이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이유는 이죽거리며 답한다.
“내가 형판 나으리께 많이 무례하였소. 참말로 미안하게 되었소.”
“입 발린 사과 따위는 전하께옵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바는 오직 이름뿐이니, 함께 일을 도모한 이들의 이름만을 말하라.”
이개가 고개를 저으니, 좌우포도대장이 손짓으로 명한다. 그러자 형장이 날아듦과 동시에 수양의 정강이가 매질당했다.
“크아아아악! 이름이라 하면 알지 않소? 권람이오! 내가 동부승지로 올려다 준 권람이!! 여기 내 옆에 있는 한명회와 나를 연결시켰소이다!! 전하! 권람을 죽이십시오! 권람을!!”
“전부 맞는 말이구려. 형판은 무얼 하시오? 나도 간만에 벗과 함께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옆에다 앉혀 주시구려! 으하하하!!
자네, 자네 왜 내 눈을 피하나? 소한당 자네에게 들려준 비책들이 수양대군 대감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갔으니 일등공신 아닌가?
아니지, 형판께서는 왜 일을 늘리시오? 대군 대감께서 쓰신 공신록만 보아도 주모자는 모두 알 수 있지 않소?”
수양대군이 고통으로 절규하는 가운데 한명회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개의 표정은 여전히,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렇다면 공신록에 쓰인 것 외에 더 말할 이름자는 없는가?”
“없소. 이미 털어놓을 대로 털어놓지 않았소?”
“그렇다면···”
이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 입을 열었다.
“역모는 언제부터 기획하였는가?”
“내 말하지 않았소? 나는 역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 역적 안평에게 주상 전하의 안위가 위협받을까 하여 어쩔 수 없이 봉기한 것이오.”
“숙부님, 거짓을 고하지 마십시오.”
순간 장내의 소리가 모두 멎는다.
특색 없는, 궐 담장의 벽돌처럼 가만히 있던 이홍위가 입을 연 것이다.
“숙부님께서 이미 에티앙블과 매원을 이용해 안평의 봉기를 유도하고 때 맞춰 그 병력을 포위한 것이라고 이미 소련 측에서 증언이 나왔습니다.”
“저, 전, 전하··· 한낱 오랑캐와 하천(下賤, 천민)의 무지렁이 같은 말에 불과하옵니다. 제가 전하의 옥체···라고 생각하던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는 청계천변 양민들의 증언이 있지 않았사옵니까?”
“그렇소? 정말로 나를 염려하여 거병을 한 것일 뿐이었소?”
“예, 참말이옵니다! 제가 충심을 다하여 전하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저 빌어먹을 신숙주와 박팽년, 하위지··· 지금 전하의 곁에서 충신인 체하는 저놈들이 전하를 오랑캐에게 팔아넘긴 것이옵니다!”
“듣는 오랑캐 기분이 나쁘구만.”
“그러게 말이오? 대군의 말이 맞다면 내 죄는 반역죄니 지금 죽여 보시오.”
트로츠키와 하위지가 차갑게 답하자, 수양대군은 그 꼴에 더욱 얼굴근육을 뒤틀며 몸을 흔들었다.
“하, 네놈 이름자가 투로추키라 하였나? 네가 원산 근교에서 아국 양민들의 피를 뿌린 지가 이제 막 두 해가 지났거늘. 어디서 성인군자인 척을 하며 주상 전하를 능멸하느냐!!”
“숙부, 정말로 나를 위해 거병을 한 것이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제가 어찌 신하 된 몸으로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일백 번을 다시 말하여도 답을 똑같사옵니다! 전하를 구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소?”
이홍위의 말에 수양대군 이유는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주상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저는 충신이 아닙니까?” 같은 말들을 줄줄이 쏟아내니 마치 광기 그 자체가 수양대군의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사실상 영에 수렴하는, 아주 실낱 같고도 하찮은 그 한 줄기 희망을 부여잡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꼬리에 불이 붙어 애타게 물가를 좇는 짐승과 같이.
허나, 그 자신의 구명만을 신경 쓰던 이유는, 정작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려조차 하지 못 했다.
“그래서 숙부님은 충신이라고?”
“예, 맞습니다.”
“나를 구하려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오?”
“두 말 할 필요가 있겠습···”
“그런데.”
이홍위는 이유의 헐떡이듯 뱉어내는 말을 잘랐다.
반쯤은 환희, 반쯤은 절망에 차 있는 그의 혐오스러운 얼굴을 들여다 보며.
“그렇다면 누님은 왜 죽였소?”
“에··· 예?”
그제서야 이유는 정신을 차리고 이홍위의 눈을 마주보았다.
새벽 이슬처럼 순수한 분노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내 도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본래 내가 머물던 영양위(왕의 사위,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의 사저에 방문했었소.
대문은 부서지고 집은 여러 채가 헐리거나 쥐새끼들이 그 서까래를 파먹고 있더군. 다른··· 다른 폐허가 된 가택들보다도 훨씬 참혹하게 들쑤셔져서는···.”
주상의 목소리가 떨린다.
“수양대군 이유는 답하라. 어찌 경혜공주와··· 그 부군 정종을 죽였는가?”
“그···그것은 그들이 전하의 안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러면 그대도 죽어야겠군? 제대로 된 연유를 말하라.”
“저, 저, 전하···”
신숙주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말을 붙였다.
“전하, 이유의 눈빛이 오만하여 쉽게 답하지 않을 듯하니 부디 인두로 살을 지져 그 입을 열게 하소서.”
“네, 네놈 신숙주!”
“역괴가 어찌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선왕께서도 어리신 금상의 안위를 걱정하셨거늘 너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기군망상의 무거운 죄를 지었으니 어찌 지하에 가서 열성조를 뵈려 하는가!”
“예판의 말이 옳다. 수양이 스스로 역모를 꾸몄다 말할 때까지 인두로 지지라.”
“전하! 저는 역모를 꾀한 적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만!!”
그때 고문을 명하는 이홍위의 앞에 누군가 바닥에 엎드린다.
이개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왜 그러는가, 형판?”
“···국법에, 국법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은 없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주소서.”
“그리고 국법에 역적을 살려두라는 법도 없지 않소?”
“하오나, 죄인을 국문할 때는 오로지···”
“감히 임금이 살아있는데 칭왕을 하고, 임금의 손위 누이와 매부를 죽인 자를 살려 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무엇이냐! 살아있어서는 안 될 죄인이 아니더냐! 내 누이는! 누님은 어찌하여 돌아가셨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홍위는 울음을 터뜨렸고, 신숙주의 눈짓에 사관의 붓이 멈췄다.
“···전하.”
이개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국법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은 없습니다.”
“···형판의 뜻대로 하시오. 나, 나는 이제 돌아가겠소. 트로츠키 의장도 부디 따라와주시오.”
그렇게 이홍위는 이개를 뒤로 하고 사정전을 나섰다. 그 뒤로 트로츠키가 뒤따르는 것만을 확인하였을 뿐, 비명 속에서 주상 전하를 울부짖는 수양의 짐승 같은 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강녕전이 나온다. 이홍위가 손짓하자 최소한의 인사만 남고 모두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오직, 트로츠키와 이홍위뿐.
“의장, 저자를 죽이고 싶소.”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자에게서 누님과 매부님을 죽여서 죄송하다는, 죽을 죄를 지었다는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었소. 그것이 그리 큰 소망이오? 그런데 어찌 저놈은 저렇게 뻔뻔하게···”
다시 이홍위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트로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이홍위가 멎어가는 울음을 가슴속으로 삼켜갈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조선국왕 전하.”
트로츠키는 잠시 수양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끊겼다가 이어졌다가, 무슨 모스 부호 같은.
아마 SOS가 아닐까?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는 그 과분한 욕심을 담은 구조 신호.
“저런 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저자는 전하의 소망을 받기에는 과분한 자입니다.”
“···알겠소.”
수양대군은 다시 가두어졌다. 재갈을 물리고 사지를 묶여 갇힐 때까지 그는 억울하다고만 외쳤다. 단 한 마디의 사죄도 없었다.
그러나 이홍위는 이제 그 때문에 울지 않았다.
“이봐? 오랜만일세?”
“오랜만은 무슨··· 고작 며칠 의주 갔다 오고서, 또 무슨 얘깃거리가 쌓이셨다고 이 야밤중에 불러내셨습니까?”
“아, 자네도 요새는 바쁜 몸이었지? 귀하신 분 불러내서 몹시 죄송하구만?”
“비꼬지 좀 마시고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지난 친국에서, 트로츠키는 이홍위의 복잡한 심경을 몇 번이고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이 폐허가 되고, 삼촌을 비롯한 친척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으며,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들을 처단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지난 2년 간의 치세에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대신들에게 보좌 받았고, 이후로는 대군들에게 조종당하다 소련으로 도망쳐왔으니··· 사실상 왕이 된 지는 며칠 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홍위가 한때 친했던 삼촌을 죽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고.
이 지점을 비집고 들어가면?
“평양과 나주에 수감되어 있는 왕자와 옛 대신들 말일세.”
“금성대군과 그 옹립자들 말입니까?”
“그래. 그들의 사면 건을 건의해보게.”
“제가 말입니까?”
트로츠키가 직접 말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직책도 없는 상황에서 ‘섭정 자격’이란 애매모호한 권위를 가지고 일을 휘두르면 필시 적들이 생기리라.
게다가 조선인들에게 그는 갑작스레 왕과 동격의 존재로 등장해선, 실세를 차지하자마자 커다란 외교문제에 개입한 잠재적 경계 대상이고 정적이다.
앞으로도 트로츠키는 적극적으로 움직일 일이 많을 텐데, 여기서 정치적 부담을 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적임자는 누가 있는가?
공식적인 직함은 있는데 하는 일은 없는 사람. 그래서 경계받지도 않는 사람.
트로츠키가 의주에 있던 그새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어 어느 양반들의 시회(詩會)니, 다회(茶會)니, 술자리 모임이니 하는 곳에 참여하는 게 업무의 전부가 된 놈팽이.
그렇게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 인사. 적당히 말랑하고 맥아리 없는 나이브한 인간.
“그럼, 자네가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시키겠나? 이 나라의 ‘영의정부사’께 얘기해야지?”
“놀리지 좀 말라니까···.”
에릭 블레어.
“요새는 조선식 호까지 지어서 ‘조지월(朝支月) 대감’이라 불린다던데?”
“그게 다 친근함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자네에게 맡기는 걸세. 이 친근하고 무해한 양반아.”
금성대군은? ···사실 뭐 소련 입장에서 죽어도 딱히 상관은 없다. 불쌍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금성과 연결되어 있는 구(舊) 대신 세력은? 이들은 얘기가 다르다.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없을 만큼은 무력화된 세력, 허나 여전히 그 주변부에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세력.
이런 이들에게 목숨의 빚을 받아 놓는다면 꽤나 유용하게 작동하리라.
“하기사··· 역시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들 불쌍하지 않습니까? 역시 트로츠키 동지도 따뜻한 마음이란 게 있군요!”
“그, 렇지? 아무튼 잘 좀 부탁하겠네.”
물론, 이 단순한 인간은 정치적 계산이란 걸 모르는 듯하지만.
그렇기에 더 적임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다음날이 되어 블레어를 조회에서 만났을 때, 눈이 퀭한 것이 결국 상소문을 쓰는 데 지난 밤을 다 보낸 것 같았다. 아마 에티앙블의 감수를 받았을 테니 그리 문제되는 구석을 없을 터.
실제로도 내용은 어느 정도 무난했다.
“전하, 일전에 공정왕(정종)께서도 회안대군(懷安大君, 이성계의 4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을 죽이지 않으시고 다만 귀양만 보내셨으며, 이 뜻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태종대왕과 세종대왕께서도 회안대군을 죽이라는 주청들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박포의 꼬드김이 있었다 하더라도 왕위를 탐내어 난을 일으킨 회안대군의 경우 또한 열성조들께서는 그 목숨을 붙여두셨는데, 하물며 어찌 전하의 생사조차 몰랐던 금성대군과 김종서 등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