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7
“허, 도적떼라.” 트로츠키가 우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지난 습격은 지방관이 아무렇게나 일처리한 결과로군요.”
“뭐, 그 대가로 지금쯤 산짐승들 밥이 되었으니 딱히 안타깝진 않군. 나머지 서류들도 해석해주게.”
“네. 이건, 내용이 길어서 알아보기 힘들지만···아마 목재와 여우가죽을 상납하는 데 대한 중앙정부의 요청서로 생각되며···아마 조선의 왕족이 사용할 품목들로 생각됩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왕족은 팔자가 좋군. 다음 문서는?”
“다음은 이 지역의 자치권에 대한 논의로···.”
그렇게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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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덕원도호부사 조희선은 아파오는 머리를 지긋이 눌렀다.
이제 슬슬 이곳에 부임한 지가 1년 반이다. 전임자란 인간이 제 자식을 부임지로 데려와 행패를 부리고 파면당한 뒤로, 자신이 대신 이곳에 온 지가 1년 반이란 것이다.
슬슬 부임지가 바뀌든, 더 낫게는 경직(京職)으로 불려가든 해야 하는 이 시기에···뭐?
“왜적입니다! 왜적이 수백 명이 나타나 원산현 호장 김밀을 죽이고 고을을 점령하였습니다요!”
지금 이 보고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폭탄이다.
“그게 언제인가?”
“제가 놈들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도망쳐온 게 김밀이 살해된 지 꼬박 하루 지났으니 벌써 이틀 전입니다! 조속히 왜적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그러고서 원산현 향리 오건석은 그대로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물론 김밀의 집이 약탈될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다가, 왜적들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틈을 타 빠져나온 거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아무튼 왜적들이 쳐들어왔고, 호장이 그들에 맞서다 죽었다는 것.
“그래서···왜적들이 색목인에, 수백 명은 되고, 쇠막대기로 무장했다 이 말인가?”
“예···그렇습니다. 그놈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힘 있는 남성을 학살하여 민초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요!”
여전히 엎드린 오건석이 대답하자 조희선은 들고 있던 부채를 착 하고 접었다.
“그렇다면 한시가 급할 터, 내 함길도 관찰사와 병마도절제사께 서신을 보내고 거병 준비를 할 것이니 자네 또한 원산으로 길을 안내할 준비를 하라.”
젠장.
겨우 빠져나온 곳을 제 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속이 끓었지만, 오건석은 고개 숙여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자신이 차기 호장을 맡는 것도 가능하리라 위안을 삼으면서.
오건석이 물러나자 조희선은 급하게 서신을 부친 뒤 병사를 불러모았는데, 모인 건 약 70명 정도. 더 모아봤자 100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일 듯했다. 왜군을 잡기에는 턱도 없으니 결국 상부의 지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두 곳 있는 봉화를 모두 점화하고, 백성들을 모아 산성으로 대피시키고, 급하게 성인 남성들 끌어 모아 무기 들려주고··· 말년에 봉변을 맞이한 덕원부사 조희선은 열심히 굴러다녔다.
말년의 한을 담아 열심히 구르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빠르게 근처 고을에서 군세가 모여 수효가 수백에 이르렀다.
‘제발···제발 이것만 딱 잡고 한양 가자···.’
조희선은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한양, 한양’ 그 두 글자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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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가가 약탈당하고 부녀자가 희롱당하며 남성은 학살당한다는 원산현은,
놀랍도록 평화로웠다.
당장이라도 저항할까 걱정되었던 농민들은 생각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
“뭔가,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아들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것 같지요?”
“예, 뭐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노먼 베순 박사와 에드워드 바스키는 눈앞에 쌓여 있는 쌀···옥가락지···뭔가 약초 같은 풀뿌리들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대민 지원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의료 봉사다. 벽지에서 질 좋은 의사를 찾는 것은 힘든 일일 테니.
사실 이정도로 외딴 시골이면 서양의학에 두려움을 가질 법도 했지만, 이미 섬에서 근대의술을 맛본 이들이 열성적인 신앙간증을 하고 다닌 바, 텐트를 세워서 급히 차린 임시 야간 병원은 언제나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만큼 의료진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도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어느새 마을사람들은 빈 초가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주어 의술활동에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더하여 의사들이 머무는 처소 앞에 매일 밤마다 놓이는 ‘성의의 표시들’.
···그렇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기에도 난처하다.
“섬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밭들이 말라 있습니다. 분명 가뭄과 기근이 심했던 것이 분명한데 쌀 같은 식자원을 받기에는 마음에 걸리는군요.”
“맞습니다. 당장 본인부터 볼이 핼쑥하게 들어간 사람들이 어디 뒷산에서 사냥해왔을 고기들을 주섬주섬 가져오는 걸 보면···.”
사실 마을의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지는 마을 사람의 대부분은 거의가 굶주림으로 몸이 허약해진 탓인데, 일선 병사들이 열심히 구호물자를 퍼다 날라 저들을 먹이지 않았나?
특히 스페인에 갈 예정이었던 밀을 풀어놓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기근이 심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농민들이 다음해 종자로 쓸 곡식까지 먹어치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해 농사도 망치게 되고, 그 다음해도, 그 다다음해도··· 식량 겸 종자를 쓸 수 있는 밀알을 나눠줬으니 이렇게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마을 주민들이 밀알을 받아 들었을 때의 표정이란,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격에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지역은 쌀농사보다는 콩이든 밀이든 다양한 작물을 섞어 기른 듯싶으니. 쌀이 아니어도 큰 상관은 없는 것 같았고.
게다가 트로츠키와 그 외 지휘관들이 기를 쓰고 막았지만, 그 지방관의 집이 털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거기서 털려 나간 물자들은 정의감 넘치는 의용병들이 전부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꽤나 큰 호응을 받았었고.
당연히 트로츠키는 지역 유지를 죽이고 약탈하면 어쩔 셈이냐고 밤낮으로 끙끙 앓았지만, 의외로 민심이 동요하긴커녕 더 좋아지기만 했으니···. 이후에 일본정부와 생길 마찰을 고민하던 트로츠키가 눈에 띄게 초췌해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병사들이든 비전투인력과 그 식솔들이든 하나둘씩 상륙해 텐트로 임시거처를 세워놓으니, 마을에 머무는 인원도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긴 시간 배 위에만 머무르면 답답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 사실 또한 지역민들과의 갈등을 걱정하는 수뇌부의 고민거리를 늘린 셈이지만.
뭐, 지금 당장은 뭐든 큰 문제가 일어난 적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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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모든 문제는! 당장 일어나지 않습니다!”
트로츠키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반응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이들은 없었다. 왜냐?
다른 지휘관들도 모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으니까.
트로츠키는 지금 뇌가 불안감으로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스페인으로 간다던 의용군, 일본으로 가다! 4차 십자군의 재림?’
‘트로츠키의 폭동! 살해와 약탈로 드러난 혁명가의 말로!’
‘내가 스탈린이면 반드시 이렇게 찌라시 뿌린다.’
그러면? 트로츠키의 정치인생은 끝장이다.
스탈린이 수송선에 어뢰라도 쐈다고 반박해보면? 증거는 있나?
반대로 트로츠키가 지방관을 살해하고 그 저택을 약탈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또한 이렇게 계속 상륙이 이어지면 필연적으로 선주민들과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다들 안일하게만 대처하고 있다.
일이 어떻게 되든 트로츠키는 일본의 감옥에서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건···너무나 추한 결말이 아닌가?
어떻게든···어떻게든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소.”
트로츠키가 척, 하고 내민 종이에는 뭔가 복잡하게 연결된 기호들의 집합이 그려져 있다.
“뭔지 아마 다들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아마 무슨 전기장치의 회로도인가 싶을 것이고.”
트로츠키는 그 종이를 팔랑거리며 외쳤다.
“안타깝게도 이건 회로도가 아니오. 우리에게 낯선 것도 아니지! 이건 우리 군 조직의 조직도요!”
노조가 있다. 공산당이 있다. 노조의 지도자도 있고, 공산당의 지도자도 있다.
노조 단위로 온 지원자들은 당에 가입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그럼 노조와 당 둘 다 가입한 사람은 누구의 명령에 따르는가?
그리고 당연하지만 국가마다, 조직마다 당과 노조의 관계는 모두 다르다. 이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또 열댓 명 규모의 조직이 있는가 하면 수백 명 단위로 자원병을 보낸 조직도 있다. 이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가?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은 똑같다. 그걸 알면 인간이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다!
원래 스페인에 도착하면 스페인 공화국군과 연계하여 체계를 정비하고 지휘부를 재편할 예정이었으나, 이 기묘한 조선행의 결과 그 계획은 이제 전부 나가리다.
그 결과 지금 지휘체계는 이리저리 엉켰고, 병사들은 전혀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결론을 굳혔소.”
트로츠키는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앞으로의 조직개편안이요. 다들 둘러보시면 논의를 시작합시다.”
다들 트로츠키가 준비한 종이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어쩐지 매서운 트로츠키의 눈빛에 다들 불안감을 느끼며 종이의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아, 이건 단순 보고서가 아니구나!’
트로츠키의 제안서를 읽고 난 뒤 모두의 머릿속에 깃든 깨달음.
‘이건 정신나간 폭탄이구나!’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요!”
씩씩 대며 일어난 것은 독일 공산당 측 인사다.
“우리의 지휘권을 박탈한다니 이건 폭거요!”
“프랑스 공산당 측도 동의하는 바요!
“프랑스 금속 연맹도 그렇소!”
“스코틀랜드 탄광 노조도 동의합···”
“잠깐.”
트로츠키가 탁자를 쾅 치더니 프랑스인 대표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랑스 금속 연맹, 프랑스 공산당, 프랑스 사회당, 그리고 아무튼 프랑스 뭐시기들···당신들 중 대표는 누구요?”
“···뭐라고 하셨소?”
“당신네! 프랑스인들 중! 대표는! 누구냐고 물었소! 귓구멍에 좆이라도 박았나, 당원 양반?”
그 순간 모두가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쫓겨난 이유를 되새겼다.
인성파탄.
그러나 프랑스 측 인사들은 제대로 된 대꾸조차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며 어물쩡거렸다. 공산당 지도자가 총대를 매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당? 어쩌면 노조 지도자가? 그렇다면 어떤 노조의 지도자가?
그 망설임이 오히려 트로츠키에게 명분을 주었고 그 기회를 잡아 트로츠키는 좌중을 쏘아보며 몰아붙였다.
“24시간, 딱 24시간 주겠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군사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누가 우위에 설지 정해오시오! 시간을 초과할 시 당신네들의 모든 지휘권을 박탈하고 ‘유일하게 군경험이 있는’ 군 장교들에게 모두 위임할 것이오!
당신네들도 모두 마찬가지요! 각 언어권마다 합의를 봐 오시오! 그 뒤에 조직체계가 각자 합리화되면 지휘권을 양분해 프랑스에서 파견한 군 장교들과 나누겠소. 이의가 있다면 제기하시오! 단, 자신이 명확하게 어떤 집단을 어떻게 대변하는지 밝힐 수 있다면 말이오!
자 이의가 없다면 표결로 붙이겠소. 반대측 거수하시오!”
누구도 감히 손을 들지 못했다.
“그럼 찬성측은?”
당연히 트로츠키 본인이 손을 들었고, 얼떨결에 지휘권이 확대된 프랑스군 출신 장교들이 거수했다. 0표 대 아무튼 0표는 아닌 수치. 이대로 표결을 끝내면 트로츠키의 승리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모르니 기회를 주겠소. 지금이라도 반대표를 던질 의향이 있다면 의사표현을 하시오. 지금도 거수하지 않는다면 기권 처리하겠소.”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아무도 거수하지 않자 트로츠키는 씩 웃었다.
그냥 진행하면 반드시 뒷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반대의 기회까지 줬는데 꿀 먹은 것마냥 가만히 있었다면? 나중에 반대하고 나와도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소?’라는 말로 쉽게 격파할 수 있다.
“저기···”
그런데 누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보니 회의의 서기 역할을 맡겨 놓은 블레어다.
“저는 반대표를 던지겠습니다.”
음? 으으으으으음?
“좋소! 반대표 단 한 표! 더 있소?”
역시 없다. 어차피 블레어는 의용군에 단체 소속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기자 자격으로 개인 참여한 것이니, 별 영향이 없을 줄은 알았다. 그런데도···기분은 더러웠다.
트로츠키는 폭발하려는 속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셋을 셀 동안. 반대표가 없으면 표결을 마치겠소. 셋, 둘, 하나아아아, 끝.”
휴, 젠장. 다행히 다들 가만히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쫄깃해진 트로츠키의 심장이 풀어졌다.
“서기, 투표 결과를 말해주시오!”
“네, 총원 57명 중 찬성 26표, 반대 1표입니다.” 블레어가 묘하게 성의 없는 말투로 낭독했다.
“총원 57명에 찬성 26표. 반대 단! 한! 표! 그럼 이번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트로츠키가 선언하자 다들 늑대로부터 도망치는 양떼마냥 우르르 함교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블레어 씨.”
“네?”
“당신은 잠시 남아줄 수 있겠소?”
어딜 가려고.
트로츠키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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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정리 (2)
선장실에서 죽치고 있으면 승무원에게 방해되니 트로츠키와 블레어는 트로츠키의 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트로츠키의 가족들도 산책 나간 상태.
“당신에게···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만 블레어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동지’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아까 지휘권 문제에 반대한 이유를 이야기해줄 수 있겠소?”
“그건···.”
블레어는 입술을 움직이며 할 말을 고르는 듯싶다가 이내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인 의용군입니다. 맞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혁명을 위해 모인 군대가 기존의 비민주적인 군대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전까지 장교도, 대표도 모두 투표로 선출했고, 지도부 회의도 그렇게 뽑힌 사람들끼리 진행하던 것 아니었습니까?”
민주주의, 지휘관 선출, 장기간 회의.
“우리는 민병대 아닙니까? 저는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조직을 실험함으로써 더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전술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만.
“잠시.”
트로츠키의 말에 블레어는 말을 멈추고 트로츠키를 마주보았다. 트로츠키의 얼굴 표정은 댐 같았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트로츠키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우연찮게도 둘 다 세 글자다.
스탈린, 그리고 민병대.
요새는 눈만 감으면 트로츠키의 수감소식을 접하고 실실대는 스탈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다.
더 이상의 자극을 받아들이기에는 트로츠키의 정신상태가 이미 한계까지 몰려 있다.
그럼에도, 최대한 이성을 유지한 채로 트로츠키가 입을 열었다.
“말허리를 잘라서 미안하오. 내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최대한 간략하게 전달하려 노력해보겠소.”
그리고 피로가 누적되어 충혈된 그의 두 눈이 빛난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 그가 장갑열차를 타고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대지를 질주하며 수만 병력을 지휘하던 시절.
“적백내전 시절 이야기요.”
전설적인 전쟁의 이름이 언급되자 블레어도 조용히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부대는 어중이떠중이 농민들을 급히 소집해 만들어진 부대였고 선생이 바라는 ‘민주적인’ 군대였소. 지휘관은 선출하고, 작전은 회의와 투표로 정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