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71
“무슨 말을! 트로츠키 동지께서 정략적 판단을 하셨다 하더라도, 결국 일본인들을 기망하신 것이 아닌가?”
“옳소!! 일본국을 혼란케 하고 조선에 우호적인 이들을 모아 아국을 평안케 하려 하신 것이겠지만 이는 교묘히 잘 짜여진 술책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도(正道)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블레어의 무리에 속하여 김종직의 지도를 받는 이들.
이렇게 두 무리가 온갖 데다 격문을 써붙이고, 곳곳에서 토론을 벌이며, 서로가 상대 파벌의 강론장이나 연회에 난입하여 논쟁을 벌이는 일도 허다했다.
“이걸로는 모자라네! 우리 측에 대신이 껴 있기를 하나? 당상관이 있기를 하나? 기껏 해봐야 당하관으로 새로 등용된 초출 몇몇이 우리 계에 속해 있을 뿐이니 단순히 논쟁을 벌여서는 버틸 재간이 없어!”
게다가 신숙주라는 컨트롤 타워이자 대학자가 확고히 버티고 있는 친소파와는 달리 ‘나로드니키(이 이름이 벌써 향민계에 대한 멸칭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다.)’들은 김종직이 ‘블레어의 수제자’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위치에 서서 규합하는 수밖에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해!”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 점필··· 아니 김종직 동지! 우리는 결국 대부분이 문인인데 문(文)으로 싸우지 않으면 주먹다짐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이 머저리들 집어치워! 이제부터 향민계는 내가 이끈다! 계의 부장(副將)으로서 명령을 내리겠으니 당장 긁어모을 수 있는 인사들은 바로 내일! 종각 앞으로 모이라고 하게!!”
피의 일요일 사건 때도 그렇고, 유럽의 다양한 정부 하에서 일어난 운동들도 그랬다. 김종직은 날밤을 새워가며 달달 외웠던 유럽의 역사책에서 영감을 받아 대책을 생각해낸다.
조선에는 아직 없는 개념이지만··· ‘대중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다!!
“와아아아아!! 김종직! 김종직!”
“여러분! 여기에 모여준 여러분 모두에게 참으로 고맙소! 우리는 왜 이곳에 모였소? 바로 우리를 보고 이단이라 비아냥대는 무리에게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오!!”
“맞소! 맞소! 블레어! 블레어! 향민계! 향민계!”
“조선 천세! 농민 천세!”
“여러분, 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임은 바로 향촌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오, 여러분!!”
“와아아아아아아! 김종직! 김종직!”
이 땅에 존재한 적 없는 연설회와 대중집회에, 대중들은 빠르게 감화되어 김종직과 블레어의 이름을 곳곳에서 연호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눈앞에서 상대 파벌의 영향력이 급팽창하는데 가만히 있을 신숙주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를 농촌에서 시작한다는 바보 같은 발상은 이미 러시아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바요! 역사서와 이론서를 조금만 훑어보아도 결론이 나오거늘, 어찌 참람한 헛소리로 인민대중을 현혹하고 이 나라 사회주의가 나아갈 길을 감히 방해한다는 말이오!!”
“옳소! 소련 천세! 조선 천천세!!”
한양의 세 세력 중 둘이 궐기했다. 나머지 하나도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을 터.
“당연하지만, 우리는 저들의 수에 끌려가는 듯해서는 아니 되네. 가장 정도에 맞는 방법으로, 가장 침착하게 대처해야 할 것일세.
···밖에서 보이기에 도성의 때아닌 소란을 다스리는 유일한 세력으로 비춰져야 하네!”
그런 박팽년의 판단에 따라, 근래 일어나는 대중 집회의 폐단을 고하는 연명상소를 올리는 식으로 (비교적) 조용히 대응하는 대신파였다.
“상소에 깃든 나라와 인군을 위한 염려가 참으로 갸륵하도다. 허나 진사 김종직을 비롯한 저들 무리 또한 아조(我朝)의 부흥과 재건을 위한 마음은 같을진대 어찌 무어라 꾸짖으며 막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해 이홍위 또한 적절히 반응했다. 편은 들지 않고, 하지만 논쟁이 이뤄지는 상황 자체를 공론화함으로써 판 자체를 키웠다.
정확히 대신들이 바라는 바였다.
당연히, 대신파의 박팽년이나 친소파의 신숙주가 진지하게 향민계를 찍어누르려 일어선 것은 아니었다.
정쟁에는 도가 튼 대신들이니만큼 김종직의 귀여운 ‘불장난’ 정도는 빠르게 꺼뜨릴 수들이 있다.
박팽년과 신숙주 모두 저들을 적당히 봐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소소한 소란에 맞불로 대응하여 판을 키워줌으로써 김종직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있다.
여기에 이홍위까지 가세하여 직접 상소문에도 없던 김종직 이름 석자를 언급하여 그의 부상을 공론화하였으니···
스타의 탄생은 예견된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김종직! 김종직!”
“김종직, 그는 신이야!”
“향촌 사회주의 만세! 인민주의 만세!!”
그렇게 논쟁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한양을 뒤덮었던 열기가 잠잠해진 후, 정계에는 세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진사에 불과한 김종직이 어느샌가 정치적 거물로 성장했다. 둘째로, 향민계에 붙여진 멸칭이었던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와 ‘인민주의’라는 단어가 이제 반쯤 공식적인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급관료일지라도 구직자로 머물러 있던 향민계원들이 다수 등용됨으로써, 어느 정도 조정에서의 균형이 맞춰지게 되었다.
즉, 드디어 향민계가 조정의 세 번째 지지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근데 왜 나만?”
물론 김종직만 빼고.
“어···째서?”
“이보게 김종직 동지? 나는 등청할 시간이 되어서 이만 가보겠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나도 일어나 보겠네. 저녁에 퇴청할 때 다시 보세나!”
이 짓거리 하는 이유가 다 무어냐. 결국 입신양명이고 육판서 삼정승의 고명한 자리까지 올라가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생난리를 치고서 단물을 뽑아먹는 건 다른 놈들이고 김종직만 홀로 덩그러니 야인으로 남아있다.
혹시나 싶어 슬그머니 지인들에게 청탁을 넣어도 보고, 대감 댁들에 돌아다니는 소식을 주워들으며 자기가 혹시 미운털이라도 박힌 것은 아닌가 알아보면서 소일해 보았지만···.
전부 쓸모 없는 일이었다.
무려 신숙주 대감 댁에서 조용히 기별이 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중은 무슨···.”
결국 더 떠들고, 더 발악하고, 더 뛰어다니라는 소리다.
자기를 띄워주려고 판이 짜인 것은 대강 눈치챘었다. 그때는 대감님들의 고마운 선물이라고 낼름 받아먹었는데 이런 독약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결국 향민계를 더 키워서 한 파벌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적임자로 김종직을 점 찍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 기약 없는 과제를 끝내기 전까지 청운(靑雲)의 꿈은 단지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신숙주와 박팽년 두 사람이 자신에게 목줄 채워 놓고 개처럼 일 시키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피눈물이 난다.
거의 한 달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트로츠키가 내뱉은 첫 마디란 이랬다.
“이···이게 뭐지?”
이는 트로츠키가 한양 땅을 밟자마자 터져 나온 반응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와아아아아아! 트로츠키 동지다!!”
“트로츠키! 트로츠키!”
“공산주의 천세! 소련 천세!”
그리고 잠시 당황했던 트로츠키가 군중 속을 자세히 눈여겨보자 한 바람잡이가 눈에 띈다.
“여러분! 조선 인민의 친구! 소련식 정통 사회주의의 지도자! 주상 전하와 함께 조선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계시는 트로츠키 동지께서 지금 입성하고 계시오!!”
“와아아아아아! 소련! 소련! 트로츠키! 트로츠키!”
당연히 신숙주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인···”
“역시 공산주의의 본산인 조선답습니다. 일국의 도성에서 이토록 공산주의의 물결이 거세다니···”
렌뇨는 깊이 감명받은 듯, 사방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경탄하여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차마 트로츠키는 자신도 대체 이게 웬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고.
“허··· 허허! 이게 다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조선 인민과 조선국왕 전하와 덕분 아니겠소?”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결국 렌뇨는 대강 ‘일본에서 온 사신’ 정도로 취급하여 동평관에 묵게 하고, 트로츠키도 급히 입조하면서 그제야 신숙주에게 그동안의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 친구가 일냈군.
바빌로프가 말한 그대로야. 향민계의 몇 없는 쓸 만한 인재라고 했었지.”
“어떻게 보면 잘 된 것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의 삼분지계(三分之計)는 공고해졌고, 인민주의자 진영에서도 블레어 동지처럼 못 미더운··· 아니 ‘순수한’ 사람 이외에 믿을 만한 인사가 생겼다는 것이니.”
“그것도 맞네만. 너무 파격적인 방식은 아니었나?”
신숙주의 말도 맞다. 김종직이 한양 전체를 확 불질러 놓음으로써 한양에서만 시끄러웠지 아직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던 공산주의 사상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 가능성이 생겼다.
게다가 그동안 친소파, 대신파, 인민주의자의 세 파벌의 구도가 공고해졌다.
하지만··· 역시 도발적이다.
세력의 급팽창은 곧 반대급부로 적대감을 급증시킨다.
벌써부터 사학의 무리들을 엄히 평정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곳곳에서 빗발치고 있다. 다들 주상 이홍위의 눈치를 보느라 쉬쉬하고는 있지만, 그 사학의 수괴가 ‘섭정 전하’와 ‘영의정 합하’임을 에둘러 표현하며 압박하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도리어 그 또한 취금헌(박팽년의 호)에게 큰 기회를 주었으니 정국이 안정되는 데 이득을 준 것이겠지요.”
그러나 신숙주는 그 또한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만이 장외에서 표출되었다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더하여 저들의 논의가 소련과의 협업 하에 진행되는 산업화, 근대화 자체에 대한 반대로 이어질 기미가 보였다면 그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취금헌과 단계(하위지의 호)가 너무 나가는 불만들은 인맥으로 잘 틀어막고 있고, 매죽헌(성삼문의 호)과 백옥헌(이개의 호)이 학문으로써 근대화를 정당화하여 주니 어찌 문제가 커지겠습니까?”
만일 저들의 불만이 겨우 안정화되어가는 정치적 3강구도를 뒤집어버린다면 그 만한 재앙이 없다.
친소파와 인민주의자 두 파당의 공산주의자들이 크게 위협받을 것은 물론 그들과 협력하는 대신파의 개혁안 또한 무너져 내릴 것이다.
“허나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걱정 마시지요.”
신숙주가 주장하듯 친소파와 인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여론은 적당히 제어되고 있다.
반개혁적인 의견들도 어디까지나 3당 구도 속으로 잘 흡수되어 대신파의 세를 강고하게 하는 데 적당히 일조하고 있을 뿐이니,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대신파와 친소파가 진작에 합의해둔 사항이다.
반동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잘 솎아내고 순화해서 어느 정도 선에서 정리하는 것.
딱, 개혁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만.
조정의 균형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무튼 그런 잡스러운 걱정은 접어 두시지요. 이제 곧 주상 전하를 뵙지 않습니까?”
“그래··· 그 말이 맞네. 이제 곧 궁이군.”
그렇게 근정전에 들자 이미 조회의 준비는 끝나 있었다.
“조선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소련 의장 전하께서도 지난 날 동안 강녕하셨소? 아국의 사정으로 먼 길 수고로이 걷게 만들어 참으로 송구하오.”
“아닙니다. 저야말로 섭정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오래 자리를 비워 죄송한 마음입니다.”
군주와 의장의 인사치레. 외국 지도자다 보니 명칭은 ‘전하’라 하였으나 조선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홍위의 어투는 하오체로, 트로츠키는 합쇼체로 서로 정했다.
오랜만에 아랫사람이 아닌 ‘대등한 지위’의 국왕과 격식을 갖춰 말하다 보니 트로츠키의 몸에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 그를 눈치챘는지 이홍위는 이런저런 예의 차리기를 관두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연여(蓮如, 렌뇨) 대사를 동반하여 입성한 것이 맞소?”
“예, 전하께서 요청하신 바와 같이 다른 추종자들은 원산에 머무르도록 하고 연여만을 동평관에 묵게 하였습니다.”
“흠, 좋소. 그런데···”
이홍위는 잠시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눈알을 굴려보다··· 말을 던진다.
“왜 이곳에는 아직 오지 않았소?”
“예? 뭐라고···”
“연여 대사는 뭇 왜인들을 설득하여 경상도에 웅거한 수양의 무리에게 병장기의 수출을 멈추도록 의논한 자가 아니오?
비록 국외인이나 종사의 뿌리를 뒤흔들려는 무리에 대항하여 의에 따라 행하였으니 마땅히 임금 된 몸으로서 그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게··· 이게 무슨 소리지?’
일단 이홍위가 말하는 업적을 해낸 것은 렌뇨가 아니라 신숙주와 이명민이다. 렌뇨를 포섭한 것은 신숙주와 이명민의 작업이 마무리된 이후다.
또한 세부 사항도 맞지 않는다. 신숙주의 간계로 와해된 것은 경상도의 구(舊)대신파, 즉 금성대군파이지 수양대군파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모를 이홍위도 아니다.
이명민이 역적 무리에 가담했던 몸이라 공신에 오르지 못 하니, 그 업적을 렌뇨에게 돌려 대신 구국의 공적을 주려 하고 있다.
대체··· 왜?
주상이 직접 왜인을, 그것도 중을 섭정에게 부탁해 도성에 들여온다는 정치적 부담 가득한 일을 굳이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심지어는 전후 사정을 왜곡하면서까지 그 왜인에게 명예를 주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고?
그 대답은 렌뇨를 급히 불러온 뒤, 이어지는 이홍위의 말 속에 있었다.
“아국과 소련의 관계는 고금을 통틀어, 만방을 뒤져보아도 이보다 가깝고도 두터운 예를 찾아보기 힘드니. 형제는 결국 같은 배에서 나왔을 뿐 결국엔 다른 몸이라, 한 몸과도 같은 이 두 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도다!
헌데 소련과 일본국의 관계가 이리 정다우니 어찌 아국 또한 일본과 우호선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아닙니다. 소승, 그저 마극사(馬克思, 마르크스)의 존귀한 말씀을 받들 뿐 초야에 묻힌 한낱 필부이니 어찌 저에게 트로츠키 선생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하여 일본과 소련이 선린한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대사는 트로츠키를 도와 내가 난신들을 평정하고 이 자리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이를 어찌 선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또한 내가 이곳에서 대사를 군주로서 맞아들일 수 있게 된 것에도 대사의 공로가 크니 마땅히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해야 대사의 공에 걸맞은 바가 아니겠소?”
장내가 술렁인다. 예상 밖의 상황에 모두가 놀라 웅성거리고 있다.
대강의 설명밖에 듣지 못했음에도, 렌뇨 역시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했는지 바싹 엎드려 절하고 있다.
“소승은 문명하지 못한 동쪽 오랑캐의 땅에서 나고 자란 미천한 몸입니다. 모친은 한낱 시종이었으며 저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벽한 절간에서 늙어가다가 이리 상국(上國) 조선에서 폐하께 은혜를 입으니 참으로 영광되고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연히 감격에 찬 눈물 연기.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영남의 삿된 무리가 금성대군의 일파를 훨씬 빠르게 무찔렀을 것이며, 삼남이 역적 이유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내 소련군과 함께 한양에 입성했다 하더라도 그가 어디로 도망쳐 더 아까운 피를 흘리게 하였을지 어찌 알았겠는가?
그대는 나에게 은인이니 그만 일어나 공신의 이름을 받으라.”
“소승··· 아니 소신은 전하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리옵니다···. 아흐흑.”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
뻔하다. 렌뇨는 조선의 공무역에 있어서도 소련이 허락한 바와 유사한 특혜를 받게 되었다.
마극종의 신도를 자처하는 다이묘가 있다면 조공에 대한 답례품이 조금 더 후해지리라.
또한 조선에 한 사람밖에 없는 호성원종공신이 되어 공식적으로는 공신록에 오르지 못한 이명민이나 권람보다도 그 공이 큰 인물로 적히게 되었다.
그보다 격이 높은 공신은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다섯 사람의 호성공신뿐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트로츠키가 중을 입성시켰느니, 전하께서 어린 마음에 불씨의 말에 의존하시느니 하는 소리들은 쏙 들어갈 수밖에.
공신 책록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있을 수가 없었다.
영남 쪽의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몇 없었고 (그런 이들은 조정에 남아있지 못했을 테니.) 사정을 아는 친소파들은 당연히 모두들 함구했다.
그렇게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렌뇨는 곧 조촐한 환송식을 받고는 원산으로 돌아갔고, 다시 원산에서 일본으로 떠났다.
아마 조선에서 얻은 공신 직위와 공무역, 사무역 두 종류에 걸쳐 얻어질 무역에서의 혜택은 그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 주리라.
이렇게 모든 것이 해소된 이후··· 남은 것은 트로츠키의 고민일 뿐.
“···전하께서는 소련을 경계하시네.”
“소련을 경계하시다뇨. 그보다는 소련이 조선에서 떨어져 나감을 두려워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숙주의 답변에 트로츠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이명민이 그의 빈 잔을 보고 술잔을 들어 따라다 준다.
···밍밍하다, 조선 술.
취하지를 못하니 한숨만 늘어간다. 신숙주가 권람에게 눈치를 주니 술병을 더 가져오기는 한다만 소용은 없을 듯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기는 했다만. 소련은 조선과 이제 정말 일심동체나 다름없어졌다.
사실상 소련이 조선의 한 지방이 되는 것이 아닌가? 트로츠키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련이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면··· 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이다.
굳이 조선의 물산에 의존하지 않고, 조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새로운 곳에서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면, 조선은 소련에게 하나의 선택지일 뿐 혈맹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이홍위는 그걸 알았다. 트로츠키나, 다른 소련인들이 미처 그 사실을 생각하기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날린 견제구가 렌뇨의 초대와 공신 책록이었다.
일본으로 뻗어나가는 소련의 권역까지 조선과 얽혀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조선과 소련이 한 몸과도 같으니 감히 그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랜뇨에게 경고하는 겸해서 취한 선택.
영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감탄스럽다.
하지만··· 어쩐지 속이 막힌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터 트로츠키는 자신이 조선에 있어 ‘외국인’임을 잊고 있었는가?
소련과 조선이 서로 외국이기에, 이홍위의 입장에서 소련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낄 수 있음을 잊어버린 건 언제부터였나?
정말, 트로츠키는 소련의 의장보다는 조선의 섭정 지위가 익숙해졌는가?
그는 사실상 조선인이 된 것인가?
앞으로의 소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조선은? 둘 사이의 관계는?
복잡한 문제들이 머릿속을 괴롭히니··· 이렇게 친소파 관원들을 불러 체커나 체스로 소일하면서 가슴을 비우는 수밖에.
조선과 소련의 관계라···.
“···그러고 보니 인민주의자들의 건은 어떻게 되어가나?”
“아, 그 부분은 신숙주 동지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전 건설 과정에 참여하니 바쁘기도 하고, 여기 권람이도 유력인사 포섭에 힘쓰다 보니···.”
“그러면, 신숙주 동지?”
“믿어 보셔도 좋습니다. 이미 김종직 쪽에 기별을 넣어두었습니다. 아마 적당히 생각을 정리해서 블레어 동지나 다른 향민계원들에게 전달하겠지요. 알아서 잘 해낼 겁니다.”
“···잘 알겠소.”
트로츠키는 신숙주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정말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각.
“젠장, 이 양반은 대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죽기 싫으면 대비하라.’
또 다시 신숙주의 서신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는 김종직이었다.
1455년 2월.
민신이 허탈한 마음으로 칩거하고, 렌뇨가 일본에 귀국한지 벌써 두세 달째.
친소파가 진행하는 산업화 프로젝트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그 기초인 농업공장에는 곧, 밀의 수확철이 다가온다.
건설 현장을 나돌아다니는 이명민의 입장에서는 한창 바쁘게 움직일 때였고, 조정의 균형상태를 매만지는 신숙주도 슬슬 일이 많아질 시기였다.
“신숙주 동지, 일이 이렇게만 진행되어서는 안 되지 않소? 김종직 그 자에게 보낸 서신이 그리 부실하다니, 너무 안일한 대응이 아니오?”
“괜찮소, 이명민 동지. 결국에는 알아들을 것이오. 김종직이라는 인간을 유심히 보았을 때, 이 정도 사세도 읽어내지 못할 바보는 아니오.
몇 없는 바보 아닌 놈들 중에서,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자를 찾자면 그가 제격이지.”
“허나, 만일 그대가 신임하는 것처럼 김종직이 영민하지 못하다면? 블레어 동지를 대신하여 인민주의자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면···?”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있겠소?”
신숙주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대중 집회라니, 어린 놈의 약아빠진 수를 받아 주었으니 이 정도 선문답 정도는 그쪽에서 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서찰에 적어 두었소. 그대로 되겠지. 그놈이 자격미달이라면 우리로서는 다른 재목을 찾으면 될 터.”
-‘죽기 싫으면 대비하라.’
그렇게 단 한 줄.
터무니없는 짓거리다. 이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