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4
하지만 눈앞의 모리토키는 불쾌함은커녕 눈 한 번 깜짝하는 기색도 없다.
자신의 말이 맞았다고 큰소리 떵떵 치며 기고만장할 법도 한데, 그저 은은한 미소와 무게감 있는 눈빛으로 문병 온 이들을 마주할 뿐이다.
모리토키는 침상에서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다.
어깨에 둘러진 붕대로부터 아직도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온다.
“···웃옷을 주십시오.”
“아니 되오. 이런 몸 상태로 어디를 나가겠다고.”
“그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하나의 육신이 중하겠습니까? 아니면 억만창생을 구원의 수레로 지고 가는 아름다운 부처의 말씀이 중하겠습니까?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불적 무리의 면면을 식별할 것이며, 또 누가 그들을 제대로 마주하겠습니까?”
“알겠소···. 여봐라, 신쿠로(모리토키의 가명) 스님께서 불적 정벌에 앞장서신다 말씀하시니 어서 웃옷들을 가져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모리토키는 그 모습에 잠시 감탄한다. 가쿠로의 저택에서 이런저런 대접을 받을 때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자신의 꼴과 저 모습이 너무도 비교되어 보인다.
쇼군가의 자제로서 통치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 권위를 호흡하듯 손쉽게 사용하는 저 모습이 너무나도 경이로웠다.
아무튼, 지배하는 자로서 태어나지 못했다면, 천한 낭인이라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 가야 하리라.
“칼을, 주십시오.”
“···알겠소.”
손짓만으로 지배할 수 없다면, 맨 앞에서 몸소 행동해야 한다.
기진이 벽에 걸려 있던 기다란 장도를 내어 주니 손잡이에는 아시카가의 가몬(家紋, 가문의 문장)인 가로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칼로 반드시 불적들을 베어 넘기려 하니, 부디 허하여 주십시오. 이곳 조도지뿐 아니라 종파 간 갈등을 뛰어넘어 각 사찰들의 병력들까지 모두 규합해야 할 것입니다.”
“···허하겠소. 우선 조도지의 병력부터 끌고 가시오.
하지만 어디로 가겠소?”
모리토키는 머물던 방을 나와 천천히 말등에 오르더니, 그 손때 묻은 고삐를 쥐어 보며 그 감촉을 음미한다.
“저와 대부분의 병력은 가쿠로의 별장으로 갑니다. 나머지는 접선자가 기다리고 있을 교 시내의 하층 평민들 숙소로 보낼 것입니다.”
“건투를 빌겠소.”
“이랴!”
그렇게 모리토키가 말달리자 조토지에서 급히 채비를 마친 승병들이 함께 따라나선다. 모리토키는 그들의 걸음에 맞춰 말의 속도를 줄인다.
어차피 말은 빨리 가기 위해 타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위한 수단이니까.
무리의 유일한 기수인 모리토키를 따라 승병들은 빠르게 달렸다. 울렁이면서도 가마가 향한 경로쯤은 기억하다 보니 저택을 찾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곧 저 멀리 화려한 저택이 보인다.
그러나 모리토키는 눈치챈다. 외면의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 이 저택을 요술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수가 훨씬 줄어 있다.
“···젠장.”
“대부분 도망친 것 같습니다. 눈치를 챈 것이···.”
“일단 남아 있는 놈들은 잡아 오고, 저택 전체를 수색해라!”
“이리 나와!”
“끄아아아악!”
“여기, 신쿠로 님! 와 보십시오!”
부르는 소리에 급히 저택 안으로 쳐들어가 보니, 아까 보았던 인부들 열댓 명이 몇몇은 제대로 된 날붙이를, 몇몇은 급조한 듯한 나무 창 등을 휘두르며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쿠로 님! 거기 계십니까?”
“···잘 있습니다. 예상 외의 친우분들을 데려오셨군요? 모두 조도지의 법우(法友) 분들입니까?”
“가쿠로 님께서 제게 해 주신 말들이 하도 인상 깊어 내 직접 동무들을 데려왔지요!”
“하하하하! 설득이 잘 안되었나 봅니다.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鷄口勿爲牛後,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라 하였거늘!
결국 남의 뒤나 핥아 주는 인생이 더 나으셨나 봅니다?“
“한갓 장사치 따위가 문자를 조금 익히니 저 스스로 뭔가 된 것 같나 봅니다? 이 방자한 것!”
“그쪽이야말로 낭인 주제에 주군이 칼을 내려 주었다 하여 어깨를 으쓱이고 호가호위하는 꼴이 애처롭기 그지없소이다!”
“뭣들 하느냐! 밀어붙여!”
“예!”
날붙이들이 번쩍이자 일꾼들이 꼬나쥔 나무 창 따위는 쉽사리 부러지고 부서진다. 그래도 개중 꽤나 훈련받은 이들이 있는지 승병들조차 고전을 면치 못한다.
애초에 습격받을 것을 상시 염두에 두었으니 이리 주요 인력들의 대피가 빨랐던 것일 테다.
그러나 저들은 십수 명, 이쪽은 족히 쉰 명.
중과부적으로 구석구석에 몰려 있던 마극종 신도들은 살해당하거나 자살한다. 반대로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죽이지 말라! 한 놈이라도 더 살려서 정보를 캐내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자결 또한 막으면서 제압해야 하니 조도지의 승병들로서는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서 불적들의 두 손을 묶어!”
“놓아라! 놔라, 이놈들아!”
“천하무산자합일! 천하노동자합일! 벌레들에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차례차례 제압당하기 시작하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가쿠로뿐.
왼쪽 허리에서 피 흘리며 절뚝거리면서도, 여전히 칼을 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우리는 대의를 위해 싸웠소. 다이묘들이 흥청거릴 때 굶어 죽는 이가 없으면 좋겠다는 대의, 그리고 성실하고 유능한 이들이 혈통 좋게 태어난 이들보다 대접받았으면 한다는 대의.”
“그런 대의를 가진 것치고 꽤나 호화로운 저택을 꾸리셨소만.”
“어리석기는! 우리도 손님들을 모시고 예식을 따져야 할 때가 있소! 불가피한 사치일 뿐이지.
보시오! 그대가 죽여 버린··· 우리 ‘동지’들을. 모두가 나의 고용인이지만 무명옷을 입었소. 나는 삼베옷을 입었고.”
“아아, 그러시구려. 숭고하기도 하셔라.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사세구(辭世句, 죽기 전에 남기는 구절)가 너무 길구려.”
“···혁명 만세, 조선 만세, 소련 만세.”
그리고 어떻게 막기도 전에 가쿠로는 칼을 거꾸로 쥐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걸쭉하게 흐르는 검붉은 피가 다다미를 적셨다.
전투가 끝났다.
“···사로잡은 놈들은 끌고 가서 심문하라!”
모리토키는 피범벅으로 쓰러진 가쿠로의 시체를 바라보며 외쳤다.
저 시체는 점차 하얗게 질려 가고 딱딱하게 굳어 가리라. 어느 들판에서 대충 태워지리라.
그는 다이묘도, 구게도 아닌 평민이기에.
모리토키는 몸을 돌려 텅 빈 저택을 빠져나갔다.
이제 이 저택에 요술은 없었다.
***
“분명 저들이 우리 동지들을 고문하여 이런저런 정보들을 캐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인부들의 대피를 돕던 가쿠로에게서 연락이 끊겼으니, 교토에서의 상인회들도 곧 끝장입니다.
교토에서의 조직망이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일단 몸을 피해야 합니다.”
가쿠로의 별채에서 돌아온 신로가 차분히 현황을 보고하였다. 렌뇨는 잠시 머리가 무거워져 이마를 짚었다.
“완연한 실패로군.”
“···송구합니다.”
“아닐세. 자네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뿐으로 이겨 낼 수 없을 고난이었으리라 믿네.
오히려 저택 내부의 주요 자산과 자료, 인력을 안전하게 빼냈으니 차라리 자네를 칭찬하라면 칭찬하겠네.”
“···.”
렌뇨의 격려에도 신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암울한 분위기가 교토 외곽의 은신처에 퍼져 있었다. 아마, 마극종 동지들을 신문했다면 이곳 또한 안전하지 못하리라.
곧 들이닥칠 승병들을 생각하더라도 슬슬 자리를 떠야 했다.
“···일단 암호문들부터 불태우게. 경전들은 ‘헤겔 법철학 비판’이나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희귀한 것만 챙기게. 소책자로 뿌릴 예정이었던 ‘공산당 선언’과 ‘임노동과 자본’은 버리고···.”
하지만 신로의 노력에도 손해가 극심하니, 호조 소운··· 아니, 모리토키라는 한 사람의 간웅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기대했던 전략의 실패였다.
이곳에 비축해 둔 활동 자금 중 상당 부분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폐기되리라. 챙겨 갈 수 있는 분량에도 한계가 있으리라.
물론 조선과 소련이라는 무한한 부의 원천이 그들 뒤에 버티고 있었으니 거기에 큰 미련은 없다만···.
“교토를 잃은 것이 못내 아쉽군.”
탁자 위, 아마 지금 일본에 있는 것 중 가장 정확할 일본 전도 위에서 렌뇨는 붉은색 말 하나를 치웠다.
교토 위에 있던 말이었다.
“교토를 잃었으니 아마 천태종과 법화종이 교토 정토진종의 사찰들을 꼭두각시로 만들 것이고··· 그리하면 우리와 정토진종 분파 사이에서 갈등하던 이들이 점차 저쪽으로 떨어져 나갈 테니···.”
인근 지역의 빨간색 말들이 속속들이 치워지고 법화종을 나타내는 파란색, 천태종을 가리키는 검정색 말들로 대체된다.
“···지도가 지저분해지는군. 깔끔하게 세력 판도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였거늘.”
그리고 렌뇨가 한숨을 쉬자, 주위의 누구도 말을 더 붙이지 못한다.
일본 곳곳을 공세적으로 채우던 붉은 기운이, 다시 오랜만에 퇴조하는 기세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마극종이 일본 전역에서 승리하리라 믿지 않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지만, 이 일보후퇴는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리 렌뇨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슬슬 이곳을 떠날 채비를 마쳐 가던 때였다.
“선사님, 계십니까?”
숙소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아마 바로 머리 옆을 스치고 간 화살에 기겁했겠지만, 놀라운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남자는 큰 반응 없이 렌뇨를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제 주인께서 선사님을 만나 뵙고자 하십니다.”
“안타깝게도 보시다시피 우리는 교를 떠나려는 참입니다. 당신의 주인이 누구든 간에 다음에 뵙자고 전해 주시오.”
“···교토를 잃고 싶지 않다면 부디 자리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주인님께서 청하셨습니다.”
그 말에 렌뇨가 눈을 부릅뜨자, 남자는 다시금 합장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다.
“다행히도 제 주인께서는 교토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외방의 별장으로 빠져나오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길을 안내할 터이니 부디 따라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자가 다시 길게 인사를 올린다. 일단 그를 물리치고 렌뇨와 제자들은 회의에 들어간다.
“···함정일 가능성은?”
“사실상 없을 것 같습니다. 함정을 팔 것이라면 이곳으로 몸종을 보내 한가로이 초대를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가쿠마의 말이 옳습니다. 이 숙소의 구조를 보면 요새화하기는 쉬우나 그만큼 빠져나갈 구석은 없습니다. 병력만 충분하다면 충분히 포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쿠마가 답하고 준민이 덧붙인다.
“포위하기에 병력이 부족하여 유인책을 쓰는 것이라면?”
“그러기에는 저희가 온존하고 있는 병력이 꽤 되는데, 이 좁은 은신처에 가둬 두고 고사시키지 않고 굳이 야전을 감행하겠다니 전술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저 몸종이 지닌 가몬을 보았는데, 어쩐지 익숙하였습니다.”
“익숙했다?”
“예, 아마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예언서’에서 권세가로 나왔던 가몬인데···.”
“나는 잘 알지 못하겠네. 지금은 아마 그리 유력한 가문은 아닐 터.”
“하지만, 장래의 야심가를 찾아다니는 일이니 이득이 될 만합니다. 더불어 승병들의 추적 또한 따돌리기 용이해질 것이니···.”
그리고 불안감에 소극적인 렌뇨를 신로가 마침내 설득해 내니···.
“그대의 말에 따르겠소. 길을 안내하시오.”
“현명한 판단입니다.”
결단이 내려졌다.
***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교토와 지방을 순회하는 상인 무리, 실상은 일본 최악의 ‘불적’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
그들은 교토를 등지고 저 전란과 피바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많은 상인의 저택이 부수어지고, 그 상인들의 경호와 승병들이 피를 뿌리리라. 많은 이들은 도망하겠으나 불운한 이들은 끝내 목숨을 잃고 사라지리라.
원래부터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희생 속에서 목숨을 건진 이들이기에 무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렌뇨에게 공손히 일렀을 때, 렌뇨는 고개를 들어 별장 대문에 박힌 가몬을 살펴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그 모든 희생은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의 후퇴는 훗날의 웅비를 위한 디딤돌이었으리라.
세 잎 접시꽃 문양.
지금은 마쓰다이라라는 이름으로 불릴 가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라고 합니다.”
훗날 도쿠가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할 가문.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7세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가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뒤로 빠르게 술과 이런저런 안주들이 마련되었다. 마른 생선, 떡, 과자 등등.
노부미쓰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최대한 숨기려 하였으나,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여간 긴장한 게 아닌지 본인은 뭐 하나 손대지 않으면서 렌뇨에게는 음식을 강권했다.
그렇게 별수 없이 찹쌀떡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렌뇨가 말을 꺼냈다.
“참, 이리 피신할 장소를 마련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 누추한 곳에 귀객(貴客)께서 발걸음해 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실제로 누추하기는 하다. 이 비좁은 별장이 주는 인상을 생각한다면, 마극종의 상인들이 접대용으로 세워 놓은 수많은 호화 별장들이 헛되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렌뇨의 말은 이어졌다.
“하지만 저희는 그저 상인과 낭인의 무리일 뿐입니다. 세간에서는 저희를 마귀라고도 부릅니다.
지혜가 부족한 소승으로서는 어찌 가독께서 이런 자리에 저를 불러 주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렌뇨의 말을 듣고 노부미쓰는 푹, 한숨을 쉰다.
“이세(伊勢)가에 대해 아십니까?”
“물론 알지요.”
“저희 가문은 이세의 가신 집안입니다. 만도코로(政所, 무로마치 막부에서 재정과 영지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기관)에서 대대로 직책을 세습하고 있죠. 그저 한미한 하급 관료 집안입니다만···.”
노부미쓰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들어간다.
“그 모리토키라는 놈이 거슬립니다.”
“···모리토키 말입니까?”
“예, 당신들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주장하며 지금 마극종 토벌에 앞장선 그놈 말입니다!”
노부미쓰는 화기가 오르는 듯 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저는 저희 가문을 융성케 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세 가문의 눈에 들고, 나아가 작금의 조그마한 영지 이상의 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 말입니다!”
큰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조심스럽게 렌뇨를 불러온 것치고는 꽤나··· 과감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무튼 노부미쓰의 말은 이어진다.
“헌데 모리토키, 그저 교토를 돌아다니며 인맥을 얻어 보려 바둥거리는 하찮은 낭인 중 한 놈인 줄 알았는데···.
당신들을 토벌하면서 이세가에 큰 감명을 준 모양입니다. 게다가 쇼군의 동생에게 칼을 하사받기까지!”
질투인가? 아니면 빼앗긴 기회에 대한 분노?
“그놈에게 선사님을 생포하는 업적을 세울 기회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세가, 조도지 사이를 오가는 정보를 잡아채서는 그들보다 빠르게 선사님의 거처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지요.”
아, 이건··· 이걸 소련인들 말로 뭐라 하더라?
“이리 작고 하찮은 가문을 손에 쥔 하급 관료일 뿐이나, 저는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작금에도 저의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끼어들 만한 분쟁이 많습니다! 득을 볼 수 있는 지점들도 넘쳐 납니다!
그리하여 선사님께 부탁드리니, 부디 제게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 주실 수 없으실까 하여···.”
프레젠테이션이다.
자신이 이렇게나 발 빠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나 정보력이 좋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이만큼이나 겹치고 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절박하다.
어차피 노부미쓰는 렌뇨의 도움이 간절하고 렌뇨에게 노부미쓰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인간이니, 툭 터놓고 자신을 판촉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방식이기는 한데···.
“아까 시종이 이야기한 바와는 다르군요.”
“예? 무슨 말씀을?”
“마쓰다이라 가문의 전언을 전해 온 시종은 ‘교토를 잃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부미쓰가 뭔가를 몸종들에게 쑥덕대자, 곧 방금의 전언을 가져왔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마쓰다이라 지카타다라고 합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폐를 끼치고 진실을 감추어 죄송합니다.”
“제 삼남입니다. 선사께 멋대로 입을 놀린 아들의 잘못을 저 또한 통감합니다.”
그렇게 고개 숙이는 부자를 바라보며 렌뇨는 충격에 빠졌다.
도쿠가와의 두 조상들이 고개 숙여 용서를 청한다.
마쓰다이라 지카타다는 삼남으로서 본래 마쓰다이라의 분가를 이룰 뿐이었으나, 그의 자손 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옴으로써 오히려 분가가 적통처럼 취급받게 된다.
만일 저자가 그런 당당함과 언행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렌뇨가 이 자리에 왔을까? 코웃음을 치며 그저 빠르게 교토를 빠져나올 뿐 아니었을까?
“괜··· 찮습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기회인가, 또 다른 실수인가.
본래 예언서에 나와 있는 대로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천하인(天下人)’들의 등장으로 렌뇨가 남긴 정토진종은 그 힘이 사그라든다.
그렇기에 그들이 도래할 미래 자체를 막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전국 시대에 유력한 존재들로 발돋움할 이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찾아가지 않기도 했다.
헌데··· 이들이 제 발로 렌뇨의 발아래로 굴러들어 왔다.
그것도 이들의 세력이 한미하여 마극종이 절대적 우위에 있을 때.
이들에게 빚을 지운다면··· 이들을 마극종의 수하로서 포섭할 수만 있다면···.
곧 이들 부자는 수년 내로 간랴쿠지성(岩略寺城)을 손에 넣고, 홋큐성(保久城)을 무너뜨린다.
8년 뒤에는 누카다(額田)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해 일대의 비옥한 평야를 손에 넣어 세력을 불린다. 그리고 전국 시대를 맞이하면?
이들은 새로운 막부를 열게 된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직접적인 도움은 많지 않습니다.”
“저희의 청을 다시 생각해 보실 수···.”
“다만 보다 간접적인 도움을 드릴 방법은 많을 것 같군요.”
렌뇨 잠시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우선 조선과 소련 조정에 마쓰다이라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거기서 자금 지원과 대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군요.”
“···예?”
마쓰다이라 부자는 순간 당혹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까 하여 밖에 내놓고 다니지는 않으나, 저는 조선에서 호성원종공신으로 책록되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저를 부르시어 직접 공신의 이름을 내리셨지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조선이 마극종을 지원한다는···.”
여전히 경악에 얼굴이 굳은 부자를 앞에 두고, 렌뇨는 술 대신 차를 홀짝였다. 목에 걸려 있던 찹쌀떡이 넘어간다.
“다만.”
렌뇨는 바닥을 짚고 몸을 조금 일으킨다. 건장한 중년인의 체구가 불쑥 솟아오른다.
“조건 없이 지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희가 선사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바가···.”
“대가는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어차피 대부분의 물질적 지원은 융자의 형식으로 이뤄질 겁니다. 그 외에도 우리 마극종 조직의 이런저런 도움은 있겠지만···.”
그것도 뒷배가 조선과 소련으로 연결되어 배쨀 수도 없는 융자. 당장은 우호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훗날에도 이들에 대한 목줄로서 작동할 수 있을 유용한 포석이 되리라.
“그리고 대가라 하여 큰 것은 필요 없습니다.”
렌뇨는 괜히 사람 좋게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의 ‘동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를 주시지요.”
이 알쏭달쏭한 말에 노부미쓰와 지카타다는 영문을 모른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좋습니다.”
노부미쓰는 결국 답하였다.
훗날의 ‘붉은 다이묘’는, 그렇게 역사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