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5
―“ . . . 도쿠 . . .”
이제는 신물 나게 들어온 신호음, 저 삑삑거리는 전기 신호의 장단.
신숙주는 이제 어느 무대의 풍악보다도 이 단음으로 된 가락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저 단조로운 음색 속에 담긴 긴장과 광대한 세계를 접어 달리는 전자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 . . . 가와 . . .”
굳이 번역 없이, 소리만으로도 그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 . . . 영입 성공.”
지직거리는 소리가 멎고, 더 이상의 신호는 오지 않는다.
‘도쿠가와 영입 성공.’
그 짧디짧은 문장이 신숙주와 에티앙블에게 가져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대어를 잡아 버렸군요.”
에티앙블이 말을 꺼내자, 신숙주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벌써 전국 시대의 차기 다이묘만 해도 둘이나 되오. 그것도 진보씨는 호쿠리쿠 지방이 본거지라 동해를 접하고 있으니 아조에서 지원하기에도 유리하오.”
“앞으로, 30년··· 아니, 10년에서 20년만 있어도 일본 공산화가 꿈이 아닙니다!”
에티앙블이 흥분에 차서 외치지만, 신숙주는 다른 생각 또한 하게 된다.
“···렌뇨의 제자들과도 연락이 닿는다면 좋을 터인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마 조선과의 연락은 렌뇨 본인이 도맡아 하고 있으니까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편집증적으로 신경 쓰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오. 렌뇨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신숙주는 무심결에 저 멀리 인천 쪽을 바라본다. 마극종의 후원자인 상인들이 저 강화도에서 조선의 상품들을 일본으로 나르고 있으리라.
“렌뇨 홀로 마극종의 권력을 독점하고서, 우리에게 일본 내 정보를 건넬 때면 딱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전달하고 있소.
우리는 그가 허락하는 만큼만 일본을 알게 되고, 또 그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니 큰 문제가 아니겠소? 옛 당조(唐朝)의 절도사를 기억하시오. 우리의 대계가 한 개인에게 좌지우지될 순 없소.”
“그러나 렌뇨를 총책으로 세운 것은 우리입니다. 그를 불신임한다면 우리의 권위에도 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에티앙블의 반박에 신숙주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우리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니 독립을 꾀하지는 않겠으나, 그가 조선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 할 것은 기정사실이오.
야망 있고 총명한 이라면 누구라도··· 이를테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리 행할 것이오.”
“바, 방금 본인 보고 야망 있고 총명하다고 자기 입으로···.”
“아무튼, 렌뇨를 불신임하지는 않더라도 견제책은 세워야 하오.”
뜨악하는 반응을 보이는 에티앙블의 말을 신숙주는 단호하게 잘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수많은 일본 관련 책자들, 그리고 렌뇨와 주고받은 통신 기록들을 정리해 놓은 파일들.
“에티앙블 동지의 말대로 앞으로 10년··· 아니면 20년이오.”
신숙주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일본에 관한 글들을 죽죽 훑어 나간다. 전국 시대, 분로쿠의 역(임진왜란), 도쿠가와 막부, 메이지 시대와 일본 제국주의의 탄생까지.
그리고 곧 그 무거운 서적들을 텅, 소리가 나게 책상 위로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려 에티앙블을 마주 본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을 변혁시킬 계획을, 더 나아가···
국제적인 대계를 짤 것이오.”
일본을 장악하고, 중국을 견제하며, 몽골과 함께 중동과 유럽으로 나아간다.
두 사람의 머릿속 세계 지도에서 전 세계가 붉은빛으로 물들어 간다.
***
처음에는 적이라 생각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케다 신켄,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전국 시대를 평정하려던 유력가들, 전 일본을 장악하고 자신의 세력 아래 두려던 천하인들.
이들 세력이 등장한다면 필연적으로 마극종은 쇠퇴한다. 일본 내의 갈등이 평정되는 순간 엄격한 통제하에 놓일 것은 지금의 불교 종파들도 마찬가지지만, 마극종만 하지는 않으리라.
결국, 일본은 분열해야 한다. 마극종이 번성하기 위해서라면 전쟁과 혼란으로 일본은 새로이 벼려져야 한다.
그런데···.
“기어코 도쿠가와가 손에 들어왔군.”
렌뇨가 찻잔을 비우자 신로가 주전자를 든다.
“허나 결론은 똑같습니다. 아직 저들은 성장 가능성을 지닌 일개 관료 집안에 불과합니다.
저희는 힘을 투사할 창구를 얻은 것이고, 이제 확장보다는 세를 굳히는 데 집중할 차례입니다.”
신로가 차를 따르며 말하자 가쿠마 또한 거든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지방 곳곳에는 다른 법화종이나 화엄종, 심지어는 밀교와도 결탁한 마극종 세력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이비들을 통제하고 제대로 된 조직으로 일궈야 합니다.”
“···너희들의 말도 옳다.”
그렇다. 결국에는 안정이다.
지금처럼 수제자들을 비롯한 수뇌부를 이곳저곳으로 한꺼번에 끌고 다니며 일일이 각지 세력을 키워 내는 것보다는, 모든 지역의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묶어 내고 관리할 방편을 마련해야 한다.
“근래에 곧 진보씨가 자신들의 성채를 되찾을 것이다. 그 가독 나가노부가 이미즈(射水)와 네이(婦負)의 지배권을 되찾을 것이고.”
원래대로라면 2년은 더 지난 뒤에 일어나야 할 일이지만 마극종의 도움이 있다면, 더 빠르게 이뤄질 수도 있으리라.
지금 마극종의 개입이 진보 가문의, 진보 가문이 뛰어든 하타케야마 가문의 계승권 분쟁의 향방을 바꿔 놓는다면?
그로 인해 이어질 오닌의 난과 전국 시대라는 역사는 얼마나 크게 뒤틀어질까?
“···그러면 나는 이제 진보씨가 다스리는 근방에 웅거하겠다.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조직들을 단속하는 일은 너희에게 맡긴다.”
결국, 렌뇨는 자신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내고야 만다. 세 명의 수제자들을 비롯한 제자들이 일제히 엎드려 절하지만, 그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바를 본다.
전 일본 각지에 흩어진 전신기들, 그것들에 오직 렌뇨만이 접근하고 통제해 오는 일도 묘기에 가까웠던 참이다.
이제 지방 조직의 통제를 제자들에게 맡긴 이상, 그들을 이용한 조선과의 교신 또한 이뤄지리라.
이 조직은 너무 거대하다. 더 이상 렌뇨가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렌뇨에게는 왠지 지금 들이켜는 찻물이 쓰고도 떫게 느껴졌다.
“스승님, 잔이 비었습니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아는 듯하면서도, 신로가 다시금 차를 따라온다.
별수가 있나 한번 마셔 보는 수밖에.
***
“영웅이오! 근래 이어지던 법난(法難)을 평정하고 마침내 교토 근방에서 악귀들의 사법(邪法)을 몰아내었으니 그대의 공이 어찌 지대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그러하오. 오늘까지 우리 모두 해묵은 원한을 품어 칼끝을 서로에게 겨누었으나, 불적 무리에게 그 미워하는 마음을 돌리니 이리 손쉽게 사악함이 씻겨 나갔소이다! 이는 모두 여기 모리토키 법사(法師)의 공이오!”
히에이잔(比叡山)의 엔랴쿠지(延曆寺)와 미이데라(三井寺), 조토지(浄土寺) 등 교토의 이름 있는 사찰의 주지와 이름 높은 승려들이 모여 한 사람을 예찬하고 있다.
이세(伊勢)가의 자제들처럼 드높은 귀족가의 사람들, 위에 열거된 사찰들의 이름 있는 후원자들 또한 이 자리에 모여 오랜만에 탄생한 교토의 유명인을 주시하고 있다.
고작 한 사람의 낭인, 변변한 배경도 없이 떠도는 어느 남자를 말이다.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눈에 띄게 젊은, 그러나 기품과 권위를 잃지 않는 태도의 한 주지가 말한다.
“신쿠로, 내가 하사한 칼은 아직도 잘 가지고 있소?”
“예, 기진 님이 빌려주셨으니 이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만.”
자랑스레 허리춤에 차고 왔던 칼을 끌러 내려 하자, 기진이 손짓으로 막았다.
“그는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라오.”
“하, 하지만···.”
“호법(護法)의 용사로서 자신의 몸을 상해 가며 적들을 베었으니 도리어 그 칼이 위대한 주인을 얻어 기뻐해야 할 것이오. 일어나시오. 그대는 이 자리의 주인공이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엎드린 모리토키를 기진이 직접 일으켜 세운다.
“이 사람이 우리의 영웅이오!”
“옳습니다!”
“이 사람이 불도를 지켜 내었소!”
“옳습니다!”
모리토키를 가리키며 기진이 외치자 좌중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새로 떠오르는 이 유명인사를 한마음으로 떠받드는 듯하다.
“그러니, 그대는 이 칼을 가질 이유가 있소. 그 용기와 지혜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나의 성의를 받아 주시오.”
“제, 제가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칼집에 금속으로 장식된 세 줄의 줄무늬가 만져진다. 쇼군가의 문장, 그것이 생생하고 섬뜩한 감촉으로 모리토키에게 불쑥 다가선다.
그때의 영광이란 참으로 꿈과도 같았다.
···깨어날 때가 한순간이었다는 점에서.
그에게 주어졌던 이런저런 호칭들과 직책들, 무슨 장군이니 뭔가 대장이니 하는 것들은 순식간에 그 허울만 남고 명예직으로 사라져 버렸다.
명예는 남았으나 순식간에 그 실권들은 허깨비처럼 흩어져 버리니 그저 외관만 그럴듯한 무대 장치에 불과했다.
호법의 영웅, 모리토키라는 일종의 희비극을 화려하게 꾸며 주는 그런 소품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모리토키 본인마저도 그 화려한 연극의 소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고.
지금 당장 불적들을 토벌해야 하겠느니, 종파를 초월하여 연합 군대를 꾸리느니 하는 탁상공론들이 그저 보여 주기식으로 오가다 말았을 뿐.
마극종에 대한 더 이상의 적극적 조치는 없었다.
저들은 두렵고도 번거로운 일을 피하는 쥐새끼들이다.
조선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영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또한 마극종 토벌에만 힘쓰다 오히려 다른 종파들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려날까 불안해할 뿐인 비겁자들.
마침 마극종의 성장세 또한 둔화되고 렌뇨와 그 제자들이 준동한다는 소식 또한 뜸해지니 그들의 이야기에도 명분이 생겨 버렸다.
몇몇 사찰에서는 공공연히 마극종이 완전히 토멸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헛소리다.
지금 당장 마극종에 귀의한 상인들이 큐슈와 산인도를 오가며 조선의 물자를 날라 대고 있다.
도시의 뒷골목에서는 날품팔이들이 불경하게도 마르크스의 이름을 외우며 천하가 개벽하는 날만을 기다린다.
다이묘들과 사찰들의 세력이 닿지 않는 저 독립적인 마을들에서도 약재와 구휼미를 건네주고 가는 ‘은혜로우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다.
허나 여기서 계속 마극종과의 전면전을 주장한다면 호법의 영웅이 전쟁광이자 관심 종자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모리토키는 울분과 실망감을 삼키며 다시 조도지의 한 승려로서, 그저 그 담대함으로 약간 명성이 높을 뿐인 낭인으로서 돌아갔다.
다시 이세가에서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
이세 모리사다(伊勢盛定), 쇼군의 명령을 전달하는 모시쓰기슈(申次衆).
“자네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들은 바가 많네. 기진 법사께서도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셨다네. 그 용기와 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요사이 그 기량을 떨칠 기회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미천한 자가 잠시간의 기회를 얻어 이름을 알렸을 뿐입니다.”
“내, 자네에게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한 남자로서 말함세.”
더 이상의 의례적인 대화나, 격식을 갖춘답시고 늘어놓는 겸양의 말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그는 손을 고개를 절레절레 돌렸다.
“자네, 나의 양자로 입적할 생각은 없는가?”
“···예?”
“물론 자네의 나이가 많으니 부담스러울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나는 이를 어느 유망한 젊은이에게 마땅히 쥐여 주어야 할 기회라고 생각한다네.
어떠한가?”
어떠하기는.
가슴이 쿵쾅거린다.
“제, 제 미천한 이름이 혹여나 이세가의 고결한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두렵습···.”
“만약에 말일세.”
모리사다는 그의 입을 막겠다는 듯 손바닥을 내민다.
“한 번만 더 예의차린답시고 그런 말을 했다간 정말 우리는 끝장일세.”
“···.”
“자네에게 무언가를 물려줄 수는 없네. 자네가 이세가의 떳떳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게.
자네는 한낱 낭인일세. 그는 나도 알고, 마찬가지로 현명한 자네도 알고 있으리라 믿네.”
모두가 알고 있으나, 보통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꺼내며 그는 모리토키의 약점들을 후벼 판다. 그는 구태여 가식 따위 차리지 않겠다는 듯 호쾌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대신 내가 주는 것은 기회일세. 이름 앞에 당당히 이세(伊勢) 두 글자를 박아 넣을 기회는 흔치 않다네. 이것이 독실히 부처를 섬기는 이로서 호법의 영웅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접일세.
어떤가? 내가 주는 선물이 문장 박힌 칼보다도 귀하지 않은가?”
답은 정해져 있다.
“···앞으로 이세가의 이름을 빛낸다는 목적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습니다.”
‘이세를 집어삼키겠다.’
그런 터무니없는 목표를 떠올리자 모리토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의 눈동자 속에 온갖 희망과 욕망들이 번뜩인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나이 어린 조카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를 이마가와 가문의 가주로 등극시키고 성주가 되어, 인생 말년에 다이묘의 자리까지 이르는 이 간웅.
그는 출세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높이 올라가겠다.’
역시 부처님께서, 그의 신실한 제자에게 은혜를 내리시는도다.
모리토키가 숙였던 고개를 감히 들어 이세 모리사다를 마주보았다.
이제부터 그의 이름은 이세 모리토키였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는 마무리가 잘된 것 같습니까?”
“예, 조선 측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사소한 조정을 제하고서는 괜찮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사소한 조정이라면?”
“일본 쪽에서 오는 배들 중에서도 특히 이미즈 지역에서 오는 무역선들에 특혜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배들에 혜택을 줄여 이미즈 지역에 몰아다 주면 우리 측에서도 더 자원을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에티앙블의 보고에 인민위원 올리버 로가 다시 보고서를 한 장 더 넘긴다.
둥그런 원탁에 둘러앉은 외무인민위원회의 선출직, 비선출직 공무원들은 제각기 자료를 정리하고 다음 의제에 대한 의견 발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일본에 대한 대전략은 렌뇨, 그리고 조선에서 신숙주와 에티앙블이 이미 처리한 부분이다.
이제 소련에서 더 논의할 사항은 세부적인 자원 분배와 이미즈에 제공할 특혜의 구체적인 내용들뿐이다.
진보씨가 지배하게 될 이미즈 지역을 어떻게 키워 줄 것인가? 이미즈 지역을 소련의 편으로 어떻게 확실히 포섭할 것인가? 소련과 공산주의의 교두보로서 이미즈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그 사안들은 이미 이들의 권한 위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외무인민위원회의 회의는 다른 의제들을 향해 나아갔다. 북청 만주족 자치구에 관한 이야기, 조선과 연계하는 개발 사업에 대해 관할권을 곧 창설될 산업건축인민위원회로 이관하는 이야기···.
피곤한 논의들이 마무리된 뒤,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올리버 로는 에티앙블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문으로서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이라니, 오랜만에 색다른 이야기를 들으니 즐겁군요.”
“아닙니다. 전문가로서의 의무죠.”
“아마 내일의 인민위원평의회에도 참석해 주셔야 할 텐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뭐 원산에 오니 트로츠키 동지 옆에 계속 안 붙어 있어도 되어 기분이 조금 낫군요.”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올리버 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티앙블의 어깨를 짚었다. 에티앙블은 그의 진심 어린 걱정에 목례로 감사를 표한 뒤 흡연실을 개조한 회의장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라, 탁 트인 갑판 위로 나선다.
1458년이다. 렌뇨와 마극종, 일본에 관한 문제를 붙들고 한양에서 끙끙댄 게 1년이었다. 그 문제가 해소되자마자 에티앙블은 다른 일본학자들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원산으로 향했다.
···향수병인가? 우습게도 그런 깊은 감정을 이 도시에 느끼게 된 건가?
지난 1년 동안 이곳의 바닷바람이 그리웠다.
운 좋게도 트로츠키나 신숙주처럼 자존심 강한 천재들은 모두 한양으로 갔다. 이곳은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
내려다보니 선체 외벽에 붙은 따개비들을 떼어 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굳이 떼어 낼 필요가 있을까? 이 배가 원산 근해에서 웅크려 바다를 항해하지 않게 된 지가 어언 6년이 지났다.
고작 6년이라고도, 무려 6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마치 켈틱 1호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정박해 있었던 듯 섬들이 떠 있는 바다와 원산의 완만한 모래톱에 보란 듯이 잘 어울렸다.
그가 원산에 향수병을 느끼게 되고 원산에 익숙해진 것처럼, 켈틱 2호 또한 원산의 일부가 되었다.
아마 소련인들이 모두 그러리라. 조선에 오기 전의 과거로부터 잘려 나와,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공간은 이곳뿐이다. 하나의 고향 속에서, 소련인들은 점차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이 6년이라는 공통의 기억을 부여잡고 서로 동포가 되었다.
그렇게 에티앙블은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마련되지 않은 숙소 대신 선실에서 묵고 일어나, 대회의장으로 향할 때까지 미처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에티앙블 동지의 말은, 이즈미를 소련 국내 경제로 흡수하겠다는 뜻입니까?”
각양각색의 국적과 인종, 민족이 모였다. 이들이 섞여 산 지는 고작 6년이다.
서로의 시야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
“크흠, 어, 그러니까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구(舊)소련 출신의 한 러시아계 남성이 일어서서 에티앙블을 바라본다.
“현재, 렌뇨 선사는 진보씨를 지원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구도를 보았을 때 아마 해당 지역은 곧 진보씨의 영향력 아래로 돌아갈 것이고, 그에 따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여기까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해당 지역에서 병장기를 만드는 데 필요할 강철 등 자원을 제공하거나 다양한 금전적 지원을 행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굳이 상인들을 통하죠? 마극종의 지원을 위해선가요?”
그 말에 에티앙블은 순간 당황한다.
“그··· 러니까, 그냥 준다고요? 자원을?”
“소련의 일원이 될 이들이 필요로 하니까요.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저들을 우리의 경제 블록으로 포섭하는 기획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이건?”
“경제 블록이라면···?”
“예를 들어 대영제국과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캐나다 같은···.”
“맙소사, 계속 듣기에는 마음이 힘들군요. 그건 그냥 제국주의적인 경제 확장 아닙니까?”
“예?”
갑자기 회의장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 손을 든다.
노먼 베순과 함께 소련 의료를 책임지는 에드워드 바스키.
“예, 바스키 동지? 질문 있으십니까?”
“그···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있으니 약간 혼란스러워서 말입니다. 무슨 일방적인 선물 제공처럼 자원을 나눠 준다느니, 경제 블록 내로 포함시킨다느니···.
그냥 경제적 상호 의존을 위한 밑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즈미와 진보 가문의 영토를 우리의 영향권으로 들여오는···.”
소란은 더 커진다. 서로 “···이거 아니었어?”라든지 “내 말은··· 대강 이런 뜻 맞지?” 같은 소리들이 오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실패한다.
“어어··· 저기! 이번 의제는 다음 회의까지 넘기고, 지금부터 연극인들에 대한 지원 예산 할당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논의가 질질 끌릴 기미가 보이자 이번에 임시 의장을 맡게 된 바빌로프가 다음 의제로 회의를 넘긴다.